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한 가지 명기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재능이란 예술의 세계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세계에는 헤아릴 수 없도록 수많은 직종들이 있습니다. 그 직종들은 전부 다 우리 인간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다양한 직종들에 어울리는 온갖 재능들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 다채로운 재능의 향연이 우리 인간사회의 약동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그 여러 재능들도 성공적 열매를 맺으려면 소설 쓰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가 더 보태져야 합니다.


(39)

군부독재는 강화되고, 그에 따라 분단은 고착되고, 그런 상황 속에서 야기되는 현실의 모순과 시대적 갈등을 형상화하고자 하는 작가들이 많아지면서 작품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상황 변화에 대해 순수문학 쪽에서 참여문학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 고발문학은 문학성이 빈약하고 예술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공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수십 년에 걸친 순수, 참여 논쟁입니다. 그 와중에 저는 작가가 되었고, 첫 작품집 <황토>의 작가의 말에 한정된 시간을 사는 동안 내가 해득할 수 있는 역사, 내가 처한 사회와 상황, 그리고 그 속의 삶의 아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34년이 지나 태백산맥문학관 벽면에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고 새겼습니다. 이것이 저의 변함없는 문학관입니다.

순수와 참여라는 이분법은 시대착오적인 유치함입니다. 이제 그런 소모적인 논쟁 아닌 논쟁은 폐기되어야 합니다. 오직 좋은 소설, 감동적인 작품이 있을 뿐입니다.


(80)

작가란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야 하고, 불의에 저항하면서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고 세계적으로 정의되고, 동의되어 왔습니다. 그건 바로 작가란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를 양쪽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함을 기본 조건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작가도 있지 않느냐고요? 그건 그들의 사정이죠.


(130)

그 인물의 중요성에 대해서 일찍이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그 고전적 정의는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불변입니다.

한 작가의 능력은 그가 얼마나 많은 작품을 썼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개성적이고 전형적인 인물들을 창조했느냐로 판가름난다.’


(133)

작가란 무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워 그 가슴을 감동으로 채워야 하는 예술품을 만들어내야 하는 업보를 지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학대하듯 스스로를 닦달하며 평생 긴장하고 최선을 다한 노력을 바치지 않고서는 그 업보는 풀리지 않습니다. 그걸 좋은 습관이라 할 수 있을까요?


(139)

제가 어느 땐가 이런 메모를 남겨둔 게 있습니다.

인생이란 때때로 더듬거리고 멈칫거리고 두리번거리고 비틀거리고 허둥거리며 홀로 걸어가는 길이다


(175)

인생이란 자기 스스로를 말로 삼아 끝없이 채찍질을 가해가며 달려가는 노정이다.’

인생이란 두 개의 돌덩이를 바꿔 놓아가며 건너는 징검다리다.’

인생이란 극본도, 연출도, 출연도 자기 혼자 도맡아 하는, 연습도 재공연도 할 수 없는 단 1회의 연극이다.’


(214-5)

이러한 객관적인 결론이 나오기 훨씬 전에, <태백산맥> 1분가 출간되고 나서 저는 얼굴 모르는 사람들의 전화를 줄줄이 받아야 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희 아버지를 사람 대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희 어머니가 책을 읽고 난 제 얘기를 들으시고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얼마나 우셨는지 모릅니다. 아버지가 총살당하고 처음으로 사람 대접받은 것이니까요.”


(234)

그 또렷또렷한 글씨 한 자, 한 자에서 필사자들이 바친 정성과 노고가 얼마나 진하고 컸는지를 절절히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성과 노고 앞에서 저는 그저 감사하고, 감동하고, 감탄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글 쓰기 잘했다는 큰 보람과 함께 삶의 가장 큰 행복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이 베풀어주는 사랑과 신뢰 중에 이보다 더 크고 무거운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100번 읽는 것보다 더 크고 더 깊은 애정이 한 번의 필사이기 때문입니다.


(298)

1962년 케네디 대통령은 백악관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작가들을 초청해 축하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고 인사를 했습니다. 펄 벅 여사는 한국이 무대인 소설을 쓰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케네디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한국은 영 골치 아픈 나라인데, 내 생각에는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고 있으니까요. 그냥 옛날처럼 일본이 한국을 통제하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펄 벅 여사는 충격으로 말을 잠시 잊었다가 이내 정색을 하고 공박했습니다. “대통령이란 자리에 있으면서 한국 사람들이 일본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도 모르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건 마치 미국이 영국의 지배를 받던 그때로 돌아가라는 것과 같은 소리입니다.”


(354)

제가 보기에 우리 사회는 결코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는 희망적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제아무리 발전한 나라에서도 유토피아란 없습니다. 유토피아란 미래 희망을 위해 만들어진 환상적 언어이지 현실적 실현성을 갖는 언어는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은 만족이 없이 끝없이 팽창되는 것이기에 유토피아를 현실에서 실현할 수 없는 게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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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2
안재성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안재성이라는 작가가 있단다. 좌파 작가라고 해야 할까? 우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좌파 인물에 대한 책들을 많이 쓰셨어. 아빠는 안재성님이 쓰신 책 중에는 <경성 트로이카><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읽어봤어. <경성 트로이카>는 읽은 지 10년이 넘었는데, 그 책을 통해서 학창시절 역사책에서 나오지 않았던 많은 좌파 독립운동가들을 알게 되었단다. 일제 시대 여러 가지 사상들이 출현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 들어 공산주의 운동을 하면서 그와 함께 독립 운동을 하는 이들이 많았어. 후에 해방이 되고 우리나라 남북으로 나뉘고 전쟁이 일어나고, 북한이 공산주의 국가가 되면서, 공산주의는 우리나라에 금기시되었단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하던 많은 공산주의자들도 교과서에서 사라진 것이지. 하지만, 일제 시대 그들은 뜨거운 피가 끓던 우리나라 젊은이였고, 나라를 되찾기 위한 많은 노력들을 하셨고, 목숨도 잃으셨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경성 트로이카>에 나왔고, 그 책에 나온 이들에 대해 몇 사람에 대해서는 지은이 안재성님께서 평전으로 좀더 자세히 쓰셨단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이현상이었어.


1.

이현상의 젊은 시절 얼굴을 보면, 강렬한 눈빛을 통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더구나. 그는 늘 웃음이 적고, 원칙에 충실한 그런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의 얼굴과 딱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을 했단다.

==========================

(193)

좌익 내부의 정적들조차 김삼룡이나 이주하는 말이 통하지만 이현상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고 평했다. 먼저 자신의 의견을 내놓고 상대방을 설득하다가 안 되면 감정이라도 분출시키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현상은 끝까지 묵묵히 듣기만 할 뿐, 끝내 자기 고집을 꺾지 않고 원칙을 관철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정적들이 조선공산당 중앙을 비판할 때 공식적으로 이현상의 이름을 거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현상의 원칙이란 것이 상식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제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지도할 때 보여준 그의 융통성과 현실주의적인 감각이 이 추측을 뒷받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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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그러나 이현상은 도무지 말이 없었기 때문에 아주 친한 사람이 아니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맡고 있는지를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하급 간부들은 이현상의 심중이 무엇인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짧게 표현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은유나 비유는 사용하지 않았고, 입에서 내뱉은 말과 다른 생각을 품고 있지도 않았다. 앞에서 한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다르지 않았고, 정치적 암투를 위해 사람을 모함하거나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거짓 호의를 베푸는 일이라곤 없었다. 근본적으로 복잡한 생각이나 정치적 욕심이 없는 담백한 사람이라고 보면 좋았다. 따라서 동료들이나 하급자들은 그가 회의 시간 내내 듣고만 있어도 무슨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어쩌다가 한마디 하면 그것이 바로 그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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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악랄하고 인간미 같은 것이 없는 사람은 아니란다. 그는 생명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중요시하고 존중했단다. 전투 중에 적의 생명을 어쩔 수 없이 앗아간 경우는 있지만, 생포된 포로에 대해서는 죽이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며칠 동안 교양을 한 다음에 다시 돌려보냈다고 하는데, 그로 인해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의 포로 원칙은 바꾸지 않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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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미군이라고 해서 마구 죽이지는 않았다. 미군도 일단 포로로 잡으면 죽이지 않고 며칠 동안 데리고 다니며 교양을 한 다음 살려 보냈다. 이 고지식한 공산주의자는 미워해야 할 것은 제국주의이며 제국주의 국가의 인민들은 다 같은 피해자라는 교리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쫓기는 처지라 포로를 감시하는 일도 쉽지 않아 쏘아버리자고 주장하는 대원도 있었으나 이현상은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이렇게 살려준 미군들이 유격대의 위치를 파악해 보고하는 바람에 포격을 당하는 일도 생겼지만 이후로도 포로 수칙을 바꾸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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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럼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짧게 이야기해줄게.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짧게 이야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만, 아빠가 밀린 독서편지를 따라잡을 때까지는 짧게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는 1925 9 27일 충청도 금산군 군북면이라는 동네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당시 면장이었고, 나중에는 형들도 면장을 했대. 일제시대 면장을 하면 보통 친일을 하는 나쁜 이들로 생각할 텐데, 그들은 면 사람들을 위해 재산을 내놓고 세금도 대신 내주는 착한 사람들이었대. 고는 고창보고를 다니다가 서울 중앙고보로 전학을 갔고 그곳에서 6.10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구속되기도 했다는 구나. 나중에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조전공산당 청년단체인 고려공산청년연맹에 가입을 해서, 본격적인 공산주의 운동과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어. 이런 활동으로 징역을 갔다 왔고, 김삼룡 이재유 등과 함께 아빠가 앞서 이야기한 경성 트로이카를 조직해서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이끌었단다. 하지만 이 일로 또 징역을 가는 등 해방할 때까지 모두 합해 10년 넘게 징역살이를 했다는구나.

광복 후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깃발을 들었지만, 광복 직후에는 여러 사상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현상도 남조선로동당이라는 정상을 만들어 박헌영과 함께 이끌었단다. 하지만 미군정이 공산주의 정당을 불법으로 정했고, 그래서 박헌영과 함께 북한으로 갔단다. 하지만 그쪽도 이현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 김일성이 권력을 잡아갔지. 이현상이 생각하기에 남조선노동당이 정통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는 다시 남한으로 와서 비밀리에 남조선노동당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이 터졌어. 지금은 역사적으로 여순사건이 정의로운 민중항쟁이라고 평가되지만, 당시에는 나라에서 반란으로 정의 내렸단다. (여순 사건은 아빠가 얼마 전에 이야기해준 김용옥님의 <우린 아무도 몰랐다> 독서 편지를 참고해 주시고…) 이현상은 이것이 너무 성급하게 우발적으로 일어났다고 생각했어. 성공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지. 하지만 그들을 버릴 수는 없어서 그는 여순사건의 주동자들로부터 지휘권을 인수받아 그들을 이끌게 되었단다. 무장유격전의 시작이었지.

지리산 산중에 자리를 잡으면서 남조선노동당의 비밀 조직을 이끌었어. 이승만 정부는 이현상이 이끄는 빨치산들을 없애기 위해 군경토벌대를 보내 대대적인 공세를 끊임없이 벌였고, 이현상의 병력도 공세 때마다 큰 타격을 입어 시간이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들었단다. 더 이상 지리산에서 임무 수행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현상은 남아 있는 부대원을 이끌고 북으로 가기 했단다. 그때가 1950 6월이었는데, 이현상은 북에서 남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지.

북상 도중 전쟁 소식을 들었단다. 북한이 일으킨 이 전쟁은 삽시간에 남한 전역을 점령하면서 낙동강 유역까지 전선을 끌어내렸단다. 이현상은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과 함께 전쟁에 참여를 했고, 이현상이 이끄는 부대는 낙동강은 넘어 미군의 군수물자를 파괴하는 등 성과를 냈어. 하지만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등으로 전세는 역전되고 후퇴하게 되었어. 그 해 이승엽과 재회를 하게 되었고 남한 유격대 총지휘권을 받게 되었고, 이현상은 다시 산중에서 게릴라를 하게 되었고, 그는 그의 부대를 남부군이라고 이름 지었단다. 그렇게 남부군이 탄생했지.

전쟁이 일진일퇴를 보이다가 장기전으로 들어섰어. 전쟁에 지친 미국과 북한은 휴전 협정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미 이현상과 남부군은 북으로부터 고립되기 시작되었단다. 가끔 북에서 지령이 내려오긴 했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고 했던가, 이현상과 남부군에 대한 지원은 점점 줄어들었어. 그에 반해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이현상을 없애려고 온힘을 기울였단다. 이승만은 이현상의 토벌 없이 지리산의 안정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정도였어.

뿐만 아니라 먹는 것을 구하는 것도 어려웠고, 겨울에는 지리산의 모진 추위와도 싸워야 했어. 이래저래 시간이 지나면서 남부군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단다. 길고 지루했던 휴전 협정이 1953 7 27일 체결되었고, 이젠 남과 북은 서로 오갈 수 없는 철조망이 세워지게 되었어. 거기에 북한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남조선로동당의 지도부에 돌렸고, 그로 인해 이승엽은 미제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을 당했고, 박헌영도 구속되었어. 이현상에게는 희망이 없었지. 이현상은 결국 경찰에 의해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뜨거운 피를 가진 이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 그는 나라를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뚜렷한 주장을 가지고 계속 선택을 했고 그 선택으로 그의 삶을 만들어갔단다. 하지만, 그의 선택과 그가 속한 나라의 선택이 달라지면서,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된 것 같구나.

이현상 그는 진정한 혁명가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에게 이익이 없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면 그는 행동을 했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분노하고, 목숨까지 걸었으니까 말이야. 결코 선택하기 쉽지 않은 삶을 그는 선택을 했고, 뜨겁게 불살랐던 같구나.

==========================

(70-71)

역사는 자신의 존재에 의거하지 않은 지식인 출신 혁명가들의 나약함과 우유부단에 관한 많은 사례를 보여준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과 함께, 출신성분이 혁명가의 진정성을 판별하는 기초 자료가 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 반대의 경우도 무수히 보여준다. 자기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없더라도 타인에 대한 애정과 정의감만으로 기득권을 버리고 변혁운동에 뛰어들어 아낌없이 죽어간 사례들이다. 자신이 처한 부당한 현실에 분개하고 분노를 폭발시키는 일은 생존의 본능이지만, 타인의 고통에 분노하고 목숨까지 걸어 싸우는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인이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지식인이거나 노동자이거나 아무 상관없이, 타인데 대해 얼마나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성품의 문제였다. 드물지만, 이런 이타적인 인간형들은 진정한 혁명가로서의 자질과 존경 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이현상도 그런 유형의 하나였던 것이다.

==========================


PS:

책의 첫 문장 : 한국전쟁이 끝난 지 두 달 후인 1953 9 18일 오전 11시경 지리산 주 능선 반야봉 남쪽 빗점계곡에서 한 사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책의 끝 문장 : 김대중 대통령 방문 당시 평양의 만수대의사당을 안내한 여성은 이현상의 막내딸 이상진이었다.


세속적인 욕심에 무심한 것은 역사를 바꿔온 대부분의 혁명가들이 가진 근본적인 성품이기도 했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과 경쟁을 역사의 동력으로 파악하는 역사가들은 혁명가들의 삶에도 이를 적용하고 싶어하여 세계의 혁명사를 당파 싸움으로 대치시키는 데 몰두한다. 그들은 혁명가들의 마음속에 희생과 용기, 이타주의의 고귀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혁명이 시대적으로 주류가 되었을 때 출세의 기회를 잡기 위해 앞 다투어 뛰어든 투기꾼들의 행태가 그들의 분석에 근거가 되고 합리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그들은 역사의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없게 되고, 결국은 시간 순서대로 역사적 사건들을 나열하고 그 사이사이에 인간의 욕망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끼워넣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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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박열은 내가 내민 쪽지를 받아들고 중얼중얼 읽었다.

첫째, 동지로서 함께 살 것.

둘째, 내가 여성이라는 관념을 반드시 제거할 것.

셋째, 둘 중 하나가 사상적으로 타락하여 권력자와 악수하는 일이 생길 경우에는 즉시 공동생활을 그만둘 것.


(229)
요구사항은 모두 네 가지였다.

첫째, 공판정에서는 일절 죄인 대우를 하지 않아야 하며 피고라고 부르지도 말 것

둘째, 공판정에서 조선 예복 착용을 허락할 것

셋째, 자리도 재판장과 동일한 좌석을 마련할 것

넷째, 공판 전에 자기의 선언문 낭독을 허락할 것.

다섯째, 만일 이상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입을 닫고 일절 신문에 응하지 않을 것임을 결심한다.


(233)

가네코도 당당한 응답으로 재판정을 흔들었다.

피고는 국가에 해가 되는 사상을 가지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어 보이는데 어떠한가?”

방금 그 질문은 상당히 모욕적이다. 내가 무적자로 태어나 어려서 친척들로부터 학대를 받았다는 것은 내가 국가와 대척점에 서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학대한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만일 그들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면 나도 고분고분하게 순응하는 머저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와 사회에 어째서 대적하는가? 그럴 만한 계기가 있었는가?”

국가와 개인은 어떤 계기가 있지 않아도 대척점에 있을 수밖에 없다. 국가는 힘으로 개인을 억누르고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틀에 맞춰서 순응하도록 하기 때문에 개인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억압받을 수밖에 없다.”


(234)

박열은 미리 약속한대로 자기 선언문을 낭독했다.

국가는 개인의 신체와 생명과 자유를 끝없이 침해하면서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강도들 중에 대강도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국가의 편에 선 재판관이 공정한 판결을 할 리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내가 이 법정에 선 것은 재판을 받자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의 입장을 정확하게 선언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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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독도와 울릉도는 조선의 것이란 말이다!”

나는 독도와 울릉도가 나의 것이라 말하지 않았다. 조선의 것이라 말했다. 우리를 끌고 왔던 어부가 몽둥이로 나의 등짝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진실 아닌 것을 진실이라 꾸미려면 언제나 폭력이 필요하다는 걸 그들은 여실히 보여주었다. 나는 한 차례 더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섬이며, 그 섬의 바다는 조선의 바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일본인의 매는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쏟아졌다.


(103)

갑작스럽게 나는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가 원하던 바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들 앞에서 기죽고 싶지는 않았다. 조선에 대한 원망이 깊었다. 그럼에도 나는 결국 조선인이었다. 무엇보다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 모든 걸 빼앗긴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에게 힘이 있었다면 전국을 뒤져 가져온 산삼을 그렇게 헐값에 넘기진 않았을 터였다. 초량 왜관에 머무는 일본인들에 대한 나의 감정은 날카로웠다. 그들에 대한 선입견에 휩싸여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194)

조선은 몇몇의 나라가 아니라 다수 백성의 나라여야 했다. 나라는 내게 목숨까지 버리라 말하면서도 사방이 막힌 이 순간에는 나를 더욱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눈물마저 새카맣게 타버려 흐를 줄 몰랐다. 나는 버려졌다. 그 점은 억울하지 않았다. 나라가 내게 기대한 일이 없으며, 나 역시 나라에게 기대할 일이 없으니 억울할 것도 없었다. 내가 마음이 아픈 건 살아남아도 우리가 의지할 곳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는 사실이었다.


(285)

우리가 가는 건 우리의 섬이고 우리의 땅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일본은 울릉도나 독도를 소유했던 번이 없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우리의 울진에 속해 있었지만, 저들은 근래에 와서 지들의 번에 속해 있다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지요. 게다가 독도든, 울릉도든 우리와 달리 일본 백성들이 거주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일본의 지난 쇼군 시절에 요나고 사람들이 울릉도에 와서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도해 허가를 해준 일을 두고 자신들의 섬이라 우기고 있는 겁니다. 도해 허가를 내주었다는 사실도 웃긴 일이지만, 그런 사실을 파악했으면 강하게 항의를 했어야 하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그리 못했지요.”


(335)

*1693 9월 초, 안용복과 박어둔은 돗토리 번에서 나가사키로 후송되었다고 한다. 당시 안용복과 박어둔을 납치한 내용은 오야 집안의 문서인 <죽도 도해 유래기 발서공, 이하 발서공>과 한자로는 백기로 적는 호키주의 일을 기록한 <이본 백기지>에도 실려 있다. <발서공>에는 안용복이 에도에 갔고,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은 채, 에도 막부가 안용복에 대한 조사를 끝낸 뒤 안용복에게 무엇인가를 줘서 조선으로 귀국시켰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쇼군으로부터 받은 서계로 추측된다. 두 사람이 나가사키로 후송되었을 때 쓰시마 번 사람들이 두 사람을 맞이했는데, 이때 선물과 서계를 모두 강탈당했으며 이를 쓰시마 번에서 보관하고 있을 거라는 가정 하에 허구적 상상력을 가미해 재해석했다. 하지만 이 역시 어디까지나 사실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힌다.


(369)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하여 강적과 겨루어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토지를 회복했으니, 부개자와 진탕에 비하여 그 일이 더욱 어려운 것이니, 영특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상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에는 형벌을 내리고 뒤에는 귀양을 보내어 꺾어버리기에 주저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울르도와 독도가 비록 척박하다고 하나, 쓰시마도 또한 한 조각의 농토가 없는 곳으로서 왜인의 소굴이 되어 역대로 내려오면서 우환거리가 되고 있는데, 울릉도와 독도를 한 번 빼앗긴다면 이는 또 하나의 쓰시마가 불어나게 되는 것이니, 앞으로 오는 앙화를 어찌 말하겠는가? 안용복은 한 세대의 공적을 세운 것뿐이 아니었다. 고금에 장순왕의 화원노졸(花園老卒)을 호걸이라고 칭송하나, 그가 이룩한 일은 대상 거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국가의 큰 계책에는 도움이 없었던 것이다. 안용복과 같은 자는 국가의 위급한 때를 당하여 항오에서 발탁하여 장수급으로 등용하고 그 뜻을 행하게 했다면, 그 이룩한 바가 어찌 이에 그쳤겠는가? – 이익의 <성호사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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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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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단 한 편의 책으로 아빠의 마음을 빼앗아 버린 이가 있었으니, 다니엘 페나크라는 분이란다. 작년에 SNS에서 알게 되어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이란 책을 읽었는데, 크게 감탄을 했단다. 어찌 이리 유쾌하고 재미있으면서 교양을 팍팍 심어주는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또 다른 책을 검색해 보니, <몸의 일기>라는 독특한 제목을 가진 소설이 있더구나. 일기를 책으로 출간하는 경우가 많은데, 누구누구의 일기가 아니고, 몸의 일기라니대충 어떻게 전개될 것이라는 생각은 들더구나.

일기.. 너희들도 가끔씩 일기를 쓰잖아. 사실 아빠도 일기를 쓰려고 노력을 한단다. 그래서 해마다 다이어리도 구입하고 그래. 그런데, 올해는 정말 일기를 제대로 쓴 날이 거의 없구나. 다이어리도 거의 새 것이란다. 일기뿐만 아니라 너희들에게 써야 할 독서편지도 사실 얼마나 밀렸는지 몰라. 회사 일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 핑계가 되려나. 사실 아빠는 하고 싶은 게 많고, 계산을 해보니, 집에 와서 샤워하고 난 다음 적어도 세 시간은 있어야 아빠가 하고 싶은 것들을 채울 수 있을 것 같구나. 사실 하고 싶은 것들 중에 여럿 포기하고 계산한 시간이란다. 그런데 올해도 여전히 일거리가 많고, 우리가 회사에서 좀 더 먼 거리로 이사를 오다 보니, 예전보다 퇴근 후 시간이 더 적어졌구나. 그렇다 보니 일기도 못쓰고 독서 편지도 말리고 그러는 것 같구나. 그렇다고 잠을 줄이는 것도 뭣하고아이고, 일기 이야기하다가 엉뚱한 곳으로 이야기가 빠졌구나. 아무튼, 아빠도 일기를 쓰려고 노력은 하고 있어..

그런데 일기라는 것이 주로 하루에 있었던 일과 그것에 대한 감상나의 생각들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잖아. 그런데, 이 책의 주인공은 자신의 몸의 변화를 중심으로 쓰고 있단다. 십대 소년이 팔십 대 노인이 될 때까지 몸의 변화이 책을 읽다 보면, 당연이 자신의 모습도 되돌아보게 된단다. 아빠도 그랬어. 주인공이 쓴 일기들의 나이 때, 나도 그랬었지, 아니 나는 이랬었지이런 생각이 많이 떠올랐단다.

1.

이 책에는 자라면서 겪는 신체 변화를 솔직하게 적어두고 있단다. 주인공은 1923년생이야.. 1차 세계대전의 아픔이 곳곳에 남아 있던 시절이었지. 주인공의 아버지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후유증으로 일찍 돌아가셨어. 돌아가시기 전에 주인공과 애틋한 정이 많이 남아 있어, 주인공의 일기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많이 담겨 있었단다. 아버지도 오래 살 것이라 예상을 했는지 주인공인 아들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 첫 몽정을 할 것을 대비해서도 너무 놀라지 말라고 미리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그 부분을 읽고, 아빠도 우리 막둥이에게도 나중에 아래처럼 이야기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쑥스러움을 타는 아빠가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노골적인 것 같기도 하니, 조금은 편집해서 이야기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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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아빠가 미리 얘기해줬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실제로 일이 닥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난 잠에서 깨자마자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잠옷 바지가 젖어 있었고 두 손도 온통 끈적끈적했다! 이불에도 묻어 있었다. 사실상 온 사방에 묻어 있었다는 게 정확한 말일 것이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바지를 벗으면서 난 아빠가 얘기해줬던 걸 떠올렸다. 그걸 사정(射精)이라고 해. 밤사이에 그 일이 일어나더라도 겁먹지 마라. 다시 오줌을 싸기 시작한 건 아니니까. 그건 새로운 미래가 시작된다는 신호야. 놀라지 말고 얼른 적응하는 편이 나아. 넌 앞으로 평생 정자를 만들어낼 테니까. 처음엔 뜻대로 조절이 안 될 거야. 성기를 만지작거리며 쾌감을 느끼는가 싶다가 어, 어느새 끝나버리지! 그러다 점차 익숙해지면 절제할 줄도 알게 되고, 결국엔 최선의 요령을 깨우치게 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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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대를 거치고 본격적인 젊음으로 들어오면, 누구나 겪는 사랑. 다들 겪는 사랑의 종류는 다양하고 다르지만, 그 사랑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리고 그 사랑을 할 때는 피곤하지도 않고, 세상의 중심이 내가 되고,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린다고 느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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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몸은 사랑의 에너지 덕을 어느 정도로나 보는 걸까. 요즘은 모든 게, 정말 모든 게 다 잘 풀린다. 직장 일에서도 지치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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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랑의 결실은 결혼과 출산이 아닐까 싶구나. 이 책의 주인공도 아이가 생겼을 때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 글을 읽으면서 너희들이 태어났을 때가 기억이 나는구나. 아주 생생한 기억. 너희들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쁨 말이야. 아빠가 서툴러서 너희를 안아주는 것도 처음에는 어려워하고, 기저귀 하나 가는 것도 낑낑 매던 시절이 있었지. 이 책의 주인공도 그런 시절이 있었고, 하지만 위험이 닥쳤을 때, 그것이 자신의 실수이긴 했지만, 자신의 몸이 다치는 한이 있더라고 아이의 안전을 생각하는 몸의 움직임은 본능이 아닐까 싶더구나. 세상 모든 아빠는 슈퍼맨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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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

손님들 앞에서 이 세상의 여덟번째 기적이라고 자랑하며 브뤼노를 흔들어대다가, 아기를 안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것이다. 앞쪽으로 넘어지면서 바닥까지 굴렀다. 정확히 열한 계단. 난 본능적으로 브뤼노를 감쌌다. 계속 구르는 중에도 아기의 머리를 내 가슴팍에 붙이고, 팔꿈치와 이두박근과 등으로 보호했다. 난 아들을 덮고 있는 껍데기였다. 모두가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우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손님들이 모두 달려들었다. 손등, 골반뼈, 무릎뼈, 발목, 등뼈, 어깨, 전부 다 계단 모서리에 부딪혔다. 하지만 난 구르는 와중에도, 가슴이 파이고 배가 움츠러드는 와중에도, 브뤼노가 내 품 안에서 완벽하게 안전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난 본능적으로 인간 완충장치로 변신했던 것이다. 브뤼노가 매트리스 싸인 채 굴렀다 해도 더 안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난 유도를 해본 적도 없고 낙법을 배운 적도 없는데. 부성애의 놀라운 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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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십대 반항아가 되어 괴롭히기도 하지.. 그렇게 세월은 무섭게 지나간단다.

2.

그리고 책의 주인공은 지금의 아빠의 나이에 다다르게 된단다. 아빠도 지금까지는 큰병 걸리지 않고 잘 살아왔던 것 같구나. 평범하고, 평균적인 건강을 가지고 말이야. 최근 들어 평균적인 몸무게에서 조금씩 오버하지만 말이야.. 그런데, 앞으로는 어떨까? 주인공이 지금의 아빠의 나이를 넘어가면서 쓰는 몸의 일기는 있잖니, 무척 슬프게 했단다.

이제 아빠의 남은 날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보다 점점 건강은 안 좋아질 것이고, 병원도 자주 자게 될 거야. 지금도 건강은 잘 모르겠지만, 이미 체력은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고, 기초 대사량도 줄어든 느낌이 들더구나. 먹는 양이 크게 늘지 않고 비슷한데도 살이 붙는 것을 보니 말이야. 노화에 대한 경험을 하나 둘 겪고 일기에 고스란히 적혀 있단다.

이명. 귀에서 끊임없이 나는 소리. 아빠도 이명이 생긴지 무척 오래되었는데, 처음에는 걱정도 많이 했는데, 아주 크지는 않고, 청력 검사를 해도 정상이고 해서 그냥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사실은 정적이 그리울 때도 있단다. 아빠는 정적을 느껴본 지 꽤 오래되었어. 지금도 키보드 치는 소리는 이명 건너편에서 고막에 도착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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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그에 따르면 이명은 아주 적응이 잘 되는 병이라고 한다. 아니, 더불어 사는 거라고 봐야지, 그가 말을 고쳤다. 그래도 어쨌든 고요함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어. 에티엔도 나와 마찬가지로 처음엔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와 똑 같은 비유를 했다. 꼭 내 몸이 켜진 라디오에 연결돼 있는 것 같더라고. 스피커 신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게 정말 달갑진 않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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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늙어가면서 겪는 경험들도 슬프고, 젊은 시절 함께 했던 친구들, 친척들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는 장면도 슬펐단다. 이런 일들이 앞으로 아빠의 인생에서 경험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니, 인생의 삶을 누가 설계한 것이라면 너무 잔인한 설계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것이 아닐까 싶구나. 그러기 위해서는 잠도 충분히 자고 그래야 하니, 너희들에게 보내는 독서 편지도 짧게 쓰고 잠을 청해야겠구나.^^ …

삶은 얼마 안 남겨두고 쓴 주인공의 일기가 다시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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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

내 몸과 나는 서로 상관없는 동거인으로서, 인생이라는 임대차 계약의 마지막 기간을 살아가고 있다. 양쪽 다 집을 돌볼 생각을 하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사는 것도 참 편안하고 좋다. 그러나 최근의 혈액검사 결과를 보며, 이젠 마지막으로 펜을 들 때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평생 자기 몸에 관해 일기를 써온 사람이 마지막 가는 길을 거부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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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도 일기를 쓰긴 하지만 아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은데, 조금 번거롭더라도 일기는 쓰면 좋을 것 같구나. 나중에 커서 그 일기를 읽어보면 좋을 테니 말이야. 아빠도 너희들 만할 때 비록 숙제로 쓰긴 했지만, 일기를 썼었는데, 안타깝게도 다 사라지고 말았단다. 지금이라도 다시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다시 일기를 써보려고 노력해야겠구나. 인생 후반전열심히 기록으로 남겨볼게. 그 일기에는 우리 식구들의 행복만 가득 적혀 있길 바라며오늘은 이만 마칠게..

PS:

책의 첫 문장 : 지금쯤 넌 장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있겠구나.

책의 끝 문장 : 겁먹지 마, 너도 데려가줄게.


청결함에 관해선 아빠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어느 날 내가 아빠 등을 때수건으로 밀어주고 있을 때 아빠가 말했었다. 우리가 벗겨낸 이 때는 다 어디로 갈까? 너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니? 우리 몸을 깨끗이 하느라고 우린 또 뭘 더럽히고 있는 건지. - P31

눈물은 자아의 배설이다. 그 엄청난 양이란! 우리는 울면서 오줌 눌 때보다 훨씬 더 시원하게 자신을 비운다. 맑은 호수에 몸을 던지는 것보다도 더 깨끗이 자신을 청소한다. 그 정화의 과정이 모두 끝나고 나면 종착역에 정신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눈물로 표현된 정신은 비로소 몸과도 좋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낸 몸도 오늘 밤엔 잠을 잘 것이다. 안도의 울음을 실컷 울었으니. 이제 끝났다. - P140

건강염려증: 몸의 상태에 대해 과도하게 신경 쓰는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 자신이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망상. 정신과 몸이 서로에게 술책을 부리는 것. 어쨌든 처음 경험하는 느낌이라 일시적인 증상의 희생자일까? - P154

순전히 정에 겨워 아기를 어르는 것과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어르는 것 사이엔 이런 차이가 있다. 첫번째 경우, 아이는 자신이 사랑의 중심에 있다고 느낀다. 두번째 경우엔 아이를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픈 충동을 느낀다. - P190

흠잡을 데 없는 똥. 딱 한 덩어리뿐이다. 완벽하게 매끈하고, 모양도 반듯하다. 차지면서도 끈끈하진 않고, 냄새는 나되 악취는 아니고, 단면이 깔끔하며 균질의 갈색을 띠고 있다. 딱 한 번 힘줘서 쑥 빠져나왔다. 휴지에도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니, 이거야말로 완벽한 장인의 솜씨다. 내 몸아, 참 잘해냈다. - P224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위아래로 가볍게 흔든다.
: 계속 이야기해봐, 관심 있으니까.
시선은 어느 한 지점에 고정하고 손가락으로 식탁 위에서 피아노 치는 시늉을 한다.
: 그 얘긴 벌써 백 번도 더 했잖아요.
속으로 어렴풋이 미소를 지으며 시선은 테이블보에 고정되어 있다.
: 내가 말은 하지 않지만, 나도 다 생각이 있다고요.
빈정거리는 미소
: 내가 맘만 먹으면 박살을 내줄 텐데.
눈의 역할
: 눈을 돌리는 건 자기 맘을 몰라줘서 답답하다는 의미, 눈을 크게 뜨는 건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 눈꺼풀이 축 처지면 지쳤다는 의미……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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