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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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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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백수린 작가님의 소설집 <여름의 빌라>를 이야기해줄게. 아빠가 작년에 읽은 백수린 님의 <눈부신 안부>를 재미있게 읽어서 백수린 님의 다른 책들을 알아보다가 알게 된 책이 오늘 이야기할 <여름의 빌라>라는 책이란다. 2020년에 출간된 책이고, 8편이 담겨 있단다. 그런데 어떤 작품은 읽다가 왠지 읽은 소설 같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도 있었어. 그래서 아빠의 독서 기록을 찾아보니, 백수린 님이 젊은작가상을 탄 적이 있는데, 아빠가 <젊은작가상 수상집>을 읽을 때 읽었던 것이더구나. <시간의 궤적> <고요한 사건>이라는 작품이 예전에 읽었던 작품이더구나. 그런데 이번에 읽는데, 왠지 읽은 것 같은 느낌만 있지, 줄거리는 전혀 생각나지 않더구나. 그래서 또 한번 아빠의 기억력에 좌절을 느끼는 순간이었어. 작년에 읽은 <눈부신 안부>도 좋게 읽었는데, 이번에 읽은 <여름의 빌라>도 좋았단다. 앞으로도 백수린 님의 작품들은 눈여겨봐야겠다.

 

1.

<시간의 궤적>

주인공은 나이 서른 살. 회사를 그만두고 프랑스로 미술사 석사 과정을 공부하러 갔어. 파리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학원에 다녔는데, 그 학원에는 한국 사람이 두 명뿐이었어. 어느날 나머지 한국인이 주인공에게 말을 걸어와 밥을 같이 먹고 나서 친한 사이가 되었단다. 주인공보다 나이가 많아 언니라고 불렀어. 언니는 대기업의 주재원으로 파리에 와 있다고 했고, 다른 주재원들은 가족들이 같이 왔는데, 자신만 미혼이라고 혼자 오다 보니, 다른 주재원 가족들과 어울리는 것도 어색하다고 했어. 언니는 예전에 만났던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주재원으로 온다고 해서 헤어지게 되었다고 했어. 그 남자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는데, 여전히 가끔 연락한다고 하더구나. 아무튼 주인공과 언니는 엄청 친해져서 같이 놀러가고 같이 밥도 자주 먹었어. 주인공은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고 브르스라는 남자친구를 만나 사귀게 되면서 남자친구와 같이 언니를 만나기도 했단다. 주인공은 브르스와 결혼하는 것을 고민했지만 결국 결혼했단다. 시간이 흘러 언니가 주재원을 마무리하면서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단다. 그 시기가 주인공이 브르스와 사이가 안 좋은 시기여서 망설이다가 같이 갔단다. 그런데 브르스는 자신보다 언니와 더 사이 좋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눈에 거슬리기도 했어. 주인공은 언니와도 거리가 좀 멀어지고 있었는데 그런 눈에 거슬리는 장면까지 만들고주인공은 언니에게 아직 유부남이 된 남자친구에게 연락하냐고 물어봤고, 언니는 그렇다고 하니까주인공은 속에 품고 있던 말을 쏟아냈어. 왜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냐면서 말이야분위기가 어땠을지 예상되지? 언니가 귀국 전에 다시 만나긴 했지만 예전의 그런 사이는 아니었어. 귀국 이후에 연락이 끊겼단다. 그래서 주인공의 쓴 소리를 들은 언니는 그 이후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싶구나.

….

<여름의 빌라>

두 번째 작품은 책의 제목이기도 한 여름의 빌라. 주인공 이름은 주아. 주아는 오래 전 유럽 유학 중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 여행에서 며칠 묶었던 집주인 노부부인 베레나와 한스와 친분을 쌓았단다. 그 이후에도 계속 연락을 지냈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주아는 지호라는 남자와 결혼을 했고, 둘 다 시간강사로 힘들게 일하고 있었단다. 한스 부부의 연락을 받고 함께 캄보디아 여행을 갔는데, 한스 부부는 손녀 레오나를 데리고 같이 왔단다. 그들은 예의를 지키면서 잘 지냈지만, 지호는 속으로 불만이 가득했단다. 한스 부부가 캄보디아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지호 생각에는 자신들이 인종적으로 우월감을 가진 듯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어. 한스 부부는 돈을 내고 관광 서비스를 받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지호는 약간 삐딱한 시선을 두고 있었단다. 계속 그 감정을 참던 지호는 결국 폭발하여 말다툼까지 이어졌단다. 아빠가 생각하기에 지호라는 사람의 속이 좁다고 생각했어. 현지인들도 관광으로 돈을 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결국 한스 부부와 안 좋게 헤어져 귀국을 했어. 얼마 후에는 베레나가 할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는 편지를 받았단다.

<고요한 사건>

지방에 살던 주인공의 가족은 부모님이 재건축을 노리고 서울의 소금고개라고 하는 곳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왔단다. 그런데 그곳의 환경은 정말 안 좋았어. 여름이면 악취로 창문도 열지 못하고, 거리에는 쓰레기가 날리는 그런 동네였어. 길고양이들도 많았는데, 길고양이를 보살펴주는 고양이 아저씨도 있었어. 이사와 함께 서울로 전학을 하게 된 주인공은 해지, 무호라는 친구와 친하게 되었어. 드디어 재건축이 결정되면서, 찬성파와 반대파의 갈등이 심해졌단다. 전세를 살고 있던 해지는 이사를 가야 했어. 주인공은 무호를 은근히 좋아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기 전에, 무호는 주인공을 찾아와 해지에게 사랑 고백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단다. 사랑이라는 것이 쉽지 않지. 어느날 동네의 길고양이들이 죽은 채 발견되었단다. 재건축 찬성파들의 짓이 뻔했어. 길고양이들이 죽은 것에 대해 고양이 아저씨는 난동을 부렸고, 재건축 찬성파에게 의해 폭행까지 당했어. 주인공은 울면서 아버지에게 도와달라고 했는데, 아빠는 별일 아닌 듯 무관심하는 모습에 주인공은 충격을 받았단다. 그런 방법밖에 없었을까. 재건축을 하더라도 영리한 고양이들은 제살길 찾아 나섰을 텐데..

<폭설>

11살 때 부모임이 이혼을 하시고, 주인공은 아빠와 함께 생활했단다. 엄마는 아빠의 전 회사 동료인 케빈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지내셨어. 주인공은 방학 때마다 엄마를 만나러 미국에 갔지만, 엄마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었어. 특히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생기는 몸의 변화에 대해 조언해 줄 사람도 없었지. 14살 이후에는 미국에 안 가기로 했어. 엄마가 가끔씩 한국에 오면 만나곤 했지만, 그 만남의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단다. 세월은 쏜살같이 빨리 흘러 주인공은 서른 살이 되었어. 다니던 회사에서 잘리고, 방황하기도 하던 시기오랜 만에 미국에 가서 엄마를 만났단다. 그리고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갔는데, 가는 길에 갑작스러운 폭설을 만나 차가 구덩이에 빠져 한 동안 둘이 차 안에 갇히게 되었어. 그러면 둘이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단다. 한번뿐인 인생.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하며 자란 주인공. 엄마는 딸의 빈자리를 채웠을까?

….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주인공 희주의 남편은 성형외과의사야. 아이는 둘이고 둘째는 아직 수유중인 평범한 가족을 이루고 있단다. 아니다, 의사 가족이면 일반 평범한 가족의 범위는 벗어났다고 봐야겠구나. 희주의 친구 한나는 <카페 뮐러>라는 레스토랑을 차렸는데, 개업식날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발레를 하는 남자 후배를 만나게 되었어.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 이후로 그 후배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거야. 그리고 동네 공사장을 지나가다가 그곳에서 일하는 젊은 남자가 그 발레리노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보겠다고 공사장을 자주 지나가기도 하고생각으로만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것은 죄악인가? 사랑은 무엇으로 막으려고도 해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어코 찾아 드는가 보구나.

<흑설탕 캔디>

돌아가신 할머니의 일기장에서 할머니의 따듯한 사랑 이야기를 발견하는 이야기란다. 주인공의 엄마가 사고로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함께 사시면서 주인공을 키워주셨어. 아빠가 프랑스에서 일하게 되면서, 주인공과 할머니도 함께 프랑스에 가게 되었단다. 할머니가 대학까지 나오셨지만, 프랑스어는 못하시고 프랑스에 아는 사람도 없었으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단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살던 집의 아래층에 노신사인 브뤼니에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어. 브뤼니에는 4년 전 사별하고 혼자 지내셨어. 일 층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연주에 우연히 인사를 한 브뤼니에와 할머니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같이 차도 마시면서 애틋한 정을 쌓아갔단다. 그런데 아빠의 갑작스런 귀국으로 할머니는 갑작스럽게 브뤼네에와 헤어지게 되었단다. 할머니와 브뤼니에는 서로 호감을 갖고 있지만, 할머니의 귀국을 반대할 만큼까지 진전은 없었던 것 같아. 그들은 이것 또한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

<아주 잠깐 동안에>

오랜 전 시절의 일을 회상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란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이 대부분 옛 이야기를 회상하는 전개 방식을 쓴 것 같구나. 지은이 백수린 님이 그런 스타일의 소설을 즐겨 쓰시는 건지, 아니면 여러 작품들 중에 그런 소설들만 묶은 건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유럽 배경의 소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건 지은이 백수린 님이 프랑스에서 유학한 경력이 있으셔서 그런 것 같구나. 무려 불문학 박사시구나. 이야기가 잠시 딴 곳으로 빠졌네. 다시 <아주 잠깐 동안에> 이야기를 해줄게. 이번 소설의 주인공은 남자란다. 주인공은 여주와 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만나 호감을 갖게 되었단다. 여주가 이사를 가면서 소식이 끊기고 회사에 취업한 이후 수소문하여 여주를 다시 만나게 되고, 그들은 사랑을 하게 되고 결혼에 골인하게 된단다. 그리고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생활해서 드디어 작지만 자신들의 집을 얻을 수 있었어. 친구들을 불러 집들이도 했어. 집들이에 온 손님들을 배웅하고 집에 오는 길에 주인공은 세탁기를 리어카에 싣고 혼자 끌고 올라가는 할머니를 보았어. 도와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할머니의 집은 한참 올라가야했단다. 여주는 안주거리 만들어서 기다리고 있어서 마음이 급해졌단다. 급한 마음에 서둘러서였나, 뒤에서 밀던 할머니에게 세탁기가 깔리기도 했어. 다행히 할머니는 많이 안 다치시고, 주인공은 할머니 집에 세탁기를 내려 놓고 집으로 달려왔단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에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 주인공은 자신의 실수로 세탁기에 할머니가 깔려 병이 심해지신 것은 아닐까그 생각을 그 이후로도 계속 갖고 살았단다. 선한 목적이었으니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주인공은 중학교를 멀리 배정 받아 초등학교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다니게 되었는데, 반편성고사에서 일등을 하게 되어 그나마 친구들이 무시하지 못했단다. 새로 사귄 친구 중에 선주라는 아이가 있는데, 선주는 범생 스타일이었어. 얼마 후 좀 노는 아이 다미와 친해지게 되었는데, 다미의 친구 무리들과 노래방도 가고, 성행위와 키스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되었어. 다미를 통해서 사랑도 알게 되고 첫키스도 해보았단다. 그런데 얼마 후 다미는 임신을 하여 퇴학을 당하게 되었어. 그리고 소식이 끊겼다가 대학에 가서 다미와 전화 통화를 했는데, 이미 아빠가 다른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단다. 자신의 처지를 불만이 없어 보였고 심지어 쿨해 보였단다. .

아빠의 기억력이 사라지기 전에 줄거리라도 적어놓아야겠다는 생각에 정신 없이 줄거리만 이야기한 것 같구나. 이미 잘못된 기억력으로 다르게 이야기한 부분도 있을 것 같다. 단편 소설은 늘 뒷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아쉬움이 있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언니가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 부활절 방학이 시작되기 전의 어느 수요일이었다.

책의 끝 문장: 그리고 나는 무사히 차도를 건너길 바라는 마음에서 눈으로 개를 좇다가, 그 개가 마침내 반대편 도로에 무사히 닿는 걸 확인한 후 고개를 돌렸다.


기차가 조금씩 속도를 줄이는 것이 느껴집니다. 편지를 마쳐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요. 도착역을 알리는 방송이 곧 나오고 기차는 역사 안으로 들어설 테지요. 때가 되면 우리는 옷가지와 부려놓는 짐을 챙겨들고, 열차에서 내린 후 영원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할 거예요. 풍화된 것들 것 바람에 흩어져 없어지고 말겠죠. 그렇지만 나는 덜컹거리는 열차 위에 아직 타고 있고,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 당신이나 지호처럼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이 편지를 쓴 것은 아니예요. 하지만요, 베레나, 이것만큼은 당신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신의 기억이 소멸되는 것마저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순리라고 한다면 나는 폐허 위에 끝까지 살아남아 창공을 향해 푸르게 뻗어나가는 당신의 마지막 기억이 이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딸이 낳은 그 어린 딸이 내게 그렇게 말한 후 환하게 웃는 장면이요. - P71

오래전, 스스로 너무 늙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아직 새파랗게 젊던 시절에 할머니는 늙는다는 게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퇴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굳는 속도에 따라 욕망이나 갈망도 퇴화하는.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알았다.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어김없이 인간이 평생 지은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이 인간을 늙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음은 펄떡펄떡 뛰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는데 육신이 따라주지 않는 것만큼 무서운 형벌이 또 있을까? 꼼짝도 못하는 육체에 수감되는 형벌이라니. 나이를 점점 먹으면서 할머니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치매나 언젠가 차게 될지 모르는 오줌 주머니가 아니었다. 할머니의 악몽에까지 찾아오는 공포는 언젠가 남편이 입원해 있던 요양병원에서 보았던 뇌졸중 환자처럼 전신이 마비되고도 또렷한 의식을 지닌 채 울부짖으며 여생을 살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었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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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내 이름은 주세죽. 1901년생. 직업, 조선 독립혁명가. 1919년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으로 감옥에 갇힌 이후 스무 성상 내내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줄기차게 싸워왔다. 그런데 항일 투쟁을 벌여갈 때 언제나 든든했던 언덕소련공산당이 돌연 나를 체포했다. ‘사회적 위험분자로 훌닦은 뒤 1938 5 22일 카자흐스탄의 사막 도시 크즐오르다로 유형 5을 명했다. 죄와 벌 모두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명백한 이유다.


(110)

<올타>철필 연주를 디딤돌로 직접 연주에 들어가면서 내가 조선 땅에 있다는 사실이, 조선의 민중돠 더불어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고마웠다. 상해를 떠나기 전에 이정은 원근, 단야와 함께 조선의 청년 속으로, 나와 정숙은 여성 속으로 들어가 조직을 일궈내기로 혁명사업을 분담했다. 단야는 상해 시절부터 내내 혼자였다. 고향 김천에 일찍 결혼한 아내가 있었지만 자신의 뜻과 전혀 무관한 혼인이었고 소통을 끊은 지도 오래라고 푸념하곤 했다. 낡은 시대의 혼인관이 빚어낸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훤칠한 단야가 고개를 숙이고 낡은 외투에 두 손 찌른 채 구부정하게 걸어가는 모습은 종종 애처롭게 다가왔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판단하다면, 어린 단야와 결혼한 여성이야말로 더 큰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어 애써 그의 아내를 떠올렸다.


(125)

인내요? 지금 저만큼 선생이 인내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야말로 더는 참기 어려우니 마지막으로 말씀드리죠. 노동하지 않고 글 팔아 먹고사는 이들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있어요. 남의 생각을 베끼지 않는 겁니다. 선생의 민족개조론은 전혀 독창적이지 않아요. 우리 민중이 3.1만세운동에 나선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 민족의 독립 불능론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나섰잖아요? 총독부는 우리 민족에게 성격적 결함이 있고, 종족으로 열악하며 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식민지로 전략하고, 못하는 것은 민족의 잘못이라고도 강조했지요. 선생의 민족개조론과 총독부 논리에 뭐가 다른가요?”


(256)

혁명 이후에 러시아 민중은 이혼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일부일처제를 여전히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실제로는 남성들의 가부장제가 남아 있지요. 가족은 혁명 러시아에서도 국가를 이루는 기본 단위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사회의 일부일처제와 마찬가지로, 혁명 러시아의 일부일처제도 또한 실질적으로는 일부다처제거든요. 여성과 남성 사이의 평등이 온전히 이뤄지지 않는 한, 배타적으로 동등한 성애를 전제로 한 일부일처제는 불가능합니다.”


(314)

조선인들 전체를 밀정일 가능성이 높은 집단으로 간주한 스탈린의 혁명적 혜안에 나는 감탄했다. 제국주의와 다를 바 없는 약소민족 탄압이 분명했다. 강제 이주에 반대할 가능성이 높은 지도자나 지식인들은 사전에 전격 체포했다. 공포에 잠긴 동포들은 화물열차 한 칸에 수십 명씩 빼곡하게 실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한 달이 걸려 이윽고 내린 카자흐스탄에서 조선인들을 맞은 것은 모래바람과 황무지였다. 집과 살림살이를 모두 빼앗기고 맨 몸으로 온 동포들에게 소련정부는 약속했던 보상을 하지 않았다. 운이 좋은 이들은 카자흐인 집의 창고나 축사를 가까스로 얻을 수 있었다. 그조차 얻지 못한 이들은 허허들판에 토굴을 파고 갈대로 지붕을 올려 살았다. 강제 이주 안팎으로 숱한 동포들이 죽어갔다.


(316)

그래서 묻는다.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 소련공산당 지도자 스탈린은 과연 혁명가인가. 나는 공산대학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을 배웠다. 두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제 동지들과 민중을, 약소민족의 혁명가들을 제멋대로 학살한 스탈린을 어떻게 볼 것인가.


(334-335)

나는 소련의 속살을 생생하게 체험하며 마르크스나 레닌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실, 우리가 레닌학교와 공산대학에서 미처 배우지 못한 진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 속에 존재하는 어둠의 뿌리는 깊디깊더군요.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이 저지르는 폭력이나 도무지 바닥을 모를 탐욕 따위가 그 대표적 보기입니다. 제 노선만이 옳다고 부르대며 자기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 숱한 엄숙주의자들은 전장은 물론,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심지어 공산당 내부까지 모든 영역에 깊숙이 똬리 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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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보다 - 문과생도 과알못도 재미있게 읽는 기발하고 수상한 과학책 과학을 보다 1
김범준 외 지음, 김지원 그림 / 알파미디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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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이야기할 책은 <과학을 보다>라는 책이란다. 얼마 전에 유튜브 채널 보다에서 과학 관련 콘텐츠를 봤는데, 쉽게 잘 설명해 주는 것 같아서, 너희들도 같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특히 Shawn은 과학 관련된 책들도 재미있게 읽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 채널의 콘텐츠를 책으로 엮은 것도 있다는 알게 되었어. 이미 몇 년 전에 책으로 출간되었고, 최근에는 시리즈 3권까지 출간이 되었더구나. 너희들과 함께 볼 수 있는 교양과학 책이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이 책이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선 1, 2권을 주문했단다. 그리고 1권을 먼저 읽었단다. 글씨도 큼지막하고 그림도 잘 나와 있어서 쉽게 쉽게 읽을 수 있었어. 주제도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들이더구나. 아빠가 이미 알고 있던 내용들은 복습 차원에서 다시 한번 머릿속에 새길 수 있었고, 새롭게 알게 된 내용들도 좋았단다.

이 책의 지은이는 유튜브를 같이 진행하는 물리학자 김범준 교수님, 핵물리학자 서균열 교수님, 천문학자 지웅배 교수님, 그리고 진행을 맡은 정영진 님의 공저로 되어 있단다. 진행을 맡은 정영진 님이 과학에 관련된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관련 있는 분이 답변하는 식으로 되어 있단다. 모두 67가지의 질문이 있단다. 아무래도 유뷰트 콘텐츠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보니, 최근에 관심이 높은 과학 관련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어.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에 대한 질문도 있고, 영화 <테넷>에서 등장한 인버전이라는 기술에 대한 질문도 있고, AI에 관련된 질문 등 시의성을 띠는 이야기들이 있단다. 그리고 우주의 역사, 원자폭탄에 관한 이야기, 과학자들의 머릿속 등 궁금증으로 유발하는 질문들도 있었단다. 다양한 주제에, 쉬운 답변으로 너희들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

 

1.

아빠는 이 책에서 알게 된 몇 가지 사실만 전달해볼게. 너희도 학교에서 대기권이라는 것을 배우는데, 어디까지 대기권이냐고 물어본다면 지구의 중력이 미치는 데까지 대기권이라고 할 거야. 그런데 중력이라는 것이 불연속적인 것도 아니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데, 지구의 중력이 미치는 곳을 칼로 딱 자를 수가 없잖니. 그래서 이것을 두고 과거에도 과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대. 결론은 편한 숫자인 100km로 결정했다는구나. 싱겁지만 나쁘지 않은 결정 같아. 그 경계면의 이름은 카르만 라인이라고 하는데, 아빠도 처음 들어봤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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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7)

이 문제와 관련해 과거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구의 대기권은 정확하게 구분되는 경계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차츰차츰 대기의 밀도가 옅어질 뿐이니까요. 그래서 이 밀도의 변화에 따라 고도를 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대표적인 고도 100km 경계선인 카르만 라인(Karman Line)’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100km로 정했을까요? 그 이유가 일반인에게는 의외라고 여겨질 수 있는데요, 그냥 100이 딱 떨어지는 편한 숫자라는 것이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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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밀물과 썰물이 달과 지구 사이의 중력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너희들도 학교에서 배운 적 있지? 그런데, 달이 1년에 3.8cm씩 멀어지고 있다고 하는구나. 새롭게 알게 된 사실.. 1년에 3.8cm라면 긴 거리는 아니지만, 100년이면 3m 인데 괜찮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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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달은 1년마다 대략 3.8cm씩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재미있게도 지구에 있는 바다 때문입니다. 달은 거대한 중력으로 바닷물을 끌어당깁니다. 달이 가까워서 바닷물을 많이 끌어당기면 썰물이 되고 해변이 넓게 드러나죠. 반대로 달이 지구에서 멀어지면 중력이 약해져 바다가 평평해지면서 밀물이 되고 해변 끝까지 바닷물이 차오릅니다. 그 속도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어서 우리나라 서해안에서는 뻘에 있던 사람들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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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환경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대체 지구로 화성을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꾼다는 SF 소설이나 영화 등이 있단다. 그런데 있잖니화성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바꾸는 게 쉽겠니. 지구 사람들이 다같이 노력하여 지구를 잘 보호하고 사랑하는 것이 쉽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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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외계 행성을 지구화해서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꾸는 걸 테러포밍(Terraforming)’이라고 부르는데요. 일론 머스크처럼 핵폭탄을 이용하겠다는 것 말고도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있긴 합니다. 화성의 우주 궤도에 어마어마한 반사경을 올려 인간이 거주할 지역에만 햇빛을 집중적으로 쏜다거나 화성에 탄소가스를 내뿜는 공장을 대량으로 지어 온실 효과를 만들자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지금 현재 과학 기술로는 많은 한계가 있는 주장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이런 아이디어들을 실제 추진하는 데 필요한 예산을 생각하면, 현재 지구가 직면한 심각한 환경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각자가 환경을 보호하고 지구를 더 사랑한다면 굳이 화성에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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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 정도로 마칠게. 이 책은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책 내용이 쉽고 알차서 너희들도 한번 읽어보면 좋겠더구나. 재미있는 과학 상식을 쌓는 기회도 되고 말이야.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우주는 무한하다고 하는데 사실 끝이 없는 공간이라는 개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책의 끝 문장: 무속과 같은 민간 신앙은 그 자체로 문화로서는 존중할 필요가 있지만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진화 과정을 추론해봐도 왜 부정적 사건을 더 강하게 기억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원시 인류가 새로운 거주지에서 식용 가능한 식물을 찾는 과정을 떠올려봅시다. 낯선 열매들을 살펴보다가 먹어도 될 것 같은 외관을 가진 열매 하나를 따서 살짝 맛을 봅니다. 운 좋게도 달콤한 맛이 느껴집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도 따 먹을 수 있게 기억해둡니다. 그러다가 다른 열매의 맛을 봤는데 이번에는 쓴맛이 나며 혀가 얼얼해지고 복통에 시달립니다. 이번에도 다음번에 실수하지 않기 위해 기억에 남겨둡니다. 생존을 위해 어떤 기억을 더 오래 남겨둬야 할까요? - P140

물리학자 중에 암흑물질을 연구하는 리사 랜들이라는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이 물리학자가 <주기적 운석 충돌의 방아쇠로서 암흑물질>이라는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리사 랜들은 원반 형태의 우리 은하 근처에 거대한 암흑물질이 이중 원반을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우리 은하의 태양계를 포함한 모든 별은 수평으로만 원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회전목마처럼 위아래로 진동하면서 돌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한 번의 진동이 완성되는 데 총 주기가 6,000만 년입니다. 그러니까 딱 3,000만 년마다 위로 한 번 지나가고 아래로 한 번 지나가고 하는 거예요. - P208

핵융합은 다릅니다. 만약 인류가 핵융합 반응을 안정적인 환경에서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면, 음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말 그대로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최초로 불을 건네준 이후, 최대의 사건이 되겠죠. 핵융합의 원료인 중수소와 삼중수소는 우주에서 가장 흔한 물질로서 고갈될 염려가 없고 핵분열과 달리 부산되는 방사성물질이 적어 훨씬 안전합니다.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 영구적인 에너지원이 되겠죠. 이렇게 인류의 모든 에너지 문제가 해결된다고 상상해보세요. 도대체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저는 짐작이 잘 가지 않을 정도네요.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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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인기 있는 대중 신문들은 뉴스를 팔기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다시 말해 고통체의 먹이를 파는 것에 중점을 둔다. 커다란 활자의 헤드라인에서 폭력과 범죄의 단어들이 난무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영국의 황색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이 점에서 탁월하다. 뉴스를 싣기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부채질하는 편이 신문 판매에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그 관계자들은 잘 알고 있다. 텔레비전을 포함한 뉴스 매체 전체가 부정적인 뉴스를 먹고 사는 경향이 있다. 사태가 악화되면 될수록 아나운서와 사회자는 더 흥분하고, 언론 매체 자체가 종종 부정적인 흥분을 부채질한다. 고통체들은 그것을 매우 좋아한다.


(213)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얼굴을 세상에 보여주려고 하든 관계없이, 당신의 마음 상태와 감정 상태를 숨길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의 내면 상태에 해당하는 에너지 장을 내뿜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록 무의식적으로만 느낄는지 몰라도 상대방이 내뿜는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것을 감지하지만, 상대방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그것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매우 분명하게 그것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잠시 후에는 말과 언어들이 그 관계를 점령하고, 말과 함께 그들이 연기하는 역할들이 등장한다. 그렇게 되면 관심이 생각의 영역으로 옮겨 가서, 상대방의 에너지 장을 감지하는 능력을 급격히 줄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의식 차원에서는 여전히 느낀다.


(223)

아이가 고통체의 공격을 받는 동안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순간에 깨어 있으면서 감정적인 반응에 말려들지 않도록 하는 것 외에는 별로 없다. 아이의 고통체는 감정적인 반응을 먹고 더 커질 것이다. 고통체들은 매우 극단적으로 드라마틱하다. 그러므로 그 드라마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원하는 것을 방해받아 고통체가 활성화된 경우에는 아이의 요구에 불복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내가 더 불행해질수록 갖고 싶은 것을 더 많이 얻게 된다.’는 것을 배운다. 이것은 훗날 삶의 기능장애를 초래한다. 당신의 무반응에 아이의 고통체는 좌절하고 잠시 후 더욱 격렬해질지 모르지만 머지않아 진정된다. 다행히 아이들의 고통체는 어른보다 대개 활동 시간이 짧다.


(235)

고통체에 사로잡힐 때마다, 그리고 고통체를 고통체로 알아볼 수 없을 때마다 고통체가 당신 에고의 일부가 된다. 당신이 동일화되는 대상은 무엇이든 에고로 바뀐다. 고통체는 에고가 동일화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것 중 하나이며, 고통체 또한 먹이를 얻고 자신을 재생시키기 위해 에고를 필요를 한다. 그러나 이 불건강한 동맹 관계는 이윽고 고통체가 너무 무거워져서 에고의 마음 구조로는 견딜 수 없을 때 끝장이 난다. 에고는 고통체에 의해 강화되기는커녕 그 강한 에너지의 맹공격에 손상된다. 전기 기구가 전류에 의해 힘을 얻고 작동하지만, 전압이 너무 높아지면 파괴되는 것과 같다.


(250)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내용물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의 내린다. 지각하고, 경험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이 내용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내용물이 관심을 완전히 차지해 버리며, 그들이 동일화되는 것이 그것이다. ‘나의 삶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인 삶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혹은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내용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정신 상태와 감정 상태는 물론 나이, 건강, 관계, 경제력, , 생활환경 등을. 사건들, 즉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마찬가지로 당신 삶의 외부 환경과 마음의 환경, 당신의 과거와 미래 모두가 이 내용물의 영역에 속한다.


(256)

일어나는 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의 내면이 일어나는 일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일어나는 일이란 물론 이 순간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은 이미 그러하게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일어나는 일은 내용물, 즉 이 순간이 취하는 형태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존재하는 순간은 이 순간뿐이다. 이 순간의 있는 그대로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내면적으로 무저항의 상태라는 뜻이다. 마음속에서 좋다거나 나쁘다는 분류표를 붙이지 않고 그것이 있는 그대로 있게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삶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지금이라는 순간과의 내적인 조화를 기초로 행동할 때 그 행동에는 삶 그 자체의 지성의 힘이 작용한다.


(263)

현재의 순간은 표면적으로는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일어나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삶의 매일매일은 서로 다른 일들이 일어나는 수많은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은 순간들의 끝없는 연속이고, 그 순간에는 좋은순간도 있고 나쁜순간도 있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잘 관찰해 보면, 즉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보면, 그렇게 많은 순간들이 있는 것이 전혀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이다. 삶은 언제나 지금이다. 당신 삶의 모든 것이 이 끝없는 지금에서 펼쳐지고 있다. 과거나 미래의 순간들도 당신이 기억하거나 기대할 때만 존재하며, 그것도 유일하게 존재하는 순간인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그것들에 대해 생각할 때 가능하다.


(270)

누구나의 삶에는 형상 차원에서의 성장과 확장을 추구하는 시기가 있다. 신체적인 허약함과 금전적인 부족 같은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때이며,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획득하거나 창조적인 활동을 통해 자신을 위해서도 타인을 위해서도 삶의 질을 높이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이 세상에 가져오는 시기이다. 그것은 음악이나 미술 작품일 수도 있고, 책이 될 수도 있으며, 당신이 제공하는 서비스와 수행하는 기능, 세상에 결정적 기여를 하는 사업체나 조직이 될 수도 있다.


(279)

눈이 아무것도 볼 것이 없을 때, 아무것도 없음이 공간으로 지각된다. 귀가 아무것도 들을 것이 없을 때, 그 아무것도 없음이 고요로 인식된다. 형상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진 감각들이 형상의 부재를 만났을 때, 감각적 인식 뒤에서 모든 인식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 없는 의식은 더 이상 형상에 의해 흐려지지 않는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우주 공간을 명상 속에 응시하거나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 이른 새벽의 고요에 귀를 기울일 때, 당신 안에서 무엇인가가 서로를 알아본 것처럼 그것과 공명한다. 그러면 당신은 공간의 무한한 깊이를 자신의 깊이로 감지하고, 형상 없는 소중한 고요가 당신 삶의 내용물을 채우고 있는 그 어떤 사물이나 사건들보다 훨씬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287)

형상과 더 이상 완전히 동일화되지 않을 때, 진정한 당신인 의식은 형상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 자유는 내적 공간의 등장이다. 설명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이 공간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나의 고요, 알아차리기 힘든 평화로 다가온다. 겉으로 보기에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할 때조차도 그 고요와 평화가 그곳에 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일어나는 사건들 주위에 갑자기 공간이 생겨난다. 또한 오르내리는 감정 주위에도, 심지어 고통 주위에도 공간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생각 주변에 공간이 생겨난다. 그 공간으로부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평화가 발산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형상이고, 그 평화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의 평화이다.


(292)

그렇다면 텔레비전 시청이 내적 공간을 가져다주는가? 그럼으로써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는가?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당신의 마음은 오랜 시간 어떤 생각도 만들어 내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대신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사고 활동과 연결되어 있다. 텔레비전 속의 집단 무의식과 연결되어 그 생각을 생각하고 있다. 생각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만 마음이 활동을 정지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텔레비전 화면으로부터 생각과 이미지를 끊임없이 흡수하고 있다. 이것은 최면 상태와 다르지 않게, 넋을 잃은 상태에서의 수동적인 깨어 있음이다. 그래서 텔레비전이 여론조작에 이용되는 것이다. 텔레비전이 사람을 멍청하게 하는 수동 상태를 만들 수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 때문에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당신에게 심으려고 하며 대부분은 성공한다.


(294-295)

오랫동안 텔레비전을 보면 무의식적이 될 뿐 아니라 수동적이 되고 에너지가 고갈된다. 그러므로 무작위적으로 시청하는 대신 프로그램을 선택해야 한다. 때로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자기 몸 안의 생명력을 느끼는 것이 좋다. 혹은 때로는 자신의 호흡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시각이 완전히 텔레비전에 점령되지 않도록 때때로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어야 한다. 청각이 압도되지 않도록 음량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 하지 않는다. 상업 광고시간에는 음을 소거한다. 또한 텔레비전을 끄자마자 잠들지 않는 것이 좋다. 켜 놓은 채 자는 것은 더 나쁘다.


(296)

만약 낮 동안의 삶을 불만, 불안, 걱정, 우울, 절망, 그 밖의 부정적인 상태로 보내지 않을 수 있다면, 만약 빗소리나 바람소리를 듣는 일 같은 단순한 일들을 즐길 수 있다면, 만약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거나, 때로는 오락과 같은 정신적인 자극을 필요로 하지 않고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고 홀로 있을 수 있다면, 만약 완전히 낯선 사람을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마음에서 우러난 친절로 대할 수 있다면, 그때 평소 같으면 끊임없는 생각의 흐름에 점령당하고 있을 마음에 짧은 순간이긴 해도 순수 공간이 열린다. 비록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것일지라도 생생한 평화와 행복이 느껴진다. 그 평화와 행복의 느낌은, 거의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만족감에서부터 고대 인도의 현자들이 아난다라고 부른 존재의 지복 상태까지 다양할 것이다. 오직 형상에만 관심을 향하도록 조건 지어져 있으면 간접적으로밖에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단순한 것들의 가치를 알고, 혼자 있는 즐거워하고, 애정을 가지고 친절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능력 속에는 공통된 요소가 있다. 이 공통된 요소는 배후에서 이것들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충만감, 평화, 그리고 생동감이다.


(298)

더할 나위 없이 작은 것최고의 행복에 이르게 해 주는가? 왜냐하면 사실 진정한 행복은 사물이나 사건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처음에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사물이나 사건이 지극히 미묘하고 지나치게 야단스럽지 않으면, 그것들은 당신의 의식의 작은 부분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머지는 내적 공간이, 즉 형상에 의해 가로막히지 않은 의식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내면의 의식 공간과 당신의 본질은 하나이며 같다.


(308-309)

자신의 호흡을 의식해 보라. 호흡의 감촉에 주목하라. 공기가 움직이면서 몸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느껴 보라. 들숨과 날숨과 더불어 가슴과 배가 조금 팽창했다가 수축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 번의 의식적인 호흡만으로도 그 전까지 생각에서 생각으로 방해받지 않은 연속적인 흐름이 이어지던 자리에 약간의 공간을 만들기에 충분하다. 한 번의 의식적인 호흡을, 두세 번이라면 더욱 좋지만, 하루에 가능한 한 여러 번 반복한다. 이것은 당신의 삶에 내적 공간을 만드는 훌륭한 방법이다. 설령 어떤 사람들이 하듯이 두 시간 이상씩 호흡 명상을 할지라도, 한 번의 호흡이 당신이 알아차릴 필요가 있는 전부이며, 당신이 진정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전부이다. 나머지는 기억과 기대이다. , 생각이다. 사실 호흡은 당신이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어남이고, 당신은 그것을 관찰할 뿐이다. 호흡은 저절로 일어난다. 몸 안의 지성이 그 일을 하고 있다. 강신이 해야만 하는 것이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다. 긴장도 노력도 개입하지 않는다. 또한 호흡 사이의 짧은 멈춤을 주목하라. 특히 숨을 다 내쉬고 난 뒤 다시 들이쉬기 전의 고요한 지점을.


(310)

호흡의 자각은 당신을 현재의 순간으로 오게 한다. 이것이 모든 내적 변화의 열쇠이다. 호흡을 의식할 때마다 당신은 절대적으로 현재의 순간에 존재한다. 또한 생각하는 동시에 호흡을 알아차릴 수는 없음을 당신은 눈치챌지 모른다. 호흡에 의식을 집중하면 마음의 활동이 정지된다. 그러나 이것은 최면에 걸리거나 반쯤 조는 상태와는 매우 다르며, 당신은 완전히 깨어 있고 고도로 민감하다. 생각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완전히 현재의 순간 속으로 들어오는 것과 의식의 잃음 없이 생각을 멈추는 이 두 가지가 사실은 하나이며 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공간 의식이 등장한 것이다.


(316)

생각과 단어는 형상의 세계에 속한다. 그것들은 형상 없음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나는 나의 내부의 몸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생각이 만들어 낸 오해이다. 실제로 일어난 것은 육체로 나타난 의식, 나는 있다.’고 하는 의식이 그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신과 일시적인 형상인 를 혼동하지 않으면, 그 무한하고 영원한 것, 즉 신의 차원이 를 통해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고 를 인도할 수 있다. 또한 형상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준다. 그러나 나는 이 형상이 아니다.’라고 머리로만 인식하거나 믿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내적 공간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가?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이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현존,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있음인 현존을 감지할 수 있는가?


(332-333)

예를 들어, 아이를 키우는 것이 당신의 삶에 의미를 준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아이가 더 이상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거나 혹은 당신 말에 더 이상 귀 기울지 않는다면 그 의미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만약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이 당신의 삶에 의미를 준다면, 당신의 삶이 계속 의미 있는 것이 되고 스스로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기 위해서는 당신보다 상황이 나빠지는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일에 뛰어나거나 승리하거나 성공하려는 욕망이 당신에게 의미를 준다면, 결코 승리하지 못하거나 어느 날 연속적인 성공이 막을 내린다면 어떻게 됩니까? 언젠가는 분명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상상이나 기억에 의존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곳은 당신의 삶에 무미건조한 의미만을 가져다주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장소입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이 의미가 있는 것은 다른 수백 수천만 명이 실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삶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실패가 필요하게 됩니다.


(339)

일터에서나 어디에서든 사람들과 만날 때 상대방에게 모든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당신은 개인으로서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의 장으로서, 깨어 있는 현존으로서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애초의 이유, 즉 물건 사고팔기와 정보 교류 등은 이차원적인 것이 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알아차림의 장, 그것이 만남과 교류의 첫째 목적이 됩니다. 그 알아차림의 공간이 당신들이 나누는 대화보다 더 중요하고, 물질적인 대상이 할 필요가 있는 일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실 순수한 있음의 차원을 알고 그것이 주된 것이 되었을 때, 행동은 더 쉬워지고 더 강력해집니다. 새로운 지구에서는 인간 존재들 사이에 그 알아차림의 통일장이 나타나나는 것이 관계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341)

당신이 사업가라고 합시다. 2년 동안 스트레스와 긴장을 힘들게 견뎌 내어 마침내 잘 팔리는 상품이나 일의 결과를 갖게 되고 돈도 벌게 됩니다. 이것은 성공인가요?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말로는 성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2년 동안 자신의 몸뿐 아니라 지구도 부정적인 에너지로 오염시켰습니다.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으며, 만난 적도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 행동 배후에 있는 무의식적인 가정은, 성공은 미래의 일이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적과 수단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만약 수단이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과는 거기에 도달하는 행동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행동에 의해 이미 오염되었다면 미래의 더 많은 불행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이것은 업을 쌓는 행위로, 불행을 무의식적으로 지속시킵니다.


(349)

자연은 무의식중에 전체와 하나가 된 상태로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2004년 쓰나미 재난(30만 명의 사망자를 낳은 동남아시아의 지진 해일)에서도 야생동물에게는 사실상 피해가 없었던 이유가 그것입니다. 인간들보다는 전체성과 더 많이 접촉하고 있기 때문에 동물들은 보거나 듣기 훨씬 전에 쓰나미의 접근을 감지할 수 있었고 더 높은 지역으로 이동했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러저러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마음이 실체를 분해하는 방식입니다. 반면에 자연은 전체와의 무의식적인 하나됨 속에서 살아갑니다. 전체와 의식적으로 하나가 되고, 우주의 지성과 의식적인 일치를 이룸으로써 이 세상 속으로 새로운 차원을 가져오는 것, 그것이 인간의 목적이자 운명입니다.


(354)

상대적인 진리와 절대적인 진리의 예로서 일출과 일몰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고 저녁에 태양이 진다고 말할 때 그것은 진리이지만 오직 상대적으로만 진리이다. 절대적인 관점에서는 틀린 말이다. 땅 위나 지표면에 가까운 장소에서 관찰하는 사람의 제한된 시야에서는 태양은 떠오르거나 진다. 그러나 우주로 나가면 태양은 뜨는 것도 지는 것도 아니고 항상 빛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안다고 해도,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인 진리임을 알고 있어도, 우리는 일출이라고 말하고 일몰이라고 말하며, 여전히 그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쓸 수 있다.


(358)

죽음은 단지 추상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형상의 소멸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는 충격을 받고 이해할 수 없으며 절망하고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제 모든 것이 의미가 없으며 절망하고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제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동안 삶이 그들을 위해 가지고 있던 모든 의미와 목적은 축적, 성공, 세움, 보호, 그리고 감각적인 만족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외부적인 운동이고 형상과의 동일화, 즉 에고와 관계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과 그들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을 때 그것으로부터 어떤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외부적인 운동보다도 더 깊은 의미가 잠재되어 있다.


(361)

한 개인의 삶에서 에고가 회귀 운동과 자신을 더 이상 동일시하지 않으면 늙음이나 다가오는 죽음은 본래의 의미를 되찾는다. 영적 차원으로의 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노인들을 만나 보았다. 그들은 늙어 가면서도 빛이 나고 있었다. 그들의 쇠약해져 가는 형상들은 투명해져서 의식의 빛이 비쳐 나오고 있었다.


(365)

의식은 형상의 일어남 뒤에 있는 지성, 즉 조직화 원리이다. 의식은 형상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수백만 년 동안 그 형상들을 준비해 왔다.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의식의 영역은 다른 차원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우주라는 형상의 차원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형상의 세계와 형상 없는 세계는 서로 스며들어 있다.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알아차림, 내적 공간, ‘현존으로서 이 차원 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의식이 깨어 있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완성하는 인간 형상을 통해서이다. 이 높은 목적을 위해 인간이라는 형상이 창조되었으며, 수백만의 다른 형상들이 그것을 위한 토대를 준비해 왔다.


(366-367)

인간의 뇌는 고도로 차별화된 형상이며, 이 형상을 통해 의식이 이 세상의 차원으로 들어온다. 인간의 뇌에는 뉴런이란 불리는 약 천억 개의 신경 세포가 있다. 이것은 우주의 뇌라고 볼 수 있는 은하계에 있는 별들의 숫자와 같다. 뇌가 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그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지구에서 가장 복잡한 물질 형태인 뇌를 만들어 낸 것이다. 뇌가 손상되었다고 해서 의식을 잃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식이 이 형상 차원으로 들어오기 위해 그 뇌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당신은 의식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의식은 본질적으로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오직 자신이 소유한 것만을 잃을 수 있을 뿐이며, 당신 자신인 것을 잃을 수는 없다.


(369-370)

깨어 있는 행동의 세 가지 방식은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이다. 각각은 의식의 특정한 진동 주파수를 대표한다. 가장 단순한 일부터 매우 복잡한 일까지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그 셋 중 하나가 작동하도록 특별히 깨어 있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의 어느 상태에도 있지 않다면, 자세히 살펴보면 당신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374)

삶의 주된 목적은 의식의 빛을 이 세상 속으로 가지고 오는 것임을 깨닫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의식을 위한 매개체로 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새로운 지구가 탄생한다.


(377)

스트레스와 달리 열정은 에너지 진동 주파수가 높기 때문에 우주의 창조적 힘과 공명한다. 랄프 왈도 에머슨이 열정 없이는 어떤 위대한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한 이유이다. 열정(enthusiasm)이라는 단어는 고대 희랍어의 을 뜻하는 (en)’을 의미하는 테오스(theos)’에서 유래한 말이다.(‘내재하는 신a Good within, 내 안에 신을 둔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단어 엔토우시아제인(enthousiazein, 신적 영감 상태)신에 사로잡힌의 의미이다. 열정에 불타고 있을 때는 자기 혼자서 모든 것을 해야만 할 필요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열정은 창조적 에너지의 물결을 불러들이기 때문에 당신은 다만 그 물결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380)

그 대신, 목표는 반드시 역동적이어야 한다.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활동을 통해 다른 인간 존재들뿐 아니라 전체와 연결될 수 있는 일에 초점을 향해야 한다. 유명한 배우나 작가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보는 대신, 자신의 작품을 통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보아야 한다. 그 활동이 자기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고 깊어지게 하는가를 느껴야 한다. 자신은 하나의 문이며,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모든 생명의 원천에서 나온 에너지가 그 문을 통해 모두를 위해 흘러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384)

미래의 사건으로서의 깨어남은 아무 의미가 없다. 깨어남은 현존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하늘, 즉 깨어난 의식은 미래에 성취해야 할 상태가 아니다.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은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당시의 머릿속에 있는 하나의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했는가?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 너희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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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말은 실체를 인간 마음이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축소시킨다. 언어는 성대에 의해 생성되는 다섯 개의 기본적인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은 , , , , 의 다섯 가지 모음이다. 나머지 소리들은 공기 압력 조절을 통해 만들어지는 , , 등의 자음들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음의 몇 가지 조합만으로 당신이 누구인지, 우주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아니면 한 그루의 나무나 돌멩이 하나에 대해서라도 그 깊은 곳에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말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가?

 

(66)

그러나 만약 우리가 사물들을 자아 강화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즉 사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실제로는 사물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에고가 하는 일이 정확히 그것이다. 에고가 사물과 동일화되면 사물에 대한 집착과 강박관념이 생겨나고, 그것으로부터 우리의 소비 사회와 경제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곳에서는 발전의 유일한 측정 기분이 언제나 더 많이이다. ‘더 많이와 끝없는 성장을 위한 이 억제되지 않는 분투 노력은 하나의 기능장애이고 질병이다. 자기를 증식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이고, 실제로는 자신이 그 일부인 전체 조직체를 파괴해 결국 자신도 파괴되는 결과가 됨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암세포의 기능 장애와 똑같다. 경제 전문가들 중에는 성장이라는 개념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어떻게든 그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 경기 후퇴를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76)

어떻게 하면 물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그런 것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결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물질에 대한 집착은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그때까지는 자신이 물질에 집착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때로는 어떤 것을 잃거나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그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즉 자신이 그것에 동일화되어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있다. 잃어버릴까 봐 화를 내거나 불안해한다면 당신이 그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자신이 물질과 동일화되어 있음을 알아차리면 그 동일화는 더 이상 완전하지 않다. ‘집착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그 알아차림이 바로 나 자신이다.’ 그것이 의식 변화의 시작이다.

 

(84-85)

내부의 몸은 사실은 육체가 아니고 생명 에너지이며, 형상과 형상 없음 사이의 다리이다. 가능한 한 자주 내부의 몸을 느끼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얼마 후면 눈을 감지 않아도 느낄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내부의 몸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내부의 몸을 느낄 수 있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내부의 몸과 접촉하고 있을 때 사실은 더 이상 육체와 동일화되지 않으며 자신의 마음과도 동일화되지 않는다. , 더 이상 형상과 동일화되지 않고 형상과의 동일화로부터 멀어져서 형상 없음으로 향해 간다. 이 형상 없음을 우리는 존재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것이 당신 정체성의 핵심이다. 몸에 대한 그 알아차림은 당신을 지금 이 순간에 닻에 내리게 할 뿐 아니라, 에고라는 감옥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출구가 된다. 이것은 면역 체계와 신체의 자연 치유력도 강화시켜 준다.

 

(101-102)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만큼 에고를 더 강화시켜 주는 것은 없다. 옳다는 것은 하나의 관점, 의견, 판단, 이야기 등과 같은 정신적 입장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옳기 위해서는 당연히 틀린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에고는 옳기 위해 누군가를 틀리게 만들기를 매우 좋아한다. 바꿔 말해, 자신의 더 강한 자아의식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틀리게 만들 필요가 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상황도 불만과 반응을 통해 틀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이런 일은 일어나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는 주장은, 잘못되거나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과 상황에 대해 자신을 상상 속에서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올려놓는다. 에고가 갈망하는 것이 그 우월감이며, 그것을 통해 에고는 자신을 강화시킨다.

 

(117)

에고의 밑바탕에서 모든 행동을 지배하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존재하지 않게 될 것 같은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이다. 결국 에고의 모든 행동은 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하지만 에고는 기껏해야 가까운 관계, 새로운 소유물, 혹은 이런저런 성취들로 일시적으로 이 두려움을 덮여 버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 환상은 결코 당신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오직 나는 누구인가의 진리만이, 만약 당신이 그것을 깨닫는다면, 그것만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125)

소심함은 종종 눈에 띄게 부정적인 자아의식, 즉 자신에게 무엇인가 많이 부족하다는 믿음과 함께한다. 자기 자신을 이러저러하게 보는 관념 속 자아의식은 내가 최고야.’라는 식의 두드러지게 긍정적이든, 아니면 나는 형편없어.’라는 식의 부정적이든, 어느 쪽이든 에고이다. 모든 긍정적인 자아의식 뒤에는 그럼에도 아직 충분히 좋지 않다는 불안이 숨어 있다. 모든 부정적인 자아의식 뒤에는 최고가 되고 싶고 다른 사람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욕구가 숨어 있다.

 

(142-143)

어린 자식이 있다면 최선의 능력을 다해 돕고 지도하고 보호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공간을 허용하는 일이다. 존재할 공간을, 아이는 당신을 통해 이 세상에 왔지만 당신의 것이 아니다. ‘무엇이 너를 위해 가장 좋은지 내가 잘 안다라는 믿음은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는 진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가 커 갈수록 그것은 점점 더 진실이 아니게 된다. 아이의 삶이 어떻게 펼쳐져야만 하는가에 대해 기대가 크면 클수록, 당신은 아이를 위해 이 순간에 존재하기보다는 당신의 생각 속에 더 많이 사로잡혀 있게 된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아이도 언젠가는 실수를 저지를 것이고 어떤 형태로든 고통을 경험할 것이다. 사실 그것들은 당신의 관점에서 볼 때만 실수일지도 모른다. 당신에게는 실수로 보여도 아이에게는 꼭 필요한 행동과 경험일 수도 있다. 가능한 한 도움과 조전은 주어야 하지만, 특히 이제 막 성인이 된 아이는 때때로 실수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고통을 겪게 해주어야만 할지도 모른다. 고통은 뜻밖에 찾아올 수도 있고, 지신이 저지른 실수의 결과로 올 수도 있다.

 

(148)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 안데 있는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때 그 다른 사람의 다름은 순전히 인간적인 영역, 형상의 영역에만 존재하는 환상임이 밝혀진다. 모든 아이 안에 있는 사랑에 대한 갈망은 형상 차원뿐 아니라 존재 차원에서도 부모가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갈망이다. 부모가 인간 차원에서만 아이를 존중하고 존재 차원을 하다면, 아이는 그 관계가 불충분하며 절대적으로 중요한 무엇인가가 빠져 있다고 감지할 것이다. 아이의 내면에 고통이 쌓이고, 때로는 무의식중에 부모를 원망할 것이다. “왜 나를 알아봐 주지 않는 거야?” 아이의 고통과 원망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52-153)

에고는 왜 역할을 연기하는가? 제대로 조사해 보지도 않은 한 가지 가정, 한 가지 근본적인 오류. 한 가지 무의식적인 생각 때문이야. 그 생각은 나는 충분하지 않다.’라는 것이다. 이 생각으로부터 다른 무의식적인 생각들이 뒤따른다. ‘나는 충분한 자신이 되는 데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역할을 연기할 필요가 있어.’ ‘더 많이 존재하기 위해 더 많이 얻을 필요가 있어.’ 그러나 당신은 당신인 것보다 더 많이 당신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육체적 심리적 형상 밑바탕에서 당신은 생명그 자체, ‘존재그 자체와 하나이기 때문이다. 형상 곳에서는 당신은 언제나 어떤 사람보다 열등하고 어떤 사람보다 우월할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본질 속에서는 당신은 누구보다 열등하지도 않고 우월하지도 않다. 진정한 자존과 진정한 겸손은 이 깨달음으로부터 생겨난다. 에고의 눈으로 보면 자손과 겸손은 대립적이다. 진리 속에서는 그 둘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159)

어떻게 하면 지금 평화로울 수 있는가?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은 삶의 놀이가 일어나고 있는 장이다. 삶의 놀이는 다른 곳에서 펼쳐질 수 없다.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면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라. 자신에게 무엇이 가능한지, 어떤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삶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하는지를, 삶의 예술에 대한 비밀, 모든 성공과 행복의 비밀을 전하는 세 단어가 있다. ‘삶과 하나가 되기이다.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은 현재의 순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자신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당신을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삶은 춤추는 자이고, 당신은 그 춤이다.

 

(186-187)

우리는 길을 잃어버린 종이다. 자연 속 모든 존재들, 모든 꽃과 나무, 모든 동물들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준다. 우리가 멈춰 서서 바라보고, 귀를 기울이면 들을 수 있다. 오리가 가르쳐 주는 교훈은 이것이다. “날개를 털어라.” 그것을 해석하면 이야기를 내려놓으라.”이다. 그리고 힘을 가진 유일한 장소로, 현재의 순간으로 돌아오라.

 

(188)

과거의 사건들은 기억으로 당신 안에서 계속 살아가지만, 그 기억 자체는 문제가 안 된다. 그뿐 아니라 기억 덕분에 과거로부터, 그리고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움을 얻을 수 있다. 기억, 즉 과거에 대한 생각에 당신이 완전이 지배되고 그것이 짐으로 바뀔 때 비로소 기억이 문제가 된다. 또한 그것이 당신의 자아의식의 일부가 될 때, 과거에 의해 조건 지어진 성격이 당신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 당신의 기억들에 자아의식의 옷이 입혀지고, 당신의 이야기는 당신이 생각하는 가 되어 버린다. 작은 나는 환상이며, 시간을 초월하고 형상을 초월한 현존으로서의 진정한 정체성을 흐려 버린다.

 

(191-192)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신생아는 이미 감정적 고통체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무겁고 단단한 고통체를 가지고 있는 아이도 있다. 언제나 행복한 듯한 아이도 있고, 큰 불행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도 있다. 충분한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잘 우는 아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특별히 이렇다 할 이유가 없는데도 마치 주변 사람을 자신처럼 불행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은 아이도 있다. 그리고 종종 그것이 성공한다. 이러한 아이는 인류 고통의 짐을 특히 많이 가지고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발산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잘 우는 아이도 있다. 부모의 부정적인 감정이 아이에게 고통을 주고, 부모의 고통체로부터 나오는 에너지를 흡수해 아기의 고통체가 커진다. 어느 경우든 아이의 신체가 자라남에 따라 고통체도 함께 커간다.

 

(195-196)

세상 만물은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서 진동하는 에너지 장이다. 당신이 앉아 있는 의자, 손에 들고 있는 책은 견고하고 움직임이 없는 물질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단지 당신의 감각기관들이 그 진동하는 주파수를 그런 식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물질은 의자든 책이든 나무든 몸이든 끊임없이 진동하는 분자, 원자, 전자, 그리고 미립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물질로 지각하는 것은 특정한 주파수 영역에서 진동하는, 혹은 움직이는 에너지이다. 생각도 역시 똑같이 에너지 진동이지만 주파수가 물질보다 높기 때문에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 생각에는 생각만의 주파수대가 있는데, 부정적인 생각은 더 낮은 쪽 주파수로, 긍정적인 생각은 더 높은 쪽 주파수로 진동한다. 고통체의 진동 주파수는 부정적인 생각의 주파수와 공명한다.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만이 고통체의 먹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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