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돈의 역사 1
홍춘욱 지음 / 로크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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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를 바꾼 중요 사건의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의 폭을 넓혀보자는 것이다. 물론 이 책 한 권 읽는다고 해서 세상일이 명쾌하게 다 설명되지는 않겠지만, 영웅의 행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계사의 이면도 있음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 '서문' 중에서

 

 

돈의 관점에서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다

 

저자 홍춘욱은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뒤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명지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 한국금융연구원을 시작으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투자운용팀장, KB국민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키움증권 투자전략팀장(이사) 등을 거쳤다. 현재 EAR Research 대표이자 숭실대학교 금융경제학과 겸임교수로 있다. 2016년 조선일보와 에프앤가이드가 '가장 신뢰받는 애널리스트'로 선정했으며, 수년 간 부동산 및 금융 분야, 국제 경제 전망을 아우르는 전문가로서 각종 미디어의 1순위 인터뷰어로 손꼽혀왔다.

지은 책으로는 <돈 좀 굴려봅시다(2012)>와 <환율의 미래(2016)> 외 10여권에 이르며, <순환장세의 주도주를 잡아라(2018)>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했다. 1999년부터 개인 홈페이지 <홍춘욱의 시장을 보는 눈>을 운영하면서 네티즌과 지식을 공유해왔으며,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 <홍춘욱의 경제강의노트>를 통해 어려운 경제 및 금융시장 지식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책은 프랑스보다 군사력이 열세였던 영국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앙은행을 비롯한 금융 시스템의 도입이 있었음을 이야기하며, 18세기부터 서양이 동양보다 잘 살게 된 이유, 일본의 버블 자산이 일어난 배경, 대한민국의 광복후 토지개혁과 이후 외환위기까지 역사적 사건들을 이야기하며, 돈의 역사는 과거에 시작되어 그 순간 끝난 것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책은 총 7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을 중심으로 산업혁명 전후의 서양 세계 발전 정을 살펴본다. 2부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역사를 다룬다. 명나라 가정제 시절 왜구가 창궐했던 이유,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이 명나라에 미친 영향 등을 샇펴본다. 3부에서는 산업혁명의 발생과 확산 과정을 다룬다. 

 

이어서 4부에서는 11929년 대공황을 다루는데, 특히 금본위제에 대한 설명에 집중하고 있다. 5부에선 1971년 닉슨 쇼크 후 금본위제가 붕괴된 후 세계경제에 어떤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다룬다. 6부에서는 왜 엔화의 강세가 나타났고, 어떻게 역사적인 자산 버블로 연결되었는지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7부에서는 한국 경제에 있었던 다양한 이벤트를 살펴본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19세기 초 유럽을 제패했던 나폴레옹에게 가장 위협적인 대항마는 섬나라 영국이었다. 영국은 프랑스를 견제코자 일곱 차례나 프랑스동맹이라는 군사 동맹을 주도했고, 프랑스의 뒷마당격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반란(1808~1814년, 반도전쟁)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또 1812년 살라망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패퇴시킨 당사자도 바로 웰링턴 공작이 이끌던 영국군이었다.

 

급기야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동맹군에게 완패함으로써 나폴레옹의 군사지배 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한 직접적 원인이 되고 말았다. 사실상 반도전쟁에서 가장 돋보인 존재감은 바로 영국 해군이었다. 영국에서 포르투갈까지 해상 보급선을 유지하고, 필수 군수물자 공급에서 프랑스군보다 우위를 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국은 극강의 해군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이는 18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를 완벽하게 제압한 이후 해상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어서다. 이들은 104문의 대포를 장착한 전함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로선 최첨단 전투선이었다.

 

 

그런데, 영국의 숲은 18세기 이전에 이미 사라지고 존재하기 않았기에 배를 만드는 목재는 스웨덴과 북미에서 수입해야만 했다. 여기에다 대포 제작과 수많은 병사들의 인건비 등 당연히 선박 구축비용이 많이 소요되었다. 이 막대한 비용을 영국은 어떻게 충당할 수 있었을까? 영국의 명예혁명(1688년)은 영국의 국채금리를 급격히 인하시켰기에 저금리로 조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영국 왕들이 빈번하게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것은 국가 재정이 튼튼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찰스 2세의 아버지인 찰스 1세가 1649년 올리버 크롬웰이 이끈 의회군에 패배해 처형당한 사건, 즉 청교도 혁명도 전함 건조를 위해 특별 세금인 건함세建艦稅를 부과해 귀족과 금융업자의 반발을 샀던 것이 원인이었다. 이후 영국 의회는 네델란드의 오렌지 공 윌리엄을 새로운 국왕(윌리엄3세)으로 앉히고 신설되는 세금은 사전에 의회의 동의 구할 것과 국민의 재산을 함부로 강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음으로써 더 이상의 원리금 연체가 발생하지 않았다.

 

네델란드 금융이 도입된 영국의 금융시장은 1702년 영국의 국채금리를 단번에 6%로 떨어뜨렸다. 특히 1755년엔 2.74%를 기록함으로써 다른 어떤 나라도 꿈꿀 수 없었던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이는 영국의 육군과 해군의 전력 상승으로 이어졌다. 거대한 함대의 건조는 물론이고, 사전에 화약을 이용한 실전 훈련을 꾸준히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금리 하락의 혜택이 영국 정부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재산을 형성한 영국 국민들은 채권, 특히 만기가 없는 영구 채권(콘솔 공채)에 투자해서 노후를 편하게 보낼 수 있는 설계가 가능했다. 나아가 '신뢰가능한' 자본시장이 형성되자, 전 세계의 부자들은 투자를 목적으로 너도나도 영국 런던으로 몰려왔던 것이다.  

 

왜 네덜란드에서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가 출범하게 되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네덜란드가 중세 유럽 사회의 핵심인 '장원제도莊園制度)'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장원제도란 영주가 자신의 봉토에 속한 농노農奴들을 수직적으로 지배하는 시스템이다. 영주는 자신에게 몸을 의탁한 농노들에게 최소한의 안전, 즉 신변 보호와 농사지을 토지의 이용권을 보장했다. 영주가 권세를 잃거나 전쟁에서 목숨을 잃으면, 그의 장원은 다른 기사나 영주에게 넘어가게 되지만 일단 형식적으로는 ‘거래 관계’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네델란드 대부분의 주에는 장원제도가 발달하지 않았다. 네델란드 육지는 대부분 바다나 늪지를 개간한 땅이다. 개간한 사람이 주인인 것이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자연스레 네델란드 사람들은 실용주의적 태도가 생겼다. 그리고 기나긴 독립전쟁(1568~1648년)이 네델란드의 혁신에 한몫 거들었다. 네델란드 정부는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한 민간 자본 육성에 동인도회사를 활용했던 것이다. 이들은 단순한 회사가 아니라 해외에 요새까지 구축하는 등 군사력까지 행사했다.

 

중세 말 대규모 상행위를 위해서는 국가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아야 했다. 이로 인해 대상大商들은 정부에 자금을 빌려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소위 '정경유착'의 형태가 발생해 사업과 정치는 긴밀하게 결탁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과정을 가장 극적으로 밟은 예가 바로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14세기 후반부터 두각을 나타냈고, 로마 교황청의 외환거래를 전담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당시에는 금화, 은화, 금속 주화 등 다양한 주화가 공존했기에 장거리 무역이나 납세 업무 시 환전 절차로 골머리를 앓았는데, 메디치 가문이 교황청의 이러한 어려움을 덜어준 것이다.

 

은행에 대한 신뢰도가 낮을 때 예금을 맡긴 사람들은 항상 '예금을 제때 찾지 못할 수 있다'는 공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예금보험제도'가 없었기에, 사람들이 일거에 예금을 찾으면 은행은 '지급불능' 상황에 빠질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을 우리들은 흔히 '뱅크런' (Bank Run)이라고 부른다. 우리들도 이미 이를 목격한 바 있다. 2010~2012년 저축은행 구조조정 당시, 자신의 예금을 인출하려고 끝없이 장사長蛇진을 친 행렬을 목격했었다. 

 

프랑스를 '영원한 도전자'라고 세계사는 평한다. 그도 그럴 것이 16세기에는 스페인이 패권 국가의 자리를 움켜쥐었고, 17세기에는 네덜란드가 암스테르담 은행과 동인도회사라는 신무기를 내세워 세계의 바다를 호령했으며, 18~19세기에는 영국이 무적 해군을 앞세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반면 프랑스는 항상 2인자에 머물렀다.

 

금리가 높은 나라는 투자처로 적합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이를 '투자'의 영역에 적용하자면, 금리가 높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터키나 브라질 등의 신흥국이 발행한 국채, 혹은 우리나라 내에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들이 발행한 회사채의 금리가 높은 것은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호시절에는 고금리 채권을 선호하는 투자자들이 늘고 이 채권의 인기가 높아지기도 한다. 그러나 2000년이나 2008년처럼, 경기가 악화될 때는 첫 번째 자금회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대항해시대로 열린 '글로벌 경제'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은 비단 유럽 사회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권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당시의 중국은 명나라 시기로 주화 제작을 은銀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만력제(재위 1572~1620년) 초기의 명재상 장거정이 단행한 일조편법一條鞭法이 이런 현상을 초래했다. 이 개혁의 핵심은 각종 세금을 토지세 하나로 단순화하고 세금은 모두 은銀으로 받는 것이었다.

 

명나라는 가정제(재위 1521~1566년) 때부터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조세 개혁은 시급한 과제였다. 이 시기에 역사상 최악의 왜구 침탈을 경험했는데, 이를 '가정대왜구'라고 부른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 해적의 명칭이 '왜구'이지만 구성원 대부분은 일본인이 아닌 중국 상인이었음이 밝혀졌다. 수백 척의 선박과 십만 명 이상의 선원을 휘하에 두었던 해적왕 왕직 역시 중국 출신이었다. 이처럼 '가정대왜구'는 일본인의 침략이 아니라 중국인들 내부의 갈등 표출이었던 것이다.

 

가정제는 밀무역 통제를 위해 해금海禁 조치를 시행하면서 수백 척의 무역선을 파괴하고 밀수상들을 처형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이는 남중국해에 서양세력 (포르투갈)이 등장해 본격적으로 약탈행위를 일삼고, 전국시대 일본의 지방 영주들이 교역을 요구하면서 행패를 부리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이를 경계할 목적으로 전면적 통제가 발생했다. 

 

이와같은 통제는 결국 중국 무역상들이 생업의 어려움으로 인해 해적으로 나서게 만듦으로써 중국 동남해안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던 셈이다. 가정제 사망 후 융경제(재위 1567~1572년)의 복선성 장저우 항 개방,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조차 승인 등을 허용했지만 이미 명나라 재정은 견디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다. 장거정의 개혁은 이런 국가 위기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멕시코에서 출발한 스페인의 대규모 선대가 필리핀을 거쳐 중국에 도달, 도자기나 비단을 구입한 대금으로 은화를 지불함으로써 중국의 일조편법으로 인한 '은銀 부족' 현상이 해소되었으니 당시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들어온 대부분의 은이 중국으로 이동했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였다. 여기엔 깊은 속사정이 있다. 중국이 다른 지역보다 은의 가치를 높이 쳐주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의 16세기 금은 교환비율대체로 1대 12였는데, 중국은 유독 1대 6이었다. 중국으로 은을 가져가기만 해도 남는 장사였다.

 

  

 

일조편법의 시행과 '귀금속 공급 확대' 덕분에 명나라의 재정은 매우 윤택했다. 적어도 명나라 때가지는 동양의 중국이 서유럽보다 더 부강했거나 또는 비슷한 생활 수준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계의 거두 이언 모리스 교수도 로마제국 멸망 이후 동양이 우세한 모습을 보인다고 밝혔다. 아래 도표를 보면, 18세기 말에 비로소 서양의 우위로 전환됨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런 명나라가 왜 갑자기 멸망하게 되었을까? 강력한 만주족 기마병 때문에 망했다고 분석하기도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당시 명의 군사력은 만주족을 능가했기에 오히려 이자성이 주도하는 대규모의 농민 반란이 명 패망의 주된 이유다. 왜 농민 반란이 일어났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생이 핍박해지면 대규모 봉기가 발생한다. 현 문재인 정권의 민생 도탄도 더 이어진다면 마찬가지 현상이 발생할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주장이 있다. 하버드 대학의 티모시 브룩 교수'기후 변화'가 명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1613년부터 중국 북부 전역에서 홍수가 지속되었고, 1615년에는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며 추워졌다. 이를 기후학계에선 '소빙하기'라 칭한다. 1616년 후반기에 기근이 발생, 중국 북부에서 양즈강 유역으로 번졌고, 이어서 광둥성을 덮쳤다. 이후 2년 동안 가뭄과 메뚜기 떼의 약탈이 극성이었다. 물론 당시 명나라 황제가 기상 이변에 대응할 정도로 재정이 탄탄했다면 결코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1997년 이후 우리나라는 왜?  

 

외환위기 이후 가계와 기업 등 경제 주체들이 과거 학습에 기인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는 저축보다 투자가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좋은 현상인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어두운 미래의 자화상이다. 즉 대마불사라던 경제 상식이 엎어지고 대기업들이 속수무책으로 붕괴되면서 수많은 실업자가 양산되는 현상을 목격했던 '트라우마' 때문에 소비와 투자를 줄인 결과,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우리 자신의 소비는 다른 사람에겐 '매출'이라는 점이다. 만성적인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하는 현상은 내수 비중이 높은 기업의 영업 환경이 악화되는 것을 뜻하므로, 이는 기업의 투자와 고용 위축으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따라서 작금의 고용 부진 사태의 원인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 주체의 적극성이 약화된 탓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심리를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일이기에 확실한 처방을 제시하기는 힘들다. 다만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 정책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기준 우리 정부의 GDP 대비 재정수지는 1%대 중반의 흑자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며, GDP 대비 정부 부채도 12.2%에 불과하다. 이렇듯 건전한 재정을 활용해서 정부가 기업들의 투자를 촉진할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공공부문의 일자리를 만드는 한편 경제 전체의 생산성 향상을 유발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회간접자본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돈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때 현재와 같은 내수경기의 부진이 계속 이어진다면 국민 개개인의 실질 소득 감소와 일자리 불안 및 감소로 인해 삶이 핍박해짐과 함께 덩달아 세수기반이 축소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정부의 재정지출은 현명함을 요구하는데, 무분별한 선심성 지출을 가급적 억제하고 실질 효과가 유발되는 부문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 것이다. 현 정권의 세수 증강책과 복지 포퓰리즘의 확대는 나라의 미래를 어두움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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