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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도 아니고 익힌 것도 아닌 - 우리 문명을 살찌운 거의 모든 발효의 역사
생각정거장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일상 속의 발효 식품은 인간의 먹거리 가운데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특이한 종류에 해당한다. 발효 식품이라는 놈은 혀를 황홀하게도 하고 구역질을 유발하기도 하는 희한한 재주가 있다. 어떤 이들은 별미라고 환장하고 또 어떤 이들은 사람이 먹을 게 못 된다고 한다. - '들어가는 말' 중에서
발효와 부패의 경계
이 책의 저자 마리크레르 프레테리크는 요리와 음식 전문기자이자 평론가이다. <블링블링 요리>, <내 잎을 따봐요>, <친환경 레시피> 등 10여 권의 책을 냈으며, 또한 잡지 <퀴진 악튀엘>, <갈라 구르망>과 개인 블로그(www.dumieletdusel.com)에 음식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수년간 해온 그런 작업의 결과물이자 성과인 셈이다.
책은 선사시대 메소포타미아, 아프리카, 이누이트, 마야 문명과 고대 로마, 갈리아, 중국, 몽골, 일본 등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우리 모두를 발효의 세계로 이끈다. 이를 통해 발효의 역사와 식품 산업의 혁명을 이야기하고,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의 미덕을 찾기 위해 우리의 오래된 발효 문화를 지속적으로 지켜나갈 것을 촉구한다.
발효는 인류 문명과 그 기원을 함께한다. 전 세계의 수많은 고고학적, 신화적, 역사적 자료들을 살펴보면 발효는 불을 이용한 가열 조리보다 그 출발이 빠르다. 인류는 소와 말 같은 가축을 길들이기 훨씬 이전부터 발효를 일으키는 미생물들을 키웠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급진적으로 표현하자면, 인류는 농사와 가축 길들이기를 통해 발효 음식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역으로 발효 음식을 먹기 위해 가축을 키우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저자는 발효 식품에 결부되는 상징적·문화적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발효 식품은 살아가는 데 필요할 뿐 아니라 때때로 목숨까지 구한다. 맛도 좋고 건강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둘째, 발효 식품에는 식도락적 가치와 영양학적 가치를 초월하는 상징적 측면이 있다. 셋째, 발효 식품은 완전히 토착적인 것으로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본래의 특색을 잃을 위험이 있다. 넷째, 발효 식품은 그 나라 사람들에게 자신의 역사와 이어져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이 음식은 공동체를 대표하고 문화의 일부가 된다. 사람들은 발효 식품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한다.
발효는 식도락의 정점
모든 전통 문명과 대륙을 통틀어 발효 식품의 소비는 인류에 속한다는 표식이다. 10만 년 전에 초기 인류가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기 전부터 발효를 활용할 줄 알았다면 이것은 단순한 은유적 표현이 아닐 것이다. 발효는 오늘날에도 우유로 유서 깊은 스틸턴 치즈를 만들고, 포도즙으로 샤토 디켐을 만들며, 12년 묵은 포도즙으로 발사믹 식초를 만들고, 간장을 오랜 세월 숙성시키며, 푸쿠옥섬의 나무통에서 자잘한 생선들로 느억맘을 만든다. 이런 발효 식품들은 여러 문화권에서 맛의 걸작으로 추앙받는다. 발효의 맛은 과거에 그랬듯이 지금도 문명과 식도락의 정점에 있다.
발효 음식은 한 나라의 음식 문화유산
단지에 넣고 발효시키는 음식은 다르다. 발효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자기네 레시피와 솜씨와 전통으로 한 나라의 음식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발효 음식은 특별하다. 구석기시대 인류로부터의 기억 전체를 밑거름 삼는 발효 음식은 식품에 들어가는 궁극적 정성을 나타내며 비유적으로 우리를 영원과 이어준다.
발효 식품은 공동체 생활양식
발효 음료를 혼자, 개인적인 영역에서 즐기게 된 것은 산업사회 이후다. 알다시피 그 결과로 중독이라는 문제가 나타났다. 전통 사회에도 중독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결 덜 심각했다. 당시에 술은 반드시 여럿이 어울려 마시는 것, 건강을 보살핀다는 뜻에서라기보다는 공동체 조직을 위해 그래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한 음주 방식은 사회 구성에 큰 역할을 했다. 발효 단지를 매개로 한 교류와 공유에서 환대의 예법, 사회적 관계들의 규제, 나아가 공동체 내 상호 의무, 혹은 공동체와 공동체 간의 상호 의무가 조직되었다. 그 영향은 지대했다. 사회생활, 경제생활, 정치생활의 상당 부분이 발효 식품의 제조와 소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발효 식품은 인간을 신과 이어줄 뿐 아니라 인간들끼리의 연대에도 이바지한다.
제빵은 효모를 발효시켜 탄생된다
제빵은 고대 이후로 대단히 발전했다고 보기 어렵다. 21세기 사람들도 4,000년 전과 비슷한 방법으로 빵을 만든다. 천연 발효법, 효모 첨가법, 다양한 빵 종류는 그 옛날에도 다 있었다. 다양한 곡물을 단독으로 쓰기도 하고 섞어 쓰기도 하고, 둥글게도 만들고 길쭉하게도 만들고, 납작하게도 만들고 푹신하게 부풀려 만들고, 속을 채우거나 고명을 얹거나 기름기를 더하거나 꿀을 뿌리거나 했다. 반죽기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발효실 등 장비와 관련된 부분만 유일하게 발전했다. 여기서 말하는 빵은 제빵사가 손수 만드는 빵을 가리킨다.
치즈의 기원은 젖산발효이다
정착 민족인 수메르인들은 거의 산업적으로 치즈를 제조하고 저장했다. 포도주나 맥주를 빚는 양조시설이 있었고 빵을 반죽하고 구워내는 곳이 따로 있었던 것처럼 유제품을 만드는 시설도 따로 만들 정도였다. 우리가 요즘 말하는 치즈, 다시 말해서 어느 정도 부피가 있고 수분을 제거해서 모양을 잡은 치즈, 큰 덩어리로 몇 달씩 저장고에 쌓아두고 보관 가능한 치즈는 이곳에서 처음 탄생했던 것이다.
프랑스 미식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치즈는 머나먼 과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의 뿌리가 다채로운 열매를 낳았다. 푸른곰팡이가 낀 것, 짭짤한 것, 말린 것, 생으로 먹는 것, 오래 두고 맛을 들이는 것, 외피를 건조시킨 것, 외피를 세척한 것, 속살이 부드러운 것, 단단한 것 등등. 치즈는 수백 가지 종류가 있다. 매일 새로운 치즈를 먹어도 일 년 안에 모든 치즈의 맛을 보지 못할 만큼 많다.
세계의 발효 음식
마그레 드 카나르 세셰 오 자로마~ 향료와 함께 말린 오리 가슴살(프랑스)
시네 헹~ 쇠고기 육포(라오스)
콘드비프~ 양배추와 함께 먹는 고기 소금 절임(아일랜드, 미국)
그라블락스~ 땅속에 묻은 연어(스칸디나비아)
안초비 소금 절임~ 고대 그리스의 타리코스를 현대화한 발효 음식(지중해 일대)
테지~ 가장 보편적이고 만들기 쉬운 꿀물술(에티오피아)
크바스~ 호밓빵으로 만드는 전통 맥주(러시아)
탄산 딱총나무꽃술~ 샴페인을 닮은 발효술(프랑스)
포리지~ 아침 식사로 먹는 전통적인 귀리죽(스코틀랜드)
도사~ 빵 대신 먹는 크레이프(인도)
스멘~ 버터를 오레가노 물에 싯어서 1년 정도 발효시킨 음식(모로코)
슈크루트~ 양배추를 발효시킨 고전적인 알자스 요리(프랑스, 중유럽)
발효의 비밀
우리는 100여 년 전부터 발효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유, 과즙, 율류, 곡물 발효는 세균학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1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일어난다. 게다가 미생물의 작용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발효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발효 식품의 성패를 가늠하는 변수들은 아주 많다. 그중 일부는 알려져 있지만 나머지는 현재 발효를 연구하는 학자들조차 모두 알지 못한다.
하지만 발효의 비밀을 다 알지 못한다고 해도 맛있는 발효 식품을 만드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발효 현상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발효의 맛을 내기에는 충분하다. 공장 생산이든 소규모 수제 생산이든 과학이 발효 식품 생산에 큰 도움을 주기는 했다. 가령, 과학적 지식은 양조에서 뭐가 부족하고 뭐가 잘못됐는지 재빨리 파악해서 바로잡아준다. 그렇지만 연륜 있는 양조가를 인터뷰한다면 포도주의 질을 결정하는 발효에서 경험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포도주와 관련된 수천 가지 성분 중에서 우리는 아직 400여 가지밖에 알지 못한다. 치즈를 만드는 장인에게 물어보면 그 역시 치즈 외피를 원하는 상태로 얻어내기까지 어려움을 토로할 것이다. 발효는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재차 말하지만 발효는 생명 활동이기 때문이다.
장은 음식의 독을 다스린다
된장이나 미소는 이 식품을 먹는 문화권에서 특히 높이 평가받는 발효 식품이다. 된장은 수명을 연장하고 일상적인 잔병들을 치료하는 효과를 인정받고 있다. 매일 조금씩 된장을 먹는 사람은 염증과 질병에 맞서기 좋은 체내 환경이 조성된다고 한다. 된장은 소화를 돕고 해독과 강장 효과가 있다. 우리에게 이로운 온갖 무기질과 소화 효소, 프로바이오틱스, 필수암미노산, 비타민 B12, 소화 흡수가 잘되는 단백질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또 된장은 흡연과 공해가 우리 몸에 미치는 폐해를 줄이고 숙취도 해소해준다고 한다.
중국 약제서 <본초강목>은 '장'에 대한 기원후 150년경의 자료를 참조하여 이렇게 말한다. "장은 무리를 이끄는 장수와 같아서 음식의 독을 다스릴 수 있다. 이는 장수가 무리 중의 패역한 자를 잡아내 다스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표현은 기막히게 들어맞는 데다가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다. 발효 식품의 미생물은 병원균이 창궐하고 패권을 쥐지 못하게 다스리는 바로 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발효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다
구석기시대에는 뭇사람들이 최초의 치즈 장인, 최초의 제빵사, 최초의 염장 숙성 장인을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던 때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결국은 똑같은 행보다. 미지를 탐색하는 행보 말이다. 과거의 기억을 되새김으로써 앞으로 나아간다. 현대성의 최첨단에 있는 요리가 수천 년의 과거를 더듬어 영감을 구한다. 전위적 요리가 선사시대의 의문, 행보, 기법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미래를 믿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