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배터리 30년 전쟁 - 변방에서 지배자로, 끝나지 않은 도전
이지훈 지음 / 리더스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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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수주 잔고가 1,000조 원을 넘는 산업은 배터리가 유일합니다.” 1,000조 원은 흔히 ‘배터리 3사’로 불리는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 세 회사의 고객이 길게는 10년에 걸쳐 구매겠다고 약속한 배터리 물량을 금액으로 환산한 것이다. 세 회사 연간 매출의 20배에 가까운 일감을 미리 확보한 셈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사진, 책표지)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이차전지’다. 이차전지는 충전해서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배터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일차전지인 건전지는 다 사용하면 버리지만 이차전지는 충전해서 재사용이 가능한 것이다. 한국은 이 분야의 글로벌 시장에서 핵심 플레이어다.


총 일곱 개 장으로 구성된 책의 저자 이지훈은 우리들에게 <혼창통>이란 저서로 널리 알려진 바 있는 세종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다. 그는 관련자들의 생생한 목소리와 풍부한 자료 조사, 치밀한 취재 등을 통해 K-배터리가 걸어온 결정적 순간을 조명하면서 아울러 K-배터리의 위기와 기회를 분석하고 있다.


세계적인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이차전지 산업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연간 0.3%씩 끌어올릴 것’으로 전망했다. 그간 반도체 산업에 크게 의존했던 한국 경제에 한줄기 희망의 빛을 던져주는 논평이다.


2023년 이후 전기자동차와 배터리 시장에 쓰나미가 몰아닥쳤다. 전기자동차의 성장세 둔화, 핵심 광물 가격의 하락, 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라는 삼중고三重苦를 겪으며 한국 배터리 업체들은 커다란 내·외상을 입었다.


이후 관련 기사에 단골로 등장했던 단어가 바로 ‘캐즘’(협곡)이다. 아마도 이차전지 주식에 투자한 주식투자자들에겐 머리가 깨지는 용어였을 것이다. 이미 전기차를 살 만큼 샀고, 일반자동차 대비 높은 가격임에 비해 전기 충전 인프라의 부족으로 인해 당분간 정체기를 겪게 될 것이란 예측 탓이었다.


흐름을 바꾼 접착제 하나


2000년, LG화학 기술연구원의 이상영(현재 연세대 화공생명공학과 교수)는 1년 6개월 동안 독일 연수를 마치고 귀국했다. 신설된 안전성 강화팀으로 발령받아 소위 ‘화재가 나지 않는 배터리’를 만드는 일에 배치되었다. 그가 귀국할 당시 LG는 배터리가 장착된 노트북과 휴대폰에서 발생한 여러 차례의 화재 사고로 매우 어수선했다.


충전용 이차전지 중 가장 많이 시용되는 리튬 이온 전지의 구조는 샌드위치와 비슷하다. 양극과 음극이라는 두 빵과 이를 기로막는 패티(고기)가 분리막인 셈이다. 사실 이 분리막은 매우 얇은 필름인데, 두 극이 맞닿을 경우 불이 날 수 있다. 그래서 이상영은 세라믹 분말 가루를 전극 표면에 발라보기로 했다.


100개에 가까운 접착제를 시험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그는 우연찮게 한 가지 물질을 떠올렸다. 독일에서 지내던 시절 옆자리의 동료가 유기 전자 소자에 쓰는 접착 물질의 접착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이를 조금 얻어 통에 보관해두었던 것이다. 귀국시 가져와 집에 보관하고 있던 그 물질을 회사에서 시험해보았다.


“세라믹이 붙더라고요. 신기하게도 그동안 제가 겪었던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죠.”


비로소 역사적인 ‘안전성 강화 분리막(SRS)’ 기술이 탄생했다. 이로써 LG화학의 전기차 배터리 사업 포기는 쑥 들어갔고, GM과 닛산을 비롯한 여러 자동차 회사의 수주를 따냈으며, 이후 SK이노베이션과 조 단위의 특허 소송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2019년 8월 말, 수십만 건의 문서와 씨름하던 LG화학 측 변호사들이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했다. LG화학에서 SK이노베이션으로 전직한 어느 직원 노트북 PC의 휴지통 폴더에 있던 엑셀 파일이었다. 2년여 뒤 ITC는 최종 판결 이유서에서 이 엑셀 파일이 없었다면 ‘SK의 증거 훼손은 LG나 ITC에 의해 적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했다. 도대체 이 파일에 무엇이 담겨 있었던 걸까. - ‘증거 번호 6125 엑셀 파일’ 중에서


LG화학은 1996년 LG금속에서 이차전지 사업을 넘겨받은 후 공장을 지어(1999년) 한국에서 최초로 생산을 시작했다. 처음 시작할 때 회사 내에 리튬 이온 전지 전공자는 전무한 상태로 일본에서 겨우 제품을 얻어 분석하는 수준이었다.


구본무 회장의 강력한 의지로 시작한 LG그룹의 이차전지 사업은 기술인력부터 최대한 증원했다. 당시 이차전지 분야의 독보적인 1위는 일본의 산요로 연구진은 4백명이었는데, LG는 그 절반인 200명 정도였다. 구 회장은 말했다. “산요만큼은 뽑으세요. 1등 하는 경쟁사보다 R&D 인력이 더 많아야 합니다.”


‘패스트 팔로어’ 전략으로 일본 업체들을 따라잡은 K-배터리는 200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는 다른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일본 기업은 리튬 이온 전지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상용화했지만, 그 전지를 노트북이나 휴대전화가 아닌 자동차에 사용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불이 나는 배터리를 자동차에 어떻게 쓰나?’라는 게 일본 배터리 업체들의 고착화된 생각이었다. 이들은 비록 무겁지만 안전한 기존 제품, 즉 니켈 수소 전지(일명 니켈하이드라이드 전지)로 수익을 충분히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리튬 이온 전지 시장에 뛰어드는 것을 주저했다.


반면 한국 배터리 업체들은 일본 업체들이 보기에 ‘미친’ 짓을 벌였다. 세계 최초로 리튬 이온 배터리를 장착한 자동차를 현대에서 만들었다. 2009년에 출시된 현대차 아반테 LPI 하이브리드가 그것이다. 여기에 들어간 배터리는 바로 LG화학에서 만든 제품이었다.


고졸 행원·공인회계사 경력의 벤처사업가 이동채


한국 주식시장에 이차전지 주식 열풍을 몰고온 주인공이 바로 에코프로그룹 이동채 회장이다. 그는 ‘58년 개띠’ 포항 출신 기업인이다. 대구상고를 졸업, 주택은행에 입사한 뒤 고졸 출신으로는 승진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퇴사 후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해 자격을 취득했다. 이후 12년 동안의 회계사 생활은 그에게 기업·산업에 대한 안목과 미래의 통찰력을 키워주었다. 이에 거래 업체 뒤치다꺼리하는 일을 그만 두고 사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유해한 화학 성분을 흡착해 제거하는 케미컬 필터(당시 국내에선 일본과 미국 수입 제품에 의존)의 국산화에 나서 에코프로, 한국화학연구원, 한 국에너지기술연구원 공동으로 기술 개발하고 특허까지 취득했다. 이후 제품 생산을 위한 공장에 소용되는 투자비가 필요했다. 이동채는 산업은행 강남지점을 찾아 대출을 협의했다.


“이번 사업이 성공할 확률이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지점장)

“솔직히 말하면 50%입니다.”(이동채)


대출을 요구하는 기업인은 보통 이런 경우 90%가 넘는다고 확언하지만 이동채의 진솔한 답변에 신뢰감을 느낀 지점장이 조건을 내세웠다. 개인적으로 자본금 10억 원(당시 에코프로의 자본금은 1억원)을 마련하면 지점장 전결로 같은 액수의 돈을 대출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에코프로는 이렇게 시작했다.


이동채는 지인들에게 저녁을 대접하겠다는 초대 편지를 보냈다. 서울 JW메리어트 호텔에 55명이 모였다. 그는 환경 사업의 청사진을 이야기한 뒤 본론인 투자를 요청했다. 비록 대박 보장은 없지만 7년 내에 반드시 갚겠다고 약속했다. 최저 5백만 원부터 최고 5천만 원까지 투자를 약속한 총액은 11억 5천만 원이었다. 이 돈이 입금된 통장을 갖고 산업은행에서 10억 대출을 받아 오창산업단지에 공장을 지었다. 훗날 이 돈을 투자한 지인들은 원금을 훨씬 상회하는 돈을 상환받게 되었다. 이동채 신화의 출발이다.


2003년 제일모직의 제안이 이동채의 운명을 크게 바꾸었다. 제일모직은 그에게 리튬 이온 이차전지의 핵심 소재인 전해액 사업을 동업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제일모직은 신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제일모직에서 설비를 이전받은 에코프로는 전해질을 생산, 제일모직에 납품했다. 에코프로가 이차전지 소재 사업에 진출하는 계기가 마련, 32억 원의 매출다운 매출을 올렸던 것이다. 이후 제일모직과의 인연이 계속 이어져 이차전지의 다른 소재사업을 함께 수행할 수 있었으며, 나중엔 제일모직의 양극재 사업을 인수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책은 포스코의 자원 개발 프로젝트의 일환인 아르헨티나 염호鹽湖 구입 계약을 중국의 ‘간펑 리튬’(리튬 세계 1위)에게 빼앗긴 사례들과 포스코의 전략 수정, 삼성의 배터리 사업 참여는 왜 신중한지 등 흥미로운 얘기들이 이어진다.


“배터리 사업은 마라톤 42.195km 코스에서 이제 4km 정도 뛴 셈입니다.” - 권영수, 전前 LG에너지솔루션 부회장


마지막으로 마치 치킨 게임과 비슷한 배터리 사업에서 중국의 CATL, BYD 등은 중국 공산당의 비호를 받으며 과감한 투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이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지 않기 위해선 향후 많이 자금이 소요되는 ‘쩐의 전쟁’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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