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 아카넷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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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2008년의 금융위기는 단지 미국만이 아닌 전 세계가 함께 겪은 위기였으며 다만 그 근원지가 북대서양을 중심으로 한 국가들이었을 뿐이다. (중략) 이러한 상호의존성의 규모와 달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세계 금융시스템을 분명히 밝혀내는 작업은 (중략) 위험천만한 현재의 상황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 '들어가는 말' 중에서

 

 

금융위기 이후 10년,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책의 저자 애덤 투즈는 현대 경제사 연구 분야의 손꼽히는 학자로 평가받으며, 최고 권위의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가 발표한 '세계의 사상가 100인'에 선정되었다. 그는 1967년 런던에서 태어나 영국과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서 성장했다.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고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대학원 연구를 시작하면서 베를린장벽이 철거되고 냉전이 종식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후 런던정경대에서 경제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케임브리지대학교와 예일대학교를 거쳐 지금은 컬럼비아대학교의 역사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편, 역작으로 평가받는 <대재앙: 1차 세계대전과 국제질서의 재편 1916-1931>(2014)에서는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10년 동안 미국의 권력을 중심으로 국제질서가 어떻게 재편되었는지를 서술했다. 그는 울프슨상과 롱맨히스토리투데이상을 비롯한 다수의 상을 수상하고, "위대한 역사가의 탄생"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파이낸셜타임스>, <LA타임스>, <포린어페어스>, <이코노미스트> 등 세계 유수의 언론에 의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차지했다.

 

저자는 금융위기 이후 10년의 역사가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정치적 "이단아" 트럼프의 당선으로 끝맺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결국 1980년대 중반부터 지속된 세계 경제가 크게 안정된 시기(대안정기)는 결국 미증유의 금융위기를 만나면서 정치적 위기로 변모했다. 세계적으로 민족주의와 외국인 혐오의 분위기를 공통분모로 하는 극우 정파가 세를 불렸고 프랑스와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온건한 좌파가 몰락했다. 특히 서구사회에서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 정치가 고개를 쳐들었다. 이런 정치적 변화의 배경에는 은행과 채권자에 유리한 구제금융 방식이 추진되고 위기 대응의 실패가 누적되면서 재정긴축에 따른 복지 프로그램 축소 등으로 삶의 고통이 가중된 대중이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와 통화스와프 협정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사태로 인해 촉발된 리먼쇼크는 미국의 일로만 그치지 않았다. 이는 글로벌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사실상 지구촌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세계1위의 경제대국이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현상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지금도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 금융과 투자 관련 비즈니스를 하던 나는 20주년 결혼기념여행으로 스페인에 가있다가 연락을 받고 급히 귀국했었다.   

 

아이로니하게도 2008년에 가장 위기에 몰린 나라는 10년 전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이었다. 당시 한국은 외환보유고도 충분했고 무역실적도 호조를 보이던 때라 한국과는 상관 없을 줄 알았던 미국의 금융위기가 유탄이 되어 한국 금융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국 경제를 떠받들던 수출전문 재벌인 현대, 삼성, 대우 등이 갑작스레 충격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상관없는 금융위기이 유탄을 맞은 셈이다"

 

아시아 지역에서 한국만 유별나게 동유럽이나 러시아처럼 취약한 모습을 보였던 건 한국의 금융시스템이 전 세계와 하나로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10년 전, IMF 외환위기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한국이기에 이후 외환보유와 축적에 공을 들여 당시 외환보유고가 2,400억 달러나 되었음에도 한국의 금융 시스템이 가진 약점은 극복될 수 없었다.

 

 

2000년대 초반 이후 동북아시아 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하려는 기치를 내걸었던 한국은 통화와 자본의 흐름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이에 한국 금융업의 상당 지분을 해외투자자들이 보유할 수 있었고, 한국의 은행들은 글로벌 달러시장에서 단기로 저리자금을 빌려와 한국 국내에서 장기로 고금리 대출을 하고 있었다.

 

반면,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환율에 맞서 지키려는 재벌들의 고민이 생겼던 것이다. 이에 달러를 빌려 한국 자산에 투자하고 나중에 환율이 유리할 때 이를 상환한다면 충분한 이익이 생길 수 있었다. 이런 계산하에 한국 기업들이 단기로 차입한 돈이 2008년 6월 기준 무려 1,760억 달러에 달했다. 여기에다 금융업계가 상환해야 할 채무는 800억 달러로 2009년 여름까지는 상환을 연장해야 할 형편이었다.

 

리먼쇼크로 인해 단기성 달러화 대출시장이 그 기능을 멈추자 달러화의 가치는 급등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원화와 달러화의 환율 차이를 이용한 캐리트레이드는 갑자기 역방향으로 움지기이기 시작함으로써 한국 기업들은 손해를 막기 위해 발버등치게 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원화 가치는 폭락해 외환보유고조차 심리저지선인 2,000억 달러 선에 간당간당하는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 당시 금융으로 돈을 벌던 아이슬란드는 국가부도 위기까지 내몰렸다.

 

"2008년 여름에서 2009년 5월 사이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은 1000원에서 1600원이 되었다"

 

2008년 가을, 한국 기업들은 위기 탈출에 나섰다. 포스코, 현대차, 삼성전자 등 주요 수출업체들은 수천만 달러를 외환시장에 쏟아부었다. 원화에 대한 압력을 늦추기 위해서였다. 한국 국민들은 애국심의 발로로 달러 저축을 원화 방어에 활용하려고 환전소에 줄을 서는 풍경을 연출했다. 한편, 한국은행은 외환시장에 적극 개입해 원화 붕괴를 막는 노력을 벌였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도움은 나라 밖에서 도출되었다. 10월 30일 한국은행은 미연준과 3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협정을 체결했다고 발표한다. 비로소 외환시장은 공포로부터 벗어났고, 타격을 입은 금융 부문도 복구를 위해 2009년 초 한국 정부는 550억 달러를 은행간 대출용으로 추가 지원하고, 별도로 부실채권 대비용으로 230억 달러를 책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민주주의가 붕괴되다

 

2011년 10월 말, 글로벌 금융위기의 후유증은 정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즉, 그리스의 정치제도는 와해되고 있었다. 실업률이 2008년 8퍼센트에서 무려 19.7퍼센트까지 치솟아 그리스 국내의 분위기는 험악해지고 있었다. 이런 위기가 시작되자 정치적 계산에 빠른 야당은 해외 채권단의 요구에 맞서려는 정부에 전혀 협력하지 않았다. 2009년 10월,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이 정권을 잡은 후 긴축조치가 실시되자, 그리스 전역은 대규모 시위와 함께 총파업이 발생했다. 

 

한편, 재정위기는 이탈리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IMF 긴급자금의 수혈이 필요했다. 실제로 IMF는 800억 유로 규모의 지원책을 제안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프랑스와 독일 정부는 당시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를 자리에서 끌어낼 계획이었으며, 때맞춰 그가 이끄는 내각도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연정 상대인 북부동맹당은 유럽과 IMF가 요구하는 연금제도의 개혁에 협조하지 않았다. 결국엔 유럽공산당원이란 평가를 받는 조르조 나폴리타노 이탈리아 대통령도 베를루스코니에게 사퇴를 종용했다.   

2011년 11월 중순, 정치 경력이 전무한 두 남자 루카스 파파데모스(그리스)와 마리오 몬티(이탈리아)가 각각 두 나라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바로 시장 친화적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민주주의를 무너트린 건 정부간 협력주의에 대한 독일 측의 끈질긴 고집과 거대한 재정적 통합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결합된 결과였다. 베를린의 메르켈 총리 주변에서는 어느 누구도 시장의 강압적인 위력에 대해 비통해하지 않았다.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미국보다 정권교체를 더 잘해낸다"는 자랑 섞인 이야기가 나돌았다.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

 

영국의 국민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영국의 파운드화응 일일 기준으로 역사상 최대의 폭락을 기록했다. 글로벌 주식시장에선 2조 달러 규모의 주가가 증발하고 말았다. 혼란이 있었지만 일시적이었다.  그랬다. 영국의 국내 경제는 어떤 파국도 경험하지 않았다. 브렉시트의 찬성파는 자유와 주권, 그리고 지배구조의 변화를 약속했다. 그렇다면 이후 영국은 누가 지배할까?

 

영국 국민 대부분은 유럽연합 잔류를 찬성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잔류파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찬성파조차도 자신들의 승리를 점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몇 주의 혼란을 거쳐 테리사 메이가 새로운 수상으로 등장했다. 영국 대기업들과 시티는 국민투표 결과에 대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각종 유로화 파생상품을 포함, 유로화 거래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시티는 브랙렉시트 이후에서도 글로벌 금융과 유로존 사이를 이어주는 중심축 기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시티는 런던에서의 금융 시업은 유로존에서의 사업과 사실상 동일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기존 합의를 유지하기 위해 총력으로 다해 정부에 로비활동을 펼쳤다.

 

시티에서 의뢰한 연구조사에 따르면 만일 기존 합의를 계속 유지하지 못한다면 유로존과의 각종 사업이 무너지면서 영국은 320억~380억 파운드가량의 세금 손실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일자리도 6만 5000~7만 5000개가 사라져 역시 연간 100억 파운드에 달하는 소득세 수입 손실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잔류파들이 국민투표 실시 전 이와 비슷한 연구결과를 제시했을 때는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렇다면 과연 국민투표가 끝난 지금은 어떨까? 

 

 

위기에 빠진 경제대국 미국

금융위기로부터 6년, 활동적이고 헌신적인, 그리고 "강력한" 대통령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의 열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평가로, 후한 평가와 감탄은 냉혹한 적대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바로 이런 태도의 변화가 보수우파와의 접점을 만들어주었다. 선정적인 3류 언론들이 만들어내는 터무니없는 소문과 음모론을 통해 트럼프는 보수우파와 같은 길을 걷는다.

 

2014년, 트럼프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장벽"을 세우자는 계획을 자신의 대표 공약으로 내세웠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자신의 전매특허로 만들었다. 민족주의, 외국인 혐오 등 미국의 현재 상황에 대한 절망적인 진단은 마침내 우파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그의 구호는 큰 인기를 끌었다. "우리의 미국이 위기에 빠졌다!" 현재까지에도 트럼프의 선동적인 포퓰리즘 정치는 계속 진행형이다. 최근엔 미중 무역갈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북한과의 관계개선도 은밀하게 밀약 중이다. 단지 염려스러운 것은 지나치게 자국 이익주의에 치중한다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역할은 뒷전이다.

 

 

 

 

스스로 갈 길을 찾아야 한다

 

저자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 책을 읽고 국내의 질서는 물론이고, 국제질서가 어느날 갑자기 흔들릴 수 있는 작금의 상황을 염려하면서 "스스로 갈 길을 찾는 데 도움을 얻었으면 한다"라고 자신의 작은 바람을 내비친다. 외환보유고가 세계 최고 수준이고 무역수지도 흑자 중임에도 미국발 리먼쇼크에 의한 금융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한국 경제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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