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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말해줘
이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평점 :
다른 구역 사람들에게 D구역 사람들의 피부는 깨끗하다 해도 깨끗한 것이 아니었다. 언제라도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는 숙주와 다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레 초래하는 귀결은 D구역은 다른 구역과 격리돼야 한다는 거였다. 그것은 다분히 정서적인 것이었지만 확실하게 작용하는 금기의 전제가 됐다. 간혹 원거리 여행을 떠나는 철새들처럼 훌쩍 떠나갔던 사람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기름에 흠뻑 젖은 깃털을 질질 끌며 구사일생 자신의 둥지로 되돌아왔다. - '허물' 중에서
피부병 때문에 격리된 사람들
이 소설의 작가 이경은 2007년 김유정소설문학상에 단편소설 <토큰>이 당선되고, 2008년 <세계의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파이프>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8년과 201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창작기금 수혜 대상자로 선정되었고, <소원을 말해줘>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9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 사업에 선정되었다. 펴낸 책으로 <표범기사>, <먼지별> 등이 있다.
전설의 뱀 롱롱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진 도시는 허물을 영원히 벗으려는 열망에 휩싸인다. 시민들은 판타지 속에 투영된 자신들의 욕망은 거짓이 아니었단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의 생생한 분노가 그 증거다. 판타지의 붕괴가 가져온 비참한 현실을 직시한다. 판타지를 부풀린 것은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며, 지금 당장 판타지와 현실을 잇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침내 시민들은 거대한 뱀처럼 꿈틀거린다. 허물에 덮인 자들이 꿈틀거리며 D구역의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도시정부와 거대 기업이 모의한 충격적인 음모가 드러난다.
소설의 시작은 한 노숙자의 세신洗身 장면으로 시작한다. 당사자는 여성이다. 장소는 화장실인데, 아마도 공중화장실로 보인다. 티셔츠와 브래지어, 바지와 팬티까지 벗어 화장실 칸막이 걸친 후, 배낭에서 비누를 꺼내 재빨리 거품을 낸다. 공원 관리인에게 들키면 귀찮아지기 때문이다. 관리인의 신념은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만이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시각은 새벽 2시, 공원 순찰을 마친 관리인은 지금쯤 관리실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을 것이다.
민첩하게 움직이던 그녀의 손이 배꼽 아래에서 멈췄다. 하반신 전체가 딱딱한 허물로 덮여있다. 마치 거칠게 갈라진 소나무 껍질 같기도 하고, 사마귀에 곰팡이가 핀 것 같기도 한 모습이다. 한 달 전, 발꿈치가 따끔하더니 벌레가 모공에서 기어 나오고, 동시에 다른 모공에서도 올라오고 다리 전체로 옮아갔던 것이다. 가려움에 손톱이 지나간 자리엔 붉은 홍반이 생기고, 홍반들이 사각현 모양의 회갈색 띡지로 변한 후 점차 허물로 굳어버렸다.
이 여성은 힘을 가헤 무릎을 문지른다. 갈라진 허물 사이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진물이 묻어난다. 체내의 불순물이 몸밖으로 배출되지 못해서 곪아서 나는 냄새였다. 씻어내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로 가려움이 몰려 온다. 씻어내면 잠시나마 가려움을 진정시킬 수 잇다. 손톱에 허물이 걸렸다. 그녀는 마치 보도블록을 들추어내듯 허물을 들어내자 피고름이 주르륵 흘렀다. 관리인의 발소리가 가까워오자 대충 비눗기를 씻고는 알몸으로 배낭과 옷을 집어든 채 잽싸게 숲으로 내달렸다.
'허물 예방과 치료를 동시에'
옷을 입은 그녀는 배낭에서 켄 하나를 꺼내자 이런 광고 문구 아래에 하루 두 번 복용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는 피부 각화증을 완화시키는 신단백질이 함유됐다는 인증마크가 부착되어 잇엇다. 이 제품은 'T- 프로틴'이다. 얼마 남지 않은 캔을 탈탈 털어 입 안에 프로틴 가루를 넣고선 빈 캔을 풀숲으로 던져 버렸다. 앞으로가 큰일이다. 프로틴이 없으니 곧 허물은 마치 덩굴처럼 온몸을 휘감을 것이다. 그녀는 잠을 포기하고 D구역으로 향했다.
거대 제약 회사가 지배하는 인구 50만의 기획 도시. 주인공인 여성은 거대 파충류 사육사다. 석 달 전 산사태로 동물원이 무너지자 야생동물들은 도시 곳곳으로 흩어지고 도시는 혼란에 빠진다. 그녀는 비단뱀을 찾아 D구역으로 간다. D구역에 격리된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피부 각화증이 심해져 뱀의 허물 같은 각질이 온 몸을 뒤덮는 풍토병을 앓고 있다. 그들은 전설 속 거대 뱀 '롱롱'이 허물을 벗으면 세상의 모든 허물이 영원히 벗겨진다고 믿고 있다.
프로틴은커녕 끼니도 잘 챙기지 못하니 허물은 금방 자라났다. 별 수 없이 다시 공원으로 와 전처럼 공원 관리인과 숨바꼭질하며 지냈다. 밤이면 벤치에 누워 생각했다. 롱롱을 찾으면 정말 허물을 벗을 수 있을까. 영원히 허물을 벗으면 한 번도 허물 입지 않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한 번도 버림받지 않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그녀의 눈에 분수대 물이 일렁거리는 게 보였다. 물은 양감을 가진 물체처럼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았다. 물결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한 줄기 물길이 분수대 밖으로 기어 나와 저 혼자 흘렀다. 뱀이었다. 물빛을 일렁이며 뱀이 분수대 바닥에서부터 천천히 물 밖으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똬리를 틀고 있던 터라 분수대 밖으로 완전히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허물에서 파생되는 경제 부양의 효과가 없다면 시의 발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갖가지 방역 업체가 성업 중이고 피부과와 피부 관리실, 피부보호제와 약, 향초, 피부 보호 기능을 첨가한 여러 가지 생활용품까지 비싼 값에 팔리고 있었다. 단시간에 이 도시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허물'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 도시에서 공포는 거짓을 진실로 뒤바꾸는 알리바이입니다. 공포가 실재하니까 거짓은 없다는 논리입니다. D구역은 이 거대한 알리바이의 중심에 있습니다. D구역 없이 이 도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백신이 개발되면 D구역도 사라집니다. 방역 센터를 공들여 만든 시스템을 제 손으로 무너뜨릴 리 없습니다"(153~4 쪽)
롱롱프로틴 회사는 타깃을 세분화해 신제품을 쏟아냈다. 앉아서 죽느니 고양이라도 물고 늘어지자는 게 이 회사의 기업 정신이었다. 오직 믿을 거라곤 롱롱의 이미지뿐이었다. 건강을 선물하는 롱롱, 근심을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하는 롱롱, 소원을 묻지 않고도 알아서 이뤄주는 롱롱 등이었다. 롱롱프로틴 라벨에는 푸른 새싹을 들고 있는 롱롱이, 걱정을 사라지게 하는 라벨에는 인어 공주로 분한 롱롱이, 소원을 이뤄주는 라벨엔 호박 마치를 탄 롱롱이 마법 부채를 들고 윙크하고 있었다.
"전설은 전하는 입마다 다르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다음 사람에게 전하기 때문이야"(201쪽)
방역센터는 시민들의 허물을 벗겨내는 유일한 기관이다. 방역센터에서 허물을 벗고 퇴소하면 다시 허물을 입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을 알지만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주인공인 그녀는 그곳에서 김과 후리, 뾰족 수염과 척을 만나게 되고 그들에게 전설 속 거대한 뱀이 폐허가 된 궁의 아궁이에 산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녀와 김, 후리는 궁의 아궁이에서 거대 뱀을 꺼내 D구역 끝에 있는 김의 재생타이어 가게로 향한다. 그곳에는 겹겹이 쌓은 항공기 타이어가 긴 동굴처럼 이어져 있어 그들은 거대 뱀을 타이어 동굴 속에 숨기고 허물을 벗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전설이 참인지 거짓인지 그때 알게 될 것이다.
"공포란 인간의 욕망과 여러모로 비슷하지. 공포가 공포를 낳는 것처럼 욕망이 욕망을 낳는다네. 내가 공포를 이용했다면 자네는 욕망을 이용한 거야. 허물을 벗고자 하는 욕망. 그게 죄라면, 자네와 내가 저지른 죄의 무게는 비슷할 걸세"(2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