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는 고기 살 돈만 있으면 된다면서요 - 초보 농사꾼의 고군분투 영농기
김영화 지음 / 학이사(이상사)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삼년상을 치르는 마음으로 시작한 농사였습니다. 이제는 여리여리한 레이스 가득한 옷보다 고무줄 바지가 더 잘 어울리고, 흙이 묻어도, 벌레가 옷깃에 붙어도 별것 아니라는 듯 툭툭 털어냅니다. 진드기마저 익숙해졌습니다. 동물들이 싸고 간 똥을 봐도 찌푸리지 않고 거름 생겼다며 좋아하는 여유를 부립니다. 호미, 괭이, 삽 등 연장 보기를 백화점 명품 보듯 합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사진, 책표지)

저자 김영화는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깊은 산골에 살고 있다. 감, 호두, 벼농사까지 하는 억척스런 아가씨 농사꾼인데 시골에서의 삶을 사랑하며 농사를 통해 얻게 되는 땅의 언어를 글로 옮기고 있다. <농민신문> 영농생활수기 공모에 당선된 후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책은 겨울, 봄, 여름, 가을이라는 농사꾼의 사계절로 구성되어 소한 추위는 꿔다가라도 한다, 청명에는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 하지를 지나면 발을 물꼬에 담그고 잔다, 입추 나락 크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 등의 소제목으로 계절별 농사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준다.   

겨울 이야기를 첫 번째로 넣은 것은 겨울은 농사를 끝내고 쉬는 농한기農閑期가 아니라 오히려 농사를 시작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벼농사를 짓는 논은 잘린 볏짚이 흙과 잘 섞이도록 갈아엎어 놓아야 하고, 과일을 맺는 나무들은 가지치기 작업을 마쳐야 한다.

바람과 햇빛과 물 등 환경을 잘 읽어야 하고, 꾸준히 보아야 모든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아직 생계형 농사는 꿈도 꾸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풀인지, 작물인지 조금씩 알게 되고 농사가 손에 익어 간다. 땅으로 맺은 인연으로 기쁘고 소중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아가씨 농사꾼의 이야기를 들춰본다. 

겨울 

겨울은 추워야 한다. 이 표현은 내가 어린 딸자식을 훈육할 때 늘 사용하던 말이다. 물론 농사꾼과 일반인의 의미가 동일하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어린 딸 둘은 아빠를 지독한 꼰대로 보았을 것이다. 경상북도 한 시골에서 성장한 나는 추운 겨울철도 무척 좋아서 실컷 즐겼다. 농사는 머슴 형이 하는 일이라 그 시절의 난 편안한 시골생활의 연속이었다. 일보다는 노는 것에 푹 빠져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손을 호호불며 꽁꽁 얼어붙은 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이렇게 탐닉하다 결국엔 손에 동상이 걸려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무튼 농사꾼의 생각은 역시 다르다. 춥지 않으면 겨우내 죽어야 할 벌레들이 이듬해에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다. 겨울은 농사일을 준비하고 시작하는 계절이라서 봄이 다가오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살충, 살균해야 할 일들이 산적하다. 아가씨 몸으로 이많은 일들을 하느라 땀 흘리는 모습이 눈에 선한다. 

3월이 오기 전에 감나무, 호두나무에 기계유제를 살포한다. 기계유제의 기름 성분이 해충의 숨구멍을 막아 해충을 방제하는 효과가 있다. 나무의 새순과 꽃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4월 초순경 사용하게 되면 꽃이 피지 못하거나 수정이 되지 않고 세력이 약해지는 등의 약해藥害가 발생할 수 있어 반드시 3월이 오기 전에 방제를 마쳐야 한다.

커다란 물통에 500리터 물을 받아놓고 18리터 기계유제를 혼합한다. 그러고는 전기식 분무기를 꺼내와 약을 치려는데 기계가 너무 조용하다. 분무기를 이리저리 살펴보니 호스가 들어가는 곳에 균열이 가 있다. 대안으로 텃밭에서 사용하는 밀차식 엔진분무기에 휘발유를 넣고 시동을 걸어 보는데 아무리 시동줄을 잡아당겨도 이것도 시동이 안 걸린다.
 
하필 일요일이라 대부분의 농기계 수리센터가 쉬는지라 고칠 수도 없다. 기계유제는 물과 혼합해 놓으면 빨리 사용해야 하므로 정말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 할 수 없이 손잡이가 있는 플라스틱물통에 기계유제를 담아서 작은 바가지로 퍼서 나무마다 다니며 뿌렸다. 불어오는 바람에 기계유제들이 흩날리며 골고루 뿌려진다. 물론 처녀 농사꾼도 기계유제를 뒤집어쓴다. 물에 빠진 생쥐꼴을 하고서야 살포작업은 끝이 났다. '다음부터는 기계 점검부터 먼저 하자'고 다짐해본다. 아무튼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이처럼 너그러워지는 법이다.

여름

농사꾼 아버지는 예초기보다는 낫으로 풀을 베었지만 날카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처녀 농사꾼은 낫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예초기 사용법을 배워 틈틈이 예초 작업을 하였다.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와 진동, 휘발유 타는 메케한 냄새를 벗삼아 풀을 베었다. 

사실 난 예초기 작업에 대한 아픈 추억이 있다. 고등학생 때 추석을 앞두고 가족 산소에 벌초작업을 나갔다가 예초기를 돌리던 사촌 자형이 악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움켜 잡고 나뒹굴었다. 예초기에 돌이 튕겨 하필 눈을 강타했던 것이다. 산에서 내려와 응급차를 타고 병원에서 도착했지만 이미 한쪽 눈은 복구 불능상태였다. 무척 나와 가깝게 지냈던 자형은 평생 한쪽 눈을 실명한 상태로 지내다가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자고 일어나니 손가락이 잘 펴지지 않는다. 어떤 날은 손바닥과 손가락이 연결되는 관절 부위에 통증이 오고, 손가락은 뚱뚱하게 부었다. 손가락을 펴거나 구부리려고 할 때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손가락이 튕기듯 펴지곤 했다. 며칠 고민 끝에 찾은 병원에서 방아쇠수지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생전 처음 들어본 병명이다. 예초기나 드릴처럼 반복적으로 진동하는 기계를 만지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많이 발생하는 증상이란다. 이후 통증을 완화하려고 스키장갑을 끼고 작업을 했더니 손등에 땀띠가 났다고 한다. 무더운 여름철에 스키장갑이라니.

가을

소牛처럼 일을 하는데도 수익이 일정하지 않아 계획성 있게 살기가 쉽지 않은 게 농사꾼의 삶이다. 농사가 잘되어도 언제 어떻게 가격이 폭락할지 아무도 모른다. 자연재해와 기후의 갑작스러운 변화로 수요와 공급이 들쭉날쭉해서다.

이 대목에선 신혼 살림을 시작한 조카가 경남 말양에서 토마토 하우스 농장을 해보겠다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와 함께 호기롭게 억대 농부를 꿈꾸며 농사꾼이 되었던 일을 소개해 본다. 농촌진흥원에서 필수 교육도 이수하고 차근차근 준비했지만 그 꿈은 결과적으로 이상에 그치고 말았다. 기후 변화로 인한 생산량도 문제였고, 판로 또한 걱정거리였다. 

비닐하우스에서 생산된 토마토의 상등품만 조합에서 매수하므로 출하가 안되는 토마토의 판매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나는 그해 여름 조카 농장에서 토마토를 구매해 입에서 냄새가 날 정도로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농사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억대 농부의 노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리라.    

그럼에도 저자는 '농사가 묘한 매력이 있다'고 옹호한다. 즉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슴이 뛰고 설렌다는 것이다. 여성이라 그런지 감수성만큼은 갑이다. 제철 작물을 심고 가꾸며 수확하는 일을 이어가면 보이지 않는 많은 소비자들이 함께 동행해 주므로 비록 육체노동의 가치가 폄하되고 농민의 삶이 존중받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흘린 땀과 노력은 정직하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고 말이다. 

농사는 기다림의 미학이다

농사란 봄에 씨앗을 뿌려 여름을 김을 매고 가을에 추수를 하는 단순한 공식이 적용되는 게 아니다. 농사꾼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행복하게 사는 그런 형편도 아니다. 여름이면 태풍이 몰아쳐 과수 농사를 망치고, 겨울이면 폭설로 인해 비닐하우스 작물 재배가 엉망이 되기도 하는 불확실한 자영업이다. 나의 조카는 억대 농사꾼의 꿈을 중도에 접었지만 충청도 산골 처녀 농사꾼의 밝은 미래를 계속 응원하고 싶어진다.

#에세이 #시골에서는고기살돈만있으면된다면서요 #김영화 #초보농사꾼 #학이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