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포의 장사법 - 그들은 어떻게 세월을 이기고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나
박찬일 지음, 노중훈 사진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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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입 베어 물면 입 안에 한 시대가 들어오는 듯한 식당들이 있다. 맛이 있어 오래 남아 있는 식당, 그것을 우리는 노포(老鋪)라 부른다. 노포를 오래 취재하다 보니 어떤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됐다. 이른바 ‘살아남는 집의 이유’다. 물론 맛은 기본이다. 운도 따라야 한다. 그 외에 가장 중요한 건 한결같음이다. 사소할 것 같은 재료 손질, 오직 전래의 기법대로 내는 일품의 맛, 거기에 손님들의 호응으로 생겨난 기묘한 연대감 같은 것들이 감탄을 자아낸다. - '프롤로그' 중에서



한국의 유명 노포老鋪들을 소개한다


책의 저자 박찬일은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먹고살려고 요리를 시작했다. 더도 말고 스파게티 레시피 3가지만 제대로 배워오자는 마음으로 이탈리아 유학을 떠나, 결국 이탈리아 음식 전문 요리사가 되어 2002년 귀국, 순 우리 재료로 만든 이탈리아 음식을 소개함으로써 유명인사가 되었다. 


글 쓰는 셰프이자 아름다운 글을 쓰는 문장가로도 유명한데, 저서로는 우리 곁에 남은 오래된 노포들의 맛과 철학을 소개한 <백년식당>, <미식가의 허기>,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뜨거운 한입>,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등이 있다. 맛과 글에 대한 강의와 함께 〈한겨레〉, 〈경향신문〉 등 다수의 매체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서교동과 광화문의 〈로칸다 몽로〉와 〈광화문국밥〉에서 일한다.


대한민국 외식업 성장사를 관통하며 살아온 그는 다시다와 미원, 식권, 회식, 가든, 맛집이란 용어가 유행했던 격변의 시대엔 기자로 살며 문화 전반을 취재했고, 요리사로 전업한 후엔 20년 가까이 주방에서 치열하게 요리했다. 장시간 변함없이 노포를 즐겨 찾았고, 그들의 '영광의 시대'를 기록하는 일에 애정을 가져왔다.

 

기자 시절엔 누군가를 섭외하고 인터뷰하는 일이 버거워 중도에 이 생활을 포기했던 그가 아이로니하게도 이 책을 위해 지난 3년간 중국집에서 갈빗집까지 취재 허가를 얻기 위해 삼고초려와 취중진담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애정과 끈질긴 노력으로 노포 식당 창업주들의 생생한 증언과 그들의 성공 비결을 한 권으로 엮어낼 수 있었다.


이 책은 기세氣勢, 일품一品, 그리고 지속持續 등 3부로 구성되었는데, 완전히 새로운 맛으로 판도를 뒤엎은 '명동돈가스'의 소개를 시작으로 최고의 재료를 사용해서 술꾼들의 배를 채워주는 '41번 포장마차'를 마지막으로 하는 총 26개의 유명 노포들을 등장시킨다. 이들 가게들이 어떻게 세월을 이기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전설의 곰탕집 하동관河東館


특별한 비법 없이 간결한 맛으로 승부하는 곰탕집 하동관, 이 가게는 '한국의 유명 노포 톱 5'에 들어가는 식당이다. 이 음식이 오랫동안 서울 시민의 사랑을 듬뿍 받은 가게라는 중요한 징표가 있다. 바로 하동관만의 독특한 주문법이다. 따로 주문표에 쓰여 있지 않아도 단골들은 알아서 식성대로 주문해서 먹는다.

 

이를테면 맛배기, 넌둥만둥, 스무 공 스물다섯 공, 깍국, 통닭, 냉수, 뜨겁게, 안 뜨겁게, 밥 따로, 민짜, 내포 빼고, 내포 많이, 기름 많이, 기름 빼고 등등, 메뉴는 오직 하나인데 이처럼 주문법은 각양각색이다. 이는 아마도 세계신기록이 아닐까 싶다. 반찬도 없는 간단한 곰탕 한 그릇에 이처럼 많은 주문이 가능하니 말이다.


"손님이 먼저 이런저런 식으로 해달라고 주문해요. 그러면 우리가 고민을 하지. 너무 길면 주문이 복잡하니까 짧게 불러야 할 것 아니우. 그래서 약칭을 만드는 거지. 직원들끼리 암호처럼. 근데 그걸 손님이 다 아는 거야"

 

맛배기는 밥을 약간 넣는 것(그만큼 고기가 적게 들어감)이고, 소 곱창은 스무 공이상의 주문이며, 깍국은 깍뚜기 국물을 뜻하는데 대부분의 주문자들이 느끼한 곰탕 맛을 중화시키려고 이를 주문한다. 여기서 통닭은 닭고기가 아니라 계란을 넣어달라는 요청이고, 냉수는 물이 아니라 소주 1잔을 달라는 주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고객들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잇는 이유는 70년째 서울 마장동 인근의 팔판정육점에서 가장 좋은 고기를 공수받아 재료로 사용하고 곰탕 5백 그릇이 소진되면 더 이상 장사를 안하고 문을 닫는다.



3대째 이어가는 정육점, 팔판정육점


"부친에게서 내가 사업을 샀어요. 물려받았냐고요? 아니에요. 돈 주고 샀어요.(웃음)" 


흔히 재벌가의 자식들은 큰 노력 없이 부모가 경영하는 회사에 임원으로 입사하기 때문에 소위 '금수저'로 불린다. 하지만 이 노포의 경우는 다르다. 철저한 사업 마인드로 중무장한 부친은 가게를 그냥 대물림하지 않았다. 물려줄 아들에게 액수를 매겨 돈을 가져오라고 했다. 진짜 장사꾼이아닌가 말이다. 한국의 재벌가도 이렇게 자식들을 교육시킨다면 어찌 '땅콩 회항'이나 '물벼락' 같은 이슈가 신문 지상에 낯 뜨겁게 등장하겠는가. 자식 교육은 모두 부모 탓이다.  


"1974년 1월 2일인가, 날짜도 안 잊어요. 일을 해보겠다고 어디 가서 쌀을 날랐어요. 힘이 좋아서 4천 원인가 받았어요. 꽤 큰 돈이었습니다. 돈을 벌어야겠다 생각했지요. 아버지한테 가게를 사기로 한 게 7월이에요. 저장된 고깃값은 다 드리고, 가게 시세는 절반으로 쳐서 샀어요"

 

모두 처가에서 빌린 돈이었다. 그 빚을 갚아야 했다. 


"내가 말이오, 1974년 7월 4일에 가게 인수하고 하루도 네 시간 넘게 자본 적이 없어요. 일주일에 서너 번은 한 시간 반밖에 못 잡니다. 고기는 트럭으로 밤에 들어와요. 그때부터 일하는 거요. 한번은 고기가 망가져서 생기는 손해를 제가 계산해봤어요, 연간 5천만 원입니다. 그러니 이 좁은 가겟방에서 대충 잠을 자는 거지요. 장사꾼은 그래야 해요. 희생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돈이 그냥 벌리나요"

 

그렇다. '노 페인 노 게인'이라는 서양 속담도 있듯이, 세상에 공짜 없고 땀 흘리지 않고 벌이가 생기지 않는다. 들어온 고기를 갈고기에 걸고 손질하고 나누고 여투는 일이 밤 새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다루는 소가 한때 하룻밤에 수십 마리씩 입고되었다니 그 노동의 강도가 짐작이 된다. 명절 때엔 한 번에 수십 억원의 매출이 발생한단다. 



서울 5대 냉면집, 을지면옥


의정부에서 시작한 평양면옥의 자제들이 서울에 터를 잡고 비슷한 계열의 냉면을 팔고 있다. 필동면옥, 을지면옥, 본가면옥이 바로 그것이다. 1969년 경기도 연천 전곡면에서 홍영남, 김경필 부부가 처음 시작한 냉면집이 1987년 의정부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게 바로 의정부 평양면옥이다. 을지면옥의 안주인 홍정숙 씨의 고집 센 남편이 냉면을 배우기 시작했다. 

 

1년 넘게 새벽에 일어나 육수부터 끓이면서 냉면을 배웠다. 그렇게 해서 기술이 남편의 손으로 이전됐다. 더 놀라운 건 환갑을 한참 넘긴 그가 지금도 주방장을 한다는 사실이다. 주인은 대체로 카운터를 지키는 게 정설인데 이 노포는 부부가 모두 주방의 제대로 된 일꾼이자 주방장, 부주방장이다. 


"새벽 5시에 육수부터 끓이는데, 남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매일 메밀도 갈아야 하고" 

이 부부가 주무르고 사린 면이 얼마였을까. 한 번 집으면 정확한 그램이 딱 나온다. 찬물에 면을 헹궈 사리를 짓다 보니 손가락과 손목에 관절통을 앓고 있다.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다. 그래서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이 부부들은 걱정한다. 사리를 만들 때 물기를 꽉 눌러 짜지 않으면 육수에 물기가 들어가 맛이 덜해지기 때문이다.

 

 

서울식 불고기집, 한일관

 

"내가 스무 살에 입사해서 지금 일흔이 넘었어요. 50년이 넘었네.

가만있자, 1965년도 입사인가보다.(웃음)" 


김동월 고문의 말이다. 그이는 관리 업무를 하면서 홀 업무도 챙겼다. 50년 넘은 직원이 근무하는 식당이라니 입이 쩍 벌어진다. 현재 한일관의 본점은 압구정동에 있지만 시작은 종로였다. 과거 성을의 중심은 사대문 안이었고 그중에서도 핵은 바로 종로였다. 일제강점기엔 명동과 충무로가 돈 많은 일본인들에 의해 급부상하기도 했지만 종로는 조선인의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지역이었다. 전설적인 주먹 김두한이 활약하던 곳이다.   

"여기는 정년이 있어요. 일할 능력이 있고 잘하는 분들은 정년 이후에도 다녀요" 

칠십이 넘는 김동월, 곽명훈 두 고문이 아직도 1939년에 문을 연 한일관을 지킨다. 당시의 이름은 '화선옥'이었다. 관리와 홀 업무를 담당했던 김 고문과는 달리 곽 고문은 1979년에 경력직으로 입사한 요리 고문이다. 오래 근속한 직원의 능력을 최대한 존중하고, 실제 업무에도 도움을 주고 있는 셈이다. 나이 칩십이 넘은 직원이 아직도 이 가게를 지키면서 서울식 불고기의 표준을 만들어낸 셈이다.


60년 전통의 중화요릿집, 신일반점 

저자가 처음 이 가게를 방문했을 때, 주인장은 마침 만두를 빚고 있었다. 만두가 서비스로 주는 요리가 되는 바람에 요즘 만두를 직접 만드는 중국집은 전국에서 손으로 셀 정도로 줄었다. 주인장인 임 옹은 여전히, 신일반점이 그의 사후死後에도 살아남을지 모르는 시절의 변화에도 무심하게 만두를 빚는다. 며느리 왕윤청 씨의 말이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빚는데, 여전히 제일 손 빠르고 잘 빚으세요. 이 만두, 정말 몇 번 그만두려고 했어요. '무슨 만두를 돈 받고 파느냐, 서비스 아니냐' 하는 손님들 인식 때문이지요. 그때마다 아버님은 웃으면서 아무 대꾸를 안 하십니다. 딱 한 번 말씀하셨는데, '그냥 해(계속 만들어 팔아)' 그게 전부였어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한국 땅에 건너온 임 옹翁은 따지자면 화교 2세대쯤에 속한다. 그는 아직도 한국말이 서툴다. 1세대가 임오군란 이후, 2세대는 1920년대 이후부터 대한민국 정부수립 시기, 3세대는 1990년대 이후에 한국으로 건너온 화교(조선족이 중심이 된)로 구분했으니 말이다.


여수 연등천 포장마차촌의 명물, 41번집 

"긍께, 덕자더러 덕자 썬다고 물어봐싸"

그렇다. 이 아짐(아주머니의 사투리)의 함자가 박덕자 여사다. 덕자 씨가 덕자(전라도에서 큰 병어를 뜻하는 말)를 손질하는데 뭘 썰고 있느냐고 물으니 칼질하다 말고 큭큭, 웃으시는 게다. 덕자(병어)로 치자면, 군평선이와 함께 여수의 일미. 이 아짐이 덕자를 다루는 솜씨가 여간 예사롭지 않다.

 

연등천은 여수 둔덕동 뒤의 해발 470미터짜리 호랑산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흘러드는 지방 하천이다. 한대 수량수량이 적당해 오염되기 전에는 포장마차의 불빛이 쫙 반사되면 문자 그대로 연등蓮燈이 피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연등천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에 걸맞는 여수의 젖줄이었다. 


한 상이 깔린다. 어디 그럴싸한 안줏거리만 있는 게 아니라 전라도식 반찬들도 한 자리씩 한다. 잘 담근 열무김치는 입에 쩍쩍 붙고, 여수 특산의 돌게찜이며 가지무침, 제철인 꼴뚜기회에 생선조림도 한 접시다. 이렇게만 먹어도 장정 서넛이 입을 닫을 상차림인데, 이제부터 진짜 요리가 이어진다. 


"포장마차라고 우습게 보면 큰일 나제, 암.

우리 집이 어떤 집이여, 네가 청춘 묻은 집잉게"

 

 

 

 

한국의 유명 노포들을 현장 취재하다

 

저자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26곳의 노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점주들과 생생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매일 새벽 손으로 두부를 만들어내는 강릉토박이할머니 두부집의 사장은 이 동네의 제삿날이 비슷한 이유는 여운형 제자들이 빨갱이로 몰려서 그렇다는 소문을 들려주고, 부산 국제시장에서 해물전골로 유명한 바다집의 여사장은 일일이 해물을 손질하는 바람에 굵어진 손가락 마디가 저자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사연 없는 우리들의 인생사가 없는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오랜 전통을 지금까지 이어오는 노포들이야말로 알마나 많겠는가. 대대손손 계속 이어나가 한국도 일본 이상으로 100년이 족히 넘는 노포들이 전국에 넘쳐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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