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평범한 이름이라도 - 나의 생존과 운명, 배움에 관한 기록
임승남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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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부딪고 깨어지는 누군가의 희생이나 용기가 있어야 한다. 남의 아픔을 보고 펑펑 울어도 보는 삶, 머리로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몸 깊숙한 어딘가에서부터 뻗어 나오는 절실함이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책은 주인공인 임승남의 삶을 소개하는 에세이다. 그는 전쟁고아 출신으로 자신의 이름과 나이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남대문 지하도에서 앵벌이, 절도 등으로 사회의 어두움 속에서 지내면서 소년원과 교도소를 들락거린 전과 7범이었다.


임승남이라는 이름은 삐뚤빼뚤한 선과 도형으로 시작되었다.(59쪽)


어느 날 공부를 한번 해볼까란 생각이 들어 연필을 깎아 ‘임승남’ 석 자를 제대로 써보고 싶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어려움에 봉착했다. 연필을 깎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깎은 연필로 ‘임’자를 쓰려 하자 연필심이 부러졌다. 재차 연필을 깎아 쓰면 또 부러지고 이러길 여러 차례 반복하자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꾹꾹 참아냈다. 교도소에서 아래와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손에 힘을 주자 말자.

종이와 친해지자.

연필과도 친해지자.


햇빛도 잘 들지 않는 담장 모서리에 피어 있는 국화꽃 한 송이가 보였다.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음지에서 꽃망울 하나라도 피워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교도소에 있는 자신의 처지와 같다고 느껴졌다. 어쩌면 꽃 한 송이 피어보지도 못하고 애만 쓰다가 끝날지도 모르는 처지이기에.


1976년 8월 8일 대전교도소를 출소한 후, 사회에서 제일 처음 한 일이 바로 막노동이었다. 당시 친구들이 살고 있는 성북동 산동네의 방에 얹혀 지내면서 그들과 함께 신길동 개천 콘크리트 치는 현장에 작업나갔다. 벽돌과 시멘트, 모래의 무게에 종일 짓눌린 탓에 녹초가 되어 밤새 끙끙대며 잠을 잤다.


“넌 노가다 체질은 아니지. 어떻게 된 놈이 잡일 좀 했다고 밤새 끙끙거리며 앓니? 우리가 너를 잡는 줄 알았다.”(118쪽)


주머니에 돈이 좀 생기자 저자는 교도소에서 알게 되었던 정 형을 만나 오랫만에 회포를 풀었는데, 그는 퇴계로 인근에 위치한 태극출판사를 다니고 있었다. 이후 연락도 하지 않은 채 돼지고기 두 근을 사들고 성남의 형 집에 직접 방문했더니 좀 놀라워 하는 눈치였다. 알고보니 중앙정보부의 감시하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의 소개로 저자는 1976년 11월 초에 신당동에 위치한 태두출판사에 월급 3만 원의 영업 배본사원이 되었다.


이후 정 형이 근무하는 태극출판사 모임에 참석한 일이 계기가 되어 세종문화회관 뒤쪽에 위치한 평민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어 이직하게 되었다. 건국대학교 출신들이 주축인 회사였는데, 민청학련 사건(1974년)으로 구속 후 출감한 이해찬이 회사의 편집부 차장이었다. 나중에 이해찬의 소개로 출판사 과학과인간사의 영업부장으로 옮겼다(1977년 말).


‘서당개 삼년이면 농풍월弄風月’이란 말이 있듯이, 저자도 출판계에 종사하다 보니 최인호의 <광장>,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 등과 같은 좋은 책들이 눈에 들어오자, 이를 구매해서 읽기 시작했다. 이는 그에게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제 그는 전태일을 만나게 된다. 물론 그날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인물 배포로 10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서울대 철학과 출신 ‘창호’라는 하숙집 메이트를 통해 알게되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 내의 한 다락방에서 재단사 일을 하고 있었는데 열악한 작업 환경을 개선해 보려고 청와대에 탄원서를 보내기까지 했지만 도무지 개선의 여지가 없자 1970년 11월 13일 온몸에 기름을 붓고 화염에 쌓인 채 노동법을 끌어안고 분실자살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사망한 지 몇 개월 지난 시점임에도 사회는 격변의 혼란기에 빠져 있었다. 1980년 1월 말, 몸 담았던 출판사 과학과인간사를 퇴직한 처지인 저자는 공장에 취업하려고 돌베개 출판사로 이해찬(하숙집에서 10개월 간 같은방에서 생활했음)을 찾아갔다. 그랬더니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양 공장은 나중에 가고, 우선 출판사가 위기라며 자기부터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저자는 돌베개 출판사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독재자의 사망으로 서울의 봄이 찾아오나 했더니 김대중 내란죄가 불거지면서 이와 가까이 한 이해찬(서울대 복학생협의회 회장)은 대학생들의 데모를 주동한 우두머리로 신문에 대서특필되어 있었다. 이튿날 저자(당시 돌베개 부장으로 재직중)는 치안본부로부터 호출되었다. 이해찬 체포를 위해 은신처를 캘 목적이었다.


이후 재정난에 빠진 돌베개를 1981년 가을에 매각하려할 때 저자는 사무실 보증금 100만 원과 백색전화를 넘기는 조건으로 출판사를 인수했다. 어렵게 출판사를 꾸려가던 중 전태일과 관련된 원고를 읽고서 1983년 6월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부제, 전태일 평전)을 출간해 전국 서점에 배포했다.


그러나, 운동권의 시위주도와 친북 행적 작가와 종교인들로 인해 출판사엔 가히 폭탄급 조사들이 들이 닥쳤다. 이들 인사들과 가까이 지냈던 저자에게도 어두운 그림지가 드리웠던 것이다. 결국 그도 체포를 벗어날 길이 없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법정에 섰다. 1989년 8월3일에 진행되었던 법정에서의 최후진술의 한 부분을 소개하면서 서평을 마치려 한다.


‘저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깨닫고, 어둠 속에서 잠깐 빛났다가 사라지는 반딧불처럼 사회에 작은 보탬이나마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최후진술을 마치겠습니다.’


책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사진, 뒷표지)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무상으로 제공받은 도서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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