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모로 산다는 것 - 왕권과 신권의 대립 속 실제로 조선을 이끌어간 신하들의 이야기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은 500년 이상 장수한 왕조였고, 27명의 왕이 재위하였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왕들은 체제의 정비가 요구되던 시기를 살기도 했고, 강력한 개혁이 요구되는 시기를 살기도 했다. 각기 다른 배경 속에서 즉위한 조선의 왕에게는 각가의 국정 목표와 방향이 있었고, 그 왕에게 발탁된 참모들은 시대적 과제 해결을 위해 역량을 발휘해 나갔다. - 머리말' 중에서

 

 

조선시대의 마흔 명 참모들 이야기 

 

이 책의 저자 신병주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고 있으며, 역사를 쉽게 전달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KBS <역사저널 그날>, KBS라디오 <글로벌 한국사, 그날 세계는>을 진행했으며,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연산군과 광해군 편에 출연하였다. 현재 KBS라디오 <신병주의 역사여행>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재재단 이사, 문화재청 궁능활용 심의위원, 외교부 의전정책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 산책>, <왕으로 산다는 것>, <책으로 읽는 조선의 역사>, <조선과 만나는 법>, <조선평전>,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등이 있다.

 

정도전의 기획 하에 출범한 조선은 당초 신권臣權정치를 표방하였기에 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기보다 참모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국정을 운영해왔다. 조선시대 참모들은 최측근에서 왕을 보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철저히 견제하기도 했는데, 책에 등장하는 40명의 참모들은 대부분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상황에서 정치적, 학문적 능력을 발휘하거나 국난을 극복했지만 왕의 판단을 흐리게 하여 결과적으로는 국정 농단의 주역이 된 인물들도 있다.

 

 

 

 

신권臣權의 신봉자 정도전, 왕조를 설계하다

 

고려 말, 당대의 지성을 대표하던 이색의 문하였던 정도전은 조선 창업의 주역이다. 그는 <시경詩經>의 '주아' 편에 실린 한 구절을 인용하여, "이미 술을 마셔서 취하고 큰 은덕으로 배가 부르니 군자께서는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리라"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慶福宮으로 정했음을 아뢰었다. 마찬가지로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의 이름도 정도전의 구상에서 나왔다.

 

근정전勤政殿~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정전

사정전思政殿~ 왕의 집무 공간

강녕전康寧殿~ 왕의 일상을 보내는 거처이자 침실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는 마치 자신의 수족手足과도 같이 움직이는 정도전을 깊이 신뢰하였고, 정도전은 그런 태조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한 것이다. 태조는 경복궁으로 이름을 지은 지 약 3개월 후 점을 쳐서 길일로 잡은 12월 28일 마침내 이곳에 들어왔다. 길하다는 날을 골라서 만든, "군자 만년 큰 복을 누리리라"는 칭송으로 가득했던 경복궁은 태조가 들어가 산 지 채 3년도 못 가서 골육상쟁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비극의 공간이 되고 만다. 이처럼 역사는 아이로니한 일이 벌어진다.

 

 

 

태종의 남자 하륜 

 

피로써 왕위를 차지한 태종 이방원을 조력한 많은 참모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 바로 하륜이다. 그가 태종의 남자로서 보여준 대표적인 능력은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전해 온다. 태종이 왕이 된 후, 아들에게 불만을 가진 태조는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고, 태종은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여러 번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태조는 오히려 이들을 죽이는 것으로 반감을 표시했다. 바로 그 유명한 '함흥차사' 고사의 유래다.

 

태조가 마음을 돌려 서울로 환궁還宮하는 날 태종은 아버지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하륜은 태조의 분노가 아직도 풀리지 않는 것을 의식하여 장막의 기둥을 크게 만들자고 했고, 놀랍게도 명궁名弓이라 불린 태조가 태종을 향해 쏜 화살은 하륜이 미리 대비한 나무 기둥에 박혔다. 태종의 생명을 구한 하륜의 기지가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탁월한 균형감을 견지했던 황희

 

조선시대의 명재상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황희 정승(1363~1452년)이다. 가히 영의정의 대명사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의 태조, 태종, 그리고 세종 때까지 관료로 활약했다. 90살까지 살았으므로 당시로 보면 무척이나 장수했으며, 24년 간 정승(19년간은 영의정)으로 활동했다. 더구나 87세에도 영의정을 지냈으니 얼마나 그가 백성과 왕으로부터 돈독한 신임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유배지에서 세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정승으로 복귀해서 우의정(1426년)에 이어 좌의정(1427년)이 되었는데, 그래 사위가 아전을 구타해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동료 정승인 맹사성에게 사건의 무마를 부탁한 사실이 나중에 밝혀져서 파직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1430년에는 사헌부에 구금된 이의 일에 개입햇다가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아 파직되는 정치적 위기가 있었다. 청백리로 명성이 높았지만 한때는 매관매직과 뇌물 수수 사건이라는 정치적 오점을 남겼던 것이다.

 

몇몇 일화 때문에 황희에 대해서는 모든 의견을 수용하는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기억하지만 실제 황희는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태종이나 최고의 성군 세종 앞에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주저하지 않았다. 황희에게는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장점이 훨씬 더 많았고, 세종은 참모로서 황희의 이런 능력을 잘 활용하였다. 황희는 창업에서 수성으로 나아가는 태종과 세종 시기에 명참모로 활약했고 부드러우면서도 할 말은 다했기 때문에 명재상으로 남아 있다. 특히 오랜 국정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적 균형 감각의 보유자였다는 점은 그의 최대 장점이었다.

 

 

 

과학자 장영실, 세종의 믿음에 보답하다 

세종이 미천한 신분의 장영실에게 괸직을 제수한 것으로 우리들은 이해한다. 사실 장영실은 태종이 처음 발탁했다고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나중에 세종은 상의원 별좌라는 직책을 장영실에게 주었는데, 이는 옷을 만드는 관청이었다. 당시 세종의 의도는 가까이 곁에 두고서 장영실의 솜씨가 과학에서 역량을 발휘하도록 배려했던 셈이다.

 

이후 장영실은 자신을 후원하고 배려한 세종에게 최고의 보답을 한다. 바로 자격루自擊漏다. 세종은 어떤 왕보다도 시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시계 제작에 총력을 기울였다. 앙부일구라고 불리는 해시계에서 일단의 성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해시계는 해가 없는 밤이나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는 작동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세종과 장영실은 이러한 한계 극복을 위해 힘을 합했고, 이것은 마침내 자격루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자격루는 물을 넣은 항아리의 한쪽에 구멍을 뚫어 물이 흘러나오게 만든 기계였다. 물을 보내는 그릇 넷과 물받이 두 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떨어지는 물방울의 양을 이용해 시각에 따라 저절로 종이나 북, 징을 울리게 한 것으로, 일종의 자동 시간 알림 장치였다. 이름을 '자격루'라 한 것도 '스스로 쳐서 울리는 시계'라는 뜻이었다. 

 

 

문장가 김종직, 조의제문을 쓰다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쓴 것은 초나라 회왕, 즉 의제의 죽음을 조문하기 위해서였는데, 숙부인 서초 패왕 항우에게 희생당한 어린 조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의제를 조문하는 내용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제자인 김일손은 스승의 이 글이 사림파 의식을 가장 잘 반영했다고 판단하여 사초(실록의 원고)에 실었다. 그러나 1498년 이 사초가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었고, 결국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는 화를 입었다. 이 희생은 역설적으로 사림파 영수 김종직의 이름을 후대까지 널리 기억하게 만들었다.

 

 

 

조광조, 훈구파의 반격으로 개혁의 꿈이 좌절되다

 

중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조광조는 개혁정치를 펼치려고 했다. 그가 말하는 개혁이란 성리학 이념이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는 사회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먼저 경연을 활성화해서 왕이 끊임없이 성리학 이념을 교육받게 했다. 다음으로 <소학>의 보급과 향약의 실시를 통해 성리학 이념이 지방 구석구석까지 전파되도록 노력했다.

 

그는 자신의 이상정치를 펼치려면 이에 동조하는 정치세력이 있어야 함을 알기에 기존의 과거 시험 대신에 현향과賢良科의 실시를 추진했다. 추천제였으므로 자신의 편을 드는 신진인사를 대거 영입하려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에겐 이런 정책이 지지를 받을 수 있었지만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에게는 정치적 부담이었다. 

 

이후 위훈삭제를 시도하며 노골적으로 훈구파의 기득권을 박탈하려는 조광조 세력의 움직임에 훈구세력들도 더 이상 방관하지 않았다. 이들은 왕실이나 정치권에 심어둔 정치세력을 적극 활용해 총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훈구파는 최고의 권력자 왕과의 만남을 자주 가지며 조광조의 위험성을 기회되는 대로 알렸다. 경연을 통해 왕을 압박하는 조광조가 왕권까지 넘보는 인물임을 거듭 강조했다.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파들은 후궁인 경빈 박 씨와 희빈 홍 씨를 통해 중종에게 조광조를 모함하는 한편, 궁중 나인을 시켜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走와 肖를 합하면 趙가 되므로 조 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라는 글씨를 유포시켰다. 나뭇잎에 새긴 글씨에 꿀을 발라 벌레가 갉아먹게 한 것이다. 한때는 최고의 참모였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오는 조광조의 전횡(권세를 혼자 쥐고 제 마음대로 함)과 왕인 자신을 압박하는 조광조의 개혁 드라이브에 지친 중종은 이제 더 이상 조광조의 후원자가 될 수 없었다.

 

 

유성룡, 위기 극복의 참모였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는 각각 유성룡의 졸기卒記가 기록되어 있는데, 공로와 과실이 교차하고 있다. 유성룡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 이외에 "왕의 신임을 얻은 것이 오래였지만 직간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고 정사를 비록 전단專斷(혼자 마음대로 결정하고 단행함)하였으나 나빠진 풍습을 구하지 못하였다"거나, "남의 잘못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힘이 부족하고 지론이 넓지 못하여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는 등 부정적인 언급이 많은 것은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이 유성룡에 대한 반대 세력에 의해 기록되어 있는 점도 간과할 수가 없다.

 

<선조실록>이 북인의 관점에서, <선조수정실록>이 서인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남인의 영수인 유성룡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인색한 것이다. 피난을 간 선조를 대신하여 전시 정부 최고의 참모로 활약한 유성룡과 그가 남긴 임진왜란에 대한 반성의 기록인 <징비록>은 위기 때 참모의 역할을 잘 보여주고 있다. 

 

 

 

허균에 대한 새로운 평가 

허균(1569~1618년)에 대한 평가는 조선시대 내내 부정적인 흐름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오늘날에는 점차 그의 진보적인 사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대두하고 있다. 허균의 비극적인 생애는 무엇보다 그 스스로의 표현대로 '불여세합'하는, 즉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강한 기질과 혁신적인 사상, 그리고 자유로운 행동가적인 면모에서 기인하였다. 세상과 타협하지 못한 허균은 그 세상을 자신에게 맞도록 바꾸려 했지만, 생각만 앞서갔던 무리한 시도는 역적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한때는 광해군의 큰 총애를 받았지만, 결국은 왕을 배신함으로써 처형으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 질서만이 지배되던 사회의 흐름을 바꾸어보려 했던 허균의 시도는 개혁의 불씨로 남아 진보적인 사상이 자리를 잡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불후의 명작 <홍길동전>의 유통과 보급은 그가 지향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이 어느 정도 실현된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

 

왕조 시대가 끝나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사회가 도래했지만, 반복이라는 역사의 속성을 고려할 때 조선시대의 이름난 참모들의 덕목들은 나름 의미가 있다. 목표 설정의 적합성, 적절한 정책 추진, 여론과 언론 존중, 도덕성과 청렴서으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 등이 바로 그것이다. 현 정부의 참모들은 과연 과거의 참모들처럼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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