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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1 - 중국사의 시작
이희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5월
평점 :
<사기>는 낱낱의 사건과 개개인의 드라마를 마치 유능한 극작가가 짜고 얽어서 흥미롭게 구성한 서사극 같았다. 인간사가 생생하게 그려지는 미시사이면서 고대 중국 3,000년의 거대 역사였다. (중략) 나는 저마다 인물들의 매력에 취해 한참을 몰입하는가 하면, 해를 거듭하는 동안 건강의 한계와도 싸웠다. 때로 궁형을 당한 채 죽간을 채워 나갔던 사마천을 떠올렸다. 사마천의 고역에 천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가 그린 인물들을 끌어내 오늘의 세상과 대면하게 하는 현재형 <사기>를 그리는 일에 내 60대를 쏟아부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만화로 만나는 중국 역사서
책의 저자 이희재는 완도의 신지섬에서 나고 자랐다. 스무 살 무렵에 만화판에 들어와 십여 년의 습작기를 보내다가 1981년에 <명인>과 <억새>를 발표하며 만화가의 문을 열었다. 어린이 만화 <악동이>를 그리고, 산업화 과정의 도시 주변부 사람들의 삶을 <간판스타>에 담아냈다. <한국의 역사>,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저 하늘에도 슬픔이>, <이희재 삼국지> 등을 그렸으며, <나 어릴 적에>로 2000년 대한민국출판만화대상을, <아이코 악동이>로 2008년 부천만화대상을 받았다. 사십 년 넘게 만화 그리는 것을 직으로 삼고 있으며, 현재는 천태만상 인간사가 생동감 있게 드러나는 거대한 서사극 <사기>를 그리는 데 몰두하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는 가장 위대한 역사책, 역사서의 전범, 인간학 교과서, 인물형의 보물창고, 동양의 탈무드, 인류 최고의 인간 드라마 등 수많은 수식어가 뒤따를 정도로 2,000년을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또 읽는 '불후의 명저'이지만 본기, 세가, 열전, 표, 서 등 130책, 5만 6,500여 자의 방대한 기록이기에 누구나 쉽게 읽기는 어렵다.
그래서 저자는 <사기>의 백미인 '열전'을 뼈대로 하되, '본기'와 '세가'로 열전만으로는 놓치기 쉬운 중국사의 맥락을 잡아주면서 만화만의 장점을 살려 인물의 심리와 사건의 전개가 생생하게 펼쳐지도록 그려냄으로써 읽는이의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재미'를 강조하는 만화가답게 역사서에 재미를 더하니 어려운 <사기>를 편하게 접할 수 있다. 이제, 책 속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소개하면서 서평에 갈음하려고 한다.
때를 낚는 강태공
중국 역사의 최악의 폭군 은나라 주왕이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묻혀 오직 애첩 달기의 말에 따르면서 국정의 운영은 뒷전이고 온갖 포악한 일을 자행하던 그 시절, 한 선비는 시절을 뒤로 한 채 좋은 때를 낚으려고 낚시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바로 '강태공' 여상이다. 그는 젊은 시절 웅지를 품고 세상을 떠돌았으니 이젠 나이가 들어 위수 근처에 눌러앉아 낚시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일상을 보내는 남자를 좋아할 아내는 이 세상에 아마도 없을 것이다. 여상의 아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집안의 가장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남자로 인해 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으니 남편이 아니라 아예 원수였던 셈이다. 나이 칠십에 기력이 부족해 이젠 도끼질도 힘에 겨워 낚시에 매달리지만 붕어는 커녕 잡어 송사리 새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왜 그럴까? 그의 낚시 바늘엔 미끼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목적은 고기가 아니라 세월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아내 마씨는 팔자를 고칠 심산으로 여상을 버리고 가출하고 만다.
한편, 서백西伯 창은 폭군 주왕에게 감금당해 죽을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에 그의 아들과 신하들이 구출 작전에 나섰다. 이때 신하 굉요와 산의생이 강태공을 찾아 그의 지혜를 구했다. 이에 여상은 폭군의 환심을 사기 위해 미인계를 사용하라는 계책을 내놓았다. 미녀들과 준마, 금은보화 등으로 주왕의 총기를 홀리고 옥사에서 풀려난 창은 아예 다스리던 서쪽의 기름진 땅마저 바치면서 당시 원성이 자자했던 '포락형'이라는 형벌을 없애달라고 간청했다. 나아가 주왕에게서 벗어난 창은 한층 더 덕정을 펼쳤다. 당시 은나라는 서백 창, 악후, 구후 등 세 명의 제후가 주왕을 떠받들고 있었는데, 악후와 구후는 이미 폭군의 손에 처형당한 상태였다.
이후 창은 사냥길에 나섰다가 위수 강가에서 강태공을 만난다. 이에 귀인임을 직감한 창은 강태공에게 지혜를 구한다. 그러자 강태공은 "녹을 주어 인재를 고르고 벼슬을 내려 나랏일을 맡기는 것은 모두 사람을 낚는 것과 같다" 면서 "좋은 미끼에 큰 고기가 물리는 것은 후한 녹을 주는 것과 같고, 낚은 고기를 요리하는 것은 인재를 쓰는 일과 다르지 않다"라고 말한다. 마침내 창은 여상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고 수레로 모셨다.
태공망太公望, 서백의 창을 돕다
창은 여상을 태공망이라 불렀다. 창의 조상 태공이 주周를 도와 일으킬 사람으로 기다렸다는 의미이다. 후대인들은 태공망을 낚시꾼 '강태공'이라 불렀다. 서백의 창은 태공망을 군사軍師로 삼아 나라의 세력을 넓혀 나갔다. 서백 창의 인덕에다 태공망의 병법(육도)에 힘입어 주나라는 주변의 병합하면서 점점 더 강국이 되어 갔다. 반면, 주왕의 포악한 통치는 악명을 더욱 떨치고 잇었다.
서백 창이 죽자 그 뒤를 아들 무왕(발)이 이어받아 때를 엿보고 있었다. 갈수록 폭정을 일삼는 주왕을 보다 참지 못한 은나라의 현인 비간比干이 나서서 "백성이 굶주리는데 주지육림에서 남녀가 벌거벗고 뒹굴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라입니까?"라며 나무라자 애첩 달기는 성인聖人의 심장엔 구멍이 일곱 개라는데 확인해 달라고 주왕을 유혹한다. 이에 주왕은 숙부인 비간을 참하는 불륜을 저지른다. 이 일로 인해 마침내 무왕은 군사를 일으켜 혁명을 도모하고 새로운 왕조를 연다. 논공행상이 이루어지고 태공망은 산동의 제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태공망이 제후가 되어 봉지로 가던 중 위수 강가에서 한 노파를 맞닥뜨리게 된다. 막무가내로 금의환향하는 태공망을 만나야 한다는 노파는 바로 강태공 시절 그를 버리고 가출해버린 그의 아내 마씨였다. 옛정을 생각해서 다시 자신을 거두어 달라는 청에 태공망은 물 한 바가지를 주면서 마씨에게 바닥에 쏟아 보라고 한다. 그러고는 그 물을 다시 주워서 바가지에 담는다면 함께 동행하겠다는 이루어질 수 없는 문제를 낸다. 사람 팔자, 정말 오리무중인 셈이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듯
한 번 끊어진 인연이 다시 이어질 수 있겠소?"
만화로 <사기>를 만난다
이 책은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중국역사의 시작을 보여준다. 태평성대의 요순시대, 물을 다스린治水 하나라 우왕, 희대의 폭군 은나라 주왕, 좋은 때를 기다린 강태공, 새로운 왕조를 연 주나라 무왕, 충신 스토리 백이와 숙제, 관포지교의 주인공 관중과 포숙, 제나라의 명재상 안영(안자) 등의 순으로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펼친다. 방대한 사마천의 <사기>를 전체 7권의 만화로 압축하여 소개한다니 벌써부터 제2권이 기다려진다. 쉽게 <사기>를 읽고 싶은 모든 분들에게 이 만화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