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정요 강의 - 리더십, 천 년의 지혜를 읽다
타구치 요시후미 지음, 송은애 옮김 / 미래의창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창업이나 수성이라고 하면 기업인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회사나 기업이 아니더라도 어떤 조직에서 리더를 꿈꾸는 젊은이들, 현재 리더를 맡아 조직 운영에 관여하는 사람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새로운 부서로 이동하거나 승진하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사생활면에서 결혼해 가정을 이루는 등, 인생에서 겪는 변화의 시기는 대부분 '창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조직의 영구적이고 안정적인 발전(수성)을 목표로 하는 사람에게도 <정관정요>는 분명 훌륭한 실천서가 되어줄 것입니다. - '서문' 중에서



정관정요의 리더십 지혜를 배운다

저자 타구치 요시후미는 니혼대학교 예술학부를 졸업한 후 신인 기록물 영화감독으로 활약하던 중, 만 25세 때 태국에서 중상을 입는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처음으로 <노자>를 만났고, 이를 계기로 중국 고전사상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40년 이상 동양 사상을 연구해 왔으며, 현재 동양 윤리학, 동양 리더십의 일인자라 불린다. 

1972년 주식회사 '이미지 플랜'을 창업, 대표이사 겸 사장을 맡아 수천 개 회사에서 기업 개혁을 지도했으며, 또 기업, 관공서, 지방자치제, 교육기관 등, 일본 전국을 돌며 활발히 강연 및 강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주로 '동양 사상으로 배우는 인간의 힘'에 관한 그의 강연을 수강한 인원이 만 명을 넘는다. 국내에 출간된 저서로는 <사장을 위한 손자병법>, <40대, 강해져야 살아남는다>, <논어 한마디>, <노자의 무언>, <손자의 지언>, <초역 노자의 말>, <초역 손자병법>, <비즈니스 리더를 위한 노자 도덕경 강의> 등이 있다. 


소위 '제왕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정관정요>는 천년의 긴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경영인과 지도자들에게 리더십의 비결을 알려준다. 598년, 혼란에 빠진 수나라 말기에 이연李淵의 차남으로 태어난 이세민은 아버지를 도와 당나라 창건에 큰 공을 세운다. 하지만 당 건국 초에는 곳곳에 여전히 세력을 자랑하는 군벌들이 다수 남아 있었기에 이세민은 각지를 돌면서 토벌에 나섰했다. 비록 이세민이 2대 황제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당 건국의 주역이자 중국 통일의 최대 공로자인 셈이다.


이미 무장으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이세민은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180도 달라진다. 연호를 새롭게 '정관貞觀'으로 정하고(627년), 무단武斷정치에서 문치정치로 탈바꿈했다. 나라를 일으키는 창업創業 시기에는 힘이 닿는 한 공격을 계속하는 무단정치를 펼쳐야 하지만 정권을 수립한 후 수성守成의 시기에 접어들면 상황이 달라진다. 태종은 나라의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고, 유학을 통해 백성을 교화하는 일에 온힘을 쏟았다. 


이런 태종의 국가 경영은 훗날 '정관지치貞觀之治'라 불리며 극찬을 받게 되는데, 이런 공적은 간의대부 위징魏徵을 비롯한 측근들의 간언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정관정요>에는 군주의 이상적인 자세, 올바른 국가의 조건을 둘러싸고 태종과 신하들 사이에 오갔던 깊이 있는 논쟁 등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따라서 재미와 함께, 이를 응용하고 실천할 때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창업創業과 수성守城


태종이 '창업과 수성, 어느 쪽이 어려운가?'라는 주제를 놓고 위징, 방현령과 함께 문답을 주고 받는다. 이에 위징과 방현령의 의견은 정반대로 나뉜다. 그러자 태종은 어느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이는 배려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태종이 원하는 바는 "창업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으니, 수성의 시대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한마음으로 진력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창업에서 수성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현대의 비즈니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회사를 창업했거나 임원으로 승진했을 때, 해당 리더는 매우 기세등등한 상태이다. 사내에서는 물론, 세상도 그를 크게 주목하고 높이 평가할 것이다. 언론조차 '시대의 영웅'이라며 추켜세울지도 모른다. 또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실력이 엇비슷한 자들과 경쟁해 끝내 승리한 과정을 반추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져버릴 우려도 있다.

 

"나는 정말 열심히 했다. 이 성공은 내 노력의 대가이다. 좋아, 더 힘차게 달려 나가자!"

 

이럴 때 바로 자만심이 싹튼다. 즉 창업으로 얻은 권력을 믿고 독선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부하들을 독려하면서 채찍을 휘두르기도 하는데, 오늘날의 창업주들도 이런 태도를 보인다. 자기 자신은 사업 초기의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국 성공했으므로 모두 자신을 본받아야 한다는 듯이, 직원들을 혹사시키며 '예스맨' 조직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런 후 회삿돈을 횡령하거나 분식회계 부정을 저지르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태종처럼 "창업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며 스스로 확실하게 선을 긋는 일이다. 그리고 이후에는 모든 활동의 초점을 '수성'에 맞추고 조직을 다지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따라서, 창업기를 벗어났다면, 일단 저돌적인 공격형 기세를 늦추고, 전체 구성원들과 힘을 합쳐서 조직을 안정시키고 계속 유지해 나가는 쪽으로 사고방식을 바끄어야 한다.



느슨함과 팽팽함을 구분해 사용하라

정관 3년, 태종은 신하들에게 '군주란 참으로 어려운 자리'라고 토로한다. 끊임없이 노력하여 정치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던 중, '배움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같은 일을 3년이나 계속하면 어느 정도 익숙해지지만, 앞으로 더욱 성장할지, 그 자리에서 멈출지는 본인의 자기 평가에 달려 있다. 스스로 자질 높은 리더라고 만족해버리면 성장은 멈추고 만다. 아니, 오히려 퇴보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 갈길이 멀다'고 생각한다면 한층 더 성장하게 될 것이다. 때때로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자신의 부족함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곤 한다. 업무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훗날 결국엔 위기를 맞게 된다. 따라서 태종처럼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태종은 대체 무엇을 어렵다고 느꼈을까? 태종은 이렇게 말한다.

 

"지나치게 엄격한 법은 오히려 선한 사람에게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식의 악행을 저지르게 할 우려가 있다. 반대로 느슨한 법은 악한 사람을 제멋대로 날뛰게 만드는 꼴이 된다. 이를 조절하는 일이 실로 어렵다"

 

이에 관해 간의대부 위징은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는 법을 관대하게 하고 반대로 마음이 느슨해졌을 때는 법으로 엄격하게 단속해야 한다. 시대나 사회 정세는 계속 변하는 법이니, 법률의 운영 방식이 역시 바뀌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요컨대 상황에 따라 느슨함寬팽팽함猛을 구분해 사용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인재를 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재능이 특출한 인물을 찾기 힘들다고 그대는 말하지만 무엇보다 짐은 그런 인재를 원하지 않소. 그릇에도 제각각 용도가 있듯이, 인재 역시 '이 사람의 이런 능력은 이러이러한 일에 활용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찾으면 되지 않소? 요즘 시대에 훌륭한 인재가 없다 해서 다른 시대에서 데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오. 역대 어느 정권이나 당대의 인물을 채용했을 뿐, 다른 시대 인물을 채용한 것이 아니지 않소. 은나라 고종(무정武丁)의 측근 중 한 사람은 고종이 꿈에서 봤다는 인물의 얼굴 생김새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전국으로 찾으러 다녔소. 그리고 어느 공사 현장의 인부가 이 자와 매우 흡사하다는 말을 듣고 그를 천거했다고 하오. 그렇게 찾아낸 인물이 훗날 실제로 2인자가 되었소. 또 주나라 문왕은 사냥을 나갔을 때, 낚시를 하는 여상呂尙을 보고는 비범한 인물이라 생각하고 말을 걸었소. 그 여상이 후에 뛰어난 재상이 되었다는 전설까지 있소. 어느 시대나 인재가 없는 게 아니오. 짐은 실제로 뛰어난 인재가 있는데도 이쪽에서 그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되오"

 

이는 태종 이세민이 상서우복야 봉덕이封德彛를 엄하게 훈계하는 장면이다. 마땅한 인재가 없다고 푸념만 늘어놓고 적극적으로 인재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이다. 즉 단지 특출난 인물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행위는 마치 감이 익어 자기 입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직무태만'이라는 지적인 셈이다. 복지부동伏地不動의 자세를 미덕으로 삼는 공무원들이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교만을 경계하라

 

군자주야君者舟也, 서인자수야庶人者水也. 수즉재주水則載舟, 수즉복주水則覆舟

 

이는 <순자荀子>에 나오눈 유명한 구절로, "군주는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엎기도 한다"는 뜻으로, 군주를 배, 백성을 물에 비유하고 있다. 배는 물의 흐름을 타고 전진하지만, 한번 물살이 거칠어지면 순식간에 뒤집히고 만다. 마찬가지로 군주는 백성이 섬기는 덕으로 존재하지만 반대로 그 백성에게 쫓겨날 때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대한민국은 이를 실제로 경험한 바 있다. 위징도 이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태종에게 간언한다.

 

"군주에게 교만함이 싹트기 시작하면 신하는 물론, 핏줄조차 정이 뚝 떨어질 것입니다. 백성의 마음도 멀어져 가겠지요. 그러면 생각대로 아랫사람이 움직이지 않는다며 혹독한 형벌을 내리거나 권세를 휘두르게 되니, 민심은 더욱 멀어집니다. 겉으로는 공경을 표하는 듯 보여도 진심으로 군주를 따르지 않습니다. 이런 원망이 점점 쌓이면 백성은 몹시 두려운 존재가 됩니다. 모두 군주를 쓰러뜨리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지요. 백성이 있어야만 군주 역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디 명심하셔야 합니다"

 

 

사리사욕을 멀리하라

 

태종은 즉위한 후, 곧 바로 궁녀 3천여 명에게 자유를 주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는 애첩을 여럿 두는 게 관례였다. 비단 임금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귀족도 그러했다. 특히, 왕이라면 후계자를 많이 두어 나라의 존속을 튼튼히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세민은 3천여 명의 후궁들이 자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많은 후궁을 거느리는 것 자체가 바로 '백성의 재산을 맘대로 사용하는 행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환언하면 '혈세의 낭비'로 간주한 셈이다. 당 태종 이세민의 이런 조치를 가슴에 담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정치인들이다. 한국 정치인들은 이를 따끔한 굴욕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툭하면 연말연시에 남은 예산을 다음 회기로 이월시키지 않고 '탕진잼'에 나선다. 왜 그렇게 외국 정치 순방이 많은지 말이다. 실제로는 놀러가는 외유이면서. 이 많은 돈은 누구의 것인가? 바로 국민의 '혈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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