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 미지의 땅에서 들려오는 삶에 대한 울림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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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대중들을 위한 고고학 책이라고 하면 인디아나 존스나 트로이를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과 같은, 황금과 보물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반면에 전문적인 고고학자들을 위한 개론서를 펼치면 전공자조차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외국용어와 개념들이 잔뜩 나옵니다. 그나마도 영어권의 책을 번역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한국에 직접 적용할 수 있는 부분도 많지 않습니다. - '서문' 중에서

 

 

고고학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책의 저자 강인욱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본과와 석사를 졸업하고 러시아과학원에서 시베리아분소 고고민족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고학자를 꿈꾸며 살아왔고, 지금도 경희대 사학과 교수로 근무하며 고고학을 강의하고 있다.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매년 러시아, 몽골, 중앙아시아 등을 다니며 새로운 자료를 조사하고 있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 출연하고, <조선일보>, <서울신문>, <한겨레> 등에 칼럼을 다수 연재하는 등 고고학의 진짜 매력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자 힘쓰고 있다. 주요 저서로 <유라시아 역사 기행>, <진실은 유물에 있다>, <북방 고고학 개론> 등이 있다.

 

이 책에는 신나는 보물찾기도, 실무적인 고고학 이론도 없다. 대신에 저자가 과거의 사람을 직접 만지고 냄새 맡는 고고학자로서의 생생한 느낌을 우리들에게 소개한다. 이같은 생생함이야말로 고고학이 가진 놀라운 매력임을 강조하는 저자는 발굴하고 연구했던 수많은 무덤에는 사자死者를  떠나 보내는 이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고고학이란 쉽게 설명하면, 유물을 연구해서 과거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 지식, 문화 등을 발히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렇게 과거 사람들의 모습에 만흥 관심을 가질까? 단순한 호기심 때문은 아니다. 과거를 생각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예측한다는 인간으로서의 숙명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것만도 약 30여 종의 인류가 있었지만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멸종했음을 밝혀냈다. 이 또한 고고학의 성과인 것이다.  

 

 

 

 

 

죽은 이를 위한 사랑의 흔적

 

 

4000년 전 유라시아를 가로질러 중국 신장 지역에 위치한 유적인 샤오허에는 사막이라는 기후적 특징 덕에 거의 완벽하게 매장 당시의 형태가 보존되어 있다. 이 무덤은 마치 수십 대의 배가 무리를 지어 사막을 가로지르는 듯한 장관을 연출한다. 그 관의 끝에는 마치 배의 노처럼 생긴 표식, 즉 묘비석을 세웠다. 사막에서 발견된 샤오허 무덤은 학익진을 펴고 바다를 헤엄치는 배처럼 사막에 펼쳐져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발굴에서 관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흙 색깔의 변화로 관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추정할 뿐이다. 인골도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무덤 안에 토기라도 없다면 그냥 구덩이라고 해도 될 정도이다. 그렇게 관도 사람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무덤을 보면 그들이 바람처럼 여행을 떠난 것이라는 생각이 이따금 들곤 한다.

 

 

 

마음을 울리는 소리 없는 음악


왜 실크로드를 통해서 동아시아 각지로 퍼진 공후(하프모양의 현악기)가 중국이 아니라 고조선에서 가장 먼저 노래로 등장했을까?  당시 중국에서는 앉아서 타는 금(琴)이 발달했고, 공후는 기마생활에 익숙한 유목민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그러니 고조선에서 유독 공후가 발달했다면 중국보다는 초원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서 직접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주목되는 유목민들이 중국 만리장성 지대에서 널리 흥했던 흉노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고조선을 흉노의 왼쪽 어깨라고 할 정도로 흉노와 고조선은 서로 통했다. 또한 기원전 4세기경에 중앙아시아에서 크게 번성했던 유목민족들은 실크로드를  따라서 만리장성을 따라 동아시아로 진출했고, 고조선과는 맞닿았다.

 

이러한 고조선과 초원 지역과의 연관성은 황금, 철제 무기와 마구에 잘 남아 있다. 중원을 거치지 않고 고조선이 직접 중앙아시아 초원 지역의 유목문화로부터 공후를 수입했을 가능성이 더 큰 건 이 때문이다. 초원 지역과 많은 교류를 했던 발해 정효공주의 무덤 벽화에도 휴대용 공후가 그려져 있다. 이렇듯 우리 고대사에서 공후로 대표되는 초원의 음악은 계{속 연주되었던 것 같다. <공무도하가>는 이처럼 서역의 음악과 이어졌던 2000년 전의 교류를 반증해주는 귀한 자료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음악은 너무 흔한 것이 되어 버렸다. 어디에서도 우리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도시에서는 음악이 끊기는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이기에 우리는 음악의 소중함에 대해 잘 깨닫고 있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오래 전, 과거인들에게 음악은 오로지 생음악뿐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값비싼 경험이었고, 평생을 두고 간직할 소리의 향연이었다. 음악은 우리의 마음을 강렬히 울리는 만큼이나 순간으로 사라져버린다. 과거 사람들의 음악을 지금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귓전에 울리는 지금의 음악이 영원할 수 있을까. 어느 누가 그걸 확신할 수 있을까?

 

 

 

파괴와 복원


고고미술사학 분야의 최고 권위자 김원룡 전 서울대 교수는 "고고학 발굴이란, 일종의 유적 파괴 행위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고고학만큼 역설적인 학문이 없다. 왜냐하면 과거를 밝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의 유적을 파괴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고고학자들이 수많은 도면과 사진을 남기며 신중하게 발굴을 진행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번 발굴한 유적은 어떠한 경우에도 되돌릴 수 없다. 간혹 유적을 발굴하지 않고 유보하는 경우도 있다. 땅속에 있는 것이 역설적으로 유적을 오래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작정 발굴을 하지 않는 것도 답이 아니다. 발굴을 하지 않으면 정작 과거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기에 오히려 고고학의 발전은 저해된다. 그러니 최소한의 발굴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 것이 고고학 발굴이 지향하는 바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발굴을 '수술 자국이 작을수록 좋은 외과수술'에 비유하기도 한다.

 

상처 입은 조개가 진주를 만든다는 속담이 있다. 고고학도 그러하다. 과거의 유적이 파괴되어 우리에게 그 속살을 보여 줄 때 비로소 우리는 과거인들의 모습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상처를 당연시하고 발굴에만 급급하게 된다면 후대에 물려줄 유물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춘천 중도 유적의 경우 3000년 전의 역사를 품고 있는 한강에서 발견된 가장 큰 마을(또는 도시)의 흔적이었다. 제대로 발굴하려면 수십 년은 걸렸을 테지만, 이 유적 발굴은 약 5년 만에 끝났다. 과연 유적이 파손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왜 고고학을 공부할까?

 

인간은 기억의 동물이다. 인간은 자신이 겪어온 것을 통해 학습하고 지식을 얻는다. 나아가서 그 지식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죽음, 폐허, 비극 같은, 흔히 인류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장면에서 가슴 설렌다. 새롭게 밝혀낼 과거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잿더미에 묻힌 폼페이 유적지에서 발굴한 아이를 끌어안고 절규하는 어머니의 석고상에서 우리들은 무한한 상상력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고고학은 오히려 행복한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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