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기억을 지워 드립니다 - 기시미 이치로의 방구석 1열 인생 상담
기시미 이치로 지음, 이환미 옮김 / 부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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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철학자열아홉 편의 한국 영화 주인공들이 나눈 대화를 엮었습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인생의 문제는 다방면에 걸쳐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자가 대화를 풀어 나갈 때의 방식은 명확합니다. 먼저 철학자는 고통을 외면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같은 말을 건네지 않으며, 또한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고 과거에 초점을 맞추지도 않습니다. 가령 지금 직면한 문제의 원인이 과거에 있다고 해도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이상 그 원인을 과거에서 찾아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들어가며' 중에서

 

 

고된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책의 저자 기시미 이치로철학자. 1956년 교토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교토에 살고 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철학에 뜻을 두었고, 대학교 진학 후에는 문턱이 닳도록 은사의 자택에 드나들며 논쟁을 벌였다. 교토대학교 대학원 문학연구과 박사과정 만기퇴학을 했다. 전공은 철학, 그중에서도 서양 고대철학, 플라톤 철학인데 그와 병행해 1989년부터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했다.

 

아들러 심리학과 고대철학에 관해 왕성하게 집필 및 강연 활동을 펼쳤고, 정신과에서 수많은 '청년'을 상대로 카운슬링을 했다. 일본 아들러 심리학회가 인정한 카운슬러이자 고문이다. 저서로는 베스트셀러인 <미움받을 용기>를 비롯해 <마흔에게>,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엄마가 믿는 만큼 크는 아이>, <늙어갈 용기> 등이 있으며, 다수의 알프레드 아들러의 저서를 번역했다.

 

불교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그 누구도 늙고 병들어 죽어 가는 고통을 피할 수는 없지만, 저자는 산다는 게 원래 괴로운 것이라고, 그것이 인생의 진리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사는 게 원래 힘들다는 말을 건넨들 고민을 상담하러 온 이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고통스러운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토록 고된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과거의 좋지 않았던 일을 머릿속에서 지우는 것은 '가능'하지만, 영화 <맨인블랙〉처럼 장치를 이용하거나 최면을 걸어 '영구히' 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당사자의 기억은 실제로 일어났던 상황의 한 단면인 것이고, 그렇기에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서 나쁜 기억은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바뀔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일과 사랑, 가족과 세상,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 상처받은 23명의 인물이 철학자를 찾아와 자신의 '나쁜 기억'을 털어놓는다. 철학자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일침을 놓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해답을 주며 과거의 기억을 재해석하는데, 이때 명확한 원칙을 가지고 대화를 풀어나간다.

 

 

 

너를 잊지 못하는 이유

 

저자는 영화 <봄날은 간다>의 주인공을 통해 사랑과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영화는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유지태)와 지방 방송국의 라디오 PD인 은수(이영애), 이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은수와 상우는 녹음 여행을 떠나고, 은수의 아파트에서 둘이 함께 밤을 보내며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진다. 쉬운 사랑만큼이나 둘의 사랑은 너무 쉽게 삐거덕거린다. 사랑이 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우는 미련과 집착을 이겨내지 못하고 서울과 강릉을 오간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상우)

"헤어져"(은수)

철학자 : 상우 씨가 그분께 결혼하자고 직접 이야기한 적은 없죠? 그분도 결혼하자고 말한 적이 없고요. 상대에게 말하지 않는 이상 서로 생각이 같을 수는 없어요. 그분은 그저 "나 김치 못 담가"라고 말했을 뿐 상우 씨에게 '결혼하고 싶다' 혹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건 아니잖아요?


상우 : 하지만 제가 김치 담글 줄 아냐고 물었을 때 그 사람이 제게 "그럼"이라고 대답했다는 건, 분명 저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철학자 :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넘겨짚고 있었던 것 같아 답답하네요. 제가 보기에는 한 사람은 결혼을 하고 싶었는데 상대방은 결혼을 망설였던 게 문제였던 것 같아요. 두 사람의 인생 목표가 일치하지 않았던 거죠. 아무리 상대를 사랑하더라도 서로 생각하는 미래가 다르다면 관계를 지속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첫눈 오는 날 그곳에서 만나자

 

영화 <건축학개론>은 스무 살, 건축학과 승민(이제훈)은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난 음대생 서연(수지)에게 반한다. 함께 숙제를 하게 되면서 차츰 마음을 열고 친해지지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툰 순진한 승민은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고백을 마음 속에 품은 채 작은 오해로 인해 서연과 멀어지게 된다.

 

서른 다섯의 건축가가 된 승민(엄태웅) 앞에 15년 만에 불쑥 나타난 서연(한가인)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승민에게 자신을 위한 집을 설계해달라고 한다. 이름을 건 첫 작품으로 서연의 집을 짓게 된 승민은 함께 집을 완성해 가는 동안 어쩌면 사랑이었을지 모를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두 사람 사이에 새로운 감정이 쌓이기 시작한다.

첫사랑은 대개 결혼에까지 이르지 못한다. 이번 생에서 너무 일찍 만났기 때문이다. 설령 서로가 사모하고 사랑하면서 사귈 수 있었다고 해도 학생끼리라면 졸업한 뒤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어디에서 살지 같은 문제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두 사람이 서로 해보고 싶은 일이 너무 동떨어져 있다면, 사귀는 상대를 아무리 좋아한다한들 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여 졸업이나 취업 같은 인생의 전기(轉機)를 맞는 횟수가 많아지면 많을수록 헤어질 확률은 높아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만남의 시기가 늦어졌다 해도 영화 속 인물들처럼, 두 사람이 인생의 전기를 경험하지 않고도 헤어지는 경우는 있다.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는 것만이 이별의 원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로 두 사람의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막 사귀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결코 하지 않았던 싸움을 하게 된다면, 예를 들어 졸업을 계기로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두 사람이 겪은 일 때문도, 두 사람이 미숙했기 때문도 아니다. 좋은 관계를 구축하는 법을 서로가 몰랐기 때문이다.

 

차라리 고아였으면 좋겠어

 

영화 <똥파리>'폭력의 대물림을 끊을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우리들에게 던진다. 자기 내키는 대로 살아 온 용역 깡패 상훈(양익준)은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아세상 무서울 것 없어 보이지만, 그에게도 마음 속에 깊은 상처가 있다. 바로 '가족'이라는 이름이 남긴 슬픔이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길에서 여고생 연희(김꽃비)와 시비가 붙는데, 자신에게 전혀 주눅들지 않고 대드는 깡 센 연희와 가까워지고 그녀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상훈 : 그러는 날 겁내지 않고 내 말에 반박하는 사람이 있더라고. 선생처럼. 그것도 새파란 여고생이 말이야. 그걸 보고 난 그동안 내가 살아온 방식이 틀렸던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됐어.


철학자 : 상훈 씨의 방식 중 어떤 점이 틀렸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상훈 : 요즘 이런 식으로 사는 게 싫다고 절실히 느끼곤 해. 예전에는 내가 욕하고 소리 지르면 다들 겁내는 모습을 보고 나 자신이 뭔가 대단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 근데 언젠가부터 아무도 나를 진짜 '나'로 대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나란 사람이 아니라 내 '힘'에 굴복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지금은 내 힘만 믿고 젊은 놈들을 때리곤 하는데, 언젠가 내가 약해져서 힘이 없다는 걸 알면 반대로 내가 젊은 놈들에게 두들겨 맞을지도 몰라.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하는 방법

 

영화 <수상한 그녀>는 우리들에게 늙은 부모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욕쟁이 칠순 할매 오말순(나문희)은 어느 날, 가족들이 자신을 요양원으로 보내려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밤길을 방황하던 말순은 오묘한 불빛에 이끌려 '청춘 사진관'으로 들어간다.

 

난생 처음 곱게 꽃단장을 하고 영정사진을 찍고 나온다. 그런데, 버스 차창 밖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젊은 오드리 헵번처럼 뽀얀 피부, 날렵한 몸매를 가진 탱탱한 꽃처녀로 변신한 것이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오말순의 스무살 '오두리'(심은경)가 되어 빛나는 전성기를 즐겨 본다.

 

저자의 아버지는 말년에 치매를 앓으셨다. 그때 아버지는 짙은 안개 속에서 살고 계신 것 같았다. 그런데 가끔씩 갑자기 안개가 걷히면서 맑게 개는 순간이 찾아오곤 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이렇게 중얼거리셨다. "잊어버린 건 어쩔 수 없어."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과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의미가 아니었으리라. 스스로 '잊은'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잊어버린' 것이라고 하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잊었다'는 뜻이기에.

아버지는 오랜 세월 함께한 아내를 잊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잊어서는 안 될 일이었을 것이다. "잊어서는 안 돼, 떠올리고 싶어, 하지만 기억나지 않아." 아버지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할 수만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아버지께서 "잊어버린 건 어쩔 수 없어"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체념이 아니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생각해 낼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려는 각오의 표명이었다.

 

 

뭘 그렇게 어렵게 사냐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현실 속에서 방황하는 젊은 청춘들에게 작은 위로를 선사한다. 도시 생활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김태리), 그녀는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어 수확한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일상의 행복을 만끽한다. 도시 생활의 피로감과 번민을 잊고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 즉 소확행小確幸을 찾는다.


혜원: 제가 서울에 간다 간다 말하면서 가지 못하는 것도 저 스스로 결정하고 싶지 않아서일까요?


철학자: 망설이며 고민하는 한 결정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러나 고민을 멈추는 순간 결정해야만 합니다. 혹시 결단을 내린 뒤에 자신에게 닥칠 일들을 받아들이기가 두려운 건가요?


혜원: 뭔가를 결정할 때는 타이밍이 중요하지 않나요? 전 그 타이밍을 기다리는 중이에요.


철학자: 그렇지 않습니다. 타이밍은 스스로 정할 수 있어요.


혜원: 그러다 때를 잘못 맞추는 바람에 제가 바라던 걸 이루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요?


철학자: 그럴 수도 있습니다.


혜원: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철학자: 다시 하면 됩니다. 아니면 다른 것을 해도 좋고요.

 

 

돌아가고 싶은 '그때'는 언제입니까?

 

영화 <박하사탕>은 스무살 그 순수함으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1999년 봄, 마흔 살 영호(설경구)는 '가리봉 봉우회' 야유회에 허름한 행색으로 나타난다.  그곳은 20년 전 첫사랑 순임(문소리)과 소풍을 왔던 곳이다. 직업도 가족도 모두 잃고, 삶의 막장에 다다른 영호는 철로 위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 라고 절규한다.


영호의 절규는 기차의 기적소리를 뚫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사흘 전 봄, 94년 여름, 87년 봄, 84년 가을, 80년 5월 그리고 마지막 79년 가을. 마침내, 영호는 스무 살 첫사랑 순임을 만난다. 살다 보면 가슴속에 묻어 둔 가시가 밖으로 헤집고 나올 때가 있다. 애써 대면하지 않고 응어리를 꾹 누른 채 그저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다.

 

1980년 5월, 광주에 군인으로 투입된 뒤 순수했던 시절과 이별을 고하고 타락의 길을 걸어간 영호, 그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휘말린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이다. 마음 깊숙히 비수처럼 박힌 상처를 어느 누구에게 쉽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회한으로 점철된 삶의 고립에서 벗어나 그는 다시 한 번 기차에 오른다. 

 



영호 : 제가 착해질 수 있을까요?
철학자 : 영호 씨는 굳이 다른 어떤 사람으로 변하지 않아도 됩니다.
영호 : 지금 이대로의 저라도 괜찮다는 말씀인가요?


철학자 :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내가 되기란 쉽지 않지만,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은 가능합니다. 실제로는 지금도 영호 씨는 착한 사람일 겁니다. 그런데 착한 사람으로 사는 걸 그만두려고…….


영호 : 경찰이 됐죠…….


철학자 : 사실 영호 씨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착한 당신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착했던 영호 씨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하나는 과거에 지배받는 것을 그만두는 겁니다. 과거의 사건이 지금의 당신을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인생을 새롭게 살 수 있어요.

 

다른 하나는 타인이 동료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영호 씨의 삶을 망치려고 할 리 없어요. 당신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철학자, 열아홉 편의 영화를 감상하다

 

열아홉 편의 영화 속에는 당시의 시대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담고 있기에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그에 다른 심리 상태 등에 관해 철학자는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그렇다고 그 대화가 누구에게나 맞는 내용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생은 자기 맘대로 되는 법이 아니기에. 아무튼 '이 장면은 이런 얘기였구나'를 뒤늦게 생각해볼 수 있는 저자만의 해석을 통해 우리 맘 속에 자리잡고 있는 나쁜 기억을 지워 버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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