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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타임워프 - 페미니즘이 한국 사회를 기억하는 방법
김신현경.김주희.박차민정 지음 / 반비 / 2019년 8월
평점 :
버닝썬 흥행에 핵심에는 승리가 있다. 그리고 이 '승리'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은 세 종류의 여성들이 만들었다. 여성 팬, 살아 있는 여자, 그리고 죽은 여자. (린사모로 대표되는) 아시아 금융 자본과 (전원산업으로 대표되는) 강남 부동산 자본이 한류 스타 승리의 명성과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연예계 인맥이라는 가치에 투자했고, 그 결과 클럽 운영을 명목으로 각종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버닝썬 카르텔'이 탄생하고 또 공고해질 수 있었다. - '본문'(32쪽) 중에서
페미니즘, 한국 사회가 지금 성찰해야 하는 과제는 무엇인가
저자 김신현경은 한국의 미디어산업 변동과 연예인의 존재 양상 변화를 규명한 논문으로 2014년 여성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문화산업과 새로운 노동주체성에 대한 관심을 발전국가 및 국가 건설기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몸의 동원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 동아시아대학원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이토록 두려운 사랑>, 공저로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 <일상의 여성학>, <섹슈얼리티 강의 두 번째>, 공역으로 <성적 차이, 민주주의에 도전하다> 등이 있다.
공저자 김주희는 여성주의 정치경제학, 섹슈얼리티 산업 연구자. 10대 여성들의 몸과 성역할을 자원 삼아 수익을 내고 있는 '티켓 다방'에 대한 연구로 여성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막달레나의집 현장상담센터에서 기지촌 현장 활동을 했다. 성매매 산업의 금융화에 관한 논문으로 2015년 여성학 박사 학위 취득 후 현재 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 성매매 산업 내 '부채 관계'의 정치경제학>이라는 논문으로 한국여성학회 제3회 학술논문상을 수상했다.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 <을들의 당나귀 귀> 등을 함께 썼다.
공저자 박차민정은 근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성적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경계들이 만들어져온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의 변태적 섹슈얼리티에 대한 담론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이화여자대학교와 명지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조선의 퀴어>가 있으며, <1920~30년대 변태적 섹슈얼리티에 대한 담론연구>, <1920~30년대 '성과학' 담론과 '이성애 규범성'의 탄생>, <AIDS 패닉 혹은 괴담의 정치>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세 명의 저자들은 근현대사, 대중문화 산업, 성매매, 섹슈얼리티 등의 주제를 연구하며 한국 사회를 치밀하게 분석해왔다. 이런 오랜 연구를 통한 분석에 더해, 지금의 페미니즘 사건들과 과거의 사건들을 병치시킴으로써 그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깊이 있게 해석한다. 즉 버닝썬 게이트를 88올림픽 시기의 환대 문화와 연결 짓고, 고 장자연 사건을 10,26의 여성 연예인들과 나란히 봄으로써 지금의 이슈들이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들을 드러내는 균열임을 밝힌다.
88 서울올림픽과 유흥업소 지원 정책
88 서울올림픽은 한국 사회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모멘트를 제공하는 매우 의미가 큰 국제 스포츠 이벤트였다. 왜냐하면,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것은 국제사회가 은연 중에 충분히 글로벌 손님을 맞이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 국민의 의식이 선진화되었고 또 사회의 제반 인프라가 이를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다고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당시의 전두환 정부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범민족올림픽추진중앙협의회를 통해 <국민참여운동백서>의 내용 속에 내 집 앞을 자발적으로 깨끗하게 청소해 전 세계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자고 촉구했다. 이는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TV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이 가족의 일상에 잘 담겨져 있다. 정부는 한국의 빈곤한 모습을 숨기고 국제적 잔치를 과시하는 그런 행정들을 속속 펼쳤다. 이에 양동 재개발로 대표되는 서울 도심부의 재개발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당시의 양동은 서울의 유명 집창촌이었다. 윤락여성들은 갱생 시설로 보내졌다. 상품화된 성의 범람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빈곤의 모습을 감추려는 시도였다. 1986년 1월, 전두환 정권은 일본인들로부터 기생관광이라는 오명을 듣던 11개 대형 요정업체에 총 20억 원의 특별융자금을 지원해주었고, 국제관광공사의 관광객용 지도에 요정의 위치를 각국 언어로 상세하게 밝혀놓았다. 나아가 서울시는 룸살롱과 카바레 등 103곳을 '모범업소'로 지정해 여러 특혜를 주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홍등가'처럼 커다란 유리창을 갖춘 성매매 업소 '유리방'이 본격 등장하기도 했다.
버닝썬 게이트와 여성 동원의 정치
2019년 우리 사회에는 '버닝썬'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고발되었다. 서울 강남에 소재하는 한 클럽에서는 약물강간, 성매매, 불법 촬영 등 선을 넘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가히 서프라이즈 수준의 밤문화였던 것이다. 이 클럽은 이미 젊은 세대에 널리 알려지고 인기를 끈 아이돌 출신이 경영하는 유흘업소였다.
"여자가 있으면 손님은 온다"
주인공은 바로 아이돌 그룹 빅뱅의 멤버 '승리'였는데, 클럽의 명성은 세 종류의 여성들이 만들었다. 여성 팬, 살아 있는 여자, 그리고 죽은 여자. (린사모로 대표되는) 아시아 금융 자본과 (전원산업으로 대표되는) 강남 부동산 자본이 '한류 스타 승리의 명성과 연예계 인맥'이라는 가치에 투자했고, 클럽 운영을 명목으로 각종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버닝썬 카르텔'이 탄생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이 사건의 배후 세력들을 충분히 파헤치지 못한 진행 중인 사건이다.
클럽 관계자, 성폭력 가해자, 불법 촬영자, 불법 촬영물 공유자에 의해 통제되고 조절된 여성들의 육체가 만들어낸 한국 클럽의 스펙터클은 글로벌 투자자, 아시아 재벌, 한국 남성들이 강남의 버닝썬에서 기꺼이 비용을 지출하는 선결 조건이 되었으며, 아이돌 사업가는 이렇게 보증된 여성들의 육체를 통해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투자 가능성을 확장해나갔다. 더구나 유출된 한국 여성들의 동영상은 글로벌 포르노 시장에서 소비되고 있다고 한다.
장자연 사건의 의미
1979년 10월 26일,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에서는 끔직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총으로 시해했다. 사건 현장은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경호실장, 그리고 젊은 여성 2인이 동석한 연회자리였다. 이날 동석한 여성은 모델겸 배우였던 여대생과 당시 인기를 끌던 여가수로 강제로 동원되었던 것이다.
"김 대표가 항상 술자리에 불러냈다. 회사에서 자연이는 그런 용도로 이용당했다"
- 장자연 주위 인물과의 인터뷰 내용(2009년 한 언론사)
2009년 3월 7일, 당시 인기리에 방여되던 TV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단역으로 이제 얼굴을 알리던 신인 여배우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녀가 남긴 소위 '장자연 리스트'는 성접대 상대방으로 의심되는 정황이었다. 여배우가 소속된 기획사의 사장이 사업상의 술자리에 그녀를 동석시키고 심지어 성접대를 강요했다는 보도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잊혀지던 이 사건이 다시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기 시작했다. 2018년 4월,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가 재조사 대상으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이후 밝혀진 바로는 '권력형 성접대' 사건으로 결론내고 김학의 전 법무차관의 구속으로 종결되었다.
사건의 의미는 여기에서 일제 식민지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입으로 꺼내지 않더라도 짐작할 만한 일일 것이다. 이렇게 여성 연예인의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한 한국의 정치, 경제, 언론의 남성 동맹과 1980년대 말부터 본격화된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장자연이 그토록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결국은 죽어서야 벗어날 수 있었던 '고통'을 저질스러운 개인에게 잘못 걸린 한 연예인의 일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그녀의 고통은 오히려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상관관계를 고민하게 만든다.
양공주에서 원정녀로
한국 사회에서의 양공주는 넓게는 미국인 남성과 성적 관계를 맺는 한국 여성을 경멸적으로 일컫는 용어로, 실제는 보통 미군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는 여성을 지칭한다. 때로 '유엔 마담', '유엔 사모님', '양갈보'로 불리기도 한다. 이들은 한국 영토 내 미군 기지촌에 거주하면서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하는 여성들이다.
미군과 결혼한 기지촌 여성들은 미군기지 안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기도 했고 미군의 아내 신분으로 미국에 이민을 가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간 많은 여성들이 한국 기지촌에서 성매매업에 종사했던 여성들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 중 일부는 미국 도착 즉시 미국의 안마시술소나 술집으로 인신매매되기도 했다. 또 많은 여성들이 남편과 이혼하게 되면서 현지 블로커의 도움으로 미국 내의 군 기지 주변 성매매 업소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한인 여성들이 더 이상 미군과의 결혼을 통해 미국 성매매 산업에 충원되지 않는다는 점을 포착했다. 즉 2008년 11월 미국 비자 면제 프로그램의 시행으로 90일 이내의 관광, 상용 목적으로는 미국으로의 입국이 간편해짐에 따라 성매매를 목적으로 단기간의 원정을 떠나는 소위 '원정녀' 현상까지 생겼다는 것이다.
동시대 한국의 성매매 경제 규모는 OECD 국가 가운데 최고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어로 '코리안 바(Korean bar)'가 이미 고유명사가 된 사실이 보여주듯 한국식 룸살롱과 같은 영업 스타일은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의 성매매 업소는 대형화되었고 각 업소 영업 방식이 세분화되고 등급화되면서 성매매 산업의 경제 규모가 팽창했다. 룸살롱은 더 이상 화이트칼라 남성들만 찾는 장소가 아니라 모든 계층 남성들의 놀이터가 되어야 했고, 룸살롱은 가격 수준, 접대 여성들의 외모 등급과 제공하는 성적 서비스의 범주에 따라 세세하게 등급화되었다.
오늘날의 등급화된 성매매 산업에는 여성들의 이동을 끊임없이 권장하는 브로커와 성형, 헤어, 의상 등의 상인이 함께 포진해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몸에 더 많이 투자한 여성'이 높은 등급에 속하므로 주변의 상인들에겐 이익이다. 그 결과 여성들은 쉴 새 없이 업소를 이동하며, 잠시 해외 업소로 이동하기도 한다. 바로 '원정녀'의 탄생이다.
페미니스트 정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자.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는 여전히 민족주의적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다. 가해자는 '우리' 민족 외부에 있다고 가정되어 규탄되면서 식민지 피해자로서 '우리'는 더욱 결속된다. 물론 가해국 일본을 규탄하고 그들의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는 활동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 '우리'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위안부' 문제의 핵심에 가 닿을 수 없을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험은 전시 일본군에 의해 제도화된 성폭력 사건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4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 피해를 경험하고도 말할 수 없던 그 시간 동안의 삶의 경험도 피해를 구성하는 일부다. 그렇다면 현재의 민족주의적 방식의 '위안부' 기억 활동을 통해 '우리'가 결속되는 데 정작 누락되어 있는 것들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험일 것이다.
사랑과 연애의 사이
우리 모두는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 그래서 사랑과 연애라는 이슈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우리가 순수한 감정으로 여기는 사랑과 연애 이면에 권력과 폭력이라는 어두운 면이 자리잡고 있다. 책은 이와같은 사랑과 연애가 어떻게 우리 사회에 자리잡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여성학 입문서인 셈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그때의 사건 사고를 통해 페미니즘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