백건우, 베토벤의 침묵을 듣다
김재철 지음 / 열아홉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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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파리에서 영국으로 가기로 한 여정대로 4박 5일의 여행을 시작했다. 머지 않아 베토벤이 떠난 지 200년이 되는 해가 다가온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특별한 시간으로 이끌었다. 이 여행은 단순한 문화 탐방이나 음악적 휴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와 함께한, 베토벤을 향한 순례에 가까운 '사유의 시간'이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저자 김재철은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뒤 영국 카디프대학교에서 언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4년부터 3년 6개월간 도쿄 특파원을 지내며 언론계 최고의 일본통으로 자리매김했고, 이후 울산MBC, 청주MBC, MBC 본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회사를 나온 뒤 뮤지컬컴퍼니A를 설립해 뮤지컬, 웹드라마, 영화 등을 제작했다.


평소 저자는 백건우, 윤정희 부부와 오랜 인연이 있었기에 건반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백건우와 함께 4박 5일의 여정을 가졌으며, 이 에세이는 바로 그 여정의 가록을 담은 글이다. 총 12개 장으로 구성된 책은 파리 북역의 아침(1장)부터 별의 순간, 베토벤 사후 200년(12장)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바쓰로 가는 기차


월요일 낮 열차는 한적하다. 패딩턴에서 카디프까지 2시간 30분, 그 중간에 바쓰가 있다. 창밖으로 영국 특유의 목가적인 풍경이 흐르고 다소 삐걱거리는 좌석마다 졸음이 오는 듯 하품을 하는 사람도 보인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진다.


(백건우)베토벤이 청력이 무너지고 잇다는 걸 처음 깨달았을 때가 대략 서른쯤이었어요. 음악가가 소리를 잃는다는 것은 ...존재가 무너진다는 뜻이죠. 그가 느꼈을 절망은 우리가 상상하는 수준이 아닐 겁니다. 사람들과 대화하기사 어렵고, 공연도 할 수 없고 ...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1802년 오스트리아의 하일리겐슈타트 숲에서 베토벤은 유서를 작성했다. 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간 루드비히'의 가장 깊은 내면을 보여준다. 세상에 대한 분노,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 그리고 위안받지 못한 슬픔 등이 녹아 있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사악하거나 

고집스러운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백건우)그런데, 베토벤의 위대함은 바로 그 뒤에 있어요. 그는 결국 죽지 않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Eroica', '영웅'이 탄생해요. 베토벤의 음악은 고통을 극복한 한 위대한 인간의 음악입니다. 절망이 그를 꺾지 못했어요. 그 절망 이후, 베토벤 최고의 작품들이 연이어 탄생합니다.


이 대목은 온 몸에 소름을 돋게 하는 백건우의 설명이다.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의 이후 작품을 살펴보자. 영웅(1803년), 피아노 소나타 28번 A장조 op.101(1816년), 피아노 소나타 32번 C단조 op.111(1821년), 합창 op.125(1824년) 등 절망을 이겨낸 베토벤의 '혼'을 엿볼 수 있다.


(사진, 베토벤의 유서)


1802년 10월 6일에 “하일리겐슈타트”(오늘날에는 빈의 일부)에서 두 동생, 카를과 요한에게 쓴 편지이다. 이 문서는 베토벤이 사망한 후 1827년 3월에 안톤 쉰들러와 슈테판 폰 브로이닝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그 해 10월에 공개되었다. 


귀가 들리지 않아도 들리는 음악


패딩턴 역을 떠난 지 한 시간이 지났을까. 창밖에 온통 바다였다. 어둠이 약간 깔리는 게 이곳이 영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8월부터는 밤이 우리보다 한두 시간 빨리 오는 곳이 영국이었다. 대신 여름에는 밤 8시가 되어도 밝았으니까. 차창에 비친 내 얼굴 옆으로 백 선배의 모습이 잔잔하게 흘러갔다.

(김재철)백 선배, 절망 속에서도 어떻게 그런 밝은 음악을 쓸 수 있었을까요?

(백건우)절망을 없애려고 한 게 아니라, 절망을 껴안고 넘어선 사람이기 때문이죠. 베토벤은 절망에 무너지지 않고 ‘희망의 빛’으로 간 사람입니다. 나에겐 그가 바로 나의 신입니다.

바쓰의 첫 밤

로마의 한적한 동네처럼 보이는 바쓰 역에 내렸다. 우선 공기가 맛있었다. 이곳은 묘하게 고요했고, 오래된 돌담위로 스며드는 습기마저도 로마 시대의 시간처럼 느리게, 천천히 흐르는 곳이었다. 성당 옆 호텔에 도착, 체크인하고 호텔바로 갔다. 성당의 종소리만 들릴 뿐, 늦은 밤의 바쓰는 '숨을 멈추는 시간'이었다.

(김재철)백 선배, 베토벤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누구였을까요?

(백건우)첫사랑의 울림은 줄이에타 귀차르디였죠. 젊고 아름답고 귀족이고...베토벤의 마음을 완전히 흔들었던 여인이었죠.


(사진, 줄리에타 귀차르디)

그렇다. 베토벤은 그녀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가슴 뛰는 행복감을 느꼈기에, '월광 소나타(피아노 소나타 제14번)'을 헌정했었다. 두 사람의 신분 차이는 엄연했다. 귀족의 딸인 줄리에타는 평민 출신의 음악가 베토벤이 아닌 귀족 남성과 결혼했던 것이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를 예술로 승화시킨 게 바로 '월광 소나타'인 것이다.

(백건우)줄리에타가 첫사랑이라면 요제피네는 평생 가슴 속으로 사랑한 여인이죠.

요제피네 브룬스빅, 그녀는 베토벤과 영혼적인 교류가 깊은 사이였다. 그녀도 베토벤을 사랑했지만 귀족이란 신분, 아이들, 사회적 분위기 등으로 인해 결국 베토벤 곁으로 오지 못했다. 요제피네가 떠난 후, 베토벤의 음악은 단단해졌고 고독이 철학이 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루지 못한 예술가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사진, 요제피네 브룬스빅)

베토벤의 사랑 이야기가 더 이어진다. 포도주 한 잔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지만 두 시간 가까이 지났음에도 반도 비우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취해 있었다. 베토벤의 사랑 이야기에 취해 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던 거다.

(김재철)백 선배, 그러면 불멸의 연인은 누구였나요?

(백건우)안토니아 브렌타노일 거예요. 교양 있고 따뜻하며, 베토벤의 고독과 예술적 불꽃을 이헤헸던 여인이었죠. 그녀와 함께 있을 때 그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평온을 느낄 것 같아요. 사실 그가 느꼈던 가장 인간적인 위로는 브렌타노와의 만남, 사랑에서 왔죠.

백건우의 독백이 이어졌다. 둘 사이엔 정서적 친밀감과 정신적 결합이 있었지만, 이 운명적 사랑은 완성될 수 없었다고 말이다. 시회적인 제약, 가정이 있는 여인에게 베토벤의 결함은 하나의 가능성만으로 남았던 거다. 브렌타노는 예술 애호가로 베토벤을 괴테에게 소개해 주었던 여인이다.


(사진, 안토니아 브렌타노)   

고야의 색, 베토벤의 울림

다음 날, 안개가 낀 이른 아침에 호텔을 나서 에이번 강줄기를 따라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강가에서 오리들이 무심한 듯 헤엄치는 평화로운 모습을 목격하고 강변의 작은 찻집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눈길을 끄는 유화 앞에 앉았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이었다.

(백건우)고야는...인간의 진실을 보는 화가예요. 보통은 아름다움부터 그리는데 고야는 인간의 악함, 고통, 공포... 그 어둠을 있는 그대로 그린 뒤에 거기서 희망을 한 줄기 끌어내요. 베토벤이 고양의 색상을 봤다면...분명 깊이 공감했을 거예요. 둘 다 인간의 어둠을 회피하지 않았으니까요. 


(사진, 발코니의 마하들)

‘만약 고야가 베토벤의 음악을 들었다면?’이란 저자의 상상을 마치 읽은 듯이 백건우는 대화를 이어 나갔다. 예술가의 감수성은 정말 놀랍다. 고야는 인간 내면의 그림자에 빛을 던지는 화가, 베토벤은 인간의 절망 속에서 희망의 문을 여는 작곡가. 둘 다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 본 예술가였다. 

(백건우)아마 고야는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캔버스 위에 폭풍처럼 또 다른 색을 쏟아냈을걸요? 베토벤의 ‘운명’은 고야의 검은 색조를 움직였을 것이고...‘영웅Eroica’은 그가 그린 빛나는 붉은색과 황금색을 깨웠겠죠. 

바쓰의 골목에서

점심 식사 후 호텔에서 나온 두 사람은 로마시대의 목욕탕부터 보기로 했다.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해설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이곳저것에 ㅎ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미로 같은 골목을 돌 때마다 서울 인사동 골목이 생각났다. 지도를 보며 바쓰의 대표 미술관인 홀번 뮤지엄으로 향했다. (사진, 홀번 뮤지엄)



발길이 닿은 곳은 소설가 '제인 오스틴' 문학관이었다. 두 사람은 그녀가 사용했던 작은 노트, 펜, 그리고 소설 속 여주인공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의상과 소품들을 찬찬히 음미햇다. 비쓰라는 도시가 가진 여성적 감성, 디테일과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았다.
 

웨일즈 숲길에서 들은 백건우, 윤정희의 사랑이야기

(김재철)누님이 떠난 후 세상 사람들이 백 선배를 비난했는데, 왜 그런 황당한 이야기들이 나왔는지...

(백건우)사람들은요... 진실보다 이야깃거리를 더 빨리 믿습니다. 특히 누군가가 유명하다면, 그 삶이 더 복잡할 것으로 생각하죠.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속에 얼마나 오랜 세월의 상처와 사랑이 스며있는지 저자는 느낄 수 있었다.

(김재철)백 선배, 누님을 잃고... 더 깊어진 음악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백건우)음악은... 사랑을 잃은 사람의 마지막 언어니까요. 나는 이제... 음악으로만 그녀와 대화할 수 있어요.

그 말에 저자는 갑자기 너무나 슬펐다. 이제 카디프의 밤은 우리에게 너무나 다정해졌고, 덕분에 서로에게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전해지는 어떤 인간적인 진실을 공유하게 되었다.

바다로 가는 마음, 카디프의 아침

바쓰에서의 마지막 밤은 유난히 짧게 느껴졌다. 호텔 창밖으로 새벽빛이 스며들기 시작할 무렵, 두 사람은 이미 짐을 정리해 바쓰 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누가 먼저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아침형 인간'이었다. 햄버거에 커피를 음미했다.

(백건우)이른 아침 열차는 늘 좋지요. 사람 마음을 한 칸 비워내니까요.

열차는 심호흡하듯 서서히 움직였다. 우리가 바쓰행 열차를 탔던 런던 패딩턴에서 출발한 기차였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김재철)카디프에 바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렙니다. 베토벤도 바다를 보고 싶어 했을까요?

(백건우)베토벤은 평생 한 번도 바다를 보지 못했죠. 그게 늘 아쉬웠을 겁니다. 그의 교향곡엔 바다가 없어요. 하지만... 바다 대신 인간 내면의 바다를 깊게 들여다봤지요.

카디프 만에서, 오늘이 있어 행복합니다

두 사람은 택시를 탔다. 매일 걷기만 하다가 사흘 만에 택시를 탔던 것이다. 목적지는 카디프 외곽에 위치한 이 도사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었다. 성당 문을 열고 들어서자, 파이프 오르간 음이 들렸다. 천장 끝까지 울리는 중후한 음색과 공명의 떨림, 마치 베토벤의 현악사중주에서나 들을 법한 깊은 울림이었다.

(김재철)제가 가장 존경하는 철학자는 쇼펜하우어입니다. 그의 말 중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승자는 과정에 신경을 쓰고, 패자는 결과에만 집착한다', 이 말이 요즘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과 부모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선배님은 이 문장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백건우)아주 정확한 말입니다. 그리고 아주 잔인한 말이기도 합니다. 예술에서 결과를 먼저 묻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자기 시간을 잃기 시작합니다. 음악은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절대로 말을 걸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일찍 결과를 요구합니다. ‘언제 콩쿠르에서 상을 타나’, ‘언제 무대에 서나’, ‘언제 성공하나’... 그 질문들이 젊은 예술가의 마음을 가장 먼저 망가뜨립니다.


(사진, 카디프의 성당)

인터뷰 - 음악을 배우러 떠난다는 것

(김재철)2027년 3월 26일은 베토벤 서거 200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뜻깊은 해에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젊은 청년 예술가들과 함께 음악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떨까요?

(백건우)꼭 필요한 여행입니다. 베토벤은 악보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가 걸었던 거리, 머물렀던 방, 침묵했을 풍경 속에 아직 남아 있습니다. 젊은 연주자들이 빈의 골목을 걷고, 본의 공기를 마시고, (베토벤이) 자살을 생각했던 하일리겐슈타트 숲속에 아무
말 없이 서 보는 경험. 그건 레슨으로는 절대 가르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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