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길 평전 보리 인문학 1
한명기 지음 / 보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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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이 남한산성에서 곧바로 귀향한 것은 지조 높은 행동이었지만, 그 또한 최명길이 열었던 문을 통해 나갔다. 그랬다. 최명길은 종사의 문이 닫히고 백성의 문이 닫히려는 순간 온몸을 던져 문을 열어젖힌 사람이었다. 훗날 박세당은 "조선 사람들이 편히 잠자리에 들고 자손을 보전한 것이 모두 최명길 덕분"이라고 단언했다. 최명길은 과연 누구였으며,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닫혀 버리기 직전에 역사의 문을 열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이야말로 변변찮은 능력을 지닌 필자가 용감하게도 최명길 평전을 쓰겠다고 덤비게 된 동기다. - '책을 내면서' 중에서

 

 

인간 최명길을 새롭게 조명하다

 

 

책의 저자 한명기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외국어대, 가톨릭대, 한신대, 국민대에서 강의했으며 규장각 특별연구원을 지냈다. 계간 <역사비평> 편집위원,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 동북아역사재단 자문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명지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로 있다.

 

 

그동안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 <광해군>(2000),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2009),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2013)를 썼고, 그 밖에 여러 저술이 있다.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한국사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관심이 많다. 첫 책인 <임진왜란과 한중관계>로 2000년 제25회 월봉저작상을,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로 2014년 제54회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았다.

 

 

17세기 초중반을 살았던 최명길이, 지금도 역사로부터 수시로 호출되곤 한다. 그 이유는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조건 때문이다. 열강의 입김과 외압 속에서 살아야 했던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 이른바 복배수적腹背受敵의 조건 때문이다. '복배수적'이란 배(腹, 정명)와 등(背, 배후) 양쪽에서 적을 맞이한다는 의미다. 돌이켜보면 조선시대엔 정면의 중국과 배후의 일본이 조선을 위협하는 강국이자 강적이었다.

 

동북아에서 강대국끼리 '힘의 교체'가 일어날 때마다 상대적으로 약세였던 한반도가 싸움의 희생물이 되어 왔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청나라가 일으킨 병자호란은 "그 가운데서도 기존 패권국(명)신흥 강국(청) 사이의 갈등과 대결이 조선에 미치는 비극적 파장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였다.

 

 

 

당시 사건의 현장으로 들어가보자. 1636년 2월 16일, 중국 심양에서 홍타이지皇太極가 청靑의 황제위에 오르자, 청은 조선으로 사신을 보내 '아우의 나라' 조선은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묻고자 했다. 용골대를 중심으로 한 사신단은 조선 땅 의주에 도착했다. 그동안 명을 숭상했던 조선의 성균관 유생들은 당연히 반대의 기치를 들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청을 오랑캐, 홍타이지를 '오랑캐 추장'이라 불렀고, 심지어 '붉고 큰 돼지'란 뜻을 지닌 '홍타시洪(紅)打豕'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사신단 일행의 목을 치라는 살벌한 분위기를 느낀 용골대龍骨大는 '추대'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못한 채 심양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일은 결국 후환을 불러왔다. 1636년 12월 9일, 청나라의 기마군 선봉이 압록강을 건너 한양을 향해 진격해왔다. 이들은 약 500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을 단 5일 만에 주파, 곧 한양성으로 들어올 조짐을 보인다.

 

이에 화들짝 놀란 인조는 12월 14일 강화도로 피신길에 나서지만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은 차단되었다는 급보가 날아들고, 청군의 선봉이 현재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 일대를 지나 무악재 방면으로 접근 중이라는 보고였다. 제대로 된 접전 한 번 펼쳐보지도 못한 채 조만간 한양 도성 한복판에 청군의 선봉이 들이닥칠 상황이 되자 인조와 신료들은 멘붕에 빠졌다.

 

그간 청과 일전을 벌이자던 척화파斥和派들도 아연실색이었다. 이때 "청과 화친하지 않으면 조사와 백성을 보전할 수 없다"는 말을 평소 입에 달고 살았던 이조판서 최명길이 무악재로 나아가 청과 화친을 제안해보겠다고 나섰다. 물론 이는 꼼수였다. 인조가 피신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참이었다. 당시는 전시 상황인지라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곧 죽음이었다. 때문에 인조가 특별히 붙여준 경호원 스무 명도 모두 숭례문 밖을 나서자 도주해버리고 말았다. 최명길은 단독으로 무악재를 향했다. 결과적으로 최명길의 책임감과 용기있는 행동으로 인해 인조와 주요 신하들이 남하산성으로 도주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준 셈이었다.

 

 

최명길(1586~1647년)의 바람과는 달리,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정사를 보면서 척화파들과 함께 청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김상헌(1570~1652년)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들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나라가 패망할지라도 끝까지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햇다. 당시 남한산성의 상황은 처참햇다. 청나라의 군대에 포위되어 1개월 여 지난 1637년 1월 중순 매서운 추위로 병사들은 얼어 죽거나 동상에 걸려 쓰러졌고, 군량미는 하루하루 줄어들고 잇엇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외부 구원병이 완전 끊겨 버렸다는 점이다.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의 함락은 시간 문제라고 확신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이미 안다. 그렇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항복함으로써 조선의 국은은 이어갈 수 있엇다.

 

김상헌의 주장과는 반대로 최명길은 인조가 명과의 의리 대문에 종사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며, 도한 무고한 백성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인조를 계속 설득했다. 성리학을 중시했던 당시 조선의 관료 사회에서 "청은 오랑캐"라는 인식이 확고했던 때라 최명길의 행보는 외로운 분투였다. 이때 인조가 최명길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최명길의 공적을 조선 중기 문신 이시백(1581~1660년)은 8가지를 꼽았다. 인조반정의 참여, 인조의 부친 정원군을 국왕으로 추숭, 단신으로 무악재에서 협상, 병자호란 때 화의 주도로 나라 보전, 청의 조선군 징발을 막음, 당파에 물들지 않음, 타인의 혈육을 따뜻하게 대함, 명과 밀통한 뒤 책임을 지기 위해 다시 목숨을 걸었던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모두는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거나, 엄청난 비난과 매도를 각오하지 않으면 불가한 일들이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끝난 후 조선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최명길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삼전도의 굴욕'을 안긴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의리와 명분을 내팽개친 소인小人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심지어, '진회秦檜보다 더한 간신'이라는 평가를 받아야만 했다. 참고로, 진회는 남송 시절 여진족인 금나라와 화친을 주도, 명장 악비까지 살해했던 악명 높은 간신이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은 이정도로 최명길을 폄하했던 것이다. 반면에 항복한 인조를 버리고 낙향했던 김상헌은 '조선의 정사正士이자 영원한 사표'되었다. 이 얼마나 웃기는 대비인가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현실인 듯 싶다. 2017년 사드 문제를 비롯 일방적으로 북핵을 옹호하는 듯한 중국은 한반도를 놓고 미국과 무역 및 패권 경쟁에 나서고 있으며, 과거 일제 식민지 치하의 피해보상 문제를 놓고 대치하던 일본은 수출 규제라는 경제 보복에 뛰어들었고, 러시아는 안보 공백을 테스트하듯 독도에 전폭기를 보내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북핵이라는 리스크도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미일과 중러, 강대국들의 힘겨루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 병자호란 때나 지금은 비슷한 위기 상황이다. 과거 조선이 직면했던 혼돈의 시기에 최명길은 패망의 위기로 내몰렸던 나라를 극적으로 살려낸 지도자였다. 그가 당시에 보여 주었던 용기와 책임감, 희생정신과 실천력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값진 가치가 아닐까 싶다. 나아가 이를 토대로 더 진일보한 해법을 우리들에게 던진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최명길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김상헌이 화친을 청하는 국서를 찢고 통곡했다. 최명길은 그것을 주워 다시 맞추며 말했다.
"국서를 찢는 사람이 없어서도 안 되지만, 국서를 주워 맞추는 사람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최명길은 인조대 조정에서 시종일관 '찢어진 국서를 주워 맞추는 사람'이었다. 종이에 쓴 국서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하지만 흩어져 버린 종이 쪼가리를 다시 맞추기란 여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삼전도의 굴욕 https://youtu.be/eWupsi0tFlM

 

남한산성에 갇혀 청과의 화친을 주도하는 최명길을 믿고 의지하던 인조는 당시 성밖으로 나가 청에게 예를 갖추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청의 인질로 잡혀가거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려했을 것이다. 인조의 출성出城은 사실 민감한 부분으로, 오직 인조만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마침내 인조가 출성을 결심, 이후 최명길에게 부여된 임무는 홍타이지로부터 인조의 안전을 확약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명길은 혹 심양으로 연행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인조가 자결할 수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마침내 홍타이지는 답서로서 최명길의 요청을 수락했다.

 

삼전도비

 

사실 청의 전신인 후금後金누르하치가 이끌면서 명과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을 키워나갔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이 국정을 다스리면서 강성해진 후금과 화친이라는 실리 외교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후 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후금과의 외교책에 다소 변화가 생길 조짐이 보이자 후금은 인조5년(1627년) 광해군의 폐위 문제를 구실 삼아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이때 호란은 '형제지국'을 맺으면서 수습될 수 있었다.

 

한편, 인조반정에 참여했던 최명길은 반정이후 호패법과 군적법을 시행하는 업무를 주도하면서, 조선의 열악한 사회, 경제적 상황과 취약한 국방력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었기에 후금, 즉 청에 맞서기보다는 화친을 해야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광해군도 당시 조선의 현실과 후금의 군사력을 견주어볼 때 화친만이 해결책임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정묘호란에 참전했던 도원수 장만과 장수 정충신의 증언을 들어봐도 당시 후금의 조선 침략 목적은 명확했다. 즉 그들은 조선의 정복이 아닌 화친 강화에 있었던 것이다. 사실 한 나라의 지도자는 냉정한 현실 인식이 필요하다. 그릇된 판단은 나라와 국민 모두를 위기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미리 잘 대응했다면 병자호란을 사전에 예방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지금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현실은?

 

여전히 '끼여 있는 나라'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현실은 갈수록 엄혹해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볼 때 만약 최명길이 지금 시대에 재림한다면 과연 그는 어떤 처방을 내릴까? 이 책의 저자는 책의 후반부에 그토록 척화론 앞장 섰던 김상헌도 나중에 최명길의 충정을 높이 평가했음을 전하며 이런 말로 책을 마친다.

 

"과거의 역사를 오늘의 현실과 곧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섣부르고 위험하다. 하지만 17세기 초반, 패권국 명과 신흥 강국 청 사이의 대결에 휘말려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하기 위해 고투했던 최명길의 생각과 행적들은 여전히 격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가 돌아보고 반추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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