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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0년 3월
평점 :
이탈리아 철학자 프랑코 베라르디는 <죽음의 스펙터클>에서 한국 사회의 특징을 네 가지로 짚었습니다.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주의, 일상의 사막화, 생활 리듬의 초가속화'가 그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꼭 지옥의 구성 목록처럼 느껴져 섬뜩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이룬 이 엄청난 정치적, 경제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나요? 왜 이렇게 비참하게 굴종하며 기어야 하나요? 왜 우리 아이들은 행복해야 할 유년기와 청년기를 이렇게 우울하게 지내야 하나요?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 '들어가는 말' 중에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를 파헤치다
책의 저자 김누리는 중앙대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원 독일유럽학과 교수이며, 독일 유럽연구센터 소장, 한국독어독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 독일 브레멘 대학에서 독문학을 공부했고, 독일 현대 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작가 귄터 그라스의 문학을 연구하면서 독일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013년 중앙대 독일연구소가 도쿄대, 베이징대에 이어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독일 정부의 지원을 받는 '독일유럽연구센터'로 선정되었고, 현재 이 연구센터의 소장을 맡아 학술 및 교육, 문화 교류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저서로는 <알레고리와 역사: 귄터 그라스의 문학과 사상>을 썼고, '통일 독일을 말한다' 3부작(<머릿속의 장벽>, <변화를 통한 접근>, <나의 통일 이야기>)을 비롯하여 <통일독일의 문화변동>, <통일과 문화>, <인권, 세계를 이해하다> 등을 공저했으며,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아직도 시간은 있다>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한국인은 참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정치 민주화를 이루고, 세상이 놀라워하는 경제 성장도 거두었는데, 오히려 우리들의 불행은 날로 커져만 가고 있다. 즉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 세계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 세계에서 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 세계에서 노동자의 죽음이 가장 빈번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또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아이들이 가장 우울한 나라이고, 세계에서 아이들을 가장 적게 낳는 나라이며, 세계에서 모두가 모두를 가장 불신하는 나라이다. 이쯤 되면 가히 인간이 살 수 없는 지옥이라 불러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젊은 세대의 신조어 '헬조선'이란 말을 결코 타박할 일이 아니다.
일상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면?
우리가 민주주의자가 아닌데 민주주의를 어떻게 하지? 얼마 전 한 신문에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광화문에 모여서 목이 터져라 민주주의를 외친 사람이 집에 가서는 완전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요, 다음 날 학교에 가서는 아이들을 쥐 잡듯이 들볶는 권위주의적 교사요, 혹은 회사에 가서는 갑질을 일삼는 상사라면, 민주주의는 어디서 하지요?
이 나라에서는 '광장 민주주의'와 '일상 민주주의'가 상당히 많이 괴리되어 있다. 우리가 아직 충분히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한 거다. 일상 민주주의는 광장 민주주의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 일상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가 광장에서 떠드는 민주주의엔 제법 성장했지만, 여전히 일상에서의 민주주의는 낙후되어 있다. 현 정권이 자행하는 여러 가지 조치에는 민주주의적이라기보다는 독재적인 방식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민주주의는 단지 정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태도에 연결되는 문제다.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약자와 공감하고 연대하며, 불의에 분노하고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태도, 이러한 심성을 내면화한 민주주의를 길러내지 못하는 한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언제라도 독재의 야만으로 추락할 수 있다. 광장의 촛불이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 타올라야 한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위험한 착각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새로운 사회로 변화하지 못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86세대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도덕적 우월감이다. 86세대가 자신들의 도덕적 결단에 의해서, 또 수많은 희생을 통해서 한국 민주주의를 이만큼 진전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상대와 싸워본 적이 없다. 그들보다 왼쪽에 있는 사람들과 경쟁해 본 적이 없다. 정말로 자유롭고 정의롭고 평등한 세계를 주장하는 진보주의자들과 대결해 본 적이 없다.
그들의 상대는 언제나 외세에 기대어 기회주의적으로 사적인 이익만을 탐하는 수구 보수들이었다. 도덕적 하자가 너무나도 분명한 수구 보수 세력하고만 경쟁해 왔기 때문에 항상 도덕적으로 우월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저자의 이런 지적에 전적으로 공감하진 않는다. 수구 보수주의자 중에도 탁월한 도덕감을 지닌 사람들도 많다.
아무튼 이렇게 우월한 진영과 싸원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들 일방적으로 스스로의 내면에 도덕적 우월감을 뿌리내렸기에 지금 보여주는 이들의 작태는 실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아니 부끄러움을 넘어 무능하다. 생산적 논쟁이 가능했던 진보 세력과 좀 더 이상적인 사회의 건설을 놓고 그 방법을 경쟁했다면 아마도 지금처럼 무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86세대, 기득권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에 대한 죄책감은 민주주의 적이다
독일 아이들은 소비할 때 죄책감을 느끼는 반면 한국의 아이들은 대다수가 성과 관련해서 죄책감을 갖고 있다. 성을 나쁜 것, 비도덕적인 것으로 악마화하거나 부끄러운 것으로 은폐하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성에 대해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독일의 성교육은 전혀 다르다. 아주 이른 시기부터 성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한다. 성교육의 첫 번째 원칙은 절대 윤리적 평가를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성은 윤리와 상관 없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성은 생명과 연계되고 인권과 관련되는 예민한 영역이다. 그래서 성과 관련해 충분한 책임 의식을 갖도록 가르친다. 물론 성폭력, 성희롱, 성추행 등 성범죄에 대해선 한국에 비해 훨씬 더욱 엄한 처벌을 내린다. 그리고 성교육은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이루어진다. 성을 신비화하거나 은폐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독일에서는 성교육을 가장 중요한 정치교육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독일의 교육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민주주의 최대의 적은 약한 자아"라고 했다. 왜 한국에서는 이렇게 민주주의가 취약할까 고민하던 시기에 저자는 아도르노의 에세이에서 이 말을 읽고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다.
이 말이 옳다면 약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민주주의를 하려면 구성원 하나하나가 강한 자아를 가진 성숙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니까. 이 말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가 왜 취약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과연 얼마나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을까? 우리 교육은 자아를 강하게 하기보다는 약하게 만드는 교육이었다.
'헬조선'의 발원지는 여의도(?)
세습 자본주의, 학벌 계급사회 등 한국 사회를 마치 '지옥'처럼 만들었는데, 이런 것들은 왜 생겨났을까? 그 발생 근원지는 어디일까? 지금과 같은 끔직한 사회 질서를 만들어낸 곳은 바로 '여의도'이다. 국회의사당에 앉아서 거수기 노릇을 하는 국회의원들이 이런 질서를 만들어낸 원흉들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300명가량의 국회의원 중에서 290명 정도는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현재 국회를 구성하고 있는 정당들 중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반대하는 정당은 정의당 정도이다. 다른 정당들은 모두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거나, 최소한 반대하지 않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이런 극단적인 의회 구성은 찾아볼 수 없다.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의원이 우리처럼 98퍼센트에 달하는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자유시장경제의 낙원이라는 미국도 이렇게 극단적이지는 않다. 한국 사람들은 자유시장경제가 정확히 무엇이고, 그것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모든 언론이 거짓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는 지금 보수와 진보가 서로 경쟁하는 게 결코 아니다. 이는 한국의 기득권이 만들어낸 최악의 거짓말이다. 해방 이후 한 번도 보수와 진보가 경쟁한 적이 없다. 현재의 정치 지형은 '보수'와 '진보'가 아니라 '수구'와 '보수'가 손을 잡고 권력을 분점해온 구도이다. 지금은 보수가 6이고, 수구가 4를 차지하는 권력 분점이다. 저자는 이를 '수구-보수 과두지배'라고 부른다.
정권 교체가 해결해주는 게 아니다
김대중 정부로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을 당시 한국 사회는 IMF 위기를 맞아 변화가 어려웠다. 이후 노무현 정부 때는 민주 세력이 미숙해서 개혁은 커녕 분탕질만 하고 말았다. 또 다시 정권이 교체되면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그런데 상황이 나아졌나? 불평등, 실업, 비정규직, 재벌개혁, 교육개혁 등 제반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이 무엇 하나 제대로 개혁된 것이 있나?
이제야 국민들이 깨닫기 시작했다. '이건 정권 교체 문제가 아니구나. 한국 사회에 뭔가 구조적인 문제가 있구나'라고 말이다. 문제는 바로 한국의 정치 구도가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극단적으로 우경화된 지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가장 보수적인 정당인 기민당이 사회적 시장경제를 실행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진보라고 불리는 민주당조차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상황이 한국이 헬조선으로 빠져드는 이유를 선연하게 설명해 준다.
한반도의 통일 문제
우리는 통일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통일이란 지난 100년 동안 있었던 다양한 사회주의의 실험 중에서 가장 권위주의적인 사회주의 국가와, 지난 세기의 수많은 자본주의 사례 중에서 가장 약탈적인 자본주의 국가가 합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우리의 통일은 고질적인 병을 앓고 있는 두 국가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두 국가가 병을 앓고 있으면 먼저 어디로 가야 할까? 결혼식장이 아니라 병원으로 가는 것이 순리다. 결혼한다고 병이 낫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한반도의 통일은 남북이 자신의 고질병을 치유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북한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를 민주화하고, 동시에 남한의 약탈적 자본주의를 인간화하는 것이 통일의 사회적 실체가 되어야 한다. 진정한 한반도 통일을 위해선 남한 사회를 경험한 북한 주민의 말에 귀 기울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