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사람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정말로 우리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그 수많은 흔적들이 밤하늘의 별 만큼이나 빼곡해서다. 특히, 무에서의 유를 창조한 환희에 찬 기쁨은 마치 나의 일인양 온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눈가는 어느새 촉촉해진다. 그리고 그 성공에 대해 무한한 박수를 보내며, 나도 할 수 있다고 주먹을 불끈 쥐게 한다. 어쩌면 자기계발 도서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이 도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흙수저 중의 흙수저라고 해도 전혀 틀리지 않는 저자의 과거와 마침내 꿈을 이룬 그의 성공 스토리 때문이다. 심지어 요즘 세태는 '개천에서 용이 결코 나올 수 없다'는 그런 분위기임에도 그는 창업자금 100만 원으로 연 매출 100억 원의 회사를 일구었으니 말이다. 마치 월트 디즈니의 동화 속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런데, 책의 출발은 흥미롭다. 그에겐 꿈이 없었으며, 꿈이라기 보다는 생계를 위한 절박함으로 가득 찼다고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코흘리개 꼬마 시절부터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꿈이라기 보다 생계를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었다. 한 여자의 남편이 되고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을 굶겨서는 안된다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만 있었을 뿐 '꿈, 도전, 성공' 등은 나와는 거리가 먼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예상치 못한 길을 열어주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과 함께,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절박함이 그를 '사업'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밤 새워 울어본 사람만이 인생을 논할 수 있다"
- 괴테
오랫동안 어렵고 힘든 시간을 견디어왔기에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인생은 결코 행복과 불행, 기쁨과 좌절, 희망과 절망이 각각 혼자만 오지 않는다는 것을. 목표를 이루었을 때 다시금 난제가 나타나고, 정상에 올랐을 때 막다른 길이 나올 수도 있다. 그림자처럼 꽁무니를 따라다니던 불행이 세월의 흐름 속에서 행운의 여신으로 서서히 변할 수도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21쪽)
저자는 충남 논산의 한 시골마을에서 출생했지만 이곳의 기억은 전혀 없다. 그의 기억 속엔 어머니도 존재하지 않는다. 갓난아기 때 가출한 엄마는 이후로 끝내 돌아오지 않았기에. 이후 그의 아버지는 술에 찌들어 살았다. 그러니 당시 삼 남매인 그의 가족은 하루 세끼조차 먹지 못하고 굶는 게 일상이었다. 그는 길바닥의 개똥을 집어먹고 배탈이 난적도 있었다.
여덟 살 이후 서울 상계동 산속의 무허가 움막집에 살면서 비로소 그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말소된 주민등록이 회복되었던 탓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밤이면 남폿불에 의지해야 했고, 밥은 나뭇불로 해먹야 했다. 당시의 상계동은 산과 들이 펼쳐진 농촌 마을이었다. 여름엔 산딸기를 다 먹고, 개울에서 가재를 잡으며 놀았다. 친구들 대부분 가난한 집 아이들이라서 움막집 살이가 별로 창피하지도 않았다. 4년여 동안 이어진 상계동 생활은 그의 가족에 변화를 초래했다. 아버지가 처녀인 새엄마를 얻었고, 두 동생이 생겨났던 것이다. 새엄마는 참으로 다정한 분이었지만,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가출하고 말았다.
"철이 들면서 나는 아버지와 정반대로 살겠노라 다짐했다"
늘 술에 취해 신세만 한탄하던 아버지, 그는 이런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그는 주도적인 삶을 살았기에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일했다. 스스로 세 가지를 다짐했다. 술과 담배 끊기, 연애 사절, 그리고 친구와의 교류금지 등이었다.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처음으로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당시 월급 300만 원이면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사채 빚 갚기로 인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격이었다. 삶이 너무 힘들어 그는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공사장에서 철근더미가 무너져서 그를 덮치는 바람에 병원 신세를 진 뒤, 대학 입학을 목표로 삼아 약 1년간 입시준비를 했다. 수능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몇몇 대학에 합격가능한 점수였다. 그러나 그는 또 대학 입학 대신에 현장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알코올중독 상태였고, 두 동생들이 점점 비뚤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으로서 중심을 잡아야만 해서였다.
구인공고를 살피던 중, 청계천 기계 상가에 있는 회사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지참해 곧장 달려갔다. 우여곡절 끝에 이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몇 달 지나서 그는 회사 업무에 대해선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단골 거래처에서도 사장 대신에 그를 찾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데, 회사는 무리한 확장으로 유동성 위기에 빠지고 사장은 잠적, 외상으로 납품하던 거래처들이 그를 찾아와 난리를 쳤다. 책임감을 갖고 뒷처리를 꼼꼼하게 했다.
1995년, K인터내셔널의 사장이 평소 그를 눈여겨 보다가 함께 일하자고 제안해 왔던 것이다. 이 회사는 기계 관련 무역 및 유통 회사였다. 입사후 10여 년간 몸담고 있으면서 회사를 빠른 속도로 회복시키고 성장시켰다. 첫 직장과 마찬가지로 기술업무와 관리업무를 도맡아 전천후 역할을 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을 만들면서 보람을 느낀 반면, 더욱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함을 느껴 주경야독으로 서울산업대학교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하지만, 사장은 야간 학업도 회사일에 지장이 있다면 당초 약속을 뒤엎어버렸던 것이다.
2004년 11월, 그는 새로운 업체로 자리를 옮겼다. 이 회사는 독일 슬립링 제조사의 한국 판매사인 T무역이었다. 슬립링이란 제조업 자동화 장치에 필수적인 부품으로, 회전하는 기계장치에 전선의 꼬임 없이 전류를 원활하게 공급해주는 역할을 한다. 놀이공원에서 흔히 보는 접시 모양의 회전체,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설비 등에 다양하게 활용되는 부품이다. 그는 혼자서 기술개발해 독일산 슬립링 완제품에 전혀 손색이 없는 제품을 완성해 이를 기존 거래처에 권했다. 가격은 1/10 수준이엇다. 하지만 사장은 이에 태클을 걸었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아내가 위로하는 말이 "당신은 자기 사업을 해야 돼"였다.
T무역을 퇴사하고 슬립링코리아를 창업하기 전까지 M산업에 근무했는데, 그는 회사의 기술연구소장으로서 개술개발에 모든 역량을 쏟았다. 국가에서 지원하는 기술개발 지원사업에 참여, 중소기업청에서 지원하는 기술지원자금 1억 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시도도 해보지 못했다. 회사 대표가 이 자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창업하기 몇 달 전 그는 경매입찰에 나서 4,300만 원짜리 연립주택을 마련했다. 전 재산이 100만 원인 상황이었다. 가장 효율적인 자금운용 전략이 필요했다. 그는 한 지인의 공장 한 칸을 얻어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30만 원 조건을 내걸었다. 수중에 있는 돈으로 보증금 일부를 내고 나머지는 벌어서 갚겠다고 했다. '슬립링 국산화' 프로젝트가 마침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슬립링코리아는 매년 두 배 넘는 매출신장을 했다. 10주년인 2017년 연 매출 100억 원을 돌파했다.
일반형슬립링(출처:슬립링코리아 홈페이지)
높은 담장 너머로 펼쳐진 드넓은 바다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