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과 왜곡 없는 고종황제 실록
박영규 지음 / 옥당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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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고종 시대의 이미지는 대부분 식민지 권력이 만들어낸 틀에서 비롯되었다. 고종을 무능하고 나라를 망친 군주로 보는 통념은 일본이 침탈을 정덩화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성한 '정당화 서사'였고, 그 왜곡은 해방 이후까지 거의 검증 없이 반복되었다. - '서문' 중에서



책의 저자 박영규는 밀리언셀러 역사 전문 작가로 베스트셀러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출간한 이후 27년 동안 고려왕조실록에서 일제강점실록까지 '한 권으로 읽는 역사' 시리즈를 펴냈다. 역서사 외에 역사문화, 에세이, 동사양철학사 등 폭넓은 관심 분야만큼 집필 분야도 다양하다.


책은 총 3부(쇄국의 시대, 개방의 시대, 몰락의 시대)에 걸쳐 아홉 개 장으로 구성되었다. 쇄국의 시대는 고종이 즉위한 1863년부터 재위 10년(1873)까지를, 개방의 시대는 고종 재위 11년(1874)부터 재위 24년(1887)까지를, 몰락의 시대는 고종 재위 25년(1888)부터 재위 44년(1910)까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쇄국의 시대


우리들이 학창시절 수업을 통해 배워 알고 있던 바와 같이 당시 조선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조선 문호를 꽁꽁 걸어 닫고 쇄국 정치를 펼침에 따라 근대화가 늦어졌고, 반면에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을 통해 막부가 물러나고 천황 체제의 신정부를 출범시켜 근대화의 고삐를 당길 수 있었던 그런 시기였다.


1863~1865년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 중 가장 눈에 돋보이는 장면은 뒷방신세였던 조대비의 정계 복귀과 흥선군 이하응의 등장이다. 권력을 되찾고자 절치부심하던 조대비에게 호기好機가 찾아왔다. 후사도 없이 철종이 죽자(1863) 그간 몇 차례의 역모 사건으로 인해 왕손의 씨가 말라버린 상태에서 흥선군 이하응의 아들 이재황(아명兒名, 명복)을 양자로 삼아 후임 왕으로 지명하고 수렴청정에 들었다. 


풍양 조씨 가문 출신인 신정왕후 조씨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빈이 되어 입궁했지만 효명이 세자 신분으로 죽는 바람에 중궁에 오르지 못하고 뒷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때는 바로 그 유명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다.


조대비가 어린 명복을 용상에 앉히려는 목적은 허수아비 왕을 세우고 자신이 뒤에서 수렴청정을 함으로써 풍양 조씨 천하를 만들려는 의도였다. 또 조대비 입장에선 그간의 기득권이었던 인동 김씨 가문과의 대결에서 방패막이 역할을 해 줄 유능한 공격수가 필요했는데, 당시 이하응만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조대비의 친정엔 김씨 세력에 대항할 마땅한 인물(조카)도 보이지 않았고, 정치 경험이 전무한 갓 스물을 넘긴 청년이었으니 말이다.


한편, 이하응은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오르자 자신이 살던 집(雲峴宮)과 궁궐인 창덕궁 내부에 있던 금위영 사이에 문을 만들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조대비의 합의하에 이뤄진 조치였다. 1864년 9월, 조대비는 직접 고종을 대동하고 운현궁을 방문하기까지 했다. 이후 고종과 대원군은 이 문을 통해 왕래하면서 만날 수 있었으며, 이는 흥선대원군이 정치 전면에 나섰음을 의미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안동 김씨 세력은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했을 것이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안동 김씨 가문의 김흥근이 대원군에게 경고성 발언을 한 것으로 나타나고, 또 이를 괘씸하게 여긴 대원군이 당시 북문 밖 삼계동에 김흥근이 소유하던 별장을 빌려 아들 고종과 함께 놀이를 다님으로써 이 별장이 자연스레 운현궁의 소유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황현(당시 10살 아이였음)이 들은 소문에 불과할 뿐 실록 어디에도 고종이 삼계동 별장에 갔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아마도 이 별장은 대원군 소유의 석파정을 일컫는 것으로 보이는데, 김흥근이 석파정을 소유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개방의 시대


경복궁 중건으로 인해 백성들은 노동력과 각종 세금으로 고통을 받자 원성이 날로 커져만 갔다. 조선의 위기감이 날로 높아져 가자 고종 10년(1873) 동부승지 최익현이 조정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조정의 대신, 육조 판서, 삼사, 성균관 유생들을 사그리 비판함으로써 조정을 이끌던 흥선대원군을 겨냥했다. 이에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문을 극찬했다. 같은 해 11월 고종의 지지에 힘을 받은 최익현은 재차 상소를 올려 대원군에게 실정의 책임을 물어 야인으로 물러나도록 하고 고종의 친정을 주장했다. 고종도 이를 거부할 수 없었기에 대원군은 결국 탄핵되어 정치 일선에서 떠나게 된다.


고종 5년(1868) 상소문의 핵심


1. 토목공사를 중지하는 것

2. 백성들의 가혹한 세금인 원납전願納錢을 중지하는 것

3. 당백전當百錢을 혁파하는 것

4. 백성들이 한성에 들어올 때 받는 문세門稅를 폐지하는 것


고종 10년(1873) 상소문의 핵심


1. 청전(청나라 돈)을 혁파하는 것

2. 정사를 임금이 직접 챙기라는 것

3. 종친은 나라의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


1875년 8월, 일본은 군함을 파견해 강화도를 통해 서울로 진입하려 했다. 이에 강화도의 조선 병력이 포를 쏘며 저지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영종도를 침략해 포격을 가함으로써 조선 병영과 민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 사건은 일본이 무력을 사용해 조선을 개항開港시키려는 목적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조선 정벌론'을 내세우며 호사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은 그동안 걸림돌이었던 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사라졌으니 이때가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미 같은 해 5월 불법적으로 부산에 운요호가 입항해 조선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제맘대로 조선 영해를 오가며 측량을 감행했다. 심지어 운요호는 동해안으로 북상하여 함경도 영흥만까지 가기도 했다. 이렇게 동해와 남해를 항해하며 조선의 대응을 간보다가 결국 8월에 서해를 거슬러 올라가 강화도 인근 난지도에 정박했다. 이후 운요호의 일본군들은 물 보급 명목으로 보트를 타고 강화도 초지진에 상륙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조선의 병사들이 무장한 구식 화포와 화승총으로는 유럽의 신식 화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몇 번의 포격을 맞아 진이 초토화되고 아울러 많은 조선 병사들이 죽거나 다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영종진의 병사들(400명)은 도망치기 급급했다. 이리 되니 조선 조정은 일본군의 무력 시위에 겁을 먹고 결국 개항 요구에 응하게  되었다. 바로 강화도 조약 체결(1876)이다.


일본과의 통상 교섭이 진행되자, 최익현은 일본과의 교섭을 중단할 것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하지만 고종은 최익현을 흑산도에 유배시키고 교섭을 강행했다. 총 12조로 구성된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했다. 이로써 조선은 쇄국정책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물론 일본의 속셈은 식민주의적 침략의 첫발이었다. 정식 명칭은 '병자수호조약'이다.


조약의 주요 내용


(1조) 조선의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5조) 부산항 외에 2개의 항구(원산, 인천)를 개항한다.

(7조) 일본의 해안 측량 허용

(10조) 영사 재판권 인정


몰락의 시대


몰락의 원인은 조선 내부에서 발생한 부정부패였다. 1888년 함경도 영흥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났다. 그 원인은 함경남도 병마사 이용익의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함경도의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인 이용익은 임오군란 때 왕비 민씨와 고종 사이에 연락책을 수행한 공로로 벼슬을 얻은 인물이었다. 


이 무렵 그는 영흥에서 사금을 채굴, 고종에겐 신임을 얻었지만 백성들에겐 가혹한 수탈을 일삼았던 것이다. 민란을 수습코자 고종은 이용익을 파직했다. 이후 함경도 감사에게 사건의 진상을 철처하게 조사해 백성의 울분을 달래라고 명령했음에도 감사 이돈하는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영의정이 사직 상소를 올렸다. 상소문 중 이런 글이 있었다.


"민란에 대한 조사를 아직 마치지 못했는데 탐학貪虐한 관리를 통렬히 징계하여 민심에 흔쾌히 사죄하기를 하였습니까?"


이에 고종은 민란의 원인을 철저히 조사해 보고하도록 조치하고, 함경도 감사와 영흥부사에게 사건 처리를 제대로 수행못한 것에 대한 죄를 물어 각각 유배령을 내렸다. 또 파직시켰던 이용익도 전라도 나주로 유배했다. 하지만 두 달 뒤 이용익은 석방된 후, 1891년 1월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복직했다.


1888년부터 1896년까지 전국 각지에서 민란과 소요 사태가 잇달아 발발했다. 영흥민란 이후 1889년 1월 함경도 길주에서 소요 사태가 발생했고,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삼례역(1892)에서 동학농민들이 집회를 열고 척왜척양斥倭斥洋을 외쳤으며, 급기야 1894년 1월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대항하는 동학농민봉기가 발발했다. 


동학교도 전봉준 등 60여 명이 2회에 걸쳐 조병갑의 학정을 시정 요구(1893년 11월)했음에도 가문의 권세를 믿고 오히려 농민 대표들을 잡아 하옥시키고 고문까지 했기 때문이다. 전봉준이 이끈는 농민군은 1894 4월 부안을 점령하고, 관군마저 대파하는 등 정읍, 흥덕, 고창 지역을 장악하더니 영광, 함평, ㅁ무안 일대를 거쳐 전주성까지 점령했다. 이에 조선은 청나라에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1894년 6월, 일본 군사들이 대궐을 난입해 궁궐 시위 군사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청나라 이홍장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후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파병 사실을 통고했다. 이미 청군 파병를 감지한 일본은 조선에 파병하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청나라와 일본 간에 전쟁이 발발한 징후를 보이더니 경복궁을 장악한 일본군은 해군을 동원,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함대를 기습 격침시키고 아산에 상륙한 청나라군을 격파함으로서 개전 5일만에 조선땅에서의 전투는 일본의 완전 승리로 종결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은 청나라 요동 지역을 공략해 뤼순과 다렌을 점령하고 이어서 산둥반도의 북양함대 기지를 공략하자 위협을 느낀 청나라는 강화회담을 요청했다. 서구 열강들이 이 전쟁에 간섭하자 일본도 결국 종전을 결정하고 강화조약에 나섰다. 그 결과 4월 17일 시모노세키조약이 성립되었다.


조선은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 개혁을 실시했다. 소위 갑오개혁 또는 갑오경장이라 불리는 혁신 조치였다. 1차 개혁은 청나라에 대한 사대정책을 반대하고 서양과 일본 문물을 수용하자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2차 개혁은 개혁 기구였던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일본에 망명했던 박영효와 서광범을 내무대신과 법무대신으로 임명함으로써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내각이 들어선 셈이었다.


김홍집의 3차 개혁은 '을미개혁'이라고도 불리는데, 초기엔 박정양 중심의 친미, 친러파가 득세했다. 미우라 일본 공사가 새로 부임, 일본군을 동원해 왕후 민씨가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김홍집 내각의 친일적 성향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이 개혁의 핵심은 태양력 사용, 단발령 실시, 독립 연호 사용 등이었다. 하지만 고종이 김홍집 내각을 믿지 못해 아관파천(1896)이 단행됨으로써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고 말았다. 성난 백성들에 의해 김홍집은 살해되었고, 유길준, 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명성황후 민자영에 대한 평가는 아주 극단적으로 갈라져 있다. 한쪽에선 약소국의 왕비로서 외세를 적절하게 잘 이용한 매우 뛰어난 인물로 묘사하고, 반면에 다른 쪽은 민씨 외척 정권의 우두머리로서 조선 몰락의 주범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또 한쪽에선 매우 검소하고 조용하며 고종을 영리하게 내조한 왕비로 평가한 반면 다른 쪽은 무속에 빠져 국가 재정을 함부로 낭비한 인물로 비난하기도 한다. 어쨌든 간에 일본은 명성황후를 제거해야만 조선 정벌이 완수된다고 여겼을 만큼 가장 무서운 政敵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러일전쟁(1904)에서 일본이 승리함로써 조선은 이제 비빌 언덕이 사라진 셈이다. 서구 열강들은 두 나라의 전쟁을 디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유하며 러시아의 승리를 점쳤지만 말이다.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선제공격을 감행했고, 러시아 정부는 무척 당황했다. 이때 일본은 뤼순항을 봉쇄하여 러시아 함댕의 진출을 막는 작전을 진행했다.


1905년 5월, 경부선 철도를 개통하고 이어서 1906년 경의선 철도를 완전 개통했다. 이는 조선의 경제 발전을 위한 구상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원활한 수탈과 대륙 침략을 위한 전쟁 물자의 용이한 보급에 그 목적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만의 리그를 위한 부산물이었던 셈이다.


마침내 치욕의 을사늑약이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되었다. 유명무실한 대한제국의 국권國權이 본격적으로 강탈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한국 땅에 불법적으로 군대를 상륙, 대한제국의 행정력을 장악하고,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해 재정과 외교 실권을 박탈햇다. 이어서 군사 목적을 내세워 독도를 강탈, '다케시마'라는 명칭으로 일본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 당시 대한제국은 독도를 '석도'라는 이름으로 울릉도에 예속시킨 상태였다(1900년, 황제 칙령).



울분이 넘쳐 난다


책은 고종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누락되고 편향된 고종 시대를 다시 보기 위한 최소한의 복원 작업의 일환이다. 저자는 고종을 제대로 봐야 비로소 한국 근현대사가 제대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서문에서 책의 집필 동기를 밝혔다. 조선 말에서 대한제국의 출범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은 모든 분들에게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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