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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벽선사의 전심법요·완릉록 해설
황벽 지음, 나영석 해설 / 하움출판사 / 2024년 10월
평점 :
깨달음이란 자신이 누구라는 것, 혹은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할 때, 견성은 위와 같이 자신의 본성인 일심, 즉 절대의식을 깨달아 아는 것이고, 성불이란 육체를 가진 나라는 에고의 마음을 없애 버림으로써 항상 자신의 본성인 일심(한마음), 즉 절대의식으로 머무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깨달음이나 깨달음의 지혜를 진리라고 합니다. - ‘서문’ 중에서
(사진, 책표지)
황벽희운黄檗希運( ? ~ 850년)은 중국 남선종 계열인 임제종의 제10대 조사이다. 중국 당나라 푸젠성福建省 출생으로, 농사꾼의 3째 아들로 태어났다. 10살 때, 어머니를 따라 황벽산의 사찰에 가서, 큰 스님의 법문을 들은 후, 집에 돌아와서 계속 생각에 잠겨 있다가 10일 후에 10살의 나이로 홍주洪州 황벽산(황보산)에 들어가 승려가 된 인물이다.선사(禪師)의 설법을 당시 지방 수령이었던 배휴裴休가 듣고 편찬한 것이 바로 ‘전심법요’이다.
전심법요傳心法要 해설
모든 부처와 더불어 일체의 중생은 오직 하나의 마음이다. 세 가지 의미의 마음이 있다. 첫 번재는 나라는 에고의 마음, 두 번째는 좀 더넓은 의미의 마음, 세 번재는 이 어록의 핵심인 일심(하나의 마음)이라는 마음이며 이는 곧 부처이다.
상相에 집착하여 수행하는 것은 깨달음의 도가 아니다. 즉 상에 집착하여 수행을 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바란다는 것은 마치 수레가 앞으로 나가지 않을 때 수레를 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아래의 선문답禪問答을 살펴보자.
남악(주1):그대는 왜 참선을 하는가?
마조(주2):부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자 남악은 깨진기왓장 조각을 돌에다 갈기 시작했다.
마조:무엇을 하러 기와를 돌에 갈고 계십니까?
남악:거울을 하나 만들어 볼까 하네.
마조:기와로 어찌 거울을 만든단 말씀입니까?
남악:만들 수 없다면, 좌선을 한들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마조:그러면 어찌 해야 되겠습니가?
남악:수레가 나가지 않으면 수레를 쳐야 할까, 소를 쳐야 할까?
(주1)남악 회양선사(677~744년)~선종 7대 조사
(주2)마조 도일스님(709~788년)~남악의 제자
만약에 여러분이 지금 이 생각하는 나라는 것을 실재實在하는 나라고 여기고, 이 나가 무언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여러분이 지금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한마음인 참 나의 그림자일 뿐이니, 이 에고의 마음인 나가 부처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마치 그림자를 나라고 여겨서 그 그림자를 통하여 부처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생각이나 감정, 기억 등의 정신 작용과 생명 작용을 주관하는 하나의 의식의 작용에 불과한 여러분의 개인적인 마음(표면의식, 에고의 마음)은 실체가 아니어서 절대로 부처가 될 수 없다.(33쪽)
완릉록宛陵錄 해설
배휴裵休(797~870년)는 하남성 맹주 제원 출신으로 당唐나라 때 유명한 정치가이자 학자였다. 당 목종 때 진사 시험에 합격, 중서문하평장사와 중서시랑을 지냈으며 종릉과 완릉 지역의 관찰사를 역임했다.
그는 문장에 능하고 서예도 뛰어났으며, 교양을 갖춘 온화한 성품으로 평판이 아주 좋았다고 알려진다. 특히, 불심佛心이 깊어 당대 선사禪師 세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분들에게 법을 구했다. 교봉 종밀(780~841년), 위산 영우(771~853년), 그리고 황벽 희운이었다.
완릉록은 배휴가 완릉의 관찰사로 재직할 때 황벽 선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문답을 기록한 글로, 총 스무 가지의 문답이 책에 소개된다. 이 중에서 황벽선사와 배휴 관찰사 간의 인상적인 문답을 소개하려 한다.
길을 걷던 중 누군가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갑자기 젊은 사람이 접근헤 이런 질문을 할 때 우리들 대부분은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아예 상대를 하지도 않을 것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고, 무심無心이 곧 도道이다’라는 가르침을 주는 문답을 살펴보자.
(배휴)산중엔 사오백 명의 수행승이 있는데, 몇 사람이나 법을 얻었습니까?
(선사)법을 깨달은 사람은 그 수를 헤아일 수 없다. 왜냐하면 도는 마음의 깨달음에 있는 것이지, 어찌 언설에 있겠는가? 언설言說이란 단지 어린아이의 귀를 덮는 것(어린애를 달래는 것)일 뿐이다.
(배휴)부처가 무엇입니까?
(선사)마음이 곧 부처이고, 무심이 곧 도이다. 다만 마음을 내고 생각을 움직여서 유무有無, 장단長短, 상대와 나, 주관과 객관 등과 같은 (분별의) 마음만 없다면 본래 부처이고, 부처가 곧 본래 마음이다. 마음은 허공과 같다. 그러므로 말하건대 부처의 진실한 법신法身이 만약 마치 허공과 같다면 달리 구할 필요가 없다.
구함이 있는 것은 다 괴로움이다. 설사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이나 오랜 세월 동안 육도만행六度滿行을 행하여 부처의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 역시 (깨달음의) 끝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연의 조작에 속하기 때문이다. 만약 인연이 다하면 무상無常으로 돌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이르기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은 진실한 부처가 아니며, 또한 법을 설하는 자도 아니다.”라고 하셨다. 다만 자신의 마음을 인식하고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이 없다면 그것이 본래의 부처이다.
무심이란 생각이 없는 것, 혹은 에고의 마음이 없는 것이다. 한번 일어난 생각을 없애기는 어렵다. 한 생각에 이끌려 가다 보면 연속으로 뒷생각이 치고 들어오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일어난 생각을 없애려 하지 말고, 어디서 생각이 일어나려고 하는지 생각이 일어나려고 하는 곳을 주시해보라.(203쪽)
(사진, 무심이 곧 이 도를 행하는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단계와 수행법
해오解悟~ 깨달음을 지식으로 이해해서 어렴풋이 아는 것
견성見性~ 내면의 성찰(참선)로 직접 체험, 정확히 아는 것
성불成佛~ 진아眞我에 머무르는 것
돈오돈수 vs 돈오점수
단박에 성불의 단계를 성취한 석가모니 부처님은 돈오돈수이지만 깨달음의 기준을 견성 수준에 둔다면 견성이란 깨달음 후 점차 수행하여 성불의 단계로 나아가는데 이를 바로 돈오점수라고 말한다.
해오~ 불경(금강경, 법화경, 아함경), 선불교 조사어록(달마어록, 육조단경, 전심법요, 완릉록, 임제록, 보조국사의 수심결과 진심직설) 등을 읽는다.
견성~ 명상법(참선)으로 저자는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통한 수행법을 소개하고 있다.
성불~ 에고의 마음인 아상我相을 철저하게 죽여 없애는 것
책의 후반부는 저자의 수행일지를 소개하면서 끝을 맺는다.
“성불成佛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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