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로 간 소크라테스 - 철학자의 삶에서 배우는 유쾌한 철학 이야기
김헌 지음 / 북루덴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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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바깥으로 향하던 지성의 눈을 인간 안으로 돌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공동체는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 그렇게 하려면 어떤 덕이 필요한가?' 그야말로 소크라테스는 본격적인 인문학으로서의 철학을 하며 삶의 방식에 관해 진지한 탐구를 한 셈이지요. - '프롤로그' 중에서


(사진, 책표지)


책의 저자 김헌은 인간다움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인문학자로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철학을 "인간이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학문으로 정의하고, 구체적 모습을 그리스 철학자의 삶에서 찾는다.


총 4부로 구성된 책은 분화구 속으로 뛰어들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 전쟁터로 간 소크라테스, 독주 한 잔 등 철학을 주제로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서양철학사를 풀어 나가는 방식으로 철학자의 삶 자체와 그 속에서 이루어진 철학적 사유를 함께 살펴본다.  


분화구 속으로 뛰어들다


최초의 철학자인 탈레스는 세상 모든 것이 하나의 원리로 움직이고 사람도 그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다면서, 살아 있으나 죽으나 큰 차이가 없으니,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 말을 듣던 사람이 “그렇다면 당신은 왜 죽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탈레스는 “죽든 살든 큰 차이가 없는데, 굳이 죽음을 재촉하거나 일부러 삶을 떠날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고 대답했다.

서양철학은 크게 두 갈래로 볼 수 있다. 하나는 헤라클레이토스에 뿌리를 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변한다는 ‘변화의 철학’이고, 또 하나는 파르메니데스에 뿌리를 둔, 어떤 것도 변하지 않으며 존재와 본질은 영원하다는 ‘본질의 철학’이다. 그 후 그리스 사람들은 이 두 주장을 어떻게 조화시킬지를 고민하면서 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스 문명을 서구 문명의 뿌리라고 말하는 것도 상당 부분은 페리클레스 덕분이다. 그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아테네를 패권국가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지성인과 예술가들을 중용하며 아테네를 문화적으로 융성하게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다원론자인 아낙사고라스와의 만남이다. 아낙사고라스가 멀리 클라조메나이에서, 페르시아 군인으로 그리스에 왔고, 전쟁이 끝난 후에 아테네에 잔류했을 때,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곁에 두었던 사람이 페리클레스였다. 그 덕분에 아테네는 철학적으로 큰 자산을 얻게 된 것이다.84

원자론을 주장했던 데모크리토스는 지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그리스 북동부 트라케 연안의 압데라에서 호의호식하며 지내기보다 고향을 떠나 세상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압데라에서 동쪽으로 소아시아와 페르시아제국은 물론, 바빌로니아를 지나 인도까지 갔고,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이집트까지 두루 돌아다녔는데, 이집트에서는 약 5년간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세상을 여행하면서 최고의 지식인과 현자를 만났고, 좋은 책과 자료를 모으는 데에 큰돈을 썼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


우리는 흔히 소피스트를 '말재주꾼'으로 떠올린다. '궤변론자'라는 번역이 이를 대변한다. 하지만 이런 편견에 사로잡히면 객관적이고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다. 본래 그리스어로 소피스트는 '지혜로운 것을 아는 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피스트들이 철학자와는 달리 수업료를 받았기에 '지식 장사꾼'이란 편견이 생긴 것이다.


소피스트가 수사학, 즉 연설의 기술, 설득의 기술을 가르치고 수업료를 받는 것이 문제가 될 건 없어 보이지만 소피스트들이 수사학을 가르치면서, ‘나에게 오면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라고 선전했는데 그것이 문제였다. 심지어 죄를 짓고도 법정에서 말을 잘해서, 배심원들을 설득해 무죄가 될 수 있게 하는 기술이 바로 그들이 가르치겠다는 수사학이었다.


아테네 서쪽 항구 페이라이에우스에서 살았던 부호 케팔로스의 집에 초청받은 소크라테스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 묻자 사람들은 다양한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반문에 막혀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소피스트 철학자인 트라쉬마코스가 못 참겠다는 듯이 나서서, 단도직입적으로 아주 도발적인 주장을 던졌다. “제가 한마디로 딱 잘라 정의해 드리지요. 정의는 강자의 이익입니다.”

전쟁터로 간 소크라테스


기원전 432년에 소크라테스와 함께 포티다이아 전투에 참가했던 알키비아데스의 말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그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남들보다 참을성이 뛰어났다고 평했다. 젊은 시절엔 아버지처럼 석공石工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포티다이아전투에 중무장 보병으로 참가한 소크라테스는 혹한의 겨울 날씨에도 평상복 차림으로 군영 밖으로 나가 활보했다고 한다. 맨발로 얼음 위를 걸으면서도 양기죽에 담요로 몸을 감싸고 두꺼운 신발을 신은 남들보다도 더 빨리 더 오래 걸어 다녔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체력이다. 이러니 두 아내를 데리고 살 수 있었을 것이다.ㅎㅎ


(사진, 소크라테스와 두 아내)


이 전투가 기폭제가 되어 벌어진 펠로폰네소스전쟁(가원전 431~기원전 404년)에도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세 번의 전투에 참전했다고 한다. 이 엄청난 그리스 내전에 마흔다섯 살의 나이로 델리온전투(기원전 424년)에 참전했는데, 이 전투에서 아테네는 스파르타 동맹국이었던 보이오티아군과 싸웠지만 패했다.


이 전투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제자 크세노픈이 말에서 떨어졌을 때,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크세노픈을 부축하고 끝까지 구했다고 한다. 전세가 불리해 아테네군이 퇴각할 때 소크라테스는 전열을 이탈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며 적과 싸웠다고 한다. 동료들이 안전하게 회군할 수 있도록 가장 후방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강력하게 저항하며 경계를 철저히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는 근육질의 전사가 아니었다. 작은 키에 배불뚝이였고, 대머리에 들창코였다. 아마도 그리스신화에서 디오니소스 신을 따르는 술주정뱅이 실레노스의 모습과 비슷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소크라테스의 교육 방법을 산파술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산파가 임산부의 태에 있는 아이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돕듯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도 이와 마찬가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소크라테스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흔히 교육을 선생님이 가진 정보나 지식을 학생들의 머리에 주입하는 것으로 이해했지만 소크라테스는 학생들이 이미 가진 지식과 정보를 끌어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죽어서 천상으로 가려면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혜와 용기, 절제의 미덕을 균형 있게 갖춘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이며, 정의로운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말을 듣는 사람은 긴가민가했다. 세상에 떵떵거리며 위세당당하게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법을 밥 먹듯 저지르면서 돈과 권력을 모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소크라테스는 고발당하고 재판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제자들로부터 권유받은 탈옥을 거부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이란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죽음이 영혼의 해방이었던 셈이다. 즉 죽음으로 몸을 빠져나간 영혼이 공중에 흩어져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영혼은 단단하고 순수하며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자신을 닮은 순수한 존재들만 있는 이데아의 세계로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독주 한 잔

퓌론(기원전 360~기원전 270년)은 흔히 회의주의懷疑主義 철학자라고 불린다. 무엇이든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일단 의심부터 해서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안다고 하는 것조차도 의심한다. 제논과 에피쿠로스가 확실한 존재론을 바탕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 가치 있는 삶인지를 적극적으로 제시했다면, 퓌론은 마치 그들에게 “당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요? 당신들 말대로 했다가 그게 아니라면, 그대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건가요? 당신들이 믿고 따르며 행동하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인지, 일단 판단을 중지하고 모든 것을 회의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 같다.

금욕주의적 생활 태도를 지키던 제논은 큰 병치레를 하지 않고 아흔여덟 살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매우 충격적이다. 평소처럼 제논은 스토아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오다가 뭔가에 걸려 넘어져 발가락이 부러졌다. 그러자 그는 비극작품의 한 구절을 인용, 크게 소리를 질렀다. “간다. 운명이여, 왜 나를 소리쳐 부르는가?”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에피쿠로스의 말년은 병 때문에 고통이 심했다. 아마도 요도에 돌이 박혀 방광결석이나 요로폐색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죽기 직전 2주 동안 고통에 시달이다가 따뜻한 물을 받아놓은 욕조에 몸을 담그고 독한 포도주 한 잔을 마신 뒤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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