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 은밀하고 뿌리 깊은 의료계의 성 편견과 무지
마야 뒤센베리 지음, 김보은.이유림.윤정원 옮김 / 한문화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십 년 동안 의학이 채택한 유일한 모델은 몸무게 70의 백인 남성에 맞춰져 있다. 가임기 여성은 임상 연구, 특히 신약 연구에서 아예 배제된다. 여성의 증상은 우울, 불안, 스트레스 탓으로 돌리며 자주 무시된다. 때로는 월경통, 폐경, 심지어 임신 등 여성의 정상적인 생리적 상태와 주기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질병과 관계없는 환자의 상태가 더 주목받기도 한다. 살찐 여성의 질환은 비만 탓으로 돌린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겪는 증상은 모두 호르몬 치료 탓이다. 흑인 여성은 처방전이 필요한 약에 중독됐다고 생각하고 이들이 호소하는 통증 자체를 의심한다. - '글을 시작하며' 중에서

 

 

의료계의 여성 편견을 고발하다

 

책의 저자 마야 뒤센베리저널리스트이자 선구적인 웹사이트인 페미니스팅닷컴 편집장으로 2009년부터 낙태에 따라붙는 사회적 낙인, 강간 문화, 남성성, 경제 정의, 대중문화 등 페미니즘에 대한 다양한 주제를 다루어왔다. 기자가 되기 전에는 미국 국립재생산건강연구소에서 일했다. 마더 존스의 기자, 퍼시픽 스탠더드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코스모폴리탄〉, 〈허핑턴포스트〉, 〈더 애틀랜틱〉, 〈틴 보그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실었고, 프레시 에어〉, 〈굿모닝 아메리카등 수많은 방송에 출연하여 의학계의 젠더 편견에 대해 인터뷰했다. 또한 학생, 보건의료계 종사자, 환자 지지단체, 생의학 분야 종사자 등 다양한 청중을 대상으로 젠더 편견에 대해 강연을 해오고 있다.

 

 

의료서비스에 있어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별을 경험한다. 응급실에서 복통 치료를 받기까지 남성은 49분이 걸리지만, 여성은 65분을 기다려야 하고, 심장마비가 온 젊은 여성은 집으로 돌려보내질 확률이 7배나 더 높으며, 여성은 여성에게 흔한 질병이더라도 병을 진단받기까지 더 오래 기다리고, 때로는 이 기간이 수년을 넘어가기도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페미니즘에 대한 다양한 주제를 다뤄온 저널리스트인데 자신이 아프고 나서야 의료계의 성(젠더) 편견이 질병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왜곡하고 환자의 치료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책은 뿌리 깊은 성 편견과 무지로 여성을 무시하거나 오진하고 병들게 한 의학계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탐색한다. 과학적/사회학적 연구, 의사와 연구자의 인터뷰, 미국 여성들의 개인사를 통합해서 의학계의 성차별이 오늘날 여성들에게 어떤 해악을 미치고 있는지를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며 낱낱이 보여준다.

 

 

 

 

책은 의학계에 있는 몇몇 성차별주의자를 골라내는 데는 관심이 없다. 대신 의학계에 편견이 어떻게 스며들었는지에 대해 다룬다. 즉 여성에 대해 특정 편견을 가진 문화권에서 살아온 우리 모두와 보건의료계 종사자들이 어떻게 무의식적인 편견을 체화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최고의 의사들조차도 여성에 대해선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잘 모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의사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의사들 역시도 여성 건강에 대해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한다. 

 

 

의료체계는 역사적으로 남성이 지배, 수 세기 동안 서구의학은 설명하기 힘든 수많은 여성의 병적 증상을 히스테리라는 포괄적인 진단명에 쓸어 넣었다. 아리송한 여성의 질병을 설명하는 일을 수 세기 동안 계속 미루다가, 19세기 말에는 히스테리를 심리적 문제로 보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수많은 질병의 기저 원인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면서, 그리고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을 혈액검사와 신기술로 측정해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의사는 보이지 않고 설명할 수 없는 질병은 모두 '마음' 으로 돌렸다. 

 

남성과 달리 여성은 사망률이 낮지만 질병 발생률은 높다. 이 간극을 '젠더 패러독스'라고 부른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몇몇 연구자들은 여성이 실제론 남성보다 더 건강하다고 주장하면서 여성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아픈지 의심했다. 그러고는 여성이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상황이 되어서야 건강이 나빠졌다고 생각했다. 여성의 질병은 쇠약해질 가능성이 더 크지만 목숨을 위협하지는 않는 만성질환이다.


우울증 병력을 가진 이탈리아 이민자인 한 중년 여성3년 동안 복통을 월경통으로 무시당했다고 한다. 이 여성의 가족력에 대장암이 있다는 사실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직장 출혈이 일어났어도 의사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았고, 그제야 3기 대장암으로 밝혀졌다. 몇 달만 더 넘겼으면 4기에 들어서서 치료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여성은 십 대 이후로 항우울제를 불규칙하게 복용했다. 몇 년 동안 어지럼증, 피로감, 시력 문제, 원인 모를 체중 증가 등의 문제를 여러 의사에게 상담했다. 하지만 항우울제 복용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스트레스' 탓으로 돌렸다고 한다.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처음으로 철저한 정밀검사를 실시한 의사가 갑상샘암을 발견했다. 이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암 진단이 마치 좋은 소식처럼 들려서 혼란스러웠어요. 알 수 없는 증상을 정확하게 알게 돼서 내가 '미쳤나봐'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만성통증을 앓는 여성은 급성통증을 앓는 여성과 같은 어려움에 직면한다. 히스테릭하게 보이지 않고, 별로 아프지 않은 척하면서 통증이 어느 정도로 심한지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그러나 '설명할 수 없는' 만성통증 환자들에게 이러한 바늘구멍을 지나는 일이 끝도 없이 이어지며, 때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눈에 보이는 통증의 원인이 없는 상태에서는 환자의 통증 호소만이 유일한 증거다. 그러나 통증을 설명하는 여성의 표현은 언어적인 표현이든 찡그린 표정이든 눈물이든 감정적으로 보이기 쉬우므로, 만성통증을 앓는 많은 여성은 의료진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극도로 자제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2년 <뉴욕타임스>에는 노스웨스턴대학교 통증전문의가 어떻게 동료 의사들이 '여성 환자의 눈물을 신체적 통증의 신호가 아니라 감정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지'를 적절하게 인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그녀는 다른 의사에게 자신의 여성 환자를 보내기 전에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울지 말라"고 '지도'했다고 한다.

 

자궁내막증만큼 억압받은 질환도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만 최소 630만 명이 앓고 있는 자궁내막증은 자궁내막과 유사한 조직이 몸의 다른 부분(대개는 복강, 난소 주변, 나팔관, 방광, 창자)에 생기는 질병이다. 자궁내막은 수정란의 착상에 대비해 자궁 내벽을 덮고 있는 점막 조직으로, 착상되지 않으면 월경 때 출혈과 함께 내막이 쓸려 나온다. 자궁내막 유사조직은 매달 월경을 일으키는 호르몬에 똑같이 반응하여 출혈을 일으키고, 탈락되어 나간다. 그 결과 통증과 염증 반응이 일어나고, 결절, 낭포, 흉터 조직이 만들어진다. 심각한 경우, 유착이 생겨 골반 내 장기들을 들러붙게 만들기도 한다. 

사실 만성 골반통증을 앓는 여성90%는 자궁내막증이 원인일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아무 증상이 없는 여성도 있는데, 이런 환자는 임신을 시도하면서 질병을 발견한다. 공식적으로 진단받으려면 자궁내막증 병변을 확인하는 외과적 수술을 해야 한다. , 자신의 증상이 단순히 '끔찍한 월경통'이 아니라고 의사를 설득해내야 한다는 것인데, 사실 이 일은 많은 여성에게 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미국에서는 통증이 시작되고 진단받기까지 평균 10~12년이 걸린다. 그리고 환자의 60%가량은 20세 이전에 자궁내막증 때문에 통증이 시작된다

 

과체중인 여성 환자는 많은 의사가 환자의 모든 증상을 체중 탓으로 돌리는 경험을 한다. 최근 <뉴욕타임스> 기사는 병원에 가자마자 체중 때문에 병의 증상이 무시된 몇몇 환자의 이야기를 실었다. 한 여성은 고관절 통증이 있어서 정형외과 의사를 찾아갔는데, 의사는 진찰해보지도 않고 즉시 '비만 통증'이라고 진단해버렸다.

 

그런데, 이 여성은 사실 점진적 척추측만증 환자환자의 통증은 체중과는 관계가 없었다. 또 다른 여성은 갑자기 몇 발짝만 걸어도 숨이 차기 시작해서 병원을 찾았는데, 응급실 의사는 그저 너무 뚱뚱해서 폐가 눌려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다이어트 할 생각은 해보셨나요?"라고 의사는 환자에게 물었다. 하지만 이 여성은 폐에 목숨을 위협할 만한 심각한 혈전이 생긴 상태였다.

 

이런 편견은 비만 남성에게도 적용되지만 특히 여성에게 심각하며, 병의 증상을 호소해도 의사들은 무시하기 일쑤다. "남성에 비해 너무, 너무, 너무 많은 여성이 의사에게 이런 일을 겪었다고 얘기해요. '무릎이 뒤틀려서 의사한테 갔더니 체중을 줄이라는 말을 들었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환자는 십중팔구 여성이죠"라고 <몸에 대한 진실>의 저자이자 기자인 해리엇 브라운이 말했다.

 

 

여성이 아프다고 말하면 믿어주자

 

난소암은 폐암, 유방암, 대장암, 췌장암에 이어 여성 사망 원인인 암중에 다섯 번째를 차지하는 드문 질병이비만 아주 치명적이다. 매년 미국인 2만 2,000명 이상이 난소암을 진단받고, 이 중 약 1만 4,000명이 사망한다. 전체적으로 볼때 진단받은 환자의 1/3 정도만이 십 년 이상 생존한다. 난소암 생존율이 낮은 주요 원인은 환자 대부분이 진단받을 때 이미 암이 많이 진행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여성이 아프다고 말할 때, 여성을 믿어라. 그렇게 한다면 더 많은 환자들이 생존가능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