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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세계사 1 - 고대편
이세환 지음, 정기문 감수 / 일라시온 / 2020년 4월
평점 :
처음에는 무기에 대한 이야기만 하려 했었다. 하지만 무기는 결국 전쟁에 쓰이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 전쟁의 배경은 무엇인지에 대한 얘기가 반드시 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느껴졌다. 시작은 무기의 역사였지만 쓰다보니 어떤 전쟁에 어떤 무기가 어떻게 쓰였는지, 그리고 전쟁은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포괄적으로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무기를 통해 전쟁이 보이고, 전쟁을 통해 역사가 보이는 책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 '머리말' 중에서
전쟁에는 반드시 무기가 등장한다
책의 저자 이세환은 윈체스터와 콜트 싱글 액션 아미 등 클래식 총기를 사랑하는 밀리터리 콘텐츠 전문가로, 총알이 발사되는 순간의 느낌을 너무 좋아하며, 지금도 없는 시간 쪼개서 총을 쏘기 위해 미국의 실탄 사격장까지 날아가곤 한다. 인하대 토목공학과 대학원에서 아슬아슬한 성적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2007년부터 <월간군사세계>의 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6년부터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사〉에 출연하여 '샤를 세환'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고대에서 현대까지 수많은 전쟁에 쓰인 다양한 무기와 방어구를 소개하는 '이세환의 무기고' 코너를 맡고 있다. 밀리터리 영화광이기도 하여 국방TV 〈순삭밀톡〉 '시네마 웨폰', '리얼 웨폰' 코너에서 영화나 드라마 속의 밀리터리를 심도 깊게 분석, 비평하고 현실세계의 밀리터리를 재미있게 해설해주고 있다. 유튜브 〈레드 피그 아카데미〉와 〈샤를 TV〉, 한국콘텐츠진흥원, 군사교육기관 등에서 밀리터리를 주제로 한 방송과 강의도 하는 등, 알고 보면 재미있는 밀리터리 콘텐츠를 대중에게 쉽고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애쓰고 있다.
유튜브 누적 조회수 8,860만회 이상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화제의 프로그램 <토크멘터리 전쟁사> 콘텐츠를 책으로 재구성했다. 이 책은 전쟁과 역사를 맛깔나게 버무려 들려주는 [토.전.사] 콘텐츠를 탄탄하게 깔고, 거기에 밀리터리 전문가인 저자의 필살기인 '무기와 방어구' 이야기를 더해 색다른 독서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전쟁사 책이다. [토.전.사]에서 해학적인 입담으로 '샤를 세환'이라는 별명을 얻은 저자의 '무기'에 대한 내공과 특유의 입담이 더해져 전쟁 이야기가 마치 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게 읽힌다.
전쟁과 무기를 다루는 역사책인 만큼 알키비아데스, 알렉산드로스, 한니발, 카이사르, 진시황, 한무제, 유비·관우·장비, 그리고 연개소문까지, 동서양을 대표하는 영웅들도 한자리에 모였다. '영웅전 종합 선물 세트'인 셈인데,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드라마틱한 죽음, 전장에서의 눈부신 활약상을 스케치하듯 훑어가면서 전투 장면들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묘사해준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그리스는 제국의 영화를 구가하는 페르시아에 비하면 조그만 시골의 '촌놈'에 불과했다. 오늘날의 이란, 아프카니스탄, 타지키스탄의 시조인 페르시아는 최초로 오리엔트 문명권을 통일한 대제국으로 2세기가 넘는 비교적 긴 기간(기원전 559년~기원전 330년) 동안 존속했다. 최전성기엔 중동, 터키,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인도 인더스강 유역, 중앙아시아, 발칸반도 일대에 걸친 광활한 영토를 가졌던 강대국이다.
그렇다면 왜 페르시아가 한 줌의 모래도 안되는 그리스 땅을 침범했을까? 한 마디로 말해 변방의 북소리가 황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즉 페르시아의 북서부 지방 최대 도시인 사르디스에 밀레투스 반란군이 침범해 페르시아 신전을 방화하는 참사극을 연출했던 것이다. 당시 그리스는 작은 도시국가들의 연맹체였는데, 밀레투스는 이오니아 지방에 위치, 반페르시아 봉기를 일으켰다.
밀레투스 참주의 거짓말도 한 몫을 했다. 당시 주식 원재료인 밀의 수입에 어려움을 겪던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존재가 야속했는데, 왜냐하면 이오니아 지방을 페르시아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밀레투스에서 쉽게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챙길 수 있다고 유혹하자, 바로 아테네는 반란군에 아낌없는 지원을 했던 것이다. 고대의 역사를 보면 신전은 '성스러운 장소'로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밀레투스 반란군은 신전을 불태웠으니 페르시아의 입장에선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커다란 자극이었으며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기다.
"패닉에 빠지지 마라. 내게 계획이 있다.
내 말대로 하면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아테네도 지킬 수 있다."
이는 전투에 앞서 밀티아데스가 병사들에게 한 말이다. 지휘관의 이런 자신에 찬 태도는 아테네 병사들의 믿음과 복종을 만들어낸다. 마침내 아테네 중장보병들은 진형을 갖추고 언덕 위에서부터 페르시아군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군이 활의 사정거리 안쪽으로 들어오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아테네군이 활을 잘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군은 활로 충분히 아테네군을 저지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윽고 양군의 거리가 200미터 이내로 좁혀지자 페르시아군은 슬슬 화살을 발사할 준비를 했다. 고슴도치로 만들겠다고 페르시아 궁수들은 활시위를 당겼다. 그 순간, 전혀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밀티아데스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전군! 적을 향해 전속력으로 뛴다!"
밀티아데스가 뛰어 나갔다. 이에 모든 아테네 중장보병들도 전속력으로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페르시아군은 당황했다. 예상에 없는 각본이었기 때문이다. 주춤하는 사이 아테네군과 페르시아군의 간격은 급격히 좁혀졌고, 페르시아군이 황급히 날린 화살들은 아테네군의 머리 위로 날아가버려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우리들 예상 그대로다. 처절한 근접백병전으로 돌변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청동 방어구 착용과 대형 방패 등으로 중무장한 아테네군을 고작 칼과 창으로 무장한 페르시아군이 결코 이길 수 없었다. 이렇게 그리스 전쟁사의 전설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고구려-수나라 전쟁
중국 대륙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크고 작은 전쟁들이 있어왔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최초로 등장한 통일 왕조가 바로 진나라이다. 하지만 진나라도 진시황 사후에 급격히 붕괴되고 말았다. 이후 한나라, 위진남북조 시대로 다시 분열되는 모습을 보이다가 수나라가 통일 제국의 면모를 이룩했지만 나라의 역사는 38년으로 비교적 단명이었다. 멸망의 가장 큰 이유는 2차례에 걸친 고구려 원정 전쟁의 참패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중국 역사교과서엔 이런 설명이 전혀 없고 내부 폭정에 따른 멸망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100만 수나라 대군은 고구려군에 몰살당하다"
중국은 자신들을 둘러싼 다른 나라들을 오랑캐로 불렀다. 이른바 '5호胡'(흉노, 갈, 선비, 저, 강족)로 구분된 세력 중 가장 신경을 쓴 지역이 바로 만주 땅이었다. 그들은 만주에 통일왕국이 건립되면 반드시 자기네 땅을 침략할 것으로 예단했기 때문이다. 중국이 이렇게 생각한 이유를 저자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중앙 아시아의 몽골 유목민족들은 와서 털지언정 정착을 잘 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서융의 티베트와 돌궐은 중국과 기후가 크게 달랐고, 남만은 정글이어서 이들 역시 중국 내부에 들어와 적은하며 살기를 원치 않았다. 그에 반해, 만주족 가운데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이 중국 내부로 들어온다면 눌러앉을 가능성이 컸다"
특히, 만주는 세계 4대 곡창지 중 하나인 만주평야가 있다. 그리고 중국 최대의 철광 산지이기도 하다. 고구려가 철 생산량이 풍부했던 이유도 만주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덕분에 고구려군은 철제무기를 폭넓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중장갑기병이 중국보다 고구려가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서기 581년, 수나라 왕조는 겨우 내전을 수습했다. 이제 막 출범하는 수나라 입장에선 만주 땅을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큰 고민거리였다. 당시 수나라의 위용은 대단했기 때문에 고구려와 매우 가까웠던 돌궐족도 납작 엎드렸고, 심지어 한반도의 신라까지도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만은 뻣뻣했다. 수문제의 눈에는 당연히 '괘씸죄'로 보였으므로 전쟁의 발단이 되고 말았다.
결정적인 이유로는 영양왕 때 오히려 고구려군이 먼저 요서지방을 1만 기마병력으로 침범했던 것이다. 이에 급히 수문제도 전쟁 준비에 돌입, 침략을 강행했지만 요하를 넘지도 못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그의 아들 수양제가 대병력을 이끌고 고구려 땅을 침범했지만, 요동성 함락에 실패하고 을지문덕에 위한 살수대첩으로 수나라군은 대패당하고 말았다.
중국식 전통 무기인 모와 피에서 더욱 진화된 '창'이 수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다. 이후 창은 '모든 병기들의 왕'으로 일컬어지며 전쟁터나 무술세계에서도 군림하게 된다. 창은 19세기 말, 화약무기가 냉병기를 몰아낼 때까지 병기의 왕좌를 지켰다.
수나라는 산성 방어 위주의 고구려군을 공략하기 위해 공성 무기 제작에 아주 심혈을 기울였다. 먼저 높은 고구려 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높이 40미터의 접이식 사다리인 운제를 만들었다. 운제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규모가 훨씬 작았고 화공에 약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수나라는 운제를 대형화하고 겉에 진흙을 발라 화공에도 대비했다.
다음으로 전호피차는 성벽 가까이 접근해서 땅을 팔 수 있도록 만든 장갑무기인데, 성 아래로 터널을 만들어서 몰래 진입하기 위한 공성 무기이다. 전통의 공성 무기인 발석차와 당거도 빠질 수 없다. 발석차와 당거는 로마군의 트리뷰셋 투석기와 램헤드에 해당하는 무기였다. 수나라군이 사용한 발석차의 사거리는 약 80미터였다.
수나라군은 고구려 성벽 앞에 아예 대규모 진지공사를 해서 성벽과 같은 높이의 고정식 공성탑을 만들어 사용했다. 당시 수나라는 운하를 팔 정도로 매우 앞선 토목공사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기술력을 십분 활용한 공성법이 당연히 존재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역시 중국판 헬레폴리스인 8륜 누차를 사용했다. 한마디로 수나라는 고구려를 공략하기 위해 공성 무기 종합 세트를 완벽하게 갖춰놓고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성은 결코 공략이 쉽지 않았다. 성엔 요철 모양의 '치'라고 하는 돌출 구조물이 설치되어 잇어서 수나라군을 향해 세 방향으로 공격가능했다. 방어에 특화된 설계였던 셈이다.
"전쟁의 승리엔 남다른 전쟁 무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