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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를 뒤흔든 5대 전염병 - 미국사의 변곡점에서 펼쳐진 전염병과 대통령의 뒷이야기 ㅣ 역사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8
김서형 지음 / 믹스커피 / 2024년 2월
평점 :
미국 사회에 치명적인 영양을 미쳤던 다섯 가지 유행성 전염병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식민지 시기부터 수많은 사망자를 초래했던 천연두와 독립전쟁 이후 미국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황열병, 19세기 중반부터 빈번하게 발생했던 콜레라, 갑자기 발생했다가 종전과 함께 소리 없이 사라진 1918년 인플루엔자, 그리고 1950년대까지 미국 사회의 가장 치명적인 유행성 전염병이었던 소아마비. - ‘들어가며’ 중에서
책은 단순히 유행성 전염병의 특징이나 사망자 수만 살펴보는 게 아니라 치명적인 전염병이 미국 사회에 미친 영향과 이를 통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당시 재임 대통령의 리더십을 함께 살펴본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책은 미국의 5대 전염병인 황열병, 천연두, 콜레라, 1918년 인플루엔자, 그리고 소아마비를 극복하기 위해 당시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앤드류 잭슨, 우드로 윌슨, 프랭클린 D. 루즈벨트의 리더십을 각각 살펴보고 이를 통해 여전히 우리를 위협하는 글로벌 전염병에 대한 대응 자세를 성찰하려 한다.
저자 김서형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미국 의학사로 박사 학위를 취득, 동교에서 국내 최초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융합을 추구하는 빅히스토리 교양과목을 강의(2020~2014년)했으며, 현재 러시아 빅히스토리 유라시아센터 연구 교수로 활동 중이다.
콜럼버스의 항해
콜럼버스는 총 네 차례에 걸쳐 항해했다. 첫 항해에서 그는 스페인으로 가져갈 금, 은을 찾고자 주변 지역을 탐색했다. 그러나 카리브해에선 금, 은이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아메리카 원주민으로부터 소량의 금, 은을 갈취한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돌아가 이사벨 1세에게 바치면서 엄청난 금과 노예를 얻을 수 있다고 거짓 보고했다. 그렇게 더욱 큰 규모의 원조를 받아 두 번째 항해를 시작했다.
1493년에 시작된 두 번째 항해 이후 콜럼버스의 탐욕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가 자신의 항해를 ‘라 엠프레사’, 즉 ‘사업’이라고 불렀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콜럼버스는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 부를 얻고자 아메리카 원주민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당시 카리브해에 살고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은 아라와크족의 일원인 타이노족이었다. 콜럼버스의 악행은 항해의 수익성을 입증코자 타이노족을 노예로 팔아넘겼고,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새로운 조공제도를 도입했다. 즉 3개월마다 상당한 크기의 금을 바쳐야 했고 이를 지키지 못하면 손발이 잘려나갔다. 또한 많은 여성들이 매춘부로 전락했으니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학살자와 다름없었다.
황금해안의 비애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아프리카 서부 해안지역에서 노예로 끌려갔다. 역사학자들은 이 지역을 ‘황금해안’이라 부른다. 15세기말 포르투갈 선교사가 도착했을 때 서아프리카 기니만 북쪽 해안을 따라 수많은 황금을 발견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7세기부터는 사탕수수를 비롯한 아메리카 플랜테이션 노동력 공급을 위한 노예무역이 활성화됨에 따라 다른 의미에서의 황금해안으로 불리었다.
노예 사냥꾼에 잡힌 아프리카 원주민은 가슴에 낙인이 찍힌 채 노예선에 올랐다. 노예선은 여러 달 동안 대서양을 횡단함에 따라 상당수 노예들이 사망했다. 사실상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정원보다 훨신 더 많은 원주민들이 탑승했다. 포르투갈은 노예무역의 핵심국가였는데, 브라질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18세기 동안 무려 180만 명을 실어 날랐다.
(사진, 노예무역)
황열병의 발병과 워싱턴 대통령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이티는 독립에 성공했다. 성공 이유 중 하나는 생도맹그에서 유행한 점염병 때문이었다. 이 지역은 아프리카 원주민의 이동과 함께 아프리카 서부 지역의 풍토병이었던 황열병이 유행했다.
황열병은 주로 이집트숲모기에 의해 전파되는 아르보바이러스가 혈액으로 침투해 발생하는 유행성 전염병이다. 황달, 발열, 근육통, 오한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 심하면 출혈이 발생하고 2주일 내에 사망한다.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서 강제로 아메리카로 이주했던 원주민들과 함께 이동한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카리브해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등 여러 농장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아이티 혁명의 발발로 백인 지배계급인 그랑 블랑 중 일부는 신생국 미국으로 이주함에 따라 자연스레 황열병은 아메리카로 퍼지게 되었다.
1793년, 필라델피아에서 치명적인 황열병이 발생했던 초기에 워싱턴 대통령은 수도를 버리고 피신했다. 그러나 그는 필라델피아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 전체에 위협적이었던 유행성 전염병을 통제하고자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의 주장을 균형 잡힌 시각에서 활용했다. 같은 해 10월 중순, 황열병은 사라졌다.
워싱턴의 재임기간 동안 미국 사회는 다른 어느 시기보다 연방주의와 반연방주의 사이에 분열이 극심했지만, 그는 중립을 유지하면서 균형 잡힌 정치를 주도했다. 정치적 갈등과 분열 속에서 미국 사회를 통합하는 데 집중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워싱턴의 가장 뛰어난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 최초의 팬데믹
역사학자에 따르면, 인류사에 있어서 최초의 펜데믹은 로마 제국에서 발병한 역병(165~180년)이다. 이 시기는 ‘팍스 로마나’, 즉 역사상 유례없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다섯 명의 황제 중 마지막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재임 첫 해에 심각한 기근과 홍수가 발생했고 파르티아 제국(페르시아)과 전쟁이 발발했다.
파르티아 군대가 점령했던 셀레우키아에서 전염병이 발생했다. 전염병은 파르티아 군대뿐만 아니라 이들과 전쟁하던 로마 군대까지 확산되었다. 파르티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 군대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지나간 모든 지역에서 전염병이 발생했다. 5세기의 한 스페인 작가에 따르면, 당시 이탈리아반도 내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전염병이 발생했고 주민들은 전부 사망했다.
유행성 전염병은 이탈리아반도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라인강을 따라 북쪽으로 확산되면서 로마 제국 국경 밖에 있던 갈리아족과 게르만족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점에서 165년의 전염병은 한 지역을 넘어 여러 지역과 국가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 최초의 팬데믹이었다.
천연두 예방 접종
1803년, 루이지애나를 매입한 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이 지역의 동식물 분포와 아메리카 원주민 등을 조사하는 탐험을 실시했다. 바로 ‘루이스와 클라크의 탐험’인데, 이로 인해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지리, 광물, 야생 동물과 식물에 대한 정보를 축적할 수 있었고 서부를 점령하는 기본 토대를 마련했다.
당시 이 탐험에서 루이스는 천연두 예방 접종 혈청을 늘 지니고 다녔다. 만나는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접종하려 했던 것이다. 비록 그들이 노스다코타에 도착했을 때가 겨울이어서 혈청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미국 국민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 원주민까지 천연두로부터 예방하고자 했던 제퍼슨의 노력을 짐작할 수 있다.
제퍼슨은 국민의 자유를 지키는 게 연방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강력한 중앙정부보다 지방정부를 선호했고, 상공업보다 농업이 신생 국가의 경제 근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점에서 제퍼슨은 반연방주의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그는 미국 전역에서 창궐하는 천연두를 효과적으로 예방해서 국민들의 자유를 지키려고 했다.
콜레라
도시는 고대부터 존재했다. 역사학자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농경이 시작된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초기 도시가 등장했다고 판단한다. 고대 그리스는 도시국가 형태로 발전, 로마 역시 도시에서 시작해 제국으로 발전했다. 중세엔 교역과 상업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산업혁명 이후의 도시는 자원이 풍부한 지역 중심으로 발전했다.
당시 도로와 인접한 토지는 가격이 비쌌다. 주택 건설업자는 적은 비용으로 도로 인접면엔 좁은 건물들을 빽빽하게 건설했다. 이렇게 지어진 집들은 대부분 빛이 제대로 들지 않았고 공기도 탁했다. 습기 또한 많이 차서 사람들이 살기엔 최악의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공장에서 일하는 임시직 노동자들은 일당을 벌기 위해 공장 근처에서 거주해야만 했다.
낮의 도시는 분주한 모습이었다. 공장 굴뚝에선 끊임없이 연기를 뿜어냈고, 많은 사람이 기계와 함께 일했다. 하지만 밤의 도시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역한 냄새를 풍기면서 식량조차 구하기 어려운 빈민들이 가득했다. 이들은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다. 이처럼 도시는 이중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런던에선 공장의 엄청난 폐수가 모두 템즈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주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오염된 하수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이같은 주거 환경은 치명적인 유행성 전염병이 발생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사진, 콜레라)
미국에서 콜레라가 처음 발생한 건 1832년 여름이다. 유행성 전염병이 처음 발생한 지역은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 뉴욕이었는데, 당시 건강한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콜레라로 인한 사망률은 50% 이상이었다. 그러나 19세기의 의학 수준으로는 콜레라의 발생 원인을 밝히기가 어려웠다.
18세기 말 미국 사회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던 황열병이 발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콜레라 발생을 둘러싸고 크게 두 가지 의견이 대립했다. 한 가지는 오염된 공기 때문에 전염병이 발생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사람 또는 물건을 매개로 전염병이 확산된다는 것이었다.
높은 사망률에도 불구하고 콜레라 발병의 원인조차 몰랐으니 환자들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기엔 역불급이었다. 일부 의사는 사혈(피빼기)을 시행했는데, 체내의 나쁜 피를 뽑아내어 긴급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뉴욕 시민들의 불안감과 공포는 눈덩이처럼 커져 나갔다.
이에 대해 많은 종교인들은 미국 사회의 부도덕 때문에 유행성 콜레라가 발생했다고 믿었다.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던 뉴욕 시민들은 물질과 향락에 빠져 절제와 금욕을 중시하는 청교도주의는 작동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덕적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신이 부도덕한 인간에게 내리는 벌”이라는 ‘신앙대각성 운동’을 초래했다. 이후 금주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인플루엔자
1918년 3월 미국 캔자스주에 위치한 펀스턴 병영兵營에서 계절성 독감과 유사한 전염병이 발생했다. 당시 많은 병사가 38℃ 이상의 고열, 통증, 무기력함 등을 호소했다. 다수의 병사는 2~3일 정도 앓다가 회복했기에 당시 병영에서 이 질병을 ‘삼일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전염병에 걸린 병사 가운데 폐렴 환자가 발생하고 사망자 수가 급증하면서 전염병의 치명성은 심각해졌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18년 3월 한 달 동안 펀스턴 병영 내에서 발생한 폐렴 환자 가운데 약 20%가 사망했다. 그런데, 여름이 되자 갑자기 인플루엔자는 사라졌다. 이후 가을에 다시 발생했다.
(사진, 뭉크 그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윌슨은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독일의 루시타니아호 습격으로 미국 내 반 독일 감정이 확산되고, 멕시코와 미국의 전쟁을 초래하려는 침머만 전보가 폭로되면서 1917년 4월 6일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재선을 위한 선거 유세에선 전쟁에 참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취임 한 달 후 모든 상황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1918년 인플루엔자가 발생했을 때 윌슨에게 전염병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1918년 인플루엔자에 걸렸는데 완치되었기에 심각한 질병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에게 치명적인 유행성 전염병보다 중요한 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구상한 세계 평화안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민족자결주의’였다. 하지만 그는 인종차별적이었기에 정의와 평등을 구현하는 리더십은 부족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소아마비
인류사에서 소아마비의 기원은 고대 이집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7년에 영국 곡학자 플린더스 페트리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데샤셰흐애서 발굴 작업을 했다. 여기서 기원전 370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들과 유물을 발견했는데 한 노인의 미라와 지팡이에 주목했다. 발굴팀은 미라의 왼쪽 대퇴골이 우측에 비해 8센티미터 짧다는 사실을 밝혀, 이를 소아마비의 증거로 받아들였다.
1940년대 이후 미국 전역에서 소아마비는 더욱 빈번하게 발생했다. 1949년에 미국 내 소아마비 발생 사례는 무려 4만 건 이상이었고, 사망자 수는 2,700명 이상이었다. 이 시기의 소아마비가 다른 시기보다 유독 치명적이었던 이유는 소아마비 발생 연령이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20세기 이전에 소아마비 감염은 대부분 생후 6개월~4세 사이의 아이들에게서 발생했다. 이 시기 소아마비에 걸린 아이들은 경미한 증상을 겪고 면역력을 가지게 되었다.
20세기 중반에 미국 사회의 소아마비를 통제하는 데 백신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소아마비 퇴치를 위한 미국 사회의 관심을 재고하는 데 누구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은 루즈벨트다. 치명적인 전염병을 통제하고 예방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 백신 개발로 이어진 것이다.
(사진, 크리스티나의 세계)
루즈벨트는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누구보다도 대중을 설득하고 소통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대중의 동의를 끌어내는 게 대공황이나 제2차 세계대전, 치명적인 소아마비라는 미국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고 효과적인 정책을 수행하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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