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기후변화, 대량멸종, 군국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일은 급진적인 문명적 전환이다. 탄소배출권 거래제, 탄소세, ESG, 그린뉴딜 같은 제도적 개혁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재생에너지, 전기차 같은 녹색기술로도 충분치 않다. 자원 추출에서 제조, 운송, 폐기에 이르기까지 산업화된 경제에서 녹색화(탈물질화)의 여지는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장 긴급한 일은 생산성의 엔진을 멈추는 일이다. 2016년 예일대 노드하우스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세계경제가 성장하는 한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산업시대 이전에 비해 1.5도 이내로 제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현재의 시스템은 심각한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감수하지 않고는 멈출 수도 없고 되돌리기는 더욱 불가능한 성장역학을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4)

핵발전소 사고가 난 곳에, 아무리 안전기준 이내라고 하더라도 오염수를 생태계에 버리는 것을 정당화하기란 매우 어렵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016년 보고서에서 말했다.(<핵발전소 사고 이후의 방사능 폐기물 관리>), 그러나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다르다. 인류는 7등급 핵사고 재난이 발생한 후쿠시마, 바로 그곳에서 130t의 방사능 폐수가 바다로 투기되는 것을 목격한다. 핵공학자 서균렬 서울대 명예교수는 후쿠시마 오염수가 남해에 도달하는 데에 걸릴 시간을 공무원들과 다르게 말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고발당했다. 나는 그가 명예교수라는 직함을 더 이상 가지지 못할까 봐 걱정한다. 한국은 달라졌다. 공무원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과학자가 경찰조사를 받는 곳이 되었다.


(26-27)

그 정점에 한국의 대통령이 있다. 도쿄전력은 일본 법령에서 원자력 사업자이다. 작년에 오염수 투기 실시계획 허가를 일본 원자력규제청에 신청했다. 신청서에 이렇게 썼다. “방출 후 모니터링에서 방출 방사능 물질 기준을 초과하는 이상치가 검출되는 경우에는 방출을 정지하겠다.” 일본 원자력규제청은 이 내용을 포함해 실시계획을 인가한 것이기 때문에, 만일 도쿄전력이 이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투기 자체가 금지된다. 처벌을 받는다. 법적 의무다. 여기에 더해 일본 원자력규제위원회는 기준 초과 여부를 측정할 해상 모니터링 장소를 늘리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도쿄 전력은 올해 2, 이런 내용을 담아 실시계획 변경 인가를 추가로 받았다. 이미 일본의 법령 안에서 결정된 일이다. 그런데 이것을 지금 한국 대통령이 일본 총리에게 요구조건으로 제시하는 중이다. 외면하고 싶은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이다.


(38-39)

쫄깃하다 과메기, 김이 모락 꼬막살, 숙취에는 해물짬뽕, 보양 으뜸 장어탕, 톡톡 튀는 생대하, 시원하다 대구탕, 돈 생각해서 동태탕, 새콤달콤 서대회, 쫄깃하다 박대구이, 생일이면 미역국, 기분이다 킹크랩, 회복 촉진 전복죽, 제사장 문어숙회, 땀이 난다 낙지볶음, 맥주에는 노가리, 그 향기 이채롭다 멍게속살, 속을 풀자 조개국물, 여름이다 민어회, 가족여행 대게찜, 승부수다 복어국, 포장마차 홍합탕, 생각난다 가자미식혜, 밥도둑 갈치조림, 애 어른 모두 명란젓, 이런저런 생선구이, 얼큰하다 매운탕, 심심풀이 쥐포, 그리고 끝끝내 어묵까지


(56)

새만금이라는 이름의 갯벌이 실제 존재하는 줄 알았던 나는 영화를 만들며 그 뜻을 처음 알게 되었다. ‘새만금이라는 말은 본래 없던 말이다. 만경평야의 만, 김제평야의 금(), 두 글자를 합친 만금이라는 말 앞에, 새로운 땅이라는 뜻의 자를 붙여 만들어진 신조어로, 만경평야와 김제평야를 합친 만큼의 새로운 땅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 새만금은 만경강과 동진강이 서해와 만나는 세계 최대의 갯벌을 무려 33.5km에 이르는 콘크리트 벽으로 막음으로써 만들어지는 땅, 혹은 그 땅을 만들고자 하는 세력의 욕망이 응집된 단어이다. ‘새만금은 역사에도, 지도에도, 사전에도 없는 단어이다. 그렇기에 새만금 갯벌이라는 말은 모순이고, 만경강, 동진강 하구의 광활한 갯벌이 있을 뿐이다.


(60)

잼버리대회가 파행 속에 열린 곳은 해창갯벌을 매립한 매립지이다. 그 한편은 매립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고 장승들이 서 있다. 3년 전, 잼버리대회를 위해 장승과 컨테이너를 다 치우라 했었지만, 시민들은 힘을 모아 장승들을 지켜냈다. 20년 동안 갯벌 복원의 염원을 담아 장승을 세우고, 비바람에 쓰러지면 일으켜 세운다. 삼보일배 출발지이자 갯벌 살림의 성지인 해창갯벌에, 어제 200명의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장승을 세웠다. 우리는 함께 울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웃었다. 그리고 <수라>의 엔딩곡인 아름다운 것들을 다 같이 부르며 갯벌의 보전과 부활을 기도했다. 국민 1308명이 원고가 되어 새만금공항 기본계획 철회를 위한 소송을 진행 중이다. 9 14일 서울행정법원에서 3차 공판이 열릴 예정이다. 아름다움을 목격한 사람들이 이제 증인이 되어 나설 때이다.


(108)

전세계적으로 기후위기 등 무분별한 환경파괴를 국제법상 에코사이드(ecocide)’로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생태학살이라는 말이 점점 더 많은 환경 운동 현장에서 들리고 있다. 환경파괴를 형법상 범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요구가 왜 등장했을까? 그 방식이 실제로 가능할까? 이미 환경파괴를 범죄로 처벌하는 나라가 있을까?


(125)

인간의 시간은 문명화 이후의 시간으로 제한될 수 없다. 1만 년도 채 되지 않은 문명의 시간은 인간 역사 400만 년 이상의 시간을 쓰레기 취급했다. 인간 형성의 99.9%의 시간은 0.1%도 안되는 신석기혁명 이후 형성된 인간성에 억압당해 폐기되었다. 인간적 가능성은 한없이 협소해졌고 자연과 생명에 대한 감각 또한 형편없이 조악해졌다. 유구한 생명활동의 시간 속에서 형성되어온 고귀한 인간적 자질은 버려야 할 야만성으로 취급되었다.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을 수렵채집인으로 살았다. 현대인은 그 시간을 고상하고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한 유아기로 취급한다. 하지만 인간 역사 속에서 인간성이 성장하고 진보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202)

세 번째는, 아마도 지겨울 만큼 반복해서 들은 이야기일 테지만,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 특히 액화상태의 화석연료들이 공급의 한계에 부딪혔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른바 녹색혁명의 성취하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화석연료에 의존한 것이었고, 지금도 전 세계 농업은 화석연료를 더더욱 많이 사용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토양이 지속적으로 황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양침식으로 인해 상실되고 있는 자연적 비옥도의 총량은 기본적으로 화석연료로 벌충할 수 있는 것보다 크다. 바로 이것은 산업국들의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농업경제의 실상이며, 한계점은 사람들이 예측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도래할 수 있다. 에너지 학자들은 2008년에서 2020년 사이에 전 세계 석유생산이 정점에 도달하고 이후에는 영구적으로 감소 추세로 돌아서서, 이번 세기 후반부에 이르면 연간 농업생산량이 지금에 비해서 10%까지 떨어질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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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3권 - 개화기편, 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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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3권을 이야기해줄게. 지난번 2번에서는 1895 10월에 있었던 을미사변까지 이야기를 했었지. <한국 근대사 산책> 3권의 부제는 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란다. 아관파천이라고 하니 1896년부터 이야기가 시작될 터이고, 하와이 이민은 아빠가 언제 처음 시작되었는지 모르니 3권의 이야기가 몇 년까지 이어질 지는 서서히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학창 시절의 역사를 싫어했던 아빠는 아관파천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나는데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몰랐단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역사에 재미를 느끼고 여러 역사책들을 읽어보다가 아관이라는 말이 러시아 공사관이라는 뜻이고 파천이는 말이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란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위협이 거세지면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갔단다. 고종이 여장을 하고 도망쳐 갔다고 하니 007 작전을 뺨 칠 정도라고 할 수 있으나, 자신의 나라에서 왕이 저리 도망갈 정도였으니 나라의 위신과 국력이 얼마나 엉망이었던 거니. 이 때 영친왕의 엄마이기도 했던 엄상궁이 이 작전을 주도했고, 당시 친러파였던 이범진, 이완용이 동참했다고 하는구나. 이완용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매국노 이완용 맞단다. 이 때만 해도 친일파가 아니고 친러파였구나. 이렇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한 것이 1896 2월 이었단다.

….

을미사변이 있고 얼마 후 김구 선생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단다. 치하포라는 곳에서 을미사변에 참여했던 일본인을 죽이게 되는데(1896 3) 얼마 못 가 김구는 체포되고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단다. 그런데 사형 선고 직전에 고종이 전화를 걸어와 사형을 면해주었다는 일화가 있다는구나. 전화 개통이 얼마 안 된 뒤였는데, 그 전화로 김구 사형 선고를 막았다고 하니 전화가 조금만 늦게 개통되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김구 선생은 없을 뻔했구나. 고종이 잘못한 일은 많았지만 이 일은 잘했구나. 그렇게 사형을 면한 김구는 형살이를 2년 더 하다가 탈옥하여 도망쳤다고 하는구나. <한국 근대사 산책> 10권까지 이야기하다 보면 김구 선생의 이야기를 계속 나올 테니 틈틈이 이야기 하도록 하마.


1.

서재필이 1986 4 7일에는 독립신문을 창간하게 되는데, 파격적으로 순한글로 간행하였고,  한글 띄어쓰기도 처음으로 시도했다고 하는구나. 서재필이 미국 유학 생활에 영향을 많아 기독교 예찬 내용도 포함되어 있고, 청결을 중시하라면서 목욕을 2일에 한 번 하라는 기사도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목욕을 2일에 한 번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리고 독립신문에는 광고도 싣는 등 오늘날 신문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어.

독립 신문을 창간한 지 3달 뒤인 1896 7월에는 같은 개화파 사람들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했단다. 그리고 파리에서 봤던 개선문을 본 따서 독립문도 건설했단다. 아빠는 독립문이 당연히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인지 알았는데, 일본으로부터 독립이 아닌, 중국의 종속에서 벗어나 독립하자는 뜻에서 지어졌다고 하는구나. 얼마 전에 썬킴의 한국사라는 팟캐스트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책에도 그 내용이 나와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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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74)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영은문은 조선이 중국의 명청 양국을 상국으로 섬길 때에 생긴 것인데, 우리가 중국의 노예라는 표라고 볼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본국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것이 영은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더러운 표, 부끄러운 이 문을 없애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였다. ……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다 독립문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때마침 내가 가진 화첩 중에 파리의 개선문이 생각나서 그 규모를 축소해 그 모양만은 똑같이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때 독일공사관에 근무하는 스위스 사람에게 설계도를 부탁 작성하였다. 그리하여 심()모라는 목수가 시공하였는데 총공사비는 1500여 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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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에서 우리나라에 근대식 학교가 생겨났다고 했었잖아. 그 중에 배재학당이란 곳에 급성장했다고 하는구나. 이 곳에는 이승만도 입학하였고, 이승만이 영어를 습득하는데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고 하는구나. 영어만 잘 하면 뭐 하나. 서재필이 매주 배재학당에서 특강을 하고 했는데, 아무래도 미국에서 자신이 배웠던 것들을 많이 알려주었겠지? 서재필은 토론하는 것에 대해 가르쳐 주기도 했는데, 협성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토론을 정기적으로 했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는 고종은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민영환을 특사로 보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일본에 맞설 군대를 만들기 위해 러시아에 군사교관 파견을 요청했다고 했어.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13명이라는 적은 수이지만 군사교관을 파견했다고 하는구나. 이렇게 러시아가 조선과 손을 잡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뒤로는 일본과 암약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조선을 서로 반으로 나누자는 내용이었다는구나.

고종은 1897 2 1년 만에 경운궁(덕수궁)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하는구나. 아관파천 1년 동안 느낀 것이 있었는지 나라는 거창하게도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자신은 황제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고종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거리낌 없었어. 앞서 김구를 사형에서 면하게 한 전화도 1896 10월에 처음 설치되어 계속 확대 설치를 했어. 철도 부설도 논의되어 여러 나라들이 참여하겠다고 했는데, 80~90%가 일본에서 철도부설권을 가져갔다고 하는구나.

1898년에 있었던 일들을 좀더 살펴보도록 할게. 18982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대원군이 죽었단다. 죽기 전에 주상이 보고 싶다고 했다는데, 고종은 대원군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 1898 5월에는 서울 명동성당이 완공되었어. 1898 3월에는 독립협회에서 주관했던 만민공동회가 열렸단다. 이것은 여러 시민들이 모여 진행한 일종의 시위였는데 1차 만민공동회의 주요 주제는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자는 내용이었어. 러시아는 몰아내자는 내용이 있어서 일본이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설이 있단다.

배재학당의 토론 모임인 협성회를 이야기했었잖아. 1898 4월 이 협성회에서 일주일에 1번 협성회 회보를 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매일신문로 바꿔 매일 신문을 발행했다고 하는구나. 독립신문이 주 3회 간행했었는데, 매일신문이 나온 이후로 독립신문도 일간지로 바꿨다고 하는구나. 경쟁 체계에 돌입한 거지.

대한제국 정부는 만민공동회의 책임을 독립협회의 서재필에게 물어 출국하라고 했고 그렇게 서재필인 1898 5월에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하는구나. 서재필에 평가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상존하는데, 우리나라를 개화화하는데 노력하긴 했는데 미국인 행세만 했다는 비판도 있다는구나.

서양 문물을 받아들일 때 우리나라 토착 문화와 잘 융합하여 조화롭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무조건 미국식 문물로 바꾸려고 했던 것이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독립협회는 상원 중심의 의회 정치가 필요하다면서 고종에 상소를 했대. 독립협회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힘을 발휘하려고 하자, 독립협회를 견제하기 위해 황국협회라는 것을 급조했는데, 황국협회에서는 하원 의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대. 근대식 정당 정치의 시작이라고나 할까? 1898년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 일간지도 또 창간을 하게 되었는데, 황성신문은 장지연, 유근, 남궁억이 만들었대 황성신문에는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 유명하신 분들이 활동했다는구나.


2.

고종이 커피를 좋아했다는 것은 유명하단다. 그런 커피에 독약을 타서 고종을 암살하려는 사건이 있었어. 고종은 커피 냄새가 이상한 것을 알아채고 바로 뱉어내어 무사했는데, 같이 커피를 마셨던 황태자는 먹었다가 토를 했는데도 고생을 했다고 하는구나.

1898 10 1일부터 12일까지 2차 만민공동회가 열렸는데, 수구 친러 정부 퇴진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였어. 시위가 거세지자 고종은 결국 친러파 대신 일곱 명을 파면 조치했다는구나. , 오늘날 촛불 시위를 연상케 하는구나. 1898 10 28일부터 29일까지 3차 만민공동회가 열렸는데, 헌의6조라는 개혁안을 고종에게 건의를 했단다. 이렇게 만민공동회가 이어지면서 친러파 인사들도 반격을 준비했어. 익명의 조작 사건을 벌여서 독립협회 회원 20명을 체포해 버렸어. 그러자 다시 만민공동회를 열어 항의했고, 체포되었던 사람들 중 간부들을 일부 석방시켰다고 하는구나. 만민공동회는 일종의 직접 민주주의라고 평가되기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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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244)

또 전인권은 이 당시 종로는 조선의 아크로폴리스였으며, 이들의 투쟁은 단기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만민공동회는 종로에 연단을 만들고 신분과 나이의 구별 없이 어린이조차 연단에 올라 연설을 하는 등 한국의 직접적 민주주의또는 대중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원형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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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만민공동회의 요구 사항을 시행하지 않자 박영효가 주도하여 만민공동회는 다시 시위를 했어. 그런데 독립협회 내에서도 이번 시위는 만류하는 온건파 인사도 있었단다. 이로 인해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와 윤치호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생기기도 했단다. 이 시위로 인해 일단 고종은 독립협회 인사들을 내각에 참여시키긴 했지만, 고종의 반격은 오래가지 않았단다.

1898 12 23일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켰고 불법화했고,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켰단다. 그로 인해 독립신문과 매일신문도 폐간이 되었다고 하는구나. 얼마 전에 내각 중추원에 참여시켰던 독립협회 회원들도 모두 파면되었대. 그러자 박영효의 쿠데타 음모가 있었고, 이 일로 이승만도 검거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대. 이때 선교사와 이승만의 부인 박승선의 구명 상소를 올렸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사형은 면했다고 하는구나. 미래를 생각했을 때 다소 아쉬운 일이구나.

독립협회 해산되면서 온건파였던 윤치호도 피신 중이었는데, 독립협회를 배신하고 내각에 들어가게 되었대.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이 법무대신으로 있었다고 하니 배신하기 쉬웠을 거야. 이완용은 1898년 독립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이 또한 변절하고 최악의 친일파의 길을 걷게 된단다.

….

다시 이 당시 사회 모습을 일부 이야기해줄게. 고종은 미국 공사였던 알렌을 통해 전기, 전차를 추진했어. 그래서 한성전기공사라는 회사가 만들어져 1898 1월 전기가 처음 들어왔고, 1899 5월에는 전차 운행이 시작되었단다. 전차를 처음 본 사람들이 얼마나 놀랬겠니. 그런데 전차로 인해 불미스러운 안전사고와 교통사고가 연이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전차를 불에 태우는 사건도 일어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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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274)

1899 5 26일에 일어난 전차 소각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종로 2가에서 전차가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를 치어 죽이자 아이의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전차에 달려들었다. 전차가 멈추지 않고 지나가려 하자 이를 지켜보던 군중들이 차장과 운전수를 향해 돌진했다. 그들이 도망가자 군중은 방치된 전차에 돌을 던져 파괴하고 그 위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또한 뒤에 달려오던 다른 전차도 전복시키고 태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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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는 1899 9월 경인구간 일부구간이 개통되었고, 1900 7월에 전구간 개통되었다고 하는구나. 자전거, 인력거 등도 이때 등장하였고, 은행도 설립되었다는구나.

….

1901년 제주도에서는 이재수의 난이 일어났어. 천주교에서 교세를 확장하려고 했는데 이때 여러 가지 폐단이 일어났고, 정부에서는 세금을 높이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더 걷어가는 조세수탈에 백성들의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 이에 제주도 백성들이 항거하자 천주교도들이 농민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이 일어났단다. 그래서 이재수를 중심으로 제주도민들이 봉기하여 천주교도 700여 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단다. 정부는 회유책으로 이들을 해산시키는데 성공하고, 이재수는 체포하여 처형시킴으로써 난은 종결되었단다.

1901년에서 1902년에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이어졌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어. 그 와중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하와이 이민 광고가 붙기 시작했단다. 1902 12월 처음으로 100여 명이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고 하는구나.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것은 예상했듯이 거짓이었고, 심한 인종 차별을 당했고 노예 같은 생활을 했다는구나.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도 없고 말이야.

여기까지가 <한국 근대사 산책> 3권의 이야기란다. 500년 동안 이어졌던 조선 왕조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이런 초라한 모습이 되었을까? 안타깝기 그지없구나. 나라의 지도자가 나라의 미래를 보지 않고 백성들을 등한시하게 되면 얼마 못 가 나라꼴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배워야 하는데, 오늘날 대한민국은 일 년여 만에 부끄러운 나라로 돌변하고 있으니, 이 또한 안타깝구나.

….


3.

이번 <한국 근대사 산책> 3권에서도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당시 조선의 모습들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는데, 재미있는 것 두어 개만 소개해줄게. 먼저 우리나라 사람들이 폭식을 많이 한다고 하고, 그것을 신기하게 보고 글로 남긴 사람이 있다고 하는구나. , 아빠가 가끔 폭식하고 나서 후회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괜히 그런 게 아니구나. 조선의 DNA를 가지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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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서울 주재 이탈리아 총영사로 일한 카를로 로제티도 1904년 이탈리아에서 출간한 <꼬레아 꼬레아니>에서 한국인들의 폭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에서는 많이 먹는 것이 큰 자랑거리의 하나이며,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는 누가 더 많이 먹는가를 내기하는 것이 매우 흔한 일이다. 이 경우 그들이 먹어치우는 엄청난 양은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체질로 인하여 상류층에서 가장 즐기는 오락이 바로 잔치라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혼령들을 위한 제사는 제쳐두더라도 결혼식 잔치에서부터 친척의 기일날에 이르기까지 즐거운 연회가 항상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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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장례문화에 관한 것인데, 우리나라 장례문화는 예전부터 축제처럼 하는데 그것이 서양 사람들에게 색다르게 비춰진 것 같구나. 마지막 가는 길을 즐겁게 가시라는 의미인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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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서울에 주재한 이탈리아 총영사 카를로 로제티는 1904년 이탈리아에서 출간한 책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장례식의 주된 분위기는 분명 슬픈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들의 감정을 가장하려는 극동 아시아 모든 민족의 기질인 것이다. 상여꾼들은 종종 청중의 웃음을 자아내는 노래를 부르며 보조를 맞춰 행진하고, 가족을 둘러싼 친지들은 농담이나 웃음짓으로 가족을 흥겹게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쓰는데, 우리 관점에서 볼 때는 매우 어색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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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첫 이민이 1902 12월까지였구나. 그러면 <한국 근대사 산책> 4권은 1903년부터 이야기가 이어지겠네. 이것도 조만간 읽고 이야기해줄게.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단발령으로 사회적 혼란이 고조된 상황을 틈타 러시아는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인천에 정박 중인 러시아 군함으로부터 수병 100여 명을 서울로 이동시켰으며,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관은 친러파 이범진 등과 공모하여 친위대 병력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돼 왕궁의 경비가 소홀한 틈을 타 고종을 아관(俄館,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게 하였다.

책의 끝 문장: 1903 8월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 하디(1865~1949)는 교인들 앞에서 바로 그 점을 고백함으로써 원산부흥운동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유길준은 <서유견문> 제14장 개화의 등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화란 온갖 사물을 깊이 연구하고 경영하여, 날로 새롭고 더 새로워지도록 기약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 진취적인 기상이 웅장하여 사소한 태만함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개화하는 일을 주장하고 힘써 실행하는 자는 개화의 주인이며, 개화한 자를 부러워하여 배우기를 기뻐하고 본받기를 즐거워하는 자는 개화의 빈객이다. 또 개화한 자를 두려워하고 미워하면서 부득이하여 따르는 자는 개화의 노예라 할 것이다."
- P25

처음에 전화는 ‘텔리폰’이란 말을 음역(音譯)해서 덕진풍(德津風)이라고도 했고 의역(意譯)해서 전어기(傳語機)라고도 했다. 다리풍, 어화통, 전어풍 등으로도 불렸다. 영어 ‘텔레폰’의 차음이거나 신조어다. 당시 일반인들은 ‘하늘의 전기바람은 비구름을 말리고 땅의 ‘덕진풍’은 땅 위의 물을 말린다"며 전기와 전화를 싸잡아 경원시했다. 진용옥은 덕진풍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지만, 텔레폰의 한역이므로 ‘덕률풍(德律風)’이 맞다고 주장했다. - P128

윤치호가 현실에 굴복해 변절했을망정, 그에게 국가, 사회를 생각하는 그런 정신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윤치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06년에 결성된 대한자강회의 회장에 추대되었고, 1907년에 조직된 비밀단체 신민회의 주도 멤버로 활약했다. 그는 그런 활동을 하다가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게 된 것인데, 출감 후 그는 <매일신보> 사장과의 회견에서 이후 일선동화(日鮮同化)를 위해 노력할 것을 천명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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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9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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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지난 번에 요 네스뵈의 <리디머>를 읽으면서 남아 있는 해리 홀레 시리즈는 순서대로 읽어보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이번에 읽은 것이 <팬텀>이란다. <팬텀>은 해리 홀레 시리즈의 아홉 번째 이야기란다. 해리 홀리 시리즈 중에서 가장 성공했다고 하는 <스노우 맨>. 아빠도 이 책부터 읽었단다. 그 책을 읽고 두 번째로 <레오파드>를 읽었는데, <레오파드>가 해리 홀레 시리즈의 여덟 번째 이야기란다. 이번에 읽은 <팬텀> <레오파드>의 뒷이야기라고 보면 된단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니 사실 순서를 두고 읽을 필요는 없단다.

아빠가 <레오파드>을 읽은 것을 확인해 보니 2014년이더구나. 어느덧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당연히 줄거리가 생각날 리 없지, 잔인한 내용들이 있었다는 것만 어설프게 기억나는구나. 그 때 읽고 써둔 독서편지를 찾아 읽어보았단다. , 그런 내용이었구나. 해리 홀레가 사건을 마무리고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홀로 홍콩으로 떠나면서 끝이 났구나. , 그럼 이번에 읽은 <팬텀>은 또 어떤 잔인한 이야기가 나올지, 덜 잔인하게 이야기가 전개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책을 폈단다.


1.

<레오파드>의 마지막 부분에서 홀로 홍콩으로 떠났던 해리 홀레가 3년만에 오슬로로 돌아오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단다. 그가 다시 돌아온 온 이유는 이랬어. 해리가 평생을 거쳐 가장 사랑한 여자가 라켈이라는 사람이었고, 그 라켈의 어린 아들이었던 올레그와도 무척 친했었어. 어린 올레그는 해리에게 아빠라고 부를 정도로 친하게 지냈단다. 그런 올레그가 어느덧 18살이 되었는데, 살인 혐의로 감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오슬로로 돌아온 거야. 해리가 워낙 과묵하고 말이 없어서 어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리가 생각하길 올레그는 그럴 아이가 아니고, 다른 진실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피해자는 19살의 구스토 한센이라는 아이로 올레그의 친구이자 마약 운반책을 맡고 있던 사람이야.

해리는 옛 동료인 과학수사관 베아텐 뢴을 찾아가 사건 경위를 들었어. 범행 현장에 올레그가 있었고, 올레그의 손에 화약 잔여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정황상 올레그가 범인으로 현장에서 체포된 것이라고 했어. 다만, 권총이 사라진 상태라고 했어. 해리 홀레는 라켈을 만났어. 라켈은 변호사였는데, 아들 사건을 위해 또 다른 변호사 한스 크리스티안과 함께 준비하고 있었어. 3년 만에 반가운 재회였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어.

….

올레그가 어쩌다 마약밀매를 하는 구스토와 친구가 되었을까. 어렸을 때부터 친구인 구스토가 나중에 마약 운반책이 되었다고 하는 게 낫겠구나. 구스토는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입양을 하게 되었어. 양부모님이 그렇게 못해준 것도 아닌데 구스토는 커가면서 자꾸 삐뚤어져 갔단다. 마약상 안드레이를 알게 되어 마약 운반책을 하게 되었고, 친구인 올레그와 구스토의 이복동생 이레네도 그 일을 도와주게 되었어. 올레그는 사실 이레네에 마음을 두고 있었단다.

구스토가 몸 담고 있던 마약 밀거래 조직은 두바이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는 이가 보스이고, 그 아래 안드레이가 중간 보스 정도 되고, 안드레이의 조카 세르게이가 행동 대장 정도 되었단다. 구스토는 거의 말단이었지. 원래는 이 조직이 다른 마약밀거래단과 비슷했는데, 입센이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는 작자가 마약을 직접 개발해서 이들에게 유통을 맡겼는데, 이것이 대박이 났단다. 입센이 새로 개발한 마약을 그들은 바이올린이라고 불렀어. 두바이는 정치력도 뛰어났단다. 떠오르고 있는 유력 여성 정치인 이사벨레 스퀘옌의 약점을 잡고 다른 마약밀거래단을 소탕하도록 압력을 넣었단다. 약점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보상도 해주고 그랬어. 그런데 그 약점이라는 것이 뭐였냐면, 이사벨레가 쿠스토와 잠자리를 같이 했는데, 그걸 두바이가 성매매로 매도했지. 어쩌면 이것도 다 두바이의 계획이었을 수도

두바이의 조직을 제외하고 나머지 마약 조직은 사라지게 되자 두바이의 조직은 독점을 하게 되고 돈을 끌어 모았단다. 그들 조직에는 마약 운반책으로 비행기 조종사 토르 슐츠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실수로 공항에서 마약탐지견에 걸리고 말았어. 결국 경찰서에 체포되었지만, 경찰서에도 두바이의 사람이 있었단다. 그가 힘을 써서 풀려났어. 하지만 그는 당분간 국내선만 운전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마약 운반을 못하게 되고, 그래서 수입이 줄어들고돈이 궁했던 그에게는 막심한 손해였어. 결국 조직을 배신하고 경찰서를 찾아서 마약 조직에서 대한 정보를 주었는데, 아하, 운도 지지리 없지, 그가 만난 미카엘 벨만이라는 경찰도 두바이의 함께 마약 밀거래를 하던 사람이었어. 결국 비행기 조종사 토르 슐츠는 살해당하고 만단다.


2.

해리는 올레그를 면회 갔어. 면회를 마치고 오던 해리는 싸해지는 기분이 들어 다시 감옥으로 돌아갔고 올레그를 살해하려고 했던 괴한으로부터 간신히 올레그를 살려낼 수 있었단다. 올레그가 중상을 입긴 했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어. 도대체 누구 짓일까? 그런데 올레그를 공격했던 괴한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단다. 도대체 누구 짓일까? 올레그가 중상을 입어서 방분간 다른 곳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이것은 한스 크리스티안의 도움으로 은신처를 구할 수 있었단다.

그런데 어느날 진범이 자수했다면서 올레그가 풀려났다고 했어. 이렇게 쉽게 진범이 나타났다고? 이것은 올레그를 죽이기 위한 함정이라고 생각했어. 다행히 해리가 먼저 올레그를 만날 수 있었단다. 그리고 올레그는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어. 구스토는 가면을 쓴 사람이 죽였고, 올레그에게는 협박만 하고 살려주었다고 했어. 가면을 쓰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해리 홀레는 범인은 안면식이 있는 범인이라고 생각했어. 목소리는 아는 측근이라서 말도 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어. 올레그에게 두바이의 집에 가보았냐고 물어보았는데, 가보긴 했지만 눈가리개를 하고 갔고 지하실에서만 있어서 두바이의 집이 어디인지 몰랐어. 하지만, 해리는 올레그의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을 이용하여 대충 집의 위치를 추리하게 된단다. 올레그에게 그 동안의 이야기를 들은 해리는 올레그를 한스 크리스티안에게 신변 인도를 했어. 당분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 달라고 말이야.

….

해리 홀레는 구스토와 올레그의 주변을 조사했단다. 해리 홀레가 이 사건을 수사하게 되자 마약 조직에 있던 안드레이는 세르게이를 시켜서 해리 홀레를 죽이려고 했어. 해리 홀레가 술 먹고 사고를 치고 그래서 그렇지, 엘리트 형사잖니. 세르게이가 어설프게 공격했다가 도리어 반격을 당해 세르게이가 죽고 말았단다.

….


3.

구스토가 죽기 전 손톱으로 범인을 긁었다고 해서 해리는 구스토의 묘지를 다시 파서 손톱을 가지고 오려고 했어. 하지만 누군가 추격을 했고 총격까지 가했어. 간신히 도망쳤단다. 손톱과 함께해리 홀레를 쫓는 괴한들은 더 늘어나서 그가 묵고 있는 호텔까지 쫓아와서 한바탕 총 싸움도 했어. 그렇게 어렵게 가지고 온 구스토의 손톱은 과학수사관 베아테 뢴에게 전달하였고, 얼마 후 수사 결과가 나왔는데 손톱에 남은 피의 주인은 경찰인 미카엘 벨만이라고 했어.

해리 홀레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어. 해리가 하나하나 마약 조직의 조직원들을 하나씩 밝혀냈단다. 바이올린을 개발한 입센의 정체는 병원에서 일하는 약사였고, 미카엘 벨만 뿐만 아니라 앞서 이야기했던 정치인 이사벨레가 연르된 것도 알아냈단다. 그리고 의문의 사나이 두바이가 호텔에 처음 묵을 때부터 알고 지낸 카토라는 사람인 것도 알게 되었어. 너무 우연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카토는 일부러 해리 홀레에게 접근한 것이라고 했어. 자신은 말기 암에 걸려 있는데, 재미있는 승부를 해보고 싶었다나.

카토, 본명은 루돌프 아사예프였고 러시아 사람이었어. 카토는 올레그를 죽이려고 했던 것은 자신이 맞지만 구스토를 죽이지 않았다고 했어. 사실은 구스토가 자신의 아들이었다고…. ,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  카토가 이야기하는 것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어.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 해리 홀레는 다시 처음부터 사건을 정리했고,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냈어. 사실이 아니길 바라는 사람하지만 범행에 사용했던 권총도 찾아냈단다. 그래 맞아, 올레그가 범인이었어. 범행 동기도 확실했어. 구스토는 올레그가 사랑하는 이레네를 입센에게 넘기고 바이올린을 받으려고 했거든.

해리는 올레그에게 자수할 기회를 주었어. 계속 설득도 했단다. 하지만 해리가 올레그를 잘못 알고 있었나 보다. 올레그는 해리를 총으로 쏘고 도망을 갔단다. 그렇게 해리는 눈을 감게 되는데정말 죽었을까? <팬텀> 이후로도 해리 홀레 시리즈는 더 있는데, 설마 죽지 않았겠지. 약간 황당한 결말에 다소 당황했지만 아빠에게는 해리 홀레 시리즈 10 <폴리스>가 있단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요 네스뵈가 <팬텀>을 쓰고 있을 즈음에 혹시 <왕좌의 게임 시즌 1>을 보고 있었나? 마지막에 주인공이 죽어버리는 보기 드문 전개를 하시다니…. 아무튼, <팬텀>은 이렇게 약간은 찜찜하게 끝이 나고 말았단다. 아니면 이런 것이 북유럽식 스타일인가?

오늘은 그럼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찍찍거리며 부르는 소리가 한밤중 오슬로 도심의 온갖 소음을 뚫고 귀에 꽂혔다.

책의 끝 문장: 곧 알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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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서재필은 크리스마스에 도착했지만, 그날 조선의 달력은 11 10일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뒤에는 1896 1 1일이 된다. 양력이 시행된 것이다. 갑오개혁으로 개국 연호를 사용하던 조선은 양력을 세운다는 의미로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달력은 개혁 조치 중 하나였는데, 흥미로운 점은 양력보다 요일제가 먼저였다는 것. 1895 5월에 주 7일 요일제가 시행되어, 양력보다 6개월 앞섰다. 하지만 명성황후 시해 이후 단발령과 함께 진행된 양력에 반발은 만만치 않았고, 종두법을 도입한 신지식인 지석영조차도 반대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22-23)

이처럼 <독립신문>은 가독성을 위해 한글 띄어쓰기를 채택했고, 이후 띄어쓰기가 대중화되고 정착되었다. 논설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각국에셔난 사람들이 남며 무론하고 본국 국문을 몬저 배화능통한 후에야 외국 글을 배오난 법인데, 죠션셔난 죠션 국문은 아니 배오드래도 한문만 공부하는 까닭에 국문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물미라. 죠션 국문하고 한문하고 비교하여 보면 죠션 국문이 한문보다 얼마가 나흔 거시 무어신고 하니 첫재난 배호기가 쉰이 됴흔 글이요, 둘재난 이 글이 죠션글이니 죠션 인민들이 알어셔 백사을 한문 대신 국문으로 써야 샹하 귀쳔이 모도 보고 알아보기가 쉬흘 터이라.”


(46)

1919년 응우옌은 파이레 미리 도착해 활동 중인 한국 대표단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프랑스 당국은 응우옌이 한국 대표단과 매우 가깝게 지낸다며 심지어 응우옌과 한국인들의 대화 내용도 기록해두었다. 응우옌은 한국 대표단의 도움으로 세계 각국 언론과 인터뷰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 신문들은 이 한국 대표단이 대한민국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 of Republic of Korea)’에서 파견되었다고 기록한다. 나중에 응우옌이라는 이 베트남 젊은이는 이름을 호치민(Ho Chi Minh)’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베트남을 독립시켰다.


(47)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은 하와이 노동자들이 일당을 아껴서 모은 돈이었다. 그 총액은 1945년까지 300만 달러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된다. 1954, 이들은 미국의 MIT에 못지않은 공과대학을 설립해달라고 대한민국에 15만 달러를 기부했다. 1954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 7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설립된 학교는 그들이 떠난 인천과 정착한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따서 인하대학교라고 이름 지어졌다.


(61-62)

여기서 이극로는 베를대학이 왜 한국어를 가르쳐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내용은 이렇다.

한국어는 현재 동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언어입니다. 한국, 만주 및 동시베리아에 사는 2000만 명이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글은 매우 독특합니다. 한국어는 실용적 측면 외에 언어학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독일에는 한국어를 아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한국 문화와 한국어를 독일에 전하기 위해 아시다시피 저는 3학기 동안 무보수로 한국어 강의를 제공하였습니다. 3학가 동안 12명이 수강했습니다.

모든 동아시아 언어에 대한 관심이 다시 증가하고 있으므로 한국어를 강의하는 것은 동양어 세미나에 큰 의미일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향후 수업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장관님께 청원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처럼 갈등과 분열의 상태에서는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절망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78)

1933 6 <과학조선> 창간호 표지

첫 페이지 과학 조선의 탄생부터 도발적이다. 일제강점기임에도 굳이 임진왜란의 거북선, 진주성 전투의 비거(飛車)’와 비격진천뢰로 시작했다. 그리고 고려 고종 21(1234)의 금속활자와 조선 태종의 주자소가 구텐베르크보다 앞선다는 내용과 세종 때의 측우기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잡지는 오늘날 기술 관료제로 번역되는 테그노크라시라는 단어도 영어 그대로 사용했다. 14페이지에는 특허제도 소개도 있다. 특허제도의 기원으로 16세기 네덜란드 수학자 시몬 스테빈의 이야기도 나오고, 1925년 지식재산권에 대한 헤이그협정 비준 현황도 실었다. 발명학회는 특허에 진심이었다. 재미있는 부분은 18페이지 향기의 과학. 향기의 역사에서 시작해 에스테르, 알코올 등 화학 성분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향기의 조합을 음악에서 협화음과 비교한 부분을 보면, 뉴턴이 <광학>에서 프리즘으로 분해한 빛을 피타고라스 음계와 비교했던 것도 떠오른다. 24페이지에는 질문과 응답 코너가 있다. 태양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시간부터 시작해, 계절의 변화를 설명하는 대목이 재미있다. 좋은 사진기를 추천해달라는 질문에 이스트만 코닥으로 답한 것도 볼 만하다. 무엇보다 한 번 응답한 질문은 다시 응답하지 아니함이라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과학조선> 첫 페이지에 나오는 측우기는 역사상 유일하게 발명 날짜가 알려진 발명품이며, 발명자는 당시 세자였던 문종이다.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부터 5 19일을 발명의 날로 지정했다. ‘과학의 날이 제정되기 10년 전의 일이다.


(86-88)

베를린 유학생 황진남이 상대성이론 특집 기사는 아인슈타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자세한 소개로 이어진다. 도입부가 재미있다.

소개함니다. 물리학에서 연구하시는 아인스타인양임니다. 우리 시대 위인인 아인스타인의 사촌 누이라 하는 한 여학생이 내게 말함은 오 년 전 스위스 쭈리히(취리히) 대학에서 공부할 때다. “당신은 물론 아인스타인이 누구인지 아시오하고 뭇난 데 대하야 아모 형편도 모르는 나는 부정사로 답하얏다. 긔가 막히여 우스면서 이 불상한 냥반아! 용서하시오”(…)

아인스타인의 존재 여부도 모르든 나는 이 여학생의 비소를 감수하얏다.

이후로는 아인스타인과 상대성에 대한 해석적 서류도 읽어보고 또 그의 저서도 연구하야 보앗스나 (…) 책장을 넹길 때마다 츨라톤(플라톤)의 아카데미 문 앞에 설린 수학에 불통하는 자에게는 허입을 금함이라는 구절을 기억치 아니치 못하얏다. 아인스타인씨 자신도 말하기를 상대론의 진의를 이해하는 이가 현재 차세에 5인 이외에 없다 하얏다는 풍설이 잇다. 고등 수학에 정통히 못하고는 상대론의 진미를 모르고 상대론을 이해치 못하면 아인스타인 숭배도 허위라 하겟다. (…) 그런대 유태인 배척이 이러케 심한 독일이 그를 위하야 특별히 천문대를 창건한 것을 보든지, 독일을 그러케 배척하든 영국과 전국 각 학교에 독일어 교수를 금지하든 미국이 그를 초청하는 것을 보면, 심지어 독일 것이라면 열성으로 증오하는 프랑스까지 그를 초청하야 후대하는 것을 보면 그 과학적 공적이 위대함을 추상할 수 잇다. 그런데 그가 우리 동아시아에 여행하려 출발하얏다는 소식을 듣고(우리 학계에 기와 누차 명석하게 소개되얏슬 듯하다) 상대론의 원리를 소개코자 하얏다.”


(148-149)

상하이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여운형이 체포된 것은 야구 시합때문이었다.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여운형은 특히 야구를 좋아했는데, 1912년 한국 최초의 야구단인 YMCA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일본 대학들과의 경기에서 큰 점수 차로 패하기는 했지만, 당시 이들의 경기는 일본에 유학 중인 한인 학생들을 크게 고무시켰고, 여운형은 이 원정을 통해 국제 스포츠 경기의 중요성을 인신하게 된다. 여원형은 독립운동에 몰두하던 상하이에서도 야구를 즐겨 코치를 맡기도 하고, 유학생들을 모아 팀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모인 선수 중에는 문인 주요한도 있었다. 여운형은 나중에 유학생 축구팀까지 만들어 동남아 원정을 떠나 국제경기도 했다.


(161-162)

1936 2 8일부터 15일까지 최규남은 신흥 물리학의 추향이라는 6편의 시리즈를 <조선일보>에 기고하면서 양자역학의 최신 동향을 소개한다. 그의 시각은 시리즈의 첫 문장에 잘 드러난다.

최근 이십 년간의 물리학 발전은 실노 녯것을 보내고 새것을 맛기에 무가지감이 잇다. 나날이 발전되는 신이론은 또다시 신이론 출현의 동인이 되여 물리학사상에 보기 드문 위관을 정하게 되엿다. 일즉이 전 세계 과학에 일대 혁명적 센세이슌을 일으킨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어언간에 고전물리학으로 귀결되엿고 현대물리학계에 가장 새로운 이론은 뿌라크리(드 브로이)’, ‘쉬레덴가(슈뢰딩거)’, ‘하이센벨크{아이젠베르크}’, ‘드랙(디랙)’, ‘풀랑크(플랑크)’, 여려 사람의 파동역학, 양자역학 및 양자론 등이라고 하겟다. (…) 인간의 사상사가 생긴 이래 철칙으로 미더오는 인과율도 조상지육이 되엿고 따라서 자연과학의 기초적 개념에까지 동요를 주게 되엿다.”


(188)

한편,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교토 다키이 연구소에서 우장춘의 연구는 계속되었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우장춘은 가족에서 일본이 이번에는 패배할 것이다라고 단언했고, 그들은 가장의 돌출 발언이 알려질까 봐 가슴 졸이며 전쟁을 견디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디키이 연구소에 조선인 청년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우장춘이 기숙사에 찾아가 이들 조선인만을 상대로 강의했다는 것이다. 가끔 조선 청년들은 흥분해서 소리를 쳤고, 뒤이어 달래는 듯한 우장춘의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고 가족들은 증언한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르나, 우장춘이 이 무렵 전쟁이 곧 끝나리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그 뒤에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깊이 고민하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205-206)

사회자 : 선생님 지금 구십 평생을 살아오셨는데요. 선생님 일생을 간단히 한마디로 평을 하신다면, 어떻게 하실 수 있을까요?

피천득 : 그저 인생을 착하고 아름답게는 살려고 했는데, 그게 끝이고… (…) 우리나라는 과거에 저항 운동을 꼭 해야 할 필요가 여러 번 있었어요. 근데 그걸 한 걸음 나가지 못하고 (…) 뒷골목으로 다니면서 한숨이나 쉬고 이렇게 한 것이 지금으로(서는) 한이고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247-249)

타향에서 고국의 소식을 접하던 그는 자신의 심정을 1949 3.1절 경축사에 육성으로 남겼다. 3.1운동은 그의 인생을 결정지은 사건이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건 서재필이기 미국에서 말하는 것이오. 나는 미국에 돌아온 뒤에 신체가 좀 강해지고, 시방 건강이 매우 좋지만은 아직도 언제 조선에 갈런지는 모르겠소이다. 내가 가든지 안 가든지 다만 부탁하는 말은 아무쪼록 조선 살게들 하시오. 합하면 조선이 살 테고, 만일 나뉘면 조선이 없어질 것이오. 조선이 없으면 남방 사람도 없어지는 것이고, 북방 사람도 없어지는 것이니 죽을 일을 할 도리가 있습니까? 살 도리를 하시오. (…)

한 집안으로 4000년을 살았는데 왜 지금 나뉘어서 두 집안이 될 까닭이 있습니까? 둘이 되면 둘이 다 약해지고 살 수가 없을 터이니, 한 배 속에 든 것과 같아서 한쪽 배가 무너지면 저쪽도 망해지는 법이오. 나는 설령 미국에 있더라도 내 정신은 조선 사람과 같이 있으니 아무쪼록 합심하고 합동해서 조선을 살게 해주시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292-293)

100년 전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머나먼 저곳까지 가서 3.1운동을 알리고, 레닌에게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림을 보면 전 세계에서 모인 공산주의자 모두가 붉은 깃발을 흔들 때, 유독 이들만은 태극기를 흔들었다. 대한민국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독립운동가들은 태극기를 앞세워 광장을 누비고 생소했던, 당시 러시아 화가의 눈에도 인상적이었기에 굳이 그림 중앙에 넣은 것이다.


(293)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무기력하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폭넓은 행보를 보이며 당대의 흐름과 같이했다. 과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과학계의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였던 상대성이론을 소개한 선구자가 있었고, 조선 전역을 돌며 순회강연을 했던 젊은이도 있었다.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상대성이론을 알리는 데 그토록 열정적이었을까?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에 다시는 과학에 뒤처지지 않겠다는 다짐한, 현식 극복의 역사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뜨거운 시대를 살았으며, 그들이 소개한 과학으로 우리는 식민지에서 벗어나고, 전쟁의 잿더미에서 불과 몇십 년 만에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기적을 보여준 것이다. 이 책은 시대의 아픔과 비극을 과학으로 극복하려 했던 분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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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형사들 - 사라진 기와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정명섭 지음 / 몽실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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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번에 읽은 책은 정명섭 님의 <조선의 형사들>이라는 책이란다. 이 책도 너희들과 함께 읽으려고 산 책인데, 너희들은 바빠서 못 읽고, 아빠가 먼저 읽어보았단다. 정명섭 님의 책은 예전에 <유품정리사>라는 책을 한 권 읽었는데, 그 책의 시대적 배경이 조선시대 정조 때였는데, 이번에 읽은 <조선의 형사들>도 정조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더구나.

좌포도청 군관 이종원과 우포도청 군관 육중창이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란다. 원래 좌포도청과 우포도청은 영역이 달라서 함께 일하는 경우가 드문데, 이 소설에서는 두 군관이 함께 사건을 수사해 나간단다. 두 사나이의 브로맨스 이야기라고 할까. 그런데 두 사나이의 직급이 높지 않아서 간혹 직급이 깡패라는 것을 실감하는 경우도 있었단다. 그 때마다 등장하여 그들을 도와주는 이가 있었으니 형조참의 정약용이란다. 아빠도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 정약용이 등장하여 반갑더구나.

그런데 이종원, 육중창 두 군관은 지은이가 만들어낸 허구 인물일 거라 생각했는데, 두 군관 모두 실존했던 인물들이라고 하는구나. 이 소설에서는 두 가지 사건을 다루고 있단다. 먼저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마마의 위패를 모신 의열궁의 기와가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났단다. 사도세자의 어머니라면 정조의 할머니가 아니더냐. 좌우 포도청은 난리가 났어. 좌우 포도청은 힘을 합쳐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능력 있는 군관을 한 명씩 발탁하여 수사하게 했단다. 그렇게 뽑힌 군관이 좌포도청의 이종원, 우포도청의 육중창이란다. 그런데 의열궁의 기와가 사라진 사건도 실제 있었던 사건이라구나. 그 사건을 해결했던 이들도 이종원과 육중창이고 말이야. 소설이 그냥 소설인줄 알았는데 실제 있었던 사건들을 소설로 각색한 것이로구나.


1.

소설 속에서는 이종원과 육중창이 기와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갈 즈음 모화관 앞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단다. 이십 대 여성의 시신으로 신분도 알 수 없는 시신이었어. 이종원과 육중창이 이 사건을 수사하다 보니 범인은 병조판서의 아들이 의심되었어. 하지만 병조판서의 집을 함부로 수사하기 어려웠어. 병조판서와 그의 아들은 수사에 대해 협조는 하지 않았고, 이 사건 수사에 혼란을 주기 위해서 또 다른 살인 사건을 사주하기도 했단다. 이 때 형조참의 정약용은 이종원과 육중창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들을 믿게 되었단다. 정약용이 도움을 주어 이종원과 육중창은 이 살인 사건을 해결하게 된단다. , 이 사건도 그럼 실제 있었던 사건일까? 이 사건은 정조는 아니고 성종 때 일어났던 비슷한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하는구나.

….

이 살인사건을 마무리하고 소설의 앞부분에 등장했던 기와 사건에 집중을 하게 된단다. 이 사건은 연루되었던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것은 단순 절도 사건이 아님을 알게 된단다. 이것은 정조 암살 미수 사건과 이어지게 되는데, 정조 암살 미수 사건은 역사적인 사실로, 많은 영화, 소설, 드라마에서 차용하는 소재 거리란다. 그래서 그런지 아빠에게는 약간 식상한 듯한 이야기였단다. 이 책은 너희들이 읽어보면 좋을 듯 싶더구나. 조선 시대 수사관들에 어떻게 활동했는지 알 수 있고, 일부 역사적인 사실도 알 수 있고, 책도 얇고 쉽게 쓰여서 읽는데도 어려움이 없을 듯 하구나. 너희들이 좋아하는 추리 소설인 점도 있고

오늘은 짧게 끝.


PS,

책의 첫 문장: 한밤중의 한양은 고요했다.

책의 끝 문장: 그러자 다른 참석자들도 술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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