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유토피아 십승지를 걷다
남민 지음 / 믹스커피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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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학술서적이 아닌 역사 속 인물들의 발자취를 따라 힐링 명소를 찾아가는 '역사기행서'이자 '감성여행서'다. 선각자들의 지식을 빌려 미흡한 공부를 하고 현장을 찾아가 향토사학자와 마을 원로들에게 탐문하면서 스토리를 완성해나갔다. 그 때문에 이 책의 역사 속 이야기는 정사와 야사, 구전, 그리고 실제로 살아온 사람들의 사례가 공존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

 

 

한국엔 십승지라는 유토피아가 있었다

 

이 책의 저자 남민은 오랜 여행을 통해 여행의 개념을 새로 쓰고 있다. 여행이란 단순히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꿔 가는 고품격 문화생활이자 평생교육임을 강조한다. 마을마다 품고 있는 역사와 문화를 통해 우리가 즐기며 배울 점을 찾는 인문학 여행을 만들어가고 있다. 또한 매년 이탈리아에서 서양미술사와 르네상스 문화예술, 유럽사를 공부하며 우리나라 문화관광자원의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경희대학교 관광대학원 석사학위, 이탈리아 로마 A.M.I 아카데미아 르네상스 미술사 과정 디플로마, 피렌체 트릴로음악학교 예술경영 마스터클래스 디플로마를 각각 취득했던 그는 현재 국내 주요 기업, 공무원, 대학, 도서관, 기관 등에서 여행 인문학 강연과 리더십 강연 및 리더십 트립을 인기리에 진행하고 있다. TV와 라디오를 통해 여러 차례 인문여행 해설을 했으며, 유력 포털사이트에 여행 인문학 글을 연재했다. 저서로는 <근현대사를 따라 떠난 여행>, <내 인생에 잊지 못할 대한민국 감성여행지> 등이 있다.

 

예언서로 불리는 <정감록>에는 총 열 곳의 십승지가 나온다. 조선 최고의 술사가 소백산을 지나는 길에 말에서 내려 배알했다고 하는 영주 풍기, 서애 류성룡 선생의 일가족이 은둔한 땅이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지 않고 숨어 살았다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해지는 봉화 춘양, 숨어 살면 어떠한 변고가 일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보은 속리산, 백두대간과 지리산 바래봉이 에워싸고 있어 외침으로부터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는 남원 운봉, 6·25 전쟁 때 마을을 둘러싼 높은 산들이 총알받이 역할을 해주어 주민들을 무사히 지켜낸 예천 금당실이 그곳이다.

 

또한 공주 유구, 마곡은 일제강점기 때 평안도 주민들이 베틀을 싣고 들어와 정착한 곳이며, 영월 연하리, 미사리, 노루목은 주민들이 6·25 전쟁이 일어난지도 모르고 퇴각하는 인민군이 살아남기 위해 찾아왔다고 한다. 무주 무풍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변을 담보하기 위한 99칸의 행궁이 지어졌으며, 여기에 깊은 계곡이 '사람을 살리는 땅'이자 허균이 <홍길동전>의 소재가 된 부안 변산, 몸을 영구 보전할 수 있는 최상의 피신처로 알려진 합천 가야도 있다.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정권의 안정화를 도모하고자 잔인한 폭압정치를 펼쳤다. 그의 독재정치는 백성들에게 사지를 짖어 죽이거나 삼족을 멸하는 등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공포정치였다. 어쩌면 현 북한의 김씨 왕조도 이를 본받아서인지 매우 닮아있다. 기록상으로는 진나라 2천만 명 백성 중 100만 명 넘게 죽어나갔다고 한다. 이에 살고 싶은 백성들은 살 곳을 찾아 은둔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 세월이 흘러 기원후 4세기 동진東晉 시절, 중국 후난성의 무릉武陵에 사는 한 어부가 강을 거슬러 오르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그가 가던 계곡의 양편엔 복숭아꽃이 만발해 있고 큰산과 수원지, 그리고 작은 동굴이 나타났다. 어부는 배를 묶어놓고 비좁은 동굴 소로를 기어들어갔다. 세상에 이런 일이! 그의 눈 앞엔 별천지가 펼쳐졌다. 동굴 안엔 넓은 평지의 논밭과 예쁜 꽃, 그리고 새소리로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낯선 이의 방문이 신기해서 어부에게로 몰려들었다. 어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면서 어부의 사연을 듣더니 자신들의 조상은 진나라 때 전쟁을 피해 이 산속에 숨어들어와 이곳에서만 살았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시인 도연명<도화원기桃花源記>에 실린 내용이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폭정에 시달린 백성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은둔의 땅을 찾아 떠났다. 이들은 이런 곳을 '이상향理想鄕'이라고 생각했다. 서양에선 아틀란티스, 아발론 섬, 엘도라도가 있으며, 중국에선 무릉도원, 샹그리라, 삼신산 등이 그러하다. 또 종교에서도 낙원은 빠지지 않고 얘기한다. 불교의 서방정토(극락세계)와 기독교의 에덴동산이 바로 그것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유토피아는 '실존하지 않는 상상 속의 세상'이란 의미가 강하다.

 

그렇다면 동양에 위치한 한국 땅에는 이런 이상향이 있었을까? 이상향의 의미를 죽임을 당하는 고통의 현실을 벗어나 생존을 위한 장소로 규정한다면, "있다"라고 답할 수 있다. 그곳이 바로 '십승지十勝地'다. 이는 정감록에서 언급하고 있는 '생명을 보전할 수 있는 곳'이다. 서양이나 중국의 이상향과는 달리 한국의 십승지는 그 실체가 확실하다. 정감록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미래의 국운을 예언한 도참서이자 살아남기 위해 '십승지'라고 하는 피신처에 찾아가는 비법을 제시한 비결서다.

 

정감록은 지은이가 불분명하고 언제 쓰여졌는지조차 분명치 않다. 수많은 이들의 손에 의해 필사로 전해져 왔기에 그 종류가 무려 육칠십종에 이른다고 한다. 아무튼 이씨 조선왕조가 국운을 다한 후 800년을 이어갈 정씨 왕조가 계룡산에서 등장하고, 이어 조씨의 1천 년이 가야산에서, 다시 범씨의 600년이 전주에서 이어진다고 했으니 정감록은 감히 세상에 내놓을 수 없는 이른바 '금단禁斷의 서書'였다. 그 누구도 천기누설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경북 봉화 춘양春陽

 

정감록의 지명은 옛 지명이라 혼란스럽지만, 현재 주소지로 말하면 알기 쉽다. ㅇ이곳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 일대이다. 태백산 남쪽 거대한 산들 속에 둘러싸인 분지에 여러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옛날에는 산으로 철저히 외부와 차단된 마을이었다. 계곡의 물줄기인 운곡천 협곡 외엔 도무지 들어갈 틈이 없다. 정감록엔 이곳을 2천 년 전의 작은 부족국 소라국召羅國의 옛터라고 표기하고 있다. 

 

춘양 도심촌은 풍산 류씨에겐 생명을 보존할 최후의 이상향이었다. 임진왜란 때 집단 이주했으며, 이후에도 세상이 어지러울 때마다 이곳의 향수를 찾아들었다. 선조가 왕궁을 버리고 명나라로 피란을 계획하자 당시 좌의정이던 류성룡은 3살 위 형의 해직을 왕에게 간절하게 읍소했다. 형이 팔순 노모를 전란 속에서 보필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임금과 벼슬아치들은 모두 북으로 피신하는데, 류성룡의 형은 반대로 왜군과 마주칠지도 모를 남쪽으로 향했다. 왜 그랬을까? 그의 고향은 경북 안동 하회마을이다. 그는 노모와 풍산 류씨 일족 100여 명을 인솔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땅' 춘양 도심촌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땅이 십승지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 했던 것이다. 실제로 도심촌의 류씨 일족은 단 한 명도 다친 이가 없었다고 한다.

 

명의 지원군이 한양에 입성하고,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크게 왜를 물리침으로서 종전이 거의 확실시되자 선조와 북인세력들은 노골적으로 서애 류성룡을 제거하여 했다. 이에 서애는 스스로 사직을 청하고 결국 파직되고 만다. 공교롭게도 절친 사이인 이순신 장군이 이날 새벽 전사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사망엔 3가지 설이 뒤따른다. 첫째는 전사戰死, 둘째는 자살, 셋째는 은둔이다. 여기서 은둔설의 장소가 바로 춘양 도심촌이다. 

 

이순신의 장렬한 전사가 역사의 정설이지만 자살이나 은둔을 했다고 해도 이 또한 그의 우국충정을 시기하고 국난 앞에서 당쟁과 입신양명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실권자들의 희생양일 뿐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은 이순신 장군보다 3살 위이지만 어릴 때부터 서울 건천동(현 중구 인현동)에서 자라면서 평생 동지로 살아왔다. 문관이던 서애는 무관인 이순신의 뒤를 항상 돌봐주었다. 춘양 도심리는 십승지라는 이유로 류성룡과 형 운용, 모친, 그리고 100여 명의 일족이 전란에 피신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이에 이순신 장군마저 은둔해 살았다는 설까지 품고 있는 마을이니 보통 마을은 아니다.

 

 

전남 남원 운봉

 

운봉은 지리산 북서쪽의 바래봉 기슭에 위치, 남원시에서는 가까운 동쪽에 있다. 해발 200미터 대의 남원시와 비교하면 운봉은 고원지대에 속한다. 남원은 섬진강 수계를 가졌고, 운봉은 낙동강 수계를 가졌다. 역사상 남원은 백제 땅이요, 운봉은 신라 땅이기에 지금도 경상도 방언이 남아 있다. 그 경계선이 여원치다.

 

난세엔 전국 각처에서 민초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정착했다. 동쪽엔 팔랑치가 있고, 서쪽엔 여원치가 있고, 북쪽엔 덕유산 자락이 막았으며, 남쪽은 지리산 바래봉이 병풍처럼 버티고 있어서 사면이 자연 성벽을 이루고 있는 형세다. 경상도 방향에선 팔랑치, 전라도 방향에선 여원치를 넘어야 비로소 이곳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 두 고개만 방어하면 안전한 십승지가 되는 것이다.

 

남원 지방의 설화를 고증한 결과, 놀부와 흥부는 실존 인물임이 밝혀졌다. 놀부인 형은 박첨지, 동생 흥부는 춘보가 실존 인물이다. <흥부가>의 '제비 노정기'와 '박타령' 속에 나오는 지명을 고증해서 밝혀진 곳은 운봉고원 한 켠에 있는 인월면 성산리가 놀부와 흥부의 출생지였고, 훗날 흥부가 전국을 유랑하다 돌아와 정착해 복받은 곳은 이웃 아영면 성리였다고 한다. 이 두 마을은 아직도 놀부와 흥부를 위한 제를 올리고 있다. 삼월 삼짇날 박첨지 제사를 지내고 정월 보름에는 춘보망제를 지낸다.

 

이 성리에는 수십 년 전까지도 사금을 채취하러 사람들이 모였다. 그렇다면 흥부도 실제로 이 사금을 캐서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성리 근처는 정감록에서 십승지로 꼽아 임진왜란 때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살았다고 한다. 남원 운봉은 이러한 판소리 소재 발원지인 동시에 동편제를 탄생시킨 고장이기도 한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닐 듯하다. 

 

 

 

전북 부안 변산

 

십승지 중 유일하게 서쪽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다. 왜구의 잦은 노략질로 인해 해안 지역은 마땅한 피신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부안 변산은 당당하게 십승지에 이름을 올렸다. 왜냐하면, 변산의 바다와 들판, 그리고 깊은 계곡이 '사람을 살리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소설가로 알려진 허균이 관직에서 파직된 후, 변산 우반동 정사암靜思庵에 들어와 <홍길동전>의 이상국가 모티브를 발견했고, 반계 유형원도 변산의 우반동에 들어와 <반계수록>을 집필했다. 


우반동은 원래 유형원의 선조인 유관에게 세종이 내린 사패지賜牌地가 있었으며, 유형원의 할아버지 유성민이 벼슬(형조정랑)을 마친 후 내려와 별장을 짓고 살던 곳이기도 했다. 이 모습을 보면 도연명이 항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내려가 전원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낸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보는 듯하다. 은둔의 땅은 그렇게 이들을 보듬어 안았다.

 

우반동에 정착한 유형원은 북서쪽 산 중턱에 반계서당을 짓고 독서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때 읽은 책이 무려 1만 권에 달했다고 한다. 정치는 물론 전국을 여행하며 익힌 경제와 지리, 병법에 이르기까지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이곳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은 유형원은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고요한 후에야 안정을 얻을 수 있고 생각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도다"라고 하며 자신의 생활에 만족했다고 한다.

 

 

 

영월 연하리, 미사리, 노루목

 

십승지 마을 중 영월은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태소백의 기운을 받아 사람을 살리는 마을로 유명세를 떨쳣다. 얼마나 운둔의 땅이기에 주민들은 한국전쟁이 일어난지도 모르고 살았을까? 당연히 피난길을 떠난 사람도 없었고, 오히려 퇴각하던 인민군과 빨치산이 살아남기 위해 이곳을 찾아들어왔다니 웃지 못할 사연 아닌가 말이다.

 

16세기 초반, 정치적으로 급진 개혁을 추진하던 조광조는 위훈삭제라는 훈구파의 척결을 부르짖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았다. 당시 중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림파들은 유교적인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조초위왕'이라는 사건에 휘말려 중종조차 이들의 개혁을 의심하면서 결국 1519년(중종 14년)에 조광조를 비롯한 70여 명의 신진사림파들이 숙청되고 사약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기묘사화己卯士禍다. 젊은 나이에 사림의 영수가 된 조광조는 꿈을 펴보지도 못하고 39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후 조광조의 후손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한양을 떠나 숨어든 곳이 바로 영월 미사리未死里다. 삶에 대한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절했던지 이곳을 '죽지 않는 마을', 즉 미사리라 불렀다. 오늘날 김삿갓면 와석2리다. 한양 조씨가 이곳에 한때 40가구가 살 정도로 몰려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정착한 곳을 조촌趙村이라고 불렀다.

 

 

 

십승지, 선조들의 풍수 결과물이다

 

십승지로 거론되는 곳들은 한결같이 주위에 높은 산으로 둘러처져 있다. 한국 풍수론의 대가 최창조 전 서율대 교수는 "풍수란 이 땅에서 살아온 선조들의 딸에 관한 지혜의 집적"이라고 설명했다. 즉 풍수는 종교와 같은 신앙의 개념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축적해놓은 결과물이라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자신의 이상향이므로 십승지는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올 여름 국내여행을 계획하는 분들에게 이 책과 함께 십승지를 적극 추천하고 싶다.

 

 

"컬쳐300으로부터 무상으로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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