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

뭉크가 남긴 많은 글 가운데 그의 예술을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문구이다. 뭉크는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처럼 풍경이나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았다. 다시 말해, 대상을 관찰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 것, 자신의 기억을 그리려고 했다.


(14)

뭉크의 예술은 그의 인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뭉크는 평생 외롭고 고독했다. 어린 시절엔 죽음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고, 청년이 되어서는 사랑을 갈구하고 그에 집착했다. 비극적 이별과 좌절을 겪고, 병마에 시달리면서 정신병을 앓기까지 했다. 공황 장해, 우울증, 불면증, 정신 분열, 불안 장애, 환각, 피해망상 등의 정신병적 증상들은 뭉크의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기에,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운과 불행에 대해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집중했고, 자기 내면의 심연으로부터 그림의 대상을 찾았다. 대표작 <절규>를 비롯하여 <마돈나> <불안> <아픈 아이> <이별> <키스> 등의 모티프를 그는 몸소 겪은 경험에 가져왔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마치 그림으로 된 일기장을 보는 듯하다.


(22)

스물여덟 살의 뭉크가 그린 <칼 요한 거리의 저녁>(1892)은 뭉크의 불안정한 심리나 비관적인 태도가 잘 드러나는 그림이다. 아직 눈이 쌓이지 않은 늦은 가을 혹은 겨울 초입, 차라리 눈이라도 내려 쌓였더라면 거리의 불빛이 눈에 반사되어 조금은 환하고 포근한 느낌을 줄 테지만 눈이 본격적으로 내리지 않은 이 무렵은 노르웨이의 1년 중 가장 암울한 계절이다. 오전 늦게 뜬 해가 빨리 져서 초저녁인데도 어느새 거리는 어둡다. 색깔도 없다. 가로수의 잎도 다 떨어져버리고, 사람들도 짙은 색깔의 겨울옷을 꺼내 입어 도시 전체가 무채색이다.


(35)

뭉크는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에서 주목할 만한 활동가는 아니었다. 당시 그는 진보적인 정치사상이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한 입장에서는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에게르가 당시 사회 관습에 정면으로 반하는 파격적 사상들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또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형성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후 화단에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혁신적 예술을 선보일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얻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55)

뭉크의 <절규>는 일그러진 얼굴과 독특한 분위기로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강한 인상에 압도당하고 만다. 해골 같은 얼굴에 늘어지고 비틀린 입과 턱, 강한 원색들이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움직이는 풍경은 당시 선호되던 아름답거나 숭고하게 느껴지는 풍경과는 동떨어져 보인다. <절규>는 마치 환상 속이나 꿈속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그린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67)

표현주의는 이후 추상 미술의 탄생을 이끌었다. 뭉크의 영향을 크게 받은 청기사파의 바실리 칸딘스키는 이후 내면의 감정을 순수한 형태와 색으로만 표현하는 경지에 이르면서 형상을 완전히 해체해버리게 되는데, 이때부터 추상 미술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시대를 앞서갔던 뭉크의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시도는 동시대인들로부터 예술에 대한 모독 혹은 오만방자한 화가라는 혹평 세례를 받았지만 미술사 전체로 보면 현대 미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추상 미술을 탄생시키는 씨앗을 만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68)

노을 부분을 보면 아주 작은 한 줄의 글귀가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라는 이 글귀가 최초로 발견된 건 1904년인데, 뭉크 자신이 썼는지 다른 이가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필체를 분석해 본 결과 뭉크보다는 관람객 중 누군가가 썼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한다.


(103-105)

뭉크의 <아픈 아이> 또한 모티프상 이 시기의 베개 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뭉크는 단지 이 모티프가 당시의 유행이기 때문에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 그리고 어릴 적부터 병약하여 생사를 넘나들었던 경험에서 나온 모티프였다. 그렇기에 <아픈 아이>에서 뭉크는 사실주의적 화법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 자신의 경험을 주관적으로 드러내다 보니 기술적으로 이를 보완할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그저 자연을 관찰하듯이 볼 수는 없는 법이다.


(138-141)

스물한 살 젊은 뭉크에서 첫사랑 밀리는 사랑이라는, 그가 추구하고 탐구해야 할 예술의 구심점을 만들어 주었다. 검은 새끼 돼지 그룹에서 만난 율은 30대에 들어선 뭉크에게 여자의 관성성과 마력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30대 중후반에 만난 툴라는 뭉크에게 인생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예술을 담도록 자극한 여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예술가 뭉크에게는 다양한 자극을 주었던 반면, 한 인간으로서의 뭉크에게는 외로움과 상실감에 빠지게 했다. 밀리는 쫓아 크리스티아니아를 헤매던 청년 뭉크와 툴리와 관련된 모든 지인들에게서 멀어지고 싶어 크리스티아니아를 등진 중년의 뭉크. 뭉크의 인생은 이들과의 사랑과 이별을 통해 더욱 침잠하고 고독해졌다.


(150)

지금은 뭉크 덕분에 잘 알려진 곳이긴 하지만 여전히 오스고쉬트란드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작은 해변 마을이었다. 뭉크는 오스고쉬트란드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작은 해변 마을이었다. 뭉크는 오스고쉬트란드에 대해 낮은 언덕 아래에 피오르로 뻗은 만()이 있고, 일렬로 서 있는 노랗고 흰 나무로 지은 집들이 마치 치아 같다. 둥근 돌로 이루어진 해변 쪽으로 바닷물이 파도를 친다라고 묘사했는데, 100여 년 전 뭉크의 묘사처럼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였다. 물론 뭉크가 지내던 당시보다 훨씬 많이 발전하고, 고깃배들보다는 개인 보트들이 더 많아졌지만 뭉크가 묘사한 아기자기한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189)

베를린에서 뭉크는 채 4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절규> <불안> <뱀파이어> <마돈나>과 같은 작품 대부분을 완성했다. 검은 새기 돼지 그룹의 급진적이고 과격한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뭉크는 자신의 예술을 정립시켜 나갔다. 그리고 여러 전시회를 통해 이름을 널리 알렸을 뿐 아니라, 독일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뭉크 미술에 영향을 받은 이들은 이후 표현주의를 꽃피우고 추상 미술을 끌어내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72년 독일 국립 미술관은 독일 예술계 발전에 기여한 뭉크의 공로를 인정하여 뭉크의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 전시회는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에서도 열렸다.


(203)

1891년 여름, 뭉크는 노르웨이로 돌아와 오스고쉬트란드에서 방학을 보내고 늦은 가을이 되어서야 연장된 유학 3년차를 위해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 도착한 지 며칠 후, 건강상에 딱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뭉크는 다시 니스로 향했다. 니스에게 뭉크는 편안하게 그림도 그리고 휴양과 도박을 즐기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꽤 외로운 시간을 보낸 듯하다. 뭉크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얼마나 외로운가. 나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듣는 걸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왜냐하면 그 발소리들은 나를 찾으러 오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 누군가 자신을 찾아와주길 간절히 바라는 듯한 뭉크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216)

뭉크는 <생의 프리즈>가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그림들을 그릴 때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나는 그 그림들을 모아보았을 때, 각각의 그림들이 내용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그림들이 전시되자 그림들 사이에서 하나의 울림이 터져 나왔고, 그림들이 따로따로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교향곡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생의 프리즈를 그리게 되었다.”

- 뭉크의 노트(MM N 46, 1930~1934)


(262-263)

오슬로 대학 강당 벽화 작업은 뭉크 스스로에게도 큰 의미가 있었다. 대형 공공 미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뭉크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생의 고통스러운 에피소드와 그 의미에 집중했던 반면, 오슬로 대학 강당의 벽화 작업을 하면서 인류와 민족, 지식과 역사 그리고 희망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다. 젊은 시절의 깊은 방황,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끝없는 관찰과 집요한 탐구에 몰두했던 뭉크는 50대를 눈앞에 둔 중년의 나이에 이르자 더 큰 관점에서 인류와 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시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깨지기 쉬운 것들의 과학 꿈꾸는돌 22
태 켈러 지음, 강나은 옮김 / 돌베개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한국계 미국인인 태 켈러가 우리나라 전래 동화를 모티브로 한 소설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로 뉴베리 대상을 탔다는 소식을 듣고 작년에 그 책을 살 때, 태 켈러의 또 다른 책 <깨지기 쉬운 것들의 과학>도 평이 좋아서 같이 샀단다. 그리고 이제서야 읽게 되었단다.

, 아빠는 이번에 읽은 <깨지기 쉬운 것들의 과학>이 더 좋았단다. 그리고 이 책은 너희보다 살짝 나이가 많은 한 소녀가 주인공이고, 소설 내내 식물을 키우는 내용도 나와서, 얼마 전에 강낭콩을 키우고 있는 shon 생각도 나더구나. 이 책은 너희들도 재미있을 게 있을 것 같아, 꼭 한 번 읽어보렴.


1.

그러면 이 책의 이야기를 해줄게. 주인공은 내털리 나폴리이고, 아빠는 존이었는데, 아빠는 한국계로 한국 이름은 영진이었고 상담사로 일하고 있어. 아빠 존의 아버지,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이탈리아 사람이고, 아빠 존의 어머니, 그러니까 할머니가 한국 사람이었어. 내털리의 엄마는 예전에는 식물학자였는데, 지금은 아파서 계속 자기의 방에서만 생활했단다. 엄마의 병명은 심한 우울증이었어. 엄마의 병 치료 때문이지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고 늘 돈이 쪼달렸단다. 내털리의 가장 친한 친구는 트위그란 친구로 부잣집이었어. 그런데 사실 어렸을 때는 미케일라라는 더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멀어져서 인사만 하는 사이였단다. 미케일라의 엄마는 멘저 교수이고, 내털리의 엄마는 멘저 교수와 같이 일했었는데, 그곳에서 해고되고 그 이후에 우울증에 걸렸어. 그것도 미케일라와 멀어지는데 한 몫 했지.

내털리의 엄마는 혼자 계속 방 안에만 있어서 내털리의 아빠가 요리도 다 하고 집안일도 다 했단다. 내털리는 처음에는 그런 엄마를 이해했지만, 십대 소녀로 엄마의 사랑이 필요한 시기에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해 간혹 화를 내기도 했단다. 엄마가 예전의 모습을 다시 찾은 적이 있는데, 추수감사절 때 할머니가 왔을 때 잠깐 이었어. 할머니에게 자신의 그런 아픈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연기를 했던 것 같아. 할머니가 가시고 나자,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가셨단다. 내털리는 엄마가 침대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엄마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엄마의 영향으로 내털리도 정서적으로 불안한 경우가 있어, 아빠는 내털리에게 병원에서 전문 상담을 받을 것을 권했고, 내털리는 그걸 싫어했지만, 아빠의 계속된 설득으로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상담을 했단다.


2.

하지만 착한 내털리는 엄마를 다시 예전의 엄마로 되돌리려는 방법을 알았어. 식물학자였던 엄마는 코발트블루 난초를 좋아했는데, 그 코발트블루 난초를 구해오면 엄마도 회복될 것이라 생각했어. 그 코발트블루 난초는 뉴멕시코에 있었어. 뉴멕시코까지 가려면 돈이 필요했고, 과학 선생님 닐리가 추천해준 달걀 떨어뜨리기 대회의 상금이 500달러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내털리는 그 대회 우승이라는 목표가 생겼어. 트위그가 같이 하자고 했고, 같은 반 친구 중 범생인 다리가 자기도 같은 팀으로 참가해도 되냐고 물어봤어. 트위그는 처음에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다리가 똑똑하기 때문에 같이 하기로 했단다. 다리는 팀원이 된 다음부터는 학교에서 과학실험을 할 때도 트위그와 내털리의 실험조에 와서 같이 실험했어.

내털리와 트위그와 다리는 집에 모여서 달걀 떨어뜨리기 대회를 열심히 준비했어. 아참, 달걀 떨어뜨리기 대회란 것이 무엇이냐면높은 곳에서 달걀을 안 깨지게 떨어뜨리는 방법을 찾는 것이란다. 아빠도 대학교 다닐 때 학교 축제에서 그런 이벤트를 했던 것 같아. 아빠는 참여해 보지 않았지만, 해보면 재미는 있을 것 같구나. 너희들도 한번 생각해 보렴… 3층 높이에서 달걀을 떨어뜨렸을 때 어떻게 하면 깨지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야.

내털리와 트위그와 다리는 열심히 준비했지만, 아쉽게도 실패했단다. 그들의 달걀이 깨지고 말았어. 내털리는 아직 코발트블루 난초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어. 어렸을 때 엄마를 따라 엄마가 일하던 대학교 연구소에 갔었는데 그곳에 코발트블루 난초의 씨가 있었거든. 몰래 그 연구소에서 코발트블루 난초의 씨를 가져오려고 했어. 트위그와 다리가 같이 가겠다고 했어. 용감한 십대들^^ 몰래 연구소에 들어가는 것까지 성공했고, 내털리가 코발트블루 난초로 알고 있던 식물에 독일 붓꽃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어. 그럼 그 동안 잘못 알고 있던 건가? 그리고 또 하나 진실을 알게 되었어. 엄마가 일하던 연구소에서 엄마의 책상과 사무실과 물건이 그대로 있었어. 그러니까 엄마가 그곳에서 짤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만 둔 거였어. 다시 이야기하면 연구소에서 짤린 것 때문에 우울증 걸린 것이 아니라, 우울증에 걸려서 연구소를 그만 둔 것이었지. 엄마의 책상과 물건이 그대로 있다는 것은 엄마가 다시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그것도 모르고 내털리는 그동안 오해를 해왔구나. 내털리와 트위그와 다리가 실험실에 있다가 그만 경비원에게 걸리고, 내털리는 멘저 교수와 아는 사이라면서 멘저 교수를 불러 달라고 했단다. 멘저 교수가 오자, 연구소에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지금까지 멘저 교수가 엄마를 해고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면서 용서를 빌었어.

내털리의 아빠와 엄마도 내털리가 엄마를 위해 한 일들을 알게 되었단다. 내털리의 아빠가 엄마의 병에 대해 내털리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어. 엄마가 우울증에 걸린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면서 이번에는 예전처럼 잘 이겨내고 다시 예전의 엄마로 돌아올 거라고 말이야. 엄마도 내털리의 이런 모습을 보고 다시 힘을 내기로 했단다. 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털리와 함께 하는 시간도 늘려갔어. 내털리는 덴저 교수 때문에 더 멀어졌던 친구 마케일라와도 오해를 풀고 화해를 했단다.

그렇게 소설은 희망을 갖고 끝이 났단다. 우울증은 마음이 깨졌을 때 병이라고 생각해. 달걀이 깨졌을 때 그것을 원래 상태로 만들기 어렵지만, 마음이 깨졌을 때는 주변 사람들, 특히 가족들의 사랑으로 다시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수 있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지만 혹시 우리 가족 중에 마음이 깨지는 일이 있다면 내털리와 내털리의 아빠처럼 사랑으로 잘 보살펴주자꾸나.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이니까 말이야.

이 책의 목차를 보면 관찰, 질문, 연구 조사, 가설, 실행 계획, 실험, 결과, 결과 분석으로 되어 있는데 과학의 탐구를 어떤 식으로 하는지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듯 해서 좋았단다. 중간중간 실험에 관한 삽화들도 나오고너희들도 이 책을 좋아할 것 같구나. 다시 한번 추천하면서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우리가 해야 할 첫 과제를 칠판에 구깃구깃한 글씨로 써 놓은 닐리 선생님은 우리에게 과학적 탐구 과정이란 것을 가르치기가 아주 신나는 모양이다.

책의 끝 문장: 그리고 그 답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곡 소오강호 2
김용 지음, 박영창 옮김 / 중원문화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소오강호 제2권의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소오강호 2권을 읽을 즈음에 너희들과 함께 캠핑을 가게 되어 숲 속에서 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만 캠핑 짐을 싸느라고 정신 없다가 고속도로에 들어선 다음에야 이 책을 두고 왔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단다. 캠핑 가서는 많이 읽지는 못하지만, 자연 속에서 몇 페이지라도 읽으면 힐링이 되었는데, 참 아쉽더구나. 다음에 캠핑 갈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책을 챙겨야겠다.

, 그럼 소오강호 2권에 대해서 부지런히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1권의 줄거리는 다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하마. 유정풍이 마교의 일원인 곡양과 친구가 되어 정교 사람들이 그를 배척하기로 했잖아. 결국 유정풍은 정교 사람들과 대결을 할 수 밖에 없었단다. 정교의 한 파인 숭산파 사람들은 배신한 유정풍의 가족들을 모두 죽여 버렸어. 도대체 이런 비열한 짓을 하고도 숭산파를 정교라고 불러야 하는지 원. 유정풍이 한창 밀리자,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곡양이 유정풍을 구출해서 도망을 가 버렸단다.

소오강호의 주인공 용호충은 항산파의 비구니 의림의 도움을 받고 치료를 받고 있었어. 그런데 그곳으로 유정풍, 곡양 그리고 곡비연이 도망 왔어. 곡비연은 1권에서 영호충을 살리는 큰 도움을 줬던 사람인데 기억나지? 곡비연은 곡양의 손녀였단다. 그러니까 곡비연도 마교 출신인 거야. 숭산파의 비빈이라는 사람이 여기까지 쫓아와서 그들을 죽이려고 했어.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한 영호충이 그를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어. 비빈은 곡비연을 죽이고, 나머지 일행도 죽이려고 할 때, 형산파 막대 선생이 나타나서 비빈을 죽이고 그들을 구해 주었단다. 그리고 유정풍과 곡양은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그들의 우정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에 자결을 하기로 했단다. 그들은 죽기 전에 그들이 만든 소오강호곡이라는 악보를 영호충에게 전해주었단다. 나중에 음악을 잘 아는 이가 있으면 전해주라고그리고는 말릴 새도 없이 둘은 함께 자결을 하고 말았단다.

영호충과 의림은 유정풍과 곡양의 시신을 묻어주었어. 주변에서 싸움 소리가 들려서 가보니 자신의 스승인 화산파 장문인 악불군과 청성파 여창해가 싸우다가 이내 멀어졌단다. 영호충은 아직 중상을 입은 상태라 스승을 따라 갈 수 없었단다. 얼마 후에는 목고봉이 임진남 부부를 협박하고 있었단다. 목고공은 꼽추이면서 무공이 뛰어난 사람으로 1권에도 나왔던 사람이잖아. 목고봉이 임진남 부부를 협박한 이유는 벽사검보를 빼앗으려 했던 거야. 영호충은 재치 있게 속임수를 써서 목고봉을 도망가게 만들었단다. 임진남이 고맙다고 했어. 하지만 임진남은 이미 중상을 입고 있어서 죽음을 피할 수 없어 보였단다. 그는 죽기 전에 벽사검보의 위치를 영호충에게 알려주면서 나중에 자신의 아들 임평지를 만나면 이야기해 주라고 하고 죽고 말았단다. 남편이 죽자 임진남의 아내도 그 자리에서 자결하고 말았단다.

….

 

1.

악불군과 화산파 사람들이 영호충을 찾아내어 그들은 화산으로 돌아갔단다. 악불군은 그 동안의 영호충의 행동에 벌을 주겠다면서 사과애에 올라가서 1년 동안 면벽 수행을 하라고 했단다. 처음에는 악영산이 매일 같이 도시락을 들고 영호충을 찾아왔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뜸해졌어. 알고 보니 악영산의 마음이 영호충을 떠나 임평지에 가 있었던 거야. 영호충은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하면서 마음 아파했단다.

면벽 수행을 하면서 동굴에 숨겨져 있는 비밀 통로에 이어진 동굴을 발견하게 되었어. 그 동굴 벽에는 오검악파의 검술을 깨뜨릴 수 있는 비법이 새겨져 있었단다. 그것을 조심씩 익혔어. 어느날 1권에서도 나왔던, 색마로 유명한 전백광이 찾아왔단다. 전백광이 색마로 유명하지만, 1권에서 영호충과 친구하자면서 살갑게 굴었는데, 기억나지? 전백광은 어떤 젊은 여자의 심부름으로 왔다면서 그를 데려가겠다고 했어. 영호충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고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어. 전백광은 대결까지 해가며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영호충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단다.

영호충은 전백광과 대결을 할 때, 비밀 통로 속 동물의 벽에 그려진 비법을 보고 익혀서 대결을 하였단다. 자꾸 동굴 속을 들락날락하자 전백광은 영호충이 스승을 몰래 숨겨둔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때 진짜 풍청양이라는 고수가 나타났단다. 화산파에는 25년 전쯤에 기()를 중시하는 사람들과 검()을 중시하는 사람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검을 중시하던 사람들이 화산파를 떠나는 사건이 있었어. 그때 검을 중시하던 고수 중에 한 명이 바로 풍청양이었단다. 그래서 그때 화산파를 떠났던 거지.

강호에서 사라져서 죽은 줄만 알았던 풍청양이 아직 살아 있던 거야. 서열로 보자면, 악불군보다 한 세대 위니까, 영호충에게는 사숙조가 되었어. 풍청양은 영호충에게 화산파의 검술인 독고구검을 가르쳐주었단다. 그리고 나서 전백광과 다시 대결했고,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전백광은 그곳을 떠나게 되었단다. 풍청양은 계속 영호충에게 검법을 전수하고 영호충이 충분히 익혔다고 생각했을 때 떠났단다. 그러면서 자신을 보거나 만났다는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했어.

 

2.

어느날 화산파 제자인 육후아가 찾아왔어. 화산파에 비상상태가 일어났다고 했어. 25년 전 화산파를 떠났던 검종 무리들이 찾아와 악불군에게 장문인 자리를 내 놓으라고 한다는 거야. 이에 영호충도 스승님을 도와주러 갔어. 그런데 가는 길에 도곡육선이라고 하는 괴이한 사람들을 만났단다. 왜 괴이하다고 하냐면 그들은 여섯 형제인데 모두 얼굴이 흉측하게 생겼고 덩치가 엄청 크고 힘이 셀 뿐만 아니라 무공도 뛰어났어. 하지만 머리는 좋지 않아 우둔했단다. 그러니까 무식하고 힘만 세니까, 더 위험한 존재일 수 있었지.

그런데 그 도곡육선이 영호충을 보고 다짜고짜 젊은 여자에게 데려가야 한다고 했어. 전백광도 그렇고 도곡육선도 그렇고 도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거지? 젊은 여자라고 하면 의림인가? 아무튼 지금은 스승을 도와주러 가는 길이니 그들을 따라 갈 수가 없었어. 영호충은 영리함으로 그들을 따돌리고 화산파의 본거지에 도착을 했단다. 영호충은 화산파를 찾아온 검종 무리들과 싸움을 했고, 영호충은 장풍을 맞고 중상을 입었단다. 그때 갑자기 도곡육선이 나타나서 상대방을 팔과 다리를 하나씩 잡고 당겨버렸어. 무식하고 힘이 센 무리들의 행동이 앞선 진면목을 보여주는구나.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그들에게 영호충을 데려오라고 한 젊은 여자가 영호충을 온전하게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검종 무리가 영호충을 중상을 입혀서 그랬던 거란다.

도곡육선은 영호충을 데리고 그곳을 떠났단다. 그리고 그들은 영호충을 치료한다고 온갖 진기를 그의 몸 속에 집어 넣었어. 하지만, 오히려 그것들이 영호충의 몸을 더 악화시켰단다. 영호충이 죽을까 봐 겁이 난 도곡육선은 다시 영호충을 데리고 화산으로 갔단다. 악불군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하지만 화산파에서는 도곡육선이 적이라고 생각하여 싸움을 하게 되었고, 악부인에 의해 도곡육선의 한 명인 도실선이 가슴에 칼이 찔리게 되었어. 뒤늦게 영호충이 설득하여 도곡육선들을 물러나게 했단다. 영호충은 여전히 중상을 입은 상태로 정신을 잃었다 깨었다를 반복했단다. 화산파 무리들은 도곡육선이 다시 찾아올까 봐 걱정이 되어 잠시 화산을 떠나 있기로 했단다. 그런데 영호충은 상태가 위중하여 떠나지 못했고, 육후아가 그를 보살펴 주기 위해서 함께 남아 있기로 했단다.

여기까지 2 권의 이야기란다. 착함과 의리의 대명사 영호충의 몸은 온전할 날이 없구나. 그리고 영호충을 데리고 오라고 하는 젊은 여자는 누구일까. 3권을 기대하면 오늘은 이만 마치련다.

 

PS:

책의 첫 문장: 유정풍의 앞을 미위이가 막아섰다.

책의 끝 문장: 육후아는 눈물을 머금고 !’하고 대답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2-08-10 09: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영화 소오강호 엄청 좋아했는데 말이죠. 이렇게 책이야기로 오랫만에 만나니 그도 반갑네요

bookholic 2022-08-11 00:52   좋아요 0 | URL
이 소설 읽고 유뷰트로 소오강호와 동방불패의 영상물을 봤습니다.
그 영화들을 보고 즐거워했던 그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나요?^^
즐거운 하루 되시고요~~

mini74 2022-08-10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무지 신나신거 같아요 ㅎㅎ 소오강호 저도 반갑네요. 한때 당구에 미친 친구는 젓가락으로 다마 치는 연습을 하고 , 김용에 빠진 저는 젓가락으로 무술을 연마하며 점심 먹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

bookholic 2022-08-11 00:53   좋아요 0 | URL
ㅎㅎ 젓가락 신공이었군요~~
젓사락은 콩 한꺼번에 5개씩 잡기... 이런것도 연습하셨나요?^^
mini74님, 비 조심하시고 신나는 하루 되세요~~
 
이휘소 평전 - 한국이 낳은 천재 물리학자
강주상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휘소라는 불운의 과학자가 있단다. 그야말로 전도유망한 과학자였는데, 불운의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죽고 만 과학자였어. 그가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을 거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할 정도로 뛰어난 과학자였단다. 그가 일반 대중에게 유명하게 된 것은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하는 소설을 통해서였단다. 과학자 이휘소를 다룬 소설이었는데, 이 소설이 공존의 히트를 치면서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등 많은 사람들이 과학자 이휘소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단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다룬 이휘소는 실제와 너무 차이가 나는 것이 문제였단다. 소설의 재미를 위해서였겠지만, 실존 인물을 너무 왜곡해서 그렸다고 했어. 그가 하지도 않은 핵무기 개발자로 나오고, 그의 죽음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내용도 있다고 하더구나.

이런 진실의 왜곡으로 이휘소의 유가족들은 힘들어했고, 그로 인에 명예훼손 등에 대한 법적 대응을 했대. 이휘소 박사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 강주상 님도 이휘소 박사에 대한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을 많이 하셨고, 이 책도 그런 취지로 썼다고 하셨어. 2007년에 처음 출간되었고, 아빠가 읽은 것은 2017년 이휘소 박사 40주기에 맞춰 나온 개간본이란다.

아빠도 이휘소 박사님을 이름만 알지,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잘 몰랐어. 작년에 힉스 보손에 관한 책을 읽다가 그 힉스 보손(힉스 입자)’라는 이름을 붙인 이가 이휘소 박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이휘소 박사님에 관한 책이 있으면 읽어봐야겠다고 생각을 하다가 이제서야 읽게 되었단다.


1.

1935 1월 서울에서 태어난 이휘소.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의사였다고 하는구나. 비록 일제 시대이긴 했지만 부모님이 모두 의사이다 보니 집안은 넉넉한 편이었대. 그런 집안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으로 피난길을 떠날 때부터였어. 마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아버지가 그만 실족사로 돌아가시고 말았어. 그 때부터 어머니 혼자 4남매를 기르셨다고 하는구나. 이휘소는 4남매의 장남으로써 계속 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끊이질 않았어. 유학을 가서도 어머니에게 자주 편지를 하곤 했단다. 당시에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쉽게 갈 수 없었으니 편지가 유일한 연락 수단이었어.

======================

(67-68)

요사이는 밤에 자기 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습니다. 미국 남북 전쟁 당시의 사정이 어쩌면 그렇게 한국의 과거 수년과 똑같은지, 마치 저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꿋꿋이 싸워 오신 그리고 아직도 싸우시는 어머님의 거룩한 모습은 저로서는 항상 자랑이요, 힘의 근원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알지 못하던, 그리고 알려고 해 본 일이 없던 사실 하나를 안 것 같습니다. 즉 여성의 힘, 심리 그리고 도덕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불안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부르는 흑인 영가 <켄터키 옛집>의 한 구절에서 이상한 마음의 동요를 느낍니다.

잘 쉬어라 쉬어, 울지 말고 쉬어,

어려운 시절이 닥쳐오리니,

잘 쉬어라 켄터키 옛집

그들이 이 구()와 자기네의 운명을 비교하고 몸부침치는 것- 어미니, 6.25 때 우리 광릉에서 지내며 똑 같은 경험을 한 것을 아직 기억하시죠?

아름답고 거룩한 어머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재건이야말로, 전쟁 이상으로 쓰라린 시기이다라고 이 책에는 씌어 있습니다.

======================

한국 전쟁을 마치고 미국에서 한국의 장학생들의 유학 지원을 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때 뽑혀서 미국 유학을 가게 되었단다. 원래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전공하고 있었지만,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이휘소는 미국에 가서는 물리학을 공부했단다. 낯선 곳에서 처음에는 무척 힘들어했지만, 그는 이 유학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하여 11초를 허투루 쓰지 않았단다. 그는 오하이오 주 마이애미 대학교를 유학간 지 1년 반 만에 졸업했고, 이어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했단다.


2.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을 마치고, 명문 중에 하나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한단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박사 자격 시험인 예비 시험을 면제까지 해주는 파격적인 대우였어. 그리고 그는 3년이 채 안되어 박사가 되었단다. 그리고 이 학교의 대학교의 물리학과 조교수에 임명된단다. 그의 나이 고작 스물 일곱 살이었단다. 그것도 한국 나이로

그가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가족들이 있는 국내 소식도 관심을 갖고 보았어.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그것에 대해 이휘소는 심한 절망감과 실망감을 느꼈다고 하는구나.

======================

(119)

이휘소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절망감을 느꼈다. 4.19를 통해 그나마 민주적인 정부가 세워지나 싶었는데 1년 만에 군인들에 의해 뒤집히고 말았던 것이다. 미국에 살면서 민주주의의 참된 가치를 절실하게 느껴온 이휘소는 해방된 지 15년이 되도록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 상황이 안타깝기만 했다. 더욱이 중남미의 어수선한 나라들에서나 벌어지는 군사 쿠데타가 한국에서도 일어났다는 사실에 그는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동료 교수들이 한국 상황을 화제에 올리면 이휘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그래서 이휘소는 계속 군사정권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었대. 나중에 이휘소가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죽고 나서 훈장 수여에 대한 제의가 왔을 때도 미국 유학 시절 만나 결혼한 이휘소의 부인 심만청 님은 이휘소의 이런 정치적 성향 때문에 받지 않겠다고 했단다. 하지만 어머님이 받는다는 것은 동의한다고 하셨대.

======================

(16)

얼마 후 재미 과학 기술자 협회 부회장인 강경식은 당시 한국 물리학회 간사장이던 조병하 교수를 통해 이휘소에 대한 정부 포상을 건의한다. 세계적인 학자였으므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명예의 흔적을 남겨 놓자는 취지였다. 어렵게 포상은 결정되었지만 정작 이휘소의 부인 심만청이 포상을 거절한다. 평소 남편 이휘소가 유신 체제에 반대해 왔는데, 그런 독재 정권으로부터 훈장을 받는다는 것은 남편의 철학에 어긋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이휘소의 어머니가 대신 받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

이휘소는 우리나라 최초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초대 받게 되어, 1년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연구했단다. 이후 그의 이력을 보면 세계 물리학계의 주요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어.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정교수, 앨프레드 슬론 재단 연구원, 스토니 브룩 대학교 이론 물리 연구소 교수,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 이론 물리학 부장, 시카고 대학교 물리학과 겸임 교수 등 화려한 이력이었단다. 이 책에는 그가 연구한 분야에 대한 내용도 나오는데,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비교적 쉽게 짧게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역시 입자물리학의 세계는 어려운 분야인 것 같구나. 그가 공부는 입자물리학은 원자를 구성하는 아주 작은 입자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구나.

======================

(102)

주로 양성자와 중성자들이 모여서 결합된 원자핵을 연구하는 학문이 핵물리학이다. 하지만 양성자, 중성자 이외에도 이만큼 무거운 중입자(重粒子)가 있고 중간 정도의 질량을 가진 중간자(中間子)가 있다. 또한 양성자와 중성자는 u, d의 두가지 맛깔의 쿼크로만 구성되나 다른 맛깔의 쿼크 결합체인 강입자들이 있다. 그러나 가장 무거운 맛깔인 t 쿼크를 포함하는 강입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명이 너무 짧아서 강입자가 만들어지기 전에 소멸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모두 대상으로 가장 바탕이 되는 기본입자를 연구하는 학문이 소립자 물리학 또는 간단히 입자 물리학이다.

======================

결국 짧은 생의 마무리한 이휘소의 물리학 연구는 미완성으로 남았다고 할 수 있겠구나. 하지만 이휘소가 했던 연구들은 많은 물리학자들의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999년 토프만과 펠트만이라는 사람이 노벨 물리학상을 타는데 가장 기여한 사람이 이휘소 박사였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이휘소 박사는 돌아가신 후에도 많은 동료 및 후배 과학자들에게 도움을 주셨어. 아마 그때 생존해 계셨으면 같이 수상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

(213)

토프트와 펠트만은 1999년 노벨상을 수상한다. 물론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는 이 두 사람의 업적이지만 토프트가 언급했듯이, 이휘소의 방법은 상호 보호적인 방법으로 그 업적을 충분히 인정받아야 한다. 만약 1999년에 이휘소가 생존했다면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었을까? 필자는 그렇다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업적은 인정되지만 상 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노벨상을 둘러싼 논박은 항상 존재한다. 하긴 와인버그의 경입자 모형에 대하여도 시비를 걸 수 있다. 게이지 대칭은 이미 글래쇼가 발표했고, 자연 대칭 파괴는 힉스가 알아낸 것이므로 와인버그 논문에 새로운 것이 없다고 폄하하는 식이다. 실제로 워드는 이런 생각으로 와인버그와 똑 같은 결론에 이르렀으나, 논문으로 발표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전해진다. 물리학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이미 알려진 인간의 자연에 관한 지식에 학자 자신의 기여를 보태 학문이 발전하는 것이다. 자신의 기여는 과거의 관련이 있고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기여로 물리학이 크게 도약하였다면 그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 와인버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게이지 대칭과 자연 대칭을 결합하여 물리학의 도약을 이루었다. 이휘소는 토프트와 상호 보완적인 방법으로 자연 파괴하는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

….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죽음이 안타깝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서, 이휘소 박사에 대한 잘못된 진실을 바로 잡았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그가 위대한 우리나라의 과학자였다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고 말이야.

오늘은 이만.

======================

(293-294)

일반 독자들의 상당수는 진실과 상관없이 이휘소의 의문사를 믿고 싶은 마음도 있는 듯하다. 물론 순전히 정서적인 이유다. 그냥 세계적인 물리학자라는 것보다 일부러 수술을 해서 핵무기 설계도를 뼛속에 감추는 등 조국을 위해 비밀 사업을 추진하다 외국 정보 기관에 암살된다는 스토리는 얼마나 감동적이고 드라마 같은 대목인가..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드라마일 뿐이다. 소설로 읽고 소설적 감동을 얻는 건 독자에게 달렸지만 진실은 진실대로 분명히 알아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휘소는 사실 그대로 세계 정상급의 물리학자로 과학사에 큰 획을 그었고, 한국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했으며 한국 물리학계의 발전과 도움을 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었다.

이것이 진실이다.

======================


PS:

책의 첫 문장: 1977 6 16, 미국 브라운 대학교 강경식 교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책의 끝 문장: 만일 그렇다면 이 전기가 얼마나 그의 의도에 충실했는지 부끄러운 면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

러시아 정부 입장에서 시베리아 유배형은 여러 가지로 유익했다. 우선 죄수를 이용해서 시베리아라는 광활하고 척박한 땅을 사람이 살 만한 땅으로 개척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시베리아가 러시아 정부의 통제하에 있는 지역이라고 공포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또 러시아 권력 체제를 비판하는 도스토옙스키 같은 위험인물을 사회에서 격리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 정부는 17세기 중반부터 사형보다 시베리아 유배형을 더 애용했다. 이때부터 시베리아는 20세기 러시아 혁명 때까지 유배의 땅으로 각인되었다.


(28)

우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 도시를 건설한 황제인 표트로의 도시라는 의미이며 네 차례에 걸쳐서 이름이 바뀌었는데,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페트르부르크’, 1914년에는 페트로그라드’, 1924년 레닌 사망 후에는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레닌그라드로 불리다가 최근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에 정작했다.


(67)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침략해 자유민이던 흑인들을 강제로 끌고갔다는 생각은 노예 무역에 관한 가장 큰 오해다. 유럽의 노예 상인들은 대부분 서아프리카 노예 시장에서 이미 노예 신분으로 팔려 온 흑인을 구매했다. 노예로 농산물이나 공산품처럼 무역으로 거래되었으며, 아프리카에는 노예를 유럽 상인에게 판매하는 상인이 존재해 이들을 주축으로 노예가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대략 7세기부터 <맨스필드 파크>의 배경인 19세기에 이르기까지 90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 노예가 고도로 발달한 노예 시장에서 매매되었다. 유럽 상인들은 개인 상인에게 노예를 구매하기보다는 노예를 체계적으로 거래하고 편의를 제공하는 아프리카의 권력자와 거래하기를 원했다.


(84-85)

과거 시험에서 뽑는 인원을 정원(定員)이라고 하는데 식년시의 경우 문과는 33명을, 무과는 28명을 선발했다. 여기서 33명은 불교에서 말하는 하늘, 33(), 28명은 밤하늘 별자리 28(宿)에서 유래했다. 보신각종이 아침에는 33번을 저녁에는 28번을 울리는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그러나 별시는 정원이 따로 없었다. 특히 무과 별시는 전쟁이나 북벌을 이유로 한꺼번에 수천 명을 선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은 가난한 나라였다. 무슨 돈으로 한꺼번에 수천 명이나 선발한 무인을 관리로 임용할 수 있었겠는가. 애초부터 별시는 유생과 무인의 사기를 북돋을 목적이었고, 급제자의 수만큼 임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06-107)

역사가들은 왕의 치세와 업적을 기록으로 남기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오직 왕이 돋보이고 빛나야 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대제국을 건설한 왕들이 대개 사자나 신하를 지방에 보내 세금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국경 지대의 상황과 민심 그리고 이웃 나라의 동태와 같은 정보를 끊임없이 수집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이런 정보는 제국을 유지하고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첩보의 중요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심도 많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심심찮게 병사들의 편지를 몰래 읽었다. 또 겉으로 보이는 병사들의 충성심을 믿지 못하고 병사들이 나누는 사적인 대화를 엿들으며 속마음과 사기를 파악하려 했다. 요즘으로 치면 개인의 이메일을 들여다보고 통화 내용도 도청한 것이다.


(120)

사람들은 본인이 질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 롤랑 바르트가 쓴 <사랑의 단상>을 읽으면 왜 우리가 질투를 부끄러워하는지 알게 된다. “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 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의 대해 괴로워한다.”


(146)

미합중국의 법은 인쇄물 검열을 시행할 수 있는 권한을 두 개의 기관에 부여한다. 이 무서운 권한을 행사하는 기관은 법원이나 경찰이 아니라 세관과 우체국이다. 세관은 불온하다고 판단한 책을 수입하지 못하도록 지정할 수 있고, 우체국은 운송 자체를 막음으로써 불온한 책의 유통을 원천 봉쇄할 수 있다. 미국 우체국 직원은 본인의 판단을 근거로 특정 책을 불온서적으로 낙인찍고 운송을 금지할 수 있는 기이한 특권을 가진 셈이다. 우체국의 판단으로 수천 명의 독자를 잃고 파산한 언론사도 있었다. 우체국이 불온한 책이라고 판단하여 발송에서 제외해버리면 신문사는 방법이 없다. 놀랍게도 미국의 우체국은 오늘날에도 이 권한을 행사한다. 여전히 우체국이 불온 문서를 통제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149-150)

자신의 원고와 편지를 소멸하고자 했던 카프카는 문단의 대선배인 찰스 디킨스에게 한 수 배웠어야 했다. 디킨스는 미래를 내다보고서 자신의 원고와 편지를 꾸준히 부지런하게 불태웠다. 그는 1860년부터 1870년 죽을 때까지 사적이고 공적인 편지를 모두 태웠다. 평소 외도가 잦았던 디킨스는 사후에 편지가 공개되어 자신의 명성이 훼손될 위험과 자식들이 편지를 출판사에 팔아치울 위험을 모두 염두에 두었다. 디킨스는 그 누구도 믿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원고를 태워서 폐기해 카프카와 달리 자신의 의도와 반해 유고가 출판되는 일을 예방할 수 있었다.


(172)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의 관계는 해피 엔딩이었지만, 도스토옙스키는 그렇지 못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바덴바덴에서 여비까지 모두 도박장에 바친 데다 설상가상으로 집주인이 집세를 올리자 할 수 없이 최후의 보루였던 투르게네프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그에게는 죽기보다 더 싫은 일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바덴바덴에서 도박을 쓸 요량으로 투르게네프에게 50루블을 빌리고 갚지 않았는데 투르게네프는 이 일을 잊지 않고 <연기>라는 소설에 100루블을 빌리고선 갚지 않은 채 유유히 바덴바덴을 떠나는 한 배은망덕한 인물을 등장시켰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인물의 모델이 자신이라고 확신해 <연기>를 신랄하게 비판했고, 질세라 <악령>에서 투르게네프를 비꼬고 비판하며 복수를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투르게네프의 친유럽적인 사고를 풍자한 것으로 모자라 그의 성격까지 꼬집어 비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