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이야기 2 -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 일본인 이야기 2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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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 일본에서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사람은 농민입니다. 그렇기에 에도 시대 일본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이들 농민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일생의 사이클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2권에서는 역사인구학과 고문서학의 성과를 이용해서 농만이 주인공인 글을 쓰려 했습니다. - '들어가며' 중에서 



과연 에도 시대는 일본의 진보기였던가?


책의 저자 김시덕은 1975년 서울 출생으로, 고려대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의 국문학 연구자료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HK 교수로 재직 중이다. 16~20세기 동부 유라시아 지역의 전쟁사가 주 연구 분야로, 특히 임진왜란을 조선.명.일본 간 국제 전쟁으로 바라보는 작업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고문헌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에 근거해 전쟁이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력을 살피고 역사의 흐름을 추적해왔다.


그는 이책에서 피지배계급이자 경제적 약자인 에도 시대의 농민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병으로 아팠을 때 어떻게 병을 치유했는지, 과거 제도가 없던 시절에 어떻게 입신양명의 길을 찾앗는지를 다루고 잇다. 한편, 이 책의 부제는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로 명명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네델란드에서 건너온 '난의학蘭醫學'이 에도 시대의 일본 의학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않다. 물론 에도 시대 일본인이 지적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의료상에서는 효과가 제한적이었다. 센고쿠 시대戰國時代(15세기 중반~16세기 후반)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와 베풀었던 의료 활동과 비교한다면 난의학은 오히려 퇴보였다는 지적이다.


 



에도 시대 일본을 조선과 비교하면서 일본이 난학을 통해 조선보다 빠르게 근대화되었다며 높이 평가하는 한국 내의 일부 경향이 있다. 당연히 일본 안에도 있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처럼 유럽의 식민지가 되거나 조선과 대청제국처럼 유럽발發의 정보에 둔감하지 않았고, 난학을 통해 유럽과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던 에도 시대 일본은 이미 그때부터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우월했다는 논리이다. 이런 우월함이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이어져서 일본은 비유럽 국가들 중 유일하게 열강列强이 되었다는 주장이 이에 뒤따른다.


난의학도 마찬가지다. 해부학 서적을 번역해서 새로운 세계관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해부와 외과 수술이 활발해질 수는 없다. 즉, 추상적 차원에서는 대항해 시대부터 시작된 중화 중심적 세계관에서의 탈피를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만인에게 큰 혜택을 주기에는 물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해부와 외과 수술에는 해부 기술과 도구, 약품 등이 필요하다. 데지마에는 네덜란드인 의사가 있어서 외과 수술을 집도했고 일부 일본인 통역관에게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지만, 이는 체계적인 의학 수업과는 거리가 멀었고, 데지마에 드나들 수 있는 일본인의 인원수에도 제한이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


사실 이 시기는 쇄국정치를 시행함으로써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 여러 면에서 퇴보기였는데, 17~18세기에 걸쳐 약 2백년 간 이어졌으며 네델란드가 전해주는 부분적인 정보에만 의존했다. 18세기 말, 러시아가 구릴 열도와 홋카이도에서 일본과 접촉하면서 비로소 일본은 유럽 세계의 정보를 검증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등과 접촉할 수 있게 되면서 네델란드 독주가 마감되었다.


난학 성취의 과대평가


너무나도 좁은 세계관을 견지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서 일본은 서방 선진국 대열과 같은 위치에 오르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 한마디로 퇴보의 시대였다. 중화 사상에 빠져 이를 견지하고 있는 중국의 세계관이 글로벌 세계관이 되지 못한 이유와 유사하다. 어쩌면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결코 글로벌 세계관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피지배민들의 생존권


에도 시대의 지배층은 피지배민들이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래서 원양 항해용 선박의 제작도 금지되었다. 피지배민들은 일방적으로 착취당했던 것이다. 지배집단 내부에 회자되던 말이 "농민과 참기름은 짜면 짤수록 더 나온다"였다. 이들이 피지배민을 얼마나 수탈했는지를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너무 배부르면 농사일을 싫어하게 되고, 농업이 아닌 다른 직업을 택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곤궁해지면 흩어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님께서는 향촌의 농민들이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도록 주의해서 쌀을 잘 바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다" - '승평야화昇平夜話' 중에서    


무사 집단은 거칠 것 없이 수탈을 시작했다. 이들의 수탈은 주로 농촌으로 향했다. 자신들의 정치적 거점인 3대 도시 에도, 오사, 교토나 각 번의 중심 도시에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책을 펼쳤고, 기근 때도 도시민이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정책을 베풀었다. 반면, 쌀을 생산하는 농민들은 평상시에도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만을 남기고 모두 세금으로 바쳐야 했기에 쌀을 비축해둘 여유가 많지 않았다. 


일본의 에도 시대 미화


일본은 앞서 언급한 3대 도시의 경제적 융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런 경향이 수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에도 시대가 결코 장밋빛으로 물든 그런 사회가 아니라 소도시와 농촌에서 무자비한 착취가 자행되었기에 이같은 어두움에서 벗어나고자 피지배민들은 처절한 노력을 했던 그런 사회였던 것이다.


소위 지식인들은 일본에 수입된 네델란드 책자와 약품 등을 이용해 많은 사람들의 건강을 지켜주려고 노력했다고 보여진다. 1774년에 출판된 <해체신서>는 유럽 해부학 도서 중 최초로 일본말로 번역되었다. 이에 따라 에도 시대 일본인들은 한의학 이외에 유럽 의학을 세로운 선택지로 고려할 수 있게 되었던 셈이다.


과거 백수십 년 동안 일본과 서구권의 학자들은 <해체신서>의 번역 출판과 지볼트의 활동에서 난학이 탄생했고, 난학으로부터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간주해왔다. 난학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한국에도 소개되어, 일본이 한반도나 중화권보다 앞서 근대화에 성공하고 제국주의 열강이 되었다는 주장이었다.




난학의 핵심은 병의 치유이자 한계 


그렇다. 난의학의 중요성을 부정해선 안 되겠지만 사실 일본이 처음 접한 유럽 지식은 네덜란드가 아니라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통해 유입됐다. 이 국가들과 일본의 국교가 단절된 뒤, 신규로 소개된 난의학은 기존의 한의학을 배척하거나 소멸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한의학과 공존했다. 


한편, 네델란드뿐 아니라 러시아도 에도 시대 일본에 큰 영향을 준 유럽 국가였다. 난학만을 절대시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전체적 맥락 속에 네덜란드와 난학을 놓고 그 가능성과 한계를 두루 고찰함으로써 에도 시대와 그 후의 일본 사회에 미친 난학의 진정한 영향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본 서평은 네이버 부흥 카페 서평 이벤트에 응하여 작성되었습니다"

(https://cafe.naver.com/booheong/198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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