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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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공지영은 1990년대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여성 작가의 한 사람으로, '좋은 세상'을 꿈꿨던 1980년대 젊은이들의 문제의식과 가부장제의 잔재를 털어버리지 못한 우리 사회의 여성 현실을 끌어안고 그 특유의 진지함으로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녀는 어릴 때의 꿈은 고아원 원장이었다. 시와 소설을 써서 혼자서 문집을 만들면서 사춘기를 보냈을 만큼 문학적으로 조숙했다.

 

 

 

 

대학 졸업 후,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전화도 받고 문인들에게 커피 대접도 했다. 출판사 생활을 거쳐 1986년 가을 '시나 쓰는 교수가 되어 삶을 편안하게 보낼 요량'으로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고전에 치우친 강의만 듣고 앉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를 그만 두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87년 11월 구로공단 인근의 한 전자부품제조회사에 취업, 1일 2교대의 고된 작업을 했지만 한 달 만에 프락치에게 걸려 강제 퇴사. 이어 12월 대통령 선거 때는 구로을구 개표소의 부정개표 반대시위에 참가했다가 용산경찰서로 끌려가 구류 1주일을 살았다. 이 때의 경험을 토대로 쓴 중편 <동 트는 새벽>이 계간 <창작과 비평>88년 가을호에 실리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작가의 80년대에 대한 태도는 세월이 흐르면서 일정한 변화를 겪었다. 초기 작품에서는 당시의 `혁명적 열정`을 그대로 받아안고서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태도였다면, 그 후로는 차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소설에는 여전히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애정이라든지, 중산층의 허위의식에 대한 폭로라든지, `좋은 세상`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는 면면이 유지, 발전되고 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주인공인 요한 신부가 베네딕도 수도회의 젊은 수사이던 시절, 마치 파도처럼 자신을 덮쳐온 사랑과 이별을 통과하며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회상의 형식으로 담았다. "고통은 왜 있는 것이며 인간은 왜 존재하는지, 사랑은 무엇인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화두로 던지면서 스토리의 전개는 가톨릭 수도회와 한국전쟁의 흥남철수 사건을 두 축으로 삼아 신의 뜻에 순명順命해야 하는 수도자들과 전쟁에 휩쓸려 삶의 갈피를 잃어버린 이들의 삶을 투영해 인생의 봉우리를 넘는 순간 우리를 일으켰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묻는다.

 

 

성 베네딕도회 W시 수도원의 일원인 정요한 신부는 호출을 받고 찾아간 사무엘 아빠스(대수도원장)로부터 10년 전에 만났던 소희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소희는 아바스의 조카로 수도원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는데, 요한이 사제 서품을 받기 전 그녀와 서로 사랑했지만 갑작스럽게 이별했던 기억, 형제처럼 가까이 지냈던 미카엘과 안젤로 수사를 불의의 사고로 잃은 일 등, 자신의 삶을 뒤흔든 커다란 사건들에 의해 수도자의 삶을 놓아버릴 뻔했던 순간들을 되돌아본다.

 

우리의 생을 뒤바꿔버린 사건이나 시간들을 통틀어 떠올려보면 그때는 보지 못했던 징후들이 마치 영화의 티저 영상처럼 삶의 거리 여기저기에 깔려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살갗에 닿는 바람결로 봄을 느끼기 전에 이미 여기저기서 조그만 들꽃의 싹이 피어나고 뜻밖에도 양지쪽에 보랏빛 제비꽃이 피어난 걸 보게 되듯이. 몸이 봄을 느끼기 전에 봄의 징후들이 도착하듯이.

그 징후들이 가지고 온 사명의 기호가 해독되는 것은 이미 사건이 종료되고 나서이거나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때라는 것이 삶의 비극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난 후에 다시 돌아보면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스포트라이트는 늘 우리가 그렇다고 믿었던 그곳 말고 엉뚱한 곳을 비추고 있었다.(46쪽)

 

 

 

신부 서품을 앞둔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의 요한 신부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의 가슴 아픈 사랑, 아니 설렘 가득한 첫사랑의 이야기가 도입부에 펼쳐진다. 김소희, 소희 데레사. 그녀를 떠올리면 불암산, 요셉 수도원, 흰 배꽃 등이 연상되면서 헐렁한 완두콩빛 스웨터에 무릎까지 오는 나풀거리는 흰 스커트를 입고 납작하고 세련된 연두빛 데크 슈즈를 신었던 장면이 금새 그려진다.

 

요한이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다른 수사와 배꽃 사이를 거닐고 잇엇다. 어깨까지 오는 생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어댈 때 비록 먼 거리였지만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던 가는 흰 손가락마저 보일 정도였다. 이렇게 첫 장면은 마치 스냅사진을 찍은 것처럼 요한 신부의 무의식 밑바닥에 저장되었다. 당시 요한은 할머니의 수술 소식을 듣고 서울에 온 김에 잠시 요셉 수도원에 들렀던 것이다.

 

사랑과 종교적 신념 간에서 흔들리는 젊은 수사, 점차 밝혀지는 과거의 비밀 등이 이 소설의 흥미를 증폭시켜 나간다. 요한과 소희, 미카엘과 그의 여자 친구 등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 수도사들의 인간과 신을 향한 사랑 이야기, 그리고 인간이 인간에 대한 사랑 이야기가 이 소설의 테마이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우리 인간사에 사실 사랑을 빼면 뭐가 남겠는가.

 

서품을 앞둔 사제의 사랑은 금지어다. 하지만 사제도 한 사람의 인간이다. 인간이 사랑에 빠진다면? 그렇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찾어온 사랑 때문에 요한 수사는 사제의 길을 중도 포기하고 수도원을 퇴소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날 함께 진한 우정을 나누었던 수도원 입회 동기 두 명이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새벽시간의 교통사고였다. 더구나 허락도 받지 않고 수도원 차량을 몰고 나갔던 결과였다.

 

 

 

책을 접하고 소설의 제목을 보자, 공지영 작가가 카톨릭 신자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는 '야곱의 사다리'를 의미하는 걸로 처음엔 이해했다. 구약성서 창세기 28장엔 야곱이 꿈에서 사다리를 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사다리는 그냥 사다리가 아니라 하늘까지 닿아 있었고, 그 꼭대기엔 하나님이 계셨다고 한다.

 

한편, 이 사다리 위엔 수많은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천상과 인간계를 왕래하고 있었다. 마치 바벨탑이 하늘에 닿고자 수백 개의 계단을 위로 높이 쌓았다는 신화처럼, 인간은 이렇듯 하늘에 닿고 싶은 갈망이 있었나 보다. 야곱의 할아버지는 바빌론 문명기에 생존했던 분인지라 당연히 바벨팁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터. 아무튼 야곱은 멀리 떨어진 외삼촌 집으로 향하던 날 밤에 꿈 속에서 사다리를 보았다. 말하자면, 이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자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높고 푸른 사다리'는 야곱의 사다리와 무관하다.

 

어느 날, 미카엘 수사와 오래동안 사귀었고 한때 결혼까지 약속했던 여성이 수도원을 찾아온다. 미카엘은 이곳 수도원과 정서적으로 맞지 않다면서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전화를 여러 차례 받고서 그를 데리러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카엘은 이 여인을 돌려보낸다. 요한은 그 여성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고, 사무실의 전화기에 귀를 대보았다. 소희를 떠올린 것이다. 이후 그는 성당 안의 어둠 속에서 홀로 주님과 마주했다.

 

"사랑하라, 요한. 사랑하라"
목소리는 나의 단전 깊숙한 곳으로부터 마음으로 울려 나왔다. 온몸으로 전율이 지나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그것이 그분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것이 그녀를 사랑하라는 그분의 허락이며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신 분이 그분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스물아홉 해를 살아와 이제는 내 피부처럼 변한 내 이성理性의 검은 옷이 확신을 막았고 나는 잠시 혼란 속에서 그 목소리를 의심했다.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나가 놀아도 좋다는 허락을 갑자기 받은 수험생처럼, 뜻밖의 휴가를 명령받은 군인처럼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되물었다. 방금 사랑한 것은 당신이 아니었다는 고백도 잊어버리고 나는 실은 겁에 질려 있었다. 십자가의 실루엣 뒤로 희뿌연 빛들이 어렸다. 귀가 멍멍했고 십자가를 제외한 모든 사물은 깊은 어둠 속에 잠겼는데 다시 소리가, 낮고 작고 인자한 소리가 내 마음으로 울렸다.
"내가 그녀를 네게 보냈다. 사랑하여라, 요한" (133쪽)
     

 

 

 

"사랑하라"고 말하면서도 사랑하는 이들을 앗아가는 잔인한 신 앞에서 낙담하던 요한은 할머니로부터 50여 년 전 한국전쟁 때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할아버지와의 일화를 듣게 되고, 수도원 인수 논의를 위해 방문한 미국의 뉴튼 수도원에서는 한 척의 수송선으로 흥남부두의 1만 4천 피난민을 구해낸 마리너스 수사를 만나게 되면서 이 땅에 내리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의미를 알게 되는데.

 

탈북을 시도하는 요한의 할머니는 임신한 채 흥남 부두에서 마치 구원과도 같았던 파란 그물 사다리를 목격했다. 소설의 제목이 말하는 바로 그 '높고 푸른 사다리'인 것이다. 1950년, 한국동란 발발로 인해 북한 땅 흥남 부두에서 수만 명의 피난민을 태운 선장이 있었다. 마치 그런 인연이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그 선장이 바로 뉴튼 수도원을 찾아온 마리너스 수사였다.

 

 

 

한편, 토마스 수사로부터 요한 루드비히 신부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키가 아주 컸던 그는 팔과 다리도 길었고 참으로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영양실조와 중노동으로 인해 젊은 신부는 발이 퉁퉁 부어올라 잘 걷지 못했고, 복수 때문에 배가 늑골 아래로 심하게 부풀러 올라 숨 쉬기조차 어려웠다. 결국 그는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물이 되었다. 북한에 선교활동을 나온 독일 선교사들은 지금의 북한 자강도 옥사덕 수용소로 끌려갔던 것이다. 수용소의 소장은 요한 신부를 특별히 미워했다. 나치의 아우슈비츠와 흡사했다. "저들은 왜 우리를 미워하고 괴롭힐까?"

 

"요한 수사님, 악은 수많은 얼굴로 다가옵니다. 사실 사람인 우리가 그것을 식별하는 것은 은총에 의지할 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도 있어요. 우리가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모든 사랑을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모든 폭력, 모든 설득, 모든 수사는 악입니다"(250쪽)

 

 

 

 

이후 서독 정부가 북한과 협상해서 옥사덕에 억류되었던 그들을 본국 독일로 데려 왔다. 요한 신부가 죽고 네 번의 겨울을 더 견딘 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몇 개월 후 다시 한국으로 돌이왔다. 신기하게도 살아남아 본국으로 귀국했던 사람 누구도 한국으로 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W시에 인쇄소를 세우고 출판사를 세우고 소시지를 만들고 포도주를 담갔다. 지금 토마스 수사는 누워서 죽을 받아먹는다. 울음이 차올라 요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토마스 수사가 이런 모습을 보고 안쓰러운 듯 반응햇다. 

"요한 수사님, 슬퍼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그 앞에서 아무것도 감추고 싶지 않았다. 나도 어린아이처럼 담백해지는 듯했다. 나는 눈물이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토마스 수사님은 조용히 죽 그릇을 물렸다. 눈물을 닦지도 않고 내가 물었다. "왜 돌아오셨습니까? 이 죽음과 고문의 땅에? 그리고 왜 떠나지 않으셨습니까? 잔인한 신을?"(305쪽)


"사랑했으니까요"
"하느님도 한국도. 사랑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게 아니니까요. 사랑은 가실 줄을 모르는 거니까요"

 

 

 

 

인연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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