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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하루
차인표 지음 / 사유와공감 / 2024년 11월
평점 :
인간이 존귀한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대해 주기 때문인 것 같다.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면 “아가야, 잘 태어났어, 잘 살아” 하며 축하해주고, (중략) 아플 땐 걱정 해주고, 슬퍼할 땐 위로하고, 기쁠 때는 같이 웃어주는 서로가 있기에,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잘 가라고, 보고 싶을 거라고” 진심으로 울어주는 서로가 있기에... 우리는 존귀하고 우리의 삶은 빛난다. - ‘개정증보판(확장판)을 내며’ 중에서
(사진, 책표지)
연예인 차인표에 붙어 다니는 타이틀은 배우, 영화감독, 여기에다 우리들이 잘 몰랐던 소설가까지 정말 많다. 그는 공전의 히트작이었던 TV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1993년)을 통해 데뷔한 이래 30년 동안 드라마와 영화 등에서 꾸준히 활동했다.
또 꾸준한 기부와 자원봉사 등 선행善行을 베품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더니 문학 소설 <잘가요, 언덕>(2009년)을 발표하면서 작가로 선보인 후 다양한 장르의 장편소설을 후속으로 발표했다. 지금 읽고 있는 장편소설 <그들의 하루>는 코믹 감동 소설 <오늘예보>(2011년)의 개정증보판이다.
차인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당초 작품 <오늘예보>의 구상 단계에선 일곱 명의 하루가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이야기였는데, 네 명의 이야기로 압축했다가 탈고 전 ‘공익 1’이란 인물을 누락시켜서 세 사람의 이야기로 출간했었다. 이번 개정판에선 ‘정유일’이란 이름을 부여해서 네 명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고단 씨의 하루
인간수명연장연구소를 찾아간 나고단 씨, 만 46세를 갖 넘긴 그에게 연구소의 기대 수명 예상은 ‘46년 1일’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접한다. 게다가 그의 출생 시각을 기점으로 계산했을 때 이제 남아 있는 생生의 시간은 겨우 20분 뿐이었다.
연구소의 전공이 수명연장이다. 이에 나고단은 빨리 연장 작업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같은 상황이 닥치면 거의 대부분 이런 반응을 보일까? 아무튼 이 연구소의 설립 목적이 ‘돈벌이’이므로 공짜로 해줄리는 만무할테고, 역시나 그에게 메뉴판이 전달된다.
(사진, 수명 연장 메뉴)
하지만 수중에 돈이 없고 신용불량자라서 신용카드조차 없는 그는 앙드레 쥬거 박사에게 앞으로 벌어서 갚을테니 딱 5년만 더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한다. 이 요구를 들은 박사는 금방 말이 짧아진다.
“수명을 연장하고 싶다는 사람이 빈손으로 오면 어떻게 해?”
박사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이 요구 조건이 점점 내려간다.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내놓자 수납 창구에 접수부터 하라고 한다. 1분 연장에 475원이란다. 나고단은 절규한다. 시간이 없다며 살려달라고 말이다. 이는 꿈이다.
나이트 웨이터를 뛰다가 부킹 전문걸을 만나 5년 정도 함께 살았지만 무정자증으로 인해 슬하에 자녀 하나 만들지 못한 채 동거녀가 수영장 강사와 눈이 맞아 돈가방까지 들고 야반에 도주해 버리자 그간의 세월이 헛고생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웨이터 일을 계속했지만 이젠 나이트 종업원과 손님들 모두 그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달라 1년 정도 휴식을 가지며 창업 준비 후 모아둔 2억 원을 자본으로 삼아 미국산 수입 쇠고기 스테이크 전문점, 부대찌개 가게 등 이것저것을 해보지만 왕창 말아먹은 후 한강에 뛰어들 결심을 한 나고단羅苦短 씨, 이것 또한 여의치 않았다. 한강 둔치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카메라 앵글에 그의 모습이 걸리니까 자꾸 비키라고만 한다. 세상에 죽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된다.
우리 어머니는 나를 낳고 미역국을 잡수셨고, 우리 아버지는 내 분윳값 벌겠다고 불 끄다가 돌아가셨다. 나는 분명 이 세상에 태어나서 40년을 넘게 삶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엄연히 숨 쉬며 살아 있는 사람을 대충 지우겠다니, 눈 앞에 보이는데 안 보이는 것처럼 만들겠다니, 있는데 없게 하겠다니..... (88쪽)
(사진, 나고단 씨의 울분)
이보출 씨의 하루
보조출연자 이보출 씨, 그는 현재 TV 드라마 <양반과 상놈>에 출연하고 있는 엑스트라로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을 누나에게 맡겨놓고 있다. 왜냐하면 빚이 너무 많아 아내도 떠났고, 살 곳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약 1년째 떨어져 살고 있다.
돈을 벌어야 방 한 칸이라도 구해서 아들과 함께 살 수 있는데, 오늘이 조기종영일이라 다시 실업자 신세로 돌아갈 처지이다. 참고로, 보조출연자의 하루 일당은 4만 원(식사대 5천 원 별도 지급)이며, 보통 반장과 함께 팀별로 움직이기 때문에 반장에게 간택된다면 새로 시작하는 50부 짜리 다른 사극에 출연할 수도 있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젊은 감독이 불호령이 떨어진다. “컷, 컷, 컷!” 아들 태평이로부터 걸려온 전화다. 아침부터 다른 보조출연자와 신경전을 벌이다 핸드폰 끄는 걸 깜빡 했다. 이어서 길 반장이 젊은 감독에게 야단을 맞고 나에게 한 마디 한다. “나가.”
촬영장에서 쫓겨난 김에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학교에서 건 전화였다. 언제 자기를 데리러 오느냐는 내용이었다. 방 한 칸을 구하려면 길 반장에게 잘 보여야 할 판에 걱정이 앞을 가린다. 그래도 가을 햇살은 따스하게 반짝인다.
남주인공은 키가 제법 큰 여주인공이 망루에서 뛰어내랄 때 안전하게 양팔로 받아야 하는데, 이 신 촬영 중 엉덩이에 기브스를 하는 사고를 당하자 이를 대신 수행할 보조출연자가 꼭 필요했다. ‘위기는 기회’라고 누군가 말했다. 보출이 이를 자원했다. 반장은 여주인공이 다치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여주인공이 망루에서 뛰어내리는 촬영 신을 극구 거부했다. 그 이유는 엑스트라에게 안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감독도 이 신을 삭제키로 결정했다. 덩달아 일당을 4배로 쳐준다는 조건도 동시에 사라지고 말았다.
마지막 촬영신은 여의도 샛강 갈대밭에서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키스하는 장면이다. 엉덩이 부상으로 거동이 불편한 남주인공이 진흙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감독의 호통에 기어서 여주인공에게로 향한다. 하늘은 얼마나 거세게 비가 오려고 비구름이 가득하다. 이 신을 마쳐야 비로소 드라마는 종영된다. 남주인공 혼자서 기어갈 수가 없으므로 감독은 모든 출연자들에게 질퍽한 지면을 기어서 가라고 지시했다. 여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아저씨, 비키라구요. 앵글에 걸려요.”
“언덕에서 내려가라고, 좀 사라지라고.”
“야! 꺼지란 말야. 비 떨어진단 말이야.”
키스신 앵글에 꼼지락거리는 사람이 잡혔다. 이에 모두 함께 합창을 했다. 그럼에도 작은 언덕 위의 남자는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이에 반장은 누가 빨리 뛰어가 이 남자를 끌어내라고 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출 씨가 달리기 시작했다. 앵글에 잡힌 이는 바로 나고단 씨다.
(사진, 9회 말 투아웃 타자 이보출)
나는 달린다. 달리고 또 달린다. 거친 갈대가 얼굴을 때려도, 진흙이 양발을 끌어당겨도, 숨이 턱에 닿아도 나는 저 언덕을 향해 달린다. 태평이와 함께 살 그날을 그리며…저 언덕을 향해…(159쪽)
박대수 씨의 하루
전라북도 익산 출신인 박대수는 열아홉 살 때, 익산역 앞에서 패싸움을 하던 중 그가 휘두른 형광등에 동네 후배인 서팔복이 맞아 깨진 조각으로 인해 왼쪽 눈을 계속 씰룩거리는 부상을 당했다. 이 일로 대수는 감옥에 갔었으며, 스무세 살에 출소한 이후 쭉 조직 생활을 하며 감옥에 몇 번 더 들락날락거렸다.
그가 조직에서 맡은 일은 떼인 돈을 대신 받아주는 일이었다. 마흔둘에 딸(봉봉이)를 얻자 ‘지금처럼 살면 안 된다’는 깨달음이 생겼다. 이후 조직 생활의 청산에 5년이나 걸렸다. 작은 식당을 운영하며 세 식구가 오순도순 살아가는 꿈에 부풀었다. 그런데, 고향 후배 이보출이 나타나서 대박 주식에 투자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꼬셨던 것이다. 장사 밑천 9천만 원을 코스닥 회사 주식에 몽땅 투자했는데 두 달 만에 상장폐지가 되자 이보출은 잠수를 타버렸다.
그의 딸 봉봉이는 골수이형성증후군에 걸렸기 때문에 골수 은행에 기증자를 찾는 신청서를 접수한 상태이다. 보호자란에 박대수 이름 석 자를 적을 때 한없이 부끄러웠다. 지난 세월을 살면서 누구에게 무엇을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진, 영화 대부3)
봉봉이의 혈액형이 ‘봄베이 O형’으로 매우 희귀한 혈액형이라 골수 기증자를 찾기가 매우 여렵다. 의사가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대수는 난생처음 봉봉이를 살려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 누군가를 찾아서, 그 사람 마음을 돌려서 우리 봉봉이에게 골수를 기증하도록 기적을 베풀어주십쇼. 신님, 네?”
정유일의 하루
정유일은 이름처럼 삼녀 일남 중 유일한 아들이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다가 아버지 사망으로 학업을 중단, 공익근무에 소집됐다. 그가 배치된 근무지는 특이한 곳으로, 한강대교 둔치 관리초소다. 근무자는 단 두 명이다.
그는 그동안 쓰레기 줍고, 휴지통 비우고, 청소하고, 길 안내하고, 개똥 치우면서 꼬박 2년을 보냈다. 폼 나는 일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외롭고 지난했던 지난 2년 동안 그가 사랑한 것은 먹는 것뿐이었다. 78kg으로 공익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102kg이다.
생전에 그의 아버지는 헌혈에 매우 정성을 기울였다.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 한 방울이 필요해서 애태우고 있을 사람을 위해선 한 차례도 빼먹을 수가 없다는 지론을 지녔다. 매주 토요일에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피를 뽑으러 간다. 345번 째 헌혈을 마치고 귀가길 횡단보도에서 신호 위반차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부하 공익인 조박은 상급자인 유일보다 여덟 살이 더 많은 연장자였다. 근무 첫날부터 몇 분 늦게 출근했다. 추후에 알고보니 현재 조박은 치매환자인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데, 그가 공익 근무지로 출근하기 전 먼저 어머니를 치매 노인 보호소에 입소시켜야 하므로 보호소 문 여는 시간과 출근 시간이 겹치다 보니 7~8분 씩 본의 아니게 지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시 퇴근을 준비하는데 초등학생 한 명이 초소로 찾아와 한 아저씨가 다리 위에서 구두 벗고, 양말 벗고, 상의를 막 벗고 있다는 거다. 강으로 뛰어들 채비를 하는 자살시도자임에 분명했다. 둘은 노을 진 다리 위로 온 힘을 다해 달렸다. 키가 조막만 한 아저씨가 팬티만 남긴 채 홀딱 벗고 서 있었다.
(사진, 유일 vs 노숙자)
“사장님, 반포대교로 가세요, 네?”
두 사람 간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조박이 불쑥 한마디를 내질렀다. 이어서 그곳엔 관리초소가 없으므로 뭘 하든 참견할 사람이 없다고 추가 설명했다. 고래고래 악을 쓰던 이 아저씨는 옷을 도로 챙겨 입고 반포대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까지 이 글을 읽었다면 이 남자가 누군지를 알 것이다. 그렇다. 수영 강사와 눈이 맞은 아내가 야반 도주했던 나이트 웨이터 출신 나고단 씨다.
20년 후, 그들의 하루
소설은 20년 후, 그들의 하루 모습을 공개하며 끝을 맺는다. 보조출연자로 맘 졸였던 이보출은 현재 드라마 촬영장 반장으로 일하며 아들 결혼식 때문에 곧 상경할 계획이다. 과거 촬영장에서 보출에게 해악질하던 항아리는 지금도 여전히 보조출연자 신세라서 보출에게 다음 작품에도 꼭 뽑아달라고 부탁한다.
인천 국제공항의 입국장에 노신사 한 명이 들어서고, 이를 기다리던 김후덕(김부장)이 90도로 인사를 한다. 대수 행님 고향 후배로 모셔오라는 분부를 받았다고 자신을 밝힌다. 박대수의 딸 봉봉이가 결혼을 하는데, 주례를 맡은 노신사는 바로 베스트셀러 작가 나고단 씨다.
서울의 한 결혼식장, 신부 박봉봉 양의 아버지 박대수 씨와 그의 부인은 하객 맞이로 분주하다. 그 맞은 편엔 잘 생긴 신랑 이태평 군과 그의 아버지 이보출 씨가 하객을 맞이하고 있다. 박대수와 이보출이 사돈지간이 되는 날이다.
세상에 쓸모 없는 인간은 없다
한강 다리 위에서 자살을 시도했던 나고단 씨는 죽기 전에 실컷 먹고 죽자는 생각에 한 교회의 천막 식당을 찾아갔다. 식사하던 중 벽에 붙은 표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부자도 나누지 못하면 거지고, 거지도 나눌 수 있으면 부자다.” 배를 채운 그는 죽는 마당에 한 가지만이라도 사람에게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육교 계단에서 헌혈자 모집 요원을 만나 버스에서 채혈을 했다. 그의 혈액형은 돌연 변종인 ‘봄베이 O형’이었다. 곧 연말이다. 이 소설은 우리들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주는 연말선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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