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cm로 싸우는 사람 - 최초의 디자인 회사 ‘바른손’ 50년 이야기
박영춘.김정윤 지음 / 몽스북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바른손 창업주 박영춘 회장의 50년 기업 경영 스토리를 그 뼈대로 하고 있다. 국내 1세대 경영자 중에서는 지금까지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이기에 그의 디자인 창업 스토리는 기록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 기업가가 자기표현의 수단으로서 회사를 경영할 때 어떤 창조적인 인생을 살게 되는지 알 수 있는 답안지다. - '프롤로그' 중에서

 

 

디자인 기업 바른손의 경영 이야기

 

박영춘 회장은 1939년 춘천에서 출생하여 강원대학교를 졸업했다. 인쇄업이 최신 산업으로 각광받던 1968년, 서울 을지로에서 다른 사람 사무실의 한 귀퉁이를 빌려 인쇄에 들어갈 글씨나 문양을 금속으로 조각하는 일을 시작한다. 1970년 카드 사업 첫해에 '바른손'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연하장이 130만 장 가까이 판매되면서 을지로 인쇄업계의 블루칩으로 떠오른다. 디자인 산업이 전무하던 한국 산업계에서 남다른 미적 감각으로 전에 없던 디자인 카드를 선보이며 시장을 석권한 것이다.

1980년대 들어 바른손팬시로 영역을 확대해 문구 시장에도 파란을 일으키며 20년 가까이 업계 1위를 고수했다. 바른손의 성업으로 인해 국내에 모닝글로리, 아트박스 등이 생기고 팬시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다. 토건 시대에 먹히던 경영 철학을 고수하는 기업가들 틈바구니에서 그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으며 국민 브랜드 바른손을 탄생시켰고, 그 시절 아이들의 일상을 바른손 카드와 문구의 다채로운 디자인으로 채워갔다.

 

1998년 IMF 사태 이후 바른손팬시가 부도 처리되었으나 박 회장은 60세의 나이에도 기업가 정신을 가슴에 품고 온라인 사업, 중국 진출 등 끊임없는 도약을 시도한다. 현재는 박 회장의 자녀들이 국내 카드 1위인 바른컴퍼니, 아트 프린팅 기업 비핸즈, 중국 상하이 법인 위시메이드를 운영하고 있으며, 그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강원도 인제의 산속에 집을 짓고 자연과 호흡하며 살고 있다.

 

 

 

 

을지로 인쇄골목의 떠오르는 스타

 

1970년대의 인쇄업은 오늘날의 IT처럼 각광 받는 미래형 산업이었다. 을지로 인쇄골목은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동네였다. 그즈음 국내 최초의 주상 복합 아파트인 풍전상가도 이곳에 들어섰는데, 에스컬레이터도 설치되어 있고 스파게티를 취급하는 양식당이 들어설 정도로 최신 트렌드가 집약되어 있었기에, 당시의 힙스터들이 을지로로 속속 모여들어 경쟁이 치열했다.

 

상경한 지 3년 째인 1970년, 박영춘은 풍전상가 1층에 넓은 사무실을 얻을 정도로 꽤나 잘나가는 인물이었다. 그 시절은 활판 인쇄를 하던 때라 손재주가 좋은 그가 금속판 조각에 있어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평판도 좋았다. 그래서 한국화장품, 태평양화학 등 뷰티 업계에서 그를 자주 찾았다. 이 때의 조각 사무실 이름이 바로 '바른손'이었다.

 

그 시절, 새해 인사는 연하장이 활용되었다. 이에 박영춘은 연하장에 디자인 개념을 넣으면 승산이 있겠다고 판단했다. 비로소 카드나 연하장은 메시지를 전하는 종이일 뿐이라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에너지가 움트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에게 새로운 디자인을 제품화할 수 있는 뛰어난 조각 기술이 없었다면 이런 아이디어는 구체화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해 연말, 바른손카드는 시장에 파란을 일으켰다. 첫해에만 연하장 130만 장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가 만든 카드를 사기 위해 직접 찾아온 도매상들이 을지로3가 건물 3층에 있던 사무실 복도부터 1층까지 빙 둘러 줄을 섰다. 마치 아이돌 그룹의 캐릭터 문구 상품을 사기 위해 한겨울 새벽부터 줄을 서는 수백 명의 소녀들처럼 말이다.

 

박영춘 회장의 젊은 시절

 

 

성공의 키워드, '아름다움과 정교함'

 

춘천에서 상경,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금속 조각공으로 인정받고, 바른손이라는 디자인 카드 및 문구 기업을 성공으로 이끈 박영춘 회장의 성공 비결은 아마도 '아름다움과 정교함'일 것 같다. 남보다 더욱 아름답게,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완벽하게 제품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한 번 볼 것을 수십 번 보고 또 보고, 고치고 또 고치는 그 과정 자체에 성공이 이미 녹아들고 있었다. 

 

회사의 성공 가도엔 직원수의 증가도 뒤따른다. 35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사로 성장하면서 모든 것이 잘 풀릴 것 같은 때에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이 맞기라도 하는 듯 뜻밖의 사건이 발발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었다. 갑자기 정국의 불안감이 팽배해지면서 시장 또한 경색되기 시작했다. 때마침 큰돈을빌려 사업규모를 확장했던 바른손카드의 자금 흐름에 치명적이었다. 마침내 1981년 바른손카드는 부도를 맞았다.

남보다 반보半步 먼저 트렌드를 파악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삼성, LG, 대우 등 대기업을 제외하고 디자인실을 따로 둔 회사가 없던 시절, 박 회장은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을 시도한다'는 슬로건 하나만으로도 창작하고자 하는 디자이너들의 욕망을 건드린 것이다. 전혀 새로운 분야, 전혀 새로운 시스템, 전혀 새로운 목적으로 무장한 바른손팬시는 1983년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제조 공장 없는 제조 기업

 

바른손팬시는 설립 첫해에 손에 휴대할 수 있는 작은 다이어리와 노트를 출시했다. 출시되자마자 20만개가 팔렸다. 1년 후 디자이너를 10명으로 확충하고 다이어리 노트 등 종이 제품, 봉제 인형, 포장지, 잡화 상품 등으로 상품 구성을 확대해 나갔다. 수입 디자인 문구만큼 뛰어난 디자인에 적절한 가격대로 출시된 바른손팬시 상품은 소비자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가히 성공적인 데뷔전이었다.

 

처음부터 바른손팬시는 자체 제조 공장이 없었다. 디자인 기획안을 갖고 고품질 제품을 함께 만들어나갈 협력 업체를 발굴, 이들에게 제조를 맡겼다. 하지만 엄격한 품질관리와 유통, 판매 등 모든 과정을 바른손팬시가 컨트롤했다. 자체 공장도 전무한 상태에서 첫 해부터 큰 매출액을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은 관련업계 종사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바른손팬시가 시장을 강타하고 나서야 사람들은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하구나!'를 깨달았다. 당시만 해도 독자적인 디자인을 개발하는 회사는 거의 없었고, 눈동냥과 귀동냥 만으로 디자인을 흉내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본 캐릭터를 살짝 베껴서 토끼 귀를 좀 길게 한 다음 리본을 붙이는 방식으로 소위 '짝퉁' 상품을 양산했다. 사용하는 색깔도 빨강, 파랑, 노랑, 검정 등 몇몇 원색이 고작이었다. 몇몇 현력업체들이 전담팀을 구성, 이런 형태로 팬시 사업에 도전했지만 도저히 바른손팬시의 디자인 감각을 따라집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집념

 

바른손팬시의 사업목적은 단순히 디자인이 좋은 상품을 만들어 판다는 데 그치지 않고 소비자들, 특히 아이들이 아름다움에 대해 눈을 뜨도록 하겠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바른손팬시 자체 캐릭터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풀어낼 수 있도록 했다. 박 회장은 늘 아름다움 그 자체를 즐겼다.

 

'올해 어떤 상품이 히트 칠까'를 두고 다 같이 투표를 한 뒤 결과를 보면 박 회장의 적중률이 가장 높았다고 한다. 그는 트렌드를 감지하는 능력이 거의 동물적이라 다른 사람이 뭘 원하는지 실무자보다도 제일 정확하게 알았다. 프로 디자이너보다 더 예리하고 정확하게 디자인을 짚어내고, 섬세하게 수정을 지시하는 감각이 놀라운 수준이었다고 디자인 고문은 회고한다.

 

바른손팬시가 처음 생길 때만 해도 '디자이너'가 아니라 '도안사'라고 불렸다. 대부분의 기업이 외국 제품의 디자인을 베끼기 바빴는데, 바른손은 자체적으로 디자이너를 모집하고 직접 교육시켜서 시장을 선도했다. 창조적인 작업에 어울리는 예쁜 사무실로 인테리어를 하고, 모든 디자이너에게 매킨토시 PC를 한대씩 지급했다. 이후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대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은 직장으로 바른손이 손꼽혔다.

 

 

위기 상황에도 나다움 잃지 않기

 

1998년, 대출 상환 기한이 점점 다가옴에 따라 20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한 바른손팬시가 곧 부도 처리될 상황을 앞두고 있었다. 박영춘 회장은 1981년 바른손카드 첫 번째 부도 사태의 혹독한 경험을 치른 이후 두 번째 겪는 일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도 박 회장은 나다움을 잃지 않았다. 평소처럼 단전 호흡을 하고, 집에서 크로키도 그리고, 음악도 들으면서 상황을 지켜봤다. 최종 부도 처리되던 날, 그는 바른손팬시의 수장으로서 누리던 기득권을 모두 포기, 타고 다니던 회사 소유의 자동차마저 주차장에 세워두고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당시 바른손팬시의 매출은 바른손카드의 30배 규모로, 바른손의 주력 사업이었다. 비록 부도가 났을지라도 지속적인 매출로 인해 바른손팬시를 비교적 좋은 조건으로 매각할 수 있었다. 1999년 박 회장은 보유주식 중 10%만 남기고 대주주로서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바른손팬시를 매각했다. 약간의 토지, 바른손팬시 주식 10%가 전부였다.

 

"30년 동안 사업을 했는데, 부도 직후 가장 많은 현금을 손에 쥐게 됐어요. 아이러니죠"

 

그런데, 기적 같은 반전이 일어났다. 주식 거래 정지 기간에 바른손팬시를 매입한 사람이 다른 기업에 이 주식을 매각한 것이다. 바른손팬시의 주식이 재상장되자 주가가 엄청난 기세로 상승, 박 회장이 소유하고 있던 10%의 주식이 엄청난 자본으로 돌아왔다. 이제 사업가로서의 인생은 모두 끝난 건가 생각했던 박 회장에게 또 다른 도전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당시 목돈을 가지고 있던 부자들이 부동산 투자에 열을 올렸지만 박 회장은 거액의 주식 매각 대금을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IT, 게임 사업에 도전해 또 다른 도약을 꿈꿨다.

 

 

60대 초반의 나이로 중국에 진출, 그리고 파킨슨 증후군

 

60대 초반의 나이에 언어와 문화 모두 낯선 중국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일은 박 회장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부동산 임대 수익으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는데도, 그는 인생 마지막 순간까지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살기를 바랐다. 자신이 기획한 대로 새롭게 일이 진행되는 과정 자체를 즐겼던 박 회장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중국 진출 3년 만에 말이 어눌해지는 언어 장애 증상이 시작됐다. 그때 급격하게 건강이 악화된 이후 파킨슨 증후군이 발병해 현재까지도 투병 중이다. 최근 박회장은 바른컴퍼니를 이끌고 있는 삼남 박정식 대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삶이 성공했다고 보지 않는다. 내 방법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개인이 재주가 있어서 첫 시작부터 성공적이었지만, 그 성공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않았다. 뛰어난 개인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긴 호흡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쌓아나가는 재미를 알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