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6부로 구성된 책은 탐색, 자신을 찾아가는 그림(1부), 언어, 의미와 조형 공간의 도구(2부), 평범, 일상을 낯설게 보기(3부), 유희, 그림 속에 놀다(4부), 해체와 재구성, 상상력의 확장(5부), 통섭, 인연생기因緣生起(6부) 등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줍는 일, 그 허공 속에서 나를 다시 만나는 기록을 담고 있다.
나를 찾아가는 여정
예술가는 창조자다. 예술은 불확실성 속에서 늘 새롭게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의 길 위에 서 있다. 예술적 행위는 ‘이것이다’라는 고정된 형식을 정해 놓고 가지 않는다. 집착하는 순간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늘 기존에 생각해 왔던 관념적인 조형의 틀을 깨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의 창조성은 직관에 의한 판단력이 필요하다. 진정한 예술의 창조적 행위는 부딪치면서 찾아가는 실험예술이자 보이지 않음 속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 자신만의 심상心象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宿命이다. 작가는 삶에서 얻어지는 지혜를 깨닫고 그려내는 세계가 세상과 만나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를 고민한다. 그림을 그리는 변환점은 사람들의 안목眼目과 관계에서 생기는 힘, 바로 두터운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다.
화가는 그림을 던져버리거나 떠나서 살 수 없다. 그림과 끊임없이 유기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 어느 때 어느 순간이라도 그림의 영역을 벗어나면 진정한 그림을 그려낼 수 없다. 그림에서 어울림이 없으면 그림이 되지 않는다. 그 어울림이 상象으로 드러나고 지워진다. 그래서 그림은 늘 머릿속에서 살아있어야 한다.

(사진, 바람부는 날 29쪽)
영혼의 울림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시리즈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의미하는 영혼의 울림을 던진다. '아바타'의 어원은 산스크리스트어 '아바타라'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육체적 화신 또는 분신을 뜻한다. 힌두교의 비슈누 산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인간이나 동물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 영역이다. 영역은 땅, 정신,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속 화면의 공간이 주어졌을 때 사람들의 의식과 인연이 되어 영혼에서 울림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소통이 된다. 그림에서 드러나는 이미지는 다양한 삶의 흔적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사진, 소통의 도구 101쪽)
일상을 낯설게 보기
'불광불급'이란 말이 있다. 미치지(狂) 않고는 경지에 미치지(及) 않는다는 뜻이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미쳐야 그림이 된다. 50년 전 저자의 대학 신입생 시절엔 철학 수업 시간에 칠판에 써놓은 '미치고 돌아라'란 글귀를 무슨 뜻인지를 전혀 몰랐다.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하고 난 뒤에야 이 말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미친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어떤 현상이 하나가 됨을, 그리고 '돈다'는 것은 거듭난다는 것임을 말이다. 그렇다. 무릇 작가는 미치고 돌아야 하는 숙명이라는 것을.
스위스 융프라우 얼음산(해발 4158미터)에 미친 스위스의 한 기업가가 있었다. 철도왕 아돌프 구에르 첼로의 기상천외한 발상이 바로 산에 철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세인世人들은 그를 미친狂 사람이라고 조롱했지만 '중꺾마'란 말처럼 결국 그는 융프라우 톱니바퀴 철도를 건설했다. 가족들과 함께 이곳으로 관광 갔을 때 이 철도를 이용했었던 추억이 떠오른다.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 생성의 시간, 물질의 호흡을 그린다. 작은 실마리, 생각의 일어남이 중요하다. 그것은 어떤 조그만 계기에서 만들어진다. 인연의 세계도 작은 것에서 출발한다. 인연은 주파수요 관계를 통해 소통하는 통신 언어다.
하늘에서 억수로 많은 비가 내렸다. 그 비가 만들어준 자연의 선과 인위의 선이 만났다. 자연이 내게 만들어준 인연법에 의해 화면에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 기억의 층위가 화면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간다. 인위人爲는 무엇으로도 무위無爲를 이길 수 없다.

(사진, 사방인연 125쪽)
그림 속에 놀다
저자는 그림을 그리는 데엔 4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오랜 세월 붓을 쥐먀 몸으로 체득하며 깨달은 것이다. 첫째는 지극至極으로 온 마음을 다하는 일이며, 둘째는 파격破格으로 익숙함을 의심하고 스스로 만든 벽을 깨는 것이고, 셋째는 고졸古拙로 평생 쌓아온 기교를 내려놓는 일이며, 넷째는 신묘神妙로 혼을 다바쳐 그릴 때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거다.
선승禪僧이 면벽 수행을 할때 벽에 느끼는 위압감은 온갖 잡념들과 끝을 알 수 없는 싸움이다. 화가가 화판畵板 앞에 서는 것도 이와 같다. 화판은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큰 빈 공간이다. 자유자재로 화폭에서 노닐려면 자신을 잊어버리고 그냥 그려야 한다. '파破'는 경계를 넘어서려는 춤이다.

(사진, '그림 속에 놀다' 160쪽)
상상력의 확장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선 북쪽 추운 바다 속에 살고 있는 큰 물고기 곤鯤이 삼천리나 되는 파도를 만나 비상을 해 붕鵬이 되어 날아오른다는 이야기를 통해 '큰 뜻을 품어라'는 가르침을 전한다. 즉 곤이 큰 파도를 만났기 때문에 붕이 되고 큰 날개로 구만리를 갈 수 있었다는 거다.
셍텍쥐페리의 <어린 왕자>(1943년)는 그림 그리는 사람에겐 마치 성서와도 같다. 어린 왕자는 조종사에게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을 보여준다. 어른들은 이를 큰 모자로만 보지만 어린왕자는 그 속에 숨은 코끼리를 발견한다. 이 장면은 바로 사유의 확장을 말하고 있다.
인연생기因緣生起
<주역周易>에서 말한 '금화교역金火交易'은 바로 이질적인 것을 하나로 묶는 가운데 은유가 담겨 있다. 상극은 서로 맞지 않는 이치이나, 음과 양이 결합하여 한 몸, 한 뜻, 한 가정을 이루어 결실을 맺는다. 이것이 바로 연기緣起요 인연因緣이다.
금이 불을 만나야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금화교역'이다. 이는 자신의 운명이 바뀐다는 의미다. 불과 금은 상극이라 서로 만나면 소멸되는 것이다. 금은 불을 만나서야 찬란한 변화를 만든다. 서로 맞지 않은 것 같은 이질적인 물질이 서로 다른 반응에 의해서 의도하지 못한 현상을 만들어 낸다.

(사진)
삶을 돌아보는 책
걷어내고 덜어내며 3년 가까운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해 말라가고 있던 저자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생명수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터질듯한 내면에서 솟아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지난 세월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깨달음의 길로 들어선 한 예술가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나 또한 지난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분들에게 책의 일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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