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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별빛처럼 빛난 자들 - 20세기 한국사의 가장자리에 우뚝 선 이름들
강부원 지음 / 믹스커피 / 2022년 11월
평점 :
이 책에 나오는 스물여섯 명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참기 힘든 일을 잘 견뎌내며, 어려운 이웃에게 손 내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의 삶을 살펴봄으로써 20세기 한국 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마련되길 바란다. - ‘들어가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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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고유한 색을 띠며 은은하게 빛난 자들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은 경쟁주의에 매몰되고 황금만능주의로 혼탁했던 20세기 한국을 맑게 정화시켰다. 공의公義로운 이상과 진취적인 사상을 품고 출세와 성공, 부와 명예보다 자유와 해방을 선택했다. 사회, 문화, 예술, 교육 방면에서 활동하며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다양한 감정이 피어오르게 했다. 많은 이가 그들에게 의존했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했다.
책은 ‘스스로 빛난 찬란한 별들’, ‘약자들의 편에 선 친구들’, ‘시련을 견뎌낸 존재들’ 등 총 3부에 걸쳐서 스물여섯 명의 삶을 소개한다. 이들은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라기보다 은은하게 자신을 드러낸 밤하늘의 별빛이다. 그래서 위인전이라기보다 오히려 다정하고 친근한 이웃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조선 최고의 무용수
최승희는 자신이 지닌 재능과 대중이 자신에게 투영하는 기대를 슬기롭게 배분하고 조절할 줄 아는 현명한 예술가였다. 또한 춤을 향한 욕망만은 양보 없이 견실하게 지켜내기 위해 사력을 다한 외골수이기도 했다.
그녀는 대중의 ‘판타지 스타’이기도 했지만, 공교롭게도 한국 현대사의 길목을 통과하며 끊임없이 부침을 겪은 ‘곡진曲盡한 인물’이기도 했다. 각자가 생각하는 최승희의 이미지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또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낙차 큰 삶의 궤적을 보여준 위태로운 예술가의 삶은, 그녀야말로 진정 ‘근대의 여성’ 이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최승희의 삶과 춤은 우리 현대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곡진한 판타지’였다고 말하는 편이 지금으로선 가장 타당해 보인다.
청춘들을 몸살 앓게 만든 시인
기형도가 생을 달리하자 대학 시절 친구들과 신문사 동료들이 힘을 합쳐 그를 기리는 유고시집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완전히 외울 정도가 될 때까지 머릿속에 시를 익혀뒀다가 완성되고 난 뒤에야 노트에 단정한 글씨로 적거나 타자기로 쳐놓았던 덕분에 유작 시를 모으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살아생전 곧 발표할 시집의 작품 배치와 순서까지 설계도로 그려뒀다. 정리벽이 있었던 그의 유품이 수습되자 시집은 수월하게 발표될 수 있었다. 그가 죽은 뒤 발표된 유고시집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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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인의 대명사 ‘윤동주’가 재림했다거나 1960년대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킨 소설가 ‘김승옥’이 쓴 시가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요절한 젊은 시인의 짧은 생애와 불안한 마음이 기록된 시집 한 권이 1990년대 독자들로 하여금 ‘청춘의 몸살’을 앓게 했다.
항상 신인이고 싶은 45년 차 음악가
김창완은 자신과 산울림을 ‘천재’ 혹은 ‘레전드’로 평가하고 대우하는 것도 내켜 하지 않는다. 자신을 ‘신인新人’처럼 대하는 방송국과 팬이 가장 좋다고 여러 자리에서 말했다. 새롭지 않은 음악이 가장 부끄럽고 남과 비슷하다는 소리가 가장 싫다고 했다.
그는 젊은 후배 가수들이나 심지어 아이유 등 인기 아이돌과의 협업도 즐거워한다. 어린이 드라마 <5학년 3반>의 주제가 <청개구리>를 공연 하이라이트에 꼭 배치하고, 인생의 페이소스가 짙게 묻어나는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의 주제곡도 만들어 불렀던 우리 곁의 아티스트 였다.
한국 야구계의 영원한 불꽃
최동원은 롯데 자이언츠의 에이스로서 삼성 라이온즈와 맞붙은 한국시리즈에서 다섯 경기에 등판해 4승 1패를 기록했다. 삼성은 ‘원투 펀치’ 김일융과 김시진이 번갈아 나오면 되었지만, 롯데는 최동원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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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전 완봉승, 3차전 완투승, 5차전 완투패에 이어 6차전에선 5회부터 구원 등판해 구원승, 그리고 마지막 7차전에서 완투승. 한국시리즈와 같은 단기전에서 한 투수가 다섯 번 출전한 것도 기가 막힌 일인데, 혼자서 4승을 책임지고 우승까지 이뤄낸 것이다. 전무후무한 괴물 투수였다.
노동자들의 예수
가난한 가정 형편 탓에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청년 전태일은 열일곱 살 때 고향 대구를 떠나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점에서 재단 보조로 노동자의 삶을 시작했다. 당시 일당이 50원 정도였는데, 하루 열네 시간 넘도록 일을 하면서 한 달에 딱 두 번 쉬었다.
이후 재단사가 된 그는 2만 3천 원 정도의 월급을 받았지만 함께 일하던 여공들의 노동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네 명이 함께 생활하는 단칸방 하숙비도 월급에서 쪼개 내야 했고, 작업 때 필요한 장갑과 골무 등도 사비로 충당해야만 했다.
긴 노동시간으로 인해 수면이 부족한 상태에서 재봉질을 하다가 졸음을 못 이겨 손가락이 바늘에 찔려 피 흘리는 일이 허다했던 것이다. 실수로 비싼 옷감의 손질을 망치면 변상까지 해야만 했다. 이런 여공들에게 전태일은 늘 붕어방과 풀빵을 사다주었던 이타적인 인간이었다.
이런 열악한 노동 환경을 해결하고자 전태일은 대통령과 서울시장 등에게 노동자 실태를 알려주며 이에 대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편지를 계속 보냈다. 하지만 묵묵무답이었다. 그래서 그는 온건한 방식으론 아무런 해결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투재 방식으로 전환했다.
마침내 1970년 11월 13일에 전태일은 분신을 시도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했으며 반공주의를 제일 중요한 가치로 삼았던 소시민이었기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도 아니며 애초에 과격한 폭력주의자 역시 아니었다.
오랫동안 숱하게 외친 노동자의 권리와 인권 문제에 대해 어느 곳에서도 답을 주지 않았기에 마지막으로 극단적인 충격요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붙이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함께 기울여보자는 답장을 했더라면 그는 결코 분신이라는 과격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최고의 문화재 수집가
훈민정음 본문에 해당하는 세종이 직접 지은 ‘예의例義’는 언해본으로너마 전해졌지만, 집현전 학자들이 집필했다는 ‘해례解例’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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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해례본이 경북 안동의 한 고가古家에서 출현했다는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당장 소장자를 찾아 나섰다. 전형필이 해례본을 원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조선 최고의 갑부가 찾는다니 값은 천정부지로 오를 수밖에 없었다.
전형필의 배포와 품성은 여기서 드러난다. 해례본을 손에 넣을 때, 거간 노릇을 한 사람이 애초에 부른 값 1천 원(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은 수고비로 따로 떼어주고 원주인에게 그의 열 배에 해당하는 1만 원을 값으로 치렀다.
이렇게 값을 치뤘던 이유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였기 때문이다. 이는 가치 있는 물건은 반드시 자신이 매긴 값을 주고 산다는 전형필의 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