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지옥
유메노 규사쿠 지음, 마이너스 옮김 / 해밀누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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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메노 규사쿠(夢野久作, 1889~1936)는 일본 근대문학사에서 언제나 조금 비켜 서 있는 사람이다. 동시대의 에도가와 란포처럼 추리작가로 분륟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에로,구로,난센스'라 불리던 1930년대 기 취향의 정점에 놓이기도 한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사진, 책표지)


작가의 본명은 스기야마 나오키이며, 필명인 '유메노 규사쿠'는 후쿠오카 방언으로 '꿈꾸는 바보'를 뜻한다. 그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와세다 대학을 중퇴한 후 승려 생활, 농업 경영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특히 정신 의학, 불교,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같은 이력이 그의 작품 세계의 원동력이 되었다. 작가의 대표작이기도 한 이 책은 세 편의 단편을 묶어 '별 것 아니었다', '살인 릴레이', '화성의 여자'으로 구성되어 있다.


별 것 아니었다


저는 지난번, 마루노우치 클럽의 경술회에서, 단시간 영광을 얻은 사람으로, 귀형과 마찬가지로 규슈 제국대학, 이비인후과 출신 후배입니다. 작년, 쇼와 8년 6월 초순부터, 이곳 요코하마시 미야자키초에, 우스키 이비인후과 간판을 내걸고 있는 자입니다만, 돌연 이와 같은 기괴한 편지를 올리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9쪽)


'별 것 아니었다'란 단편은 이렇게 우스키 이빈인후과의 원장인 우스키 리헤이가 대학 선배인 시라타가 히데마로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시작한다. '히메쿠사 유리코라는 여성이 자살했다'는 내용인데, 그녀의 허구에 관해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사진, 경찰을 속인 전화 21쪽)


우스키 이비인후과 개업 전날 저녁에 간호사가 필요한지를 문의해 해온 여성이 바로 히메쿠사 유리코였다. 아오모리현이 고향이며, 부모님은 그곳에서 양조장을 운영 중이지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고 간호사 일을 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또 아오모리의 현립 여학교를 졸업, 시나노마치의 K대 이비인후과에 입학해 재학 중이며, 신원 보증인은 시타야에서 미용사를 하는 이모님이라고 했다. 만 19세 2개월인 소녀의 순진무구한 태도에 빨려 들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간호사로 채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 관한 신원 정보는 모두 거짓이었다. 


소녀 '히메쿠사 유리코'는 끊임없이 자신을 과장하고 거짓으로 계속 꾸면댄다. 이같은 거짓에 깜빡 속아 넘어가는 병원, 경찰 등은 도대체 그녀의 무엇을 믿었을까?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이름조차 거짓인 한 소녀의 허영심, 욕망,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등의 감정이 결국 '진실'이 아닌 '거짓'임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사진, 이름도 가짜, 94쪽)


이를 읽으면서 내 머리에 떠오른 속담은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였다. 이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으로부터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힐 정도의 가르침이었다. 소녀 히메쿠사 유리코의 언행도 마찬가지였다. 사소한 거짓말이 한두 번 계속 쌓이면서 '별 것 아닌 것'으로 스스로를 마취시킨 셈이었다. 이 정도면 과대망상증에 걸린 환자가 아닐까란 생각마저 든다. 아무튼 거짓이 탄로나는 순간 그녀에겐 죽음이었으니 그녀의 거짓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것이다.   


살인 릴레이

여차장만큼은 정말로 안 돼요. 농부로 사는 것보다 훨씬 재미없고, 훨씬 더 무섭고, 싫은 일이에요. 여차장의 운명이라는 건, 길거리에 흩어진 종잇조각보다 훨씬 값싼 것이에요. 여차장이 되어 보면 곧 알게 돼요. 간단히 말하자면, 농부의 딸로 있으면 신랑감은 순박한 마을 청년들 중에서 부모님이 골라 주시잖아요. 운이 좋으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여차장이 되면 그런 행복은 처음부터 포기해야 해요. 회사 중역이라든가 임원이라든가, 자동차 담당 순경님 같은 이들의 말은 아무리 부당하고 불쾌해도 얌전히 들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바로 해고돼요. 어떻게든 구실을 붙여서 쫓아내 버리니까요. (120쪽)

부모 형제도 없는 고아 신분인 도모나리 도미코는 미나토 버스의 여차장이다. 술에 취한 승객에게 놀림을 당하기도 하고, 멋 부리는 운전사에게 찔리거나 무서운 순경에게 손을 잡히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훨씬 더 무서운 일을 당하기도 한다. 

초등학교 동급생인 쓰키카와 쓰야코도 하마마쓰의 공부 버스에서 여차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자꾸 누군가에게 살해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편지를 보내왔던 것이다. 내용인 즉, 새로 입사한 한 운전사 니타카가 석 달쯤 되자 쓰야코의 아버지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넣었고, 회사 전무가 직접 중매를 선 까닭에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인데다 호감가는 남자라서 이를 승락했다는 거다. 

그런데, 도쿄 아오 버스에 근무하는 친구 마쓰우라 미네코의 갑작스런 편지에 따르면 놀랄만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 마디로 니타카 다쓰오란 운전사가 새로 온다면 이 남자를 반드시 조심하라는 경고와 함께 아주 무섭고 평판이 나쁜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아오 버스에서 일하는 동안 수많은 여차장을 유혹해 내연 관계를 맺고, 이후 싫증 나면 죽여서 어딘가에 버린 탓에 경시청으로부터 주목받자 아오 버스를 몰래 사직하고 사라졌다는 거다.

이후 문제가 발생한다. 정직한 심성을 가진 쓰야코 여차장은 이 편지를 아버지가 아닌 니타카에게 보여주는 바보 같은 행동을 했던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두 남녀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떼문이다. 증거가 될 수도 있는 편지를 다 읽은 그는 이를 화로에 넣어 태워 버리기까지 하면서 이렇게 무서운 말을 내뱉었다.
 
"바보구나... 너는... 이런 걸 남한테 떠벌리면 가만 안 둘 거야" 

이후 쓰야코는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사망해 장례까지 치렀다. 쓰야코의 아버지 말로는 '버스 대용으로 쓰이던 신형 포드 차의 운전사는 니타카였고, 만원 차의 여차장은 쓰야코'였으며 어둠 속에서 반대편 트럭의 돌진을 피하는 순간 쓰야코는 전봇대에 부딪혀 불행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는 승객의 증언이 있었다고 한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니타카 운전사는 나중에 미나토 버스 회사에 취직했다. 니타카의 범죄 행각을 이미 알고 있는 이 회사 버스 여차장으로 근무 중인 도모나리 도미코에겐 과연 어떤 일이 닥쳐 올까? 벌써 머리로는 그림이 상상된다.    

색마色魔의 연속되는 살인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성(여차장)이 자신의 친구에게 고백 편지를 보낸다. 그녀는 벌어진 사건 속에서 자신이 행한 역할로 인해 혼란에 빠진다. 즉 자신이 피해자인지, 아니면 오히려 가해자인지를 말이다.


(사진, 도미코의 행동 131쪽) 

그렇다면 이 소녀는 뭔가를 숨기고 있을까? 도무지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지 이에 도달하기까지 긴장감의 연속이다. 마치 '스톡홀름 증후군' 이 연상되는 사랑과 증오가 혼재混在한 소녀 도미코의 내면이야말로 소설의 제목처럼 잔혹한 '지옥'이 아닐까 싶다.

화성의 여자

지난 3월 26일 새벽 2시경, 시내 오도리 지역 6번째 구역에 위치한 현립 여고 운동장 구석의 낡은 창고에서 불이 났다. 강풍이 불고 있었기에 자칫 큰 화재로 번질 뻔했지만, 시 소방서장을 비롯한 소방대의 신속한 대응으로 창고 한 채만 전소된 채 진화되었다. 다행히 교사 건물에는 피해가 없어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151쪽) 

며칠 뒤 화재 장소를 정리하던 중에 새까맣게 탄 시신 한 구軀를 발견하면서 지난 26일에 발생했던 화재는 크게 관심을 끌게 되었다. 부검 결과, 시신의 주인공은 스무 살 정도의 여성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시신의 허리 부분 주위에 화재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연료가 집중 배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경찰 당국은 성추행에 연관된 방화 살인 사건으로 판단하고, 관련 보도를 일시 중단하고 철저한 수사에 들어갔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단서를 잡지 못하고 사건은 이미 미궁迷宮에 빠졌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번져 나갔다. 

사실 이 학교의 낡은 창고는 평소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으며, 또 화기 취급은 전무했기에 자연 발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경찰은 여전히 타살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여고는 3월 19일부터 봄방학에 돌입했고, 화재 당시 기숙사엔 학생은 전혀 없었기에 단순한 화재가 아니라 비극적인 사건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화성의 여자'(교장이 붙여준 별명)가 교장 선생님에게 보낸 편지엔 이런 글이 있었다. 

동급생들 가운데서도 저와 정반대로, 가장 아름답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단 한 명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 선생님, 동급생들 모두 저에게는 상냥한 말 한다디 건네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묘하게 저와 거리를 두고, 어딘가 기묘하게 차가운 웃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요. 용모나 성적만을 두고 서로 경쟁하던 아이들에게 저는 왠지 모르게 열등하고, 어딘가 결함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입니다.(181쪽)

평범함을 벗어난 특이함이 이토록 불편할 줄이야. 작품의 주인공은 큰 키와 강한 힘을 가진 여고생 '아마카와 우타에'로, 대항전이 열리거나 테니스, 배구, 달리기 등의 경기가 펼쳐지는 운동장에선 온갖 찬사를 한 몸에 받았지만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면 오히려 그로테스크한 괴물 취급을 당했다. 

이에 소녀는 현실 도피를 위해 마치 폐가와 같은 학교의 낡은 창고로 숨어 들어 지내며 혼자만의 은밀한 즐거움을 누렸다. 소녀 혼자만 즐기는 은밀한 공간인 줄 알았는데, 이곳에선 악과 비리가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즉 교장 선생님, 곱사등이 노인 서기, 뚱보 영어 여선생님 등이 학교 예산을 어떻게 횡령하는지 또 서로 다투는 소리까지 모두 엿듣게 되었던 것이다.


(사진, 교장의 비리)

이렇게 교장과의 얽힌 사건으로 인해 그녀의 삶은 비극적인 방향으로 전개된다. 소녀 스스로도 자신을 '화성의 여자'로 규정한다. '새까만 소녀 사건'. '모리스 교장 실종', '엉망진창이 된 현립여고' 등과 같은 신문의 기사와 사건 관련 진술 내용 등이 뒤섞이며 피해와 복수의 경계가 흐려진다. 과연 진실과 거짓은 어디까지인가? 독자들은 조각난 기록들을 따라가며 한 소녀의 삶과 고통 그리고 사회적 폭력 등을 마주하게 된다. 

1930년대에 발표된 작품이므로 약 100년 전의 사건 사고들이 고전소설 속에 등장한다. 횡령, 통정, 간통, 내연 관계, 살인, 사랑과 증오, 진실과 거짓 등등 인간사에 벌어지는 이같은 심리와 사건은 지금도 여전하며 언론과 매스컴에 자주 보도되는 사회비판이란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이곳이 '지옥'과 진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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