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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ㅣ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김상근 지음, 김도근 사진 / 시공사 / 2023년 7월
평점 :
지난 2,800년 동안 시칠리아 사람들은 한 번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거나 독자적인 문명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들 눈에 보이는 모든 과거의 기념비들은 그들의 땅에 침입했던 외부의 점령자들이 남긴 것이다. - ‘들어가며’ 중에서
한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제주도와 비교되는 장화 모양을 한 이탈리아 반도 밑에 있는 시칠리아섬은 실상 제주도보다 무려 14배나 큰 면적을 가진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이다. 또 지난 역사를 볼 때 지중해의 해상권을 놓고 로마와 일대 결전을 벌였던 한니발 장군의 카르타고처럼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진출했던 세력들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중간 교두보이기도 했다.
기원전 800년경, 시칠리아에서 처음 식민지를 개척했던 페니키아인들부터 그리스, 로마, 반달 왕국, 동고트 왕국, 비잔틴 제국, 사라센 제국, 노르만 왕조, 독일 호엔슈타우펜 왕가, 프랑스 카페 왕조, 스페인 아라곤 왕조, 북이탈리아 사보이아 왕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 스페인 부르봉 왕조 등이 차례로 시칠리아를 수탈했다. 구한말과 대한제국이 35년 간 일제日帝의 강압을 받은 것과는 도저히 비교가 되질 않는 정말 안타까운 역사를 지닌 셈이다.
책의 저자 김상근 교수는 인문학의 대중화에 힘써 EBS <인문학 특강>과 <세계테마기행>, JTBC <차이나는 클라스> 등에 출연, 많은 관중들의 찬사를 이끌어낸 강연을 펼치기도 했다. 이 책은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시리즈의 네 번째 도서로 총 13장으로 구성되어 ‘시칠리아’를 주제로 다룬다.
곡물창고이자 아프리카와 유럽을 잇는 교두보 역할을 한 시칠리아섬은 2800년 동안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수탈에 시달린 다사다난한 역사를 지녔다.
잔인한 참주의 공포 정치
‘참주’僭主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비합법적으로 독재권을 확립한 지배자를 일컫는 말이다. 시칠리아는 그리스인들의 도래와 함께 문명의 혜택을 처음으로 누렸지만 동시에 섬의 원주민들은 어리석은 참주의 고통스러운 정치에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위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시칠리아 동부 시라쿠사까지 직선거리로는 약 750킬로미터이다.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거리와 시간은 더욱 짧아질 것이다. 이 섬에 처음 정착한 그리스인은 테오클레스로 기원전 8세기 후반 때였다.
유럽 최초로 한 차원 높은 문명을 탄생시킨 그리스는 협소한 경작지로 인한 식량난 때문에 늘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지중해의 거대한 ‘곡물 창고’였던 시칠리아에 주목, 그리스의 폴리스 국가별로 선단을 꾸려 이 섬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한편, 타고난 이야기꾼인 그리스인들은 시칠리아를 ‘신화의 섬’으로 만들었다. 이는 그리스 본토의 신화를 시칠리아와 연결하는 작업으로 원주민들을 포섭하려는 일종의 문화 침투 현상으로 해석된다.
시칠리아 동쪽에 거주하면서 최초로 철기 문명을 들여온 시켈로이족이 지리적으로 그리스와 가장 가까웠던 탓에 그리스인들은 이들을 시칠리아 원주민으로 이해했다. 아무튼 시켈로이를 비롯한 원주민들은 그리스인이 만든 신화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어리석은 참주의 고통스런 통치를 수용해야만 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리스인 테오클레스는 항해에 앞서 부정한 재물을 포세이돈에게 바쳤고, 이에 화가 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테오클레스가 탄 배를 침몰시키자 부서진 갑판 조각에 의지해 시칠리아 동부 해인 낙소스에 표류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기원전 735년 낙소스에 첫 그리스 이주민이 정착한 이래, ‘신전들의 계곡’으로 유명한 아그리젠토의 팔라리스(기원전 570~554년 재위)부터 참주 정치의 서막이 올랐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확대코자 공포 정치를 펼쳤다. 자신의 정적政敵을 산 채로 잡아 청동제 황소 틀 안에 집어넣고 장작불을 피웠다고 한다.
팔라리스의 폭정
이후 시라쿠사의 참주 겔론(기원전 485~478년), 형 겔론의 후계자인 히에론1세(기원전 478~466년), 디오니시우스 1세(기원전 405~367년), 디오니시우스 2세(기원전 367~343년), 티몰레온(기원전 344~337년), 아가토클레스(기원전 317~289년), 그리고 에피루스의 피로스(기원전 287~275년) 등이 차례로 등장해 시칠리아에 기나긴 고통의 세월을 안겨주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아가토클레스조차 시칠리아 사람들에게는 잔혹한 참주였을 뿐이었다. 왜 마키아벨리가 이런 참주를 높이 평가했을까? 마키아벨리는 악행은 저지르지 말아야 하지만 피치 못할 경우엔 ‘단숨에 끝장을 봐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시칠리아섬을 통치하던 대부분의 참주들은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카르타고로부터 큰 군사적 압박을 받았지만 이제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될 신흥 세력 로마가 부상하고 있었다. 이후 시칠리아는 그리스의 식민지에서 로마 공화정의 최초 속주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시칠리아는 로마 공화국의 곡물 창고이며, 로마인을 위한 유모와 같은 땅이다.” - 키케로
사라센의 시칠리아 통치(902~1072년)
영원히 지속될 듯했던 로마 제국도 외세의 침입을 견디지 못하고 동과 서로 분열되었다. 서로마의 수도는 여전히 로마였고, 동로마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었다. 455년 반달족이 로마를 함락시키고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에 의해 붕괴(476년)된 후, 시칠리아는 또다시 외세의 빈번한 침략과 수탈에 시달리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북아프리카의 반달족을 복속시킨 후, 혼란기에 슬그머니 로마와 시칠리아를 차지한 동고트족과의 약 1년간의 전쟁을 통해 시칠리아에서 완전히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시칠리아는 이제 비잔틴 문명의 지배하에 놓였다.
비잔틴 황제 콘스탄스 2세(641~668년 재위)는 로마 교황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로 천도한 그는 옛날 가혹했던 그리스 참주 시대를 연상케 했다. 결국 한 신하가 비누 상자로 시라쿠사 궁전의 목욕탕에서 그를 가격해 살해(668년)하고 만다.
이후 시칠리아는 군사 속주로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동로마 제국의 세력 약화로 인해 시칠리아는 지중해의 변방으로 밀려나면서 그 존재감도 약화되었다.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과 중동의 아랍족으로 구성된 사라센 군대는 시라쿠사를 정복(877년)했다.
결국 시칠리아 전체는 사라센의 점령하에 놓여 본격적으로 이슬람 문명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강경한 이슬람의 정복지 정책인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 시칠리아에서 시행되지 않았다. 사라센의 통치 기간 중 성당의 타종, 공공장소 음주, 새 성당 건축 등은 규제되었다. 모스크 옆에서의 소음 금지와 사라센의 집보다 더 높은 건물의 건축도 규제되었다. 사라센 문명 최전성기에 시칠리아 인구는 약 160만 명 정도였다.
팔레르모 왕궁 성당의 천장
사라센은 시칠리아에 독립 건물이나 예술 작품을 남기지 않았다. 중세 때 반 이슬람 운동의 절정이었던 십자군 정서의 유행과 함께 시칠리아에서 170년간 화려한 꽃을 피웠던 이슬람 문명은 종적을 감추게 되었다. 하지만 사라센 문화는 잠복하고 있었다. 이슬람 모스크를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코자 동원됐던 장인과 인부들 중엔 사라센 기술자가 많았다.
프랑스 노르만의 통치(1072~1191년)
지중해의 섬 시칠리아가 지금까지 그리스, 로마, 그리고 사라센 등이 개입한 힘의 각축장이었음을 살펴보았다. 마지막 점령자인 사라센의 내부 분열로 인해 시칠리아에 힘의 공백이 발생하자 제4의 세력이 등장했다. 프랑스 서쪽 해안가 노르망디에 정착했던 덴마크 바이킹의 후손, 노르만족이었다.
십자군의 일원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노르만 기사 40명이 이탈리아반도의 동남쪽 몬테 가르가노의 동굴(대천사 미카엘이 출현한 가장 오래된 순례 성지임)을 참배하고자 방문했다. 당시 이탈리아 남부는 패권을 잡기 위한 군사 충돌이 자주 있었다. 로마 제국을 붕괴시킨 게르만족 후예들(롬바르도족)과 동로마 제국의 비잔틴 세력 간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다. 그런데 기회가 찾아왔다. 양쪽 진영은 모두 노르만 기사를 용병으로 고용하고자 했다.
시칠리아에서 사라센을 추방했던 노르만의 정복 과정은 특유의 인형극으로 발전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사라센은 75년에 걸쳐 시칠리아를 점령했지만(827~902년), 노르만의 로저 1세는 30년 만에 시칠리아를 점령했다. 뒤를 이어 10살에 왕위에 오른 로저 2세는 59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약 50년간 시칠리아를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특히 문화 융합 정책은 팔레르모를 지중해 문명의 중심 도시로 만들었다.
로저 2세의 아들들은 모두 단명했다. 결국 네 번째 아들 윌리엄 1세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지만 그는 게으르고 무능한 왕이었다. 집권 초에 식민지인 북아프리카 땅도 아랍인들에게 빼앗겼고, 아버지 시대에 지중해 교역을 주름잡았던 사라센 상인들도 북아프리카로 속속 귀국해버렸다. 왕위에 오른 지 5년도 지나지 않아 시칠리아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시칠리아 왕위는 윌이엄 2세(1166~1189년 재위)에게로 넘어갔다. 노르만의 문화 융합 정책이 다시 개화했다. 이는 새로운 왕조의 개입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윌리엄 2세는 1189년에 임종했고, 그의 별명은 ‘선한 왕 윌리엄’이었다. 모든 인종과 종교를 존중하고 가문의 문화 융합 정책을 계승했던 그의 통치는 시칠리아 주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노르만 오트빌 가문의 시칠리아 통치가 종결되었다. 1040년 시라쿠사를 점령했던 ‘철권의 윌리엄’을 필두로, 로저 2세가 교황청으로부터 왕위를 인정받았던 1130년을 거쳐, 2명의 로저와 2명의 윌리엄이 통치했던 시대가 마감된 것이다.
몬레알레 대성당
그리스, 로마, 비잔틴, 그리고 사라센이 시칠리아의 농촌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면, 노르만인들은 시칠리아의 도시들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라틴 그리스도교와 비잔틴 정교회, 그리고 이슬람 신앙을 융합했던 노르만의 개방성 덕분에 시칠리아는 지중해의 곡물 창고에서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었다.
시칠리아 여행시 휴대해야 할 도서
한국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로 주목받는 시칠리아는 역사와 문명을 만나는 장소이다.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박물관 같은 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칠리아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시칠리아는 슬픔의 땅이자, 수탈과 압제에 시달린 역사의 현장이다. 시칠리아 여행을 계획한다면 이 책을 미리 읽거나 휴대하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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펍스테이션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