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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존재는 무리에 섞이지 않는다 - 군중심리
귀스타브 르 봉 지음, 김진주 옮김 / 페이지2(page2) / 2024년 10월
평점 :
특정한 목적을 위해 모인 군중은 민족의 역사적 생애에서 언제나 큰 역할을 해왔으나, 그 역할이 오늘날만큼 중요했던 적은 없다. 군중의 무의식적 행위가 개인의 의식적 활동을 대체하는 양상은 현시대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다. - ‘머리말’ 중에서
사람이 무리를 형성하면 그 무리는 고유의 민족성과는 다른 독특한 특성을 갖게 된다. 군중이 보이는 정신적 특성은 어떠한 제도나 법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다. 인간은 자기 내면에 존재한 사상, 관습, 감정 등에 지배받기에 제도와 법이 우리의 정신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책의 저자 귀스타브 르 봉(1841~1932년)은 프랑스 사상가·사회심리학자로 출발했으나 군중심리학 연구로 현대 사회심리학의 하나의 원류를 이루었다. 19세기 말의 상황을 '군중의 시대'라고 인식, 군중은 개인의 합리성을 상실하고 맹목적인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집합체라고 보았다.
그는 <민족 진화의 심리학적 법칙>(1894년)을 통해 석학碩學으로서의 명성을 얻었고, 이어서 발간한 <군중 심리>(1895년)는 출간 1년 만에 19개 언어로 번역될 만큼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총 3부 13개 장으로 책은 구성되어 있다.
군중의 시대가 도래하다
인류 역사에서 발생한 큰 사건들의 배경엔 항상 생각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당대가 과도기인 것은 점점 붕괴한 낡은 사싱을 대체할 신新사상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래는 전혀 새로운 사싱 위에 세워질 것이다. 그리고 이 사상을 형성할 가장 강력한 세력은 군중이다.
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아랍 세계가 탄생한 것과 같은 문명의 변화와 격변은 이민적의 침략이나 왕조의 전복 등과 같이 정치적으로 중대한 사건들이 원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표면적 이유 이면엔 대체로 민족 사상의 변화라는 실제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급격한 변화는 그 규모와 폭력성이 아니라 문명을 새롭게 만든 중대한 병화들이 사상, 이해, 신념에서 비롯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과거에는 실제로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져버린 수많은 사상의 잔해 위로, 또 혁명으로 줄줄이 부서져버린 그 숱한 정권들 속에서 유일하게 일어선 것이 바로 군중 세력이다. 오랜 신념이 가물거리다 사라지고 사회의 낡은 기둥들이 차례로 무너지는 동안 그 어떤 것에도 위협받지 않고 점점 더 위세를 키우는 것은 오직 군중 세력뿐이다.
군중의 정신 구조
우연히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만으로는 군중의 특성을 띠지 않는다. 특정한 상황 아래에서 결집할 때만이 심리적 군중의 특성을 보이게 된다. 이렇한 군중들은 구성원의 형태와 작극 정도에 따라 다양한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공통적인 특성이 있기 마련이다.
심리학적 측면에서 군중을 살펴보도록 하자. 특정한 상황 아래에서 결집한 사람들은 그 상황 속에서 새로운 특성, 그러니까 각 개인의 특성과는 매우 판이한 특성을 갖기 마련인데, 이때 의식을 가진 인격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집단 일체의 감정과 생각이 한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그러면 일시적이지만 뚜렷한 성격을 지닌 집단정신이 형성된다. 집단은 소위 ‘조직된 군중’ 또는 ‘심리적 군중’이 되고 단일한 존재로 거듭나 정신적으로 단결하는 법칙을 따르게 된다.
심리적 군중을 이루는 개인들의 사상과 감정의 방향이 고정되면 그들 고유의 개성은 사라진다. 실제로 평상시라면 평화를 추구하는 선량한 부르주아지들이 혁명기에 이르러 가장 과격한 국민 공회 의원이 되었고, 이후 혁명의 폭풍우가 지나가고 나자 본래의 평화주의자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군중은 구성원 개개인의 평균값이나 단순한 합合이 아니라, 이질적인 요소들이 화학적으로 결합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유기체와 같다. 군중 속에서 개인이 상실되는 현상은 의식적 행위나 의지가 아니라 무의식에서 비롯된다.
군중은 변덕스럽다
군중은 그때그때 가해지는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대단히 변덕스럽다. 어떤 자극이 가해지느냐에 따라 군중은 관대하거나 잔인할 수 있고, 용맹하거나 소심할 수도 있다. 군중은 충동적으로 반응하여 쉽게 변덕을 부리고 격분하지만, 이러한 군중의 특성은 민족의 고유한 기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군중에게 가해지는 자극은 어떤 식으로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망을 억누를 만큼 언제나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군중은 매우 다양한 자극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데다 항상 어떤 자극을 좇기 때문에 몹시 변덕스럽다. 냉혹하고 잔인하던 군중이 눈 깜짝할 사이에 관대해지거나 용맹해지는 것도, 사형 집행인이던 군중이 곧잘 순교자로 돌변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암시를 따르는 군중
군중은 머릿속에 환기된 이미지를 현실로 여긴다. 그 이미지가 군중의 모든 구성원에게 비슷한 이유다. 군중 속에서는 박식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균등해진다. 군중 속 모든 개인을 지배하는 환상의 여러 사례들이 있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풍문이 사실로 둔갑하는 것은 군중 사이에서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군중은 어떤 암시에 쉽게 빠지고 그 암시가 제시하는 메시지와 이미지의 진실 여부를 판단하는 능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소위 ‘공동 환각’ 현상을 보인다.
예를 들어 모든 십자군 병사들이 예루살렘 성벽 위에 모습을 보인 성 게오르기우스를 목격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현신現身을 본 병사는 오직 단 한 사람뿐이었음이 분명하다. 단 한 명이 목격한 기적이 전파를 통해 즉각 모든 십자군 병사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사진, 성 게오르기우스)
이러한 사건들은 군중의 증언이 사건을 밝히는 증거로서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는지 보여준다. 논리학 개론서에서는 수많은 증인들의 일치된 증언이 어떠한 사건의 진실을 가리는 확고한 증거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는 군중 심리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비추어본다면 완전히 개정되어야 하는 내용이다. 가장 많은 사람이 관찰한 사건일수록 가장 의심스러운 사건인 법이다. 요컨대 수천 명의 사람이 어떤 일을 동시에 목격했다면, 실제로 일어난 일과 그들이 공유하는 이야기는 완전히 다를 가능이 매우 높다.
군중의 이성에 호소하지 말고 감정을 자극하라
문명을 일으킨 것은 이성이 아니라 공상이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전을 짓게 하고 광활한 제국을 건설하며 신의 권능을 지닌 위대한 지도자를 탄생케 한 것은 감정과 공상이었다. 만약 군중이 하나하나 이성적으로 따졌다면, 역사 속의 그 모든 일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으로는 군중을 계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해야 할까?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인간이 이성의 힘을 빌렸다면, 공상과도 같은 환상에 이끌려 열정적이고도 대담하게 문명을 일으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이끄는 무의식의 산물인 공상은 반드시 필요하다.
갈릴리의 한 무지한 목수가 2,000년 동안이나 전지전능한 신이 되어 가장 위대한 문명을 이끌었다는 사실도, 몇몇 아립 부족이 사막을 벗어나 고대 그리스 - 로마의 영토 대부분을 정복한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제국보다 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는 것도, 또 무명의 한 포병대 중위가 수많은 민족과 군주를 위에 군림햇다는 사실도 모두 있을 법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가 지금것 모든 문명의 커다란 원동력이었던 그 감정들은 이성과 함께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에 반反해 생겨난 것이었다.
의회는 집단 지성이 아니다
의회는 각 국가마다 민족정신의 영향으로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군중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특수한 조직인 만큼 여타의 군중과는 다른 차이를 보인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자코뱅당은 의회의 의견이 단순화되는 가장 완벽한 전형을 보여주엇다. 독단적인 논리만 내세운 당원들은 사안 자체의 개별성은 무시한 채 막연한 일반론에만 몰두했다. 그래서 그들이 여러 가지 상황은 외면한 채 혁명을 밀어붙이기만 했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사용한 수단은 역시나 절대적인 단순화엿다. 그들은 자신들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폭력적으로 파괴했고, 자코뱅파뿐만 아니라 지롱드파, 산악당(프랑스 혁명 때 정국을 주도한 좌익 정당), 테르미도르당을 비롯한 거의 모든 정당들도 같은 생각에 고취되어 있었다.
입법을 기획하거나 정책을 구상할 때 의원은 하나의 개인으로 돌아간다. 그 전문가에 의해 탄생한 법과정책은 뛰어난 개인의 작품이지만, 여러 의원들의 수정이 더해지면 결국엔 집단의 참담한 작품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래도 일시적이나마 전문가들이 의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며 의회의 미숙한 결정과 오류를 바로잡는다. 하지만 유권자를 의식한 의회 행정으로 인해 재정이 낭비되는 상황은 피할 수 없다.
재정이 낭비되는 위험보다는 개인의 자유가 점진적으로 제한된다는 위험 요소가 더욱 치명적일 수 있다. 시민들은 더 많은 법이 더 많은 평등과 자유를 보장하리라는 환상에 사로잡힌 채 갖가지 규제가 일상의 자유를 조금씩 좀먹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민족은 하나의 이상으로 뭉친 결합체이며, 문명은 그 이상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탄생한 것들이 이룬 결과물이다.하지만 어느 수준에 이르면 문명은 성장을 멈추고 뇌쇠기에 접어든다. 이와 함께 민족도 분열한다. 이때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국가가 등장한다.
이상理想이 점차 소멸하면 민족은 그들에게 응집력과 통일성, 힘을 부여하던 가치들을 차츰 상실한다. 이 때 개인은 여전히 인격적으로나 지성적으로 성장할 수 있지만, 민족의 집단 이기주의는 지나치게 발달한 개인 이기주의로 대체되고, 민족의 기개와 실행력도 약화되어 버린다. 그러면 일체성을 갖고 하나의 집단을 형성했던 민족은 결국 응집력이 없는 개개인들의 집합체가 된 채 그저 전통과 제도만 앞세우며 한동안 인위적으로 유지될 뿐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개인들은 각자의 이해와 열망에 따라 분열하지만,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극히 사소한 행위마저 지도해줄 누군가를 기다리게 된다. 그러면 이때 개인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을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가 등장한다.
민족의 흥망성쇠
과거의 이상을 완전히 잃어버린 민족은 결국 고유의 정신마저 완전히 잃고 만다. 그런 민족은 그저 무수히 많은 독립된 개인으로 흩어진 최초의 모습, 즉 군중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면 그들은 더는 일관성이 없고 내일도 없는 군중의 모든 과도기적 특성을 띠고, 문명도 더는 불변성을 갖지 못한 채 우연히 닥쳐오는 위험들에 고스란히 맞닥뜨리게 된다. 꿈을 좇아 야만에서 문명의 단계에 도달햇다가 그 꿈이 힘을 잃는 즉시 쇠퇴하고 소멸해버리는 것, 이것이 곧 민족의 흥망성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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