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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나를 깨우다 - 멈춘 사유의 감각을 되살리는 51가지 철학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김욱 편역 / 레디투다이브 / 2025년 8월
평점 :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우리 삶과 세계가 단순한 원리나 공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의 사유는 삶의 본질과 세계의 현상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하지만 바로 그 진지함 덕분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사랑하고, 매일매일을 자기 의지로 살아가려는 독자라면 쇼펜하우어의 통찰에 깊이 공감하게 될 것이다. - '편역자의 글; 중에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19세기 서양 철학계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흔히 염세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단순히 삶의 불행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이라는 실존의 조건 아래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집요하게 사유한 철학자다.
총 3부로 구성된 책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등의 주제로 이야기들을 펼쳐 나가며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평가에 묶어두지 마라', '천재는 두 개의 지성을 타고난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했을 때' 등 51가지의 철학을 소개한다.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평가에 묶어두지 마라
나는 타인이 아닌 고전의 인물들로부터 위안을 얻었다. 피타고라스와 에픽테토스 같은 사상가들은 모두 내면에 귀 기울인 자들이다. 나는 그들이 남긴 글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했다. 세상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내가 나 자신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자평해왔다. 사실 진리는 타인의 박수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람들은 종종 명예를 잃으면 자신의 품위가 손상되었다고 느낀다. 하지만 명예를 지킨다는 것은 남의 시선을 지키는 일일 뿐, 진정한 자아와는 무관하다. 명성은 간혹 생전에 얻어지지 않는다. 시류의 흐름에 따라 언제든 잊힐 수 있고, 때로는 죽은 뒤에야 평가가 올라간다. 내가 존경했던 작가들, 글로 진실을 말했던 자들은 그들의 시대를 초월해 모든 시대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생전에 가난했고 외면당했다.
그래서 나는 ‘무無’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무의 충만함. 아무것도 갖지 못했지만 결핍을 느끼지 않는 상태,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지만 허기를 느끼지 않는 상태. 그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내면의 독립과 정신의 풍요로움이 필수적이다. 외부로부터 무엇을 얻지 않고도 견디는 자, 외부의 인정 없이도 살 수 있는 자가 진정으로 되고 싶었다.
나는 지금껏 그렇게 살아오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많은 것을 거절했다. 명예, 부, 사회적 위치, 학문적 지위 등을 외면했다. 내게는 글을 쓸 수 있는 방, 걸어갈 수 있는 산책길, 그리고 침묵을 지켜주는 사유가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나는 그런 삶을 비참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안에 진정한 고귀함이 있다고 믿었다. 대중의 환호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진정한 삶이다. 행복을 부정하면서도, 그 부정을 통해 깊은 평정을 얻는 삶. 나는 그것이야말로 궁극의 삶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 살 더 먹었다는 것, 한결 더 깊어졌다는 뜻
탁월한 정신은 절대로 다수와 어울릴 수 없다. 맑은 물이 진흙탕에 섞이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이들은 세속의 인간관계로 위안을 얻기보다는 홀로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견고히 쌓아가는 길을 택한다. 세상은 이들을 가리켜 차갑고 무례하다고 평가하지만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고귀함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타인의 친밀함조차 조심스레 거부하는 결단을 선택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따금 사람들은 묻는다. 왜 어떤 이는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마치 그것을 성향인 듯 감수할 수 있는지. 그러나 이것은 본능이 아니다. 단지 삶의 부조리를 일찌감치 통찰한 자가 그 통찰을 견뎌내기 위해 선택한 삶의 방식일 뿐이다. 다시 말해 고통은 탁월한 정신이 세상과 맺는 유일한 관계이며, 그것이야말로 그가 진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삶의 본질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본 자는 선택의 순간마다 쾌락보다는 고통을 택할 것이다. 그에게 고통은 회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존재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통로이며,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실체를 가장 날카롭게 드러내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은 젊은 날의 갈등을 감내하며 나이를 먹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내면은 침묵의 지혜와 더불어 더욱 단단해진다.
육체는 쇠하고, 욕망은 마멸되며, 타인과의 갈등은 점차 무의미해진다. 60세 이후, 인간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점점 둔감해지지만, 오히려 내면의 고요는 더욱 단단해진다. 이 단단함이야말로 나이가 들어가는 인간이 얻어낼 수 있는 지혜의 참모습일 것이다. 젊은 시절의 분노와 충돌, 갈망과 흥분은 생물학적 소란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인간은 삶의 본질을 직시할 준비를 끝마치게 된다.
천재는 두 개의 지성을 타고난다
천재는 두 개의 지성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으로서 자신의 의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한다. 나머지 하나는 이 세계를 위한 것으로서 세계를 순수하고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사용한다. 천재의 두 번째 지성이 곧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이같은 순수 객관적인 파악의 핵심은 기술적 수련이 더해져 예술, 시, 그리고 철학으로 묘사된다.
이에 반해 일반인은 첫 번째 지성, 즉 자신을 위한 지성만을 타고난다. 따라서 일반인인의 지성은 주관적 지성이며, 천재의 지성은 객관적 지성이다. 일반인의 주관적 지성은 아무리 높은 예지와 수준에 도달했을지라도 천재가 지닌 두 개의 지성과는 견줄 수 없다.
삶이 이토록 찢기는 동안에도 그 열매는 익어가고 있음을
지적인 생활은 본래의 타고난 운명, 예를 들어 경제적 형편이라든지 직업 선택의 자유, 신분상의 제약과는 무관하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지적인 생활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변화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 지적인 생활은 사유와 배움, 탐구, 수련을 통해 지속되며, 이 같은 생활이 차츰 삶의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자리 잡게 되면 육체적인 삶은 목적을 위한 도구로써 지적인 생활에 예속된다.
이처럼 지적인 생활이 육체적인 생활과 전혀 다른 별개의 삶이라는 예를 우리는 괴테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전쟁으로 시대가 어수선하고 혼란이 극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 관심이 많았던 색채학色彩學을 연구했다. 당시 괴테는 혼란을 피해 룩셈부르크의 한 작은 도시에 머물고 있었는데, 훗날 그곳에서 자신을 위로해준 유일한 친구는 조그마한 책상 위에 펼쳐진 색채학 노트였다고 고백했다. 이처럼 괴테는 모든 이가 본받아야 할 삶의 모범을 보여줬다.
인간은 지상의 소금으로서 비록 육체적인 삶은 세상의 풍파에 시달릴지라도 지적인 생활만큼은 항상 유지할 수 있는 정신 상태가 필요하다. 또한 육체라는 시녀의 산물이 아니라 자유로운 정신의 산물임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폭풍이 휘몰아치는 언덕 위에서 조용히 잎사귀와 열매를 나부끼는 외로운 나무이다. 이 고독한 문양에 나는 한 줄의 글귀를 더하고자 한다. “내가 이토록 찢기는 동안 저들이 익었노라” 또는 “참혹한 고통을 당했으나 우리는 열매를 맺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했을 때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했을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은 두 배의 가치를 누리게 된다. 알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고백했으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셸링과 그의 추종자들처럼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쇼펜하우어의 재탄생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칸트가 남긴 인식론에서 출발했지만, 칸트처럼 인식이라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에 매몰되기보다는 인식을 좌우하는 인간의 표상과 형태에 천착했다. 생전에 그의 철학은 이단이라고 할 만큼 냉대를 받았고, 다른 철학자들로부터 미치광이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아왔으나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그는 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철학자 중 일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쇼펜하우어 철학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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