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 (양장)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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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Jiny 가 학원에서 읽어야 한다면서 책목록을 보여주었단다. 그 목록에 이희영 님의 <페인트>이 있었단다. 이 책은 예전부터 인터넷 서점에서 많이 노출이 되어서 책 제목과 책 표지는 이미 알고 있던 책이었어. 책 제목과 책 표지만으로는 무슨 내용인지 가늠이 안 되었단다. 왜 제목이 페인트일까? 궁금했지. 이 궁금증은 우리 식구들 모두의 궁금증이었지.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아빠가 가장 먼저 읽어 보았단다. 그리고 그 궁금증을 해결했단다. ㅎㅎ Jiny도 아빠 다음으로 이 책을 읽었으니 이제 그 궁금증이 해결되었겠구나.

너희 같은 학생들에게 추천을 해주어서, 이 책에 교훈적인 내용도 담겼나? 하는 생각도 하면서 책을 펼쳤단다. 책 소개를 전혀 읽지 않고 읽기 시작했는데, SF 소설이더구나. , 아빠가 SF 소설은 좋아하니 더 반가웠단다. 책이 그리 두껍지 않아서 휘리릭 읽었단다. Jiny는 이미 책 내용을 알고 있을 테니, 아빠의 기억력을 백업한다는 생각으로 줄거리에 충실하게 적어보련다.


1.

가까운 미래인데, 먼 미래인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 속의 시대에는 아이들의 양육을 포기한 부모들을 위해서 나라에서 체계적으로 아이를 양육해주는 NC센터가 있었단다. NC Nation’s Children의 약자였어. 그리고 아이를 낳고 양육을 포기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했어. 그래야 양육 문제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가 줄어들고, 그로 인해 떨어지는 출생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 같구나. 아이들을 낳아본 아빠로서는, 미래가 되었다고 해서 엄마, 아빠의 아이들을 사랑하는 본능이 쉽게 바뀔 것 같지가 않더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양육 포기하는 것이 자연스런 사회가 되어도, 양육 포기를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는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야.

아무튼, NC센터는 국가에서 아이들을 키워주는 그런 단체였고, NC 센터는 나이에 따라 퍼스트 센터, 세컨드 센터, 라스트 센터로 구분되어 있었어. 마지막 라스트 센터는 13살부터 19살까지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 면접을 통해서 부모를 선택할 수 있었단다. 이것이 오늘날 입양 시스템과 좀 다른 것이란다. 오늘날 입양은 부모가 될 사람이 아이를 선택하게 보통인데, NC 센터에서는 입양하고 싶은 사람들을 아이가 면접을 여러 번에 걸쳐서 하고 나중에 최종적으로 결정을 하게 되면 그때 NC 센터에서 나가 자신의 선택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거야.

NC 센터의 아이들을 입양한 부모에게는 나라에서 여러 가지 혜택을 주기도 해. 이렇게 센터의 아이들이 부모를 면접하는 것을 부모 면접(Parent’s Interview)이라고 하고, 부모 면접을 영어로 한 페어런츠 인터뷰를 줄여서 부르다 보면 페인트와 발음이 비슷해서 아이들 사이에 부모 면접을 은어로 페인트라고 불렀단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페인트가 된 것이란다.

센터에서 아이들을 보호해 주는 어른을 가디언이라고 하고, 줄여서 가디라고 한단다. 그리고 센터의 아이들은 입양이 되어 센터를 떠나기로 확정되면 이름을 갖게 되고 그 이전에는 자신이 태어난 달의 영어 이름을 줄인 것에 숫자를 붙여서 부른단다. 주인공은 1월에 태어나서 제누301’이라고 불렀어. 제누301 17살로 센터 안에서는 꽤 나이가 많은 편이었단다. 19살까지 부모를 만나지 못하면 NC에서 나가서 혼자 살아야 하는데, 이 경우 암암리에 NC센터 출신이라는 차별을 받게 된다고 하더구나. 센터장 박씨와 가디 최씨는 제누301 19살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부모를 만나게 해주려고 노력을 했단다. 센터장 박씨는 센터를 위해서 참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었어. 자신의 일보다 센터의 일이 늘 먼저였어.


2.

보통 NC 센터에 아이를 입양하려는 부부는 준비를 많이 해 온단다. 아이의 면접을 받는 대상이 부부들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어느 날 젊은 30대 부부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센터에 들렀단다. 서하나, 이해오름이라는 부부인데 그들의 자세부터 부모가 되려는데 별 관심이 없어 보였어. 그저 국가에서 주는 혜택을 받으려고 온 사람들인 것 같아서 가디들은 그 부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다른 준비를 많이 한 사람들과 달리 솔직함이 좋다면서 제누301은 그들을 면접하겠다고 했단다.

면접을 하면 할수록 그들의 솔직함에 면접은 3차까지 이어졌단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제누301은 입양을 거부했단다. 서하나, 이해오름 부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니야. 제누301은 이곳 NC센터에 더 배울 것이 있다고 했어. 마지막 19살 때까지 NC센터에서 배우고 이 곳을 나가서 혼자 세상에 부딪혀 보겠다고 했어. 그런 점을 마지막 면접 때 서하나에게 이야기를 했고, 서하나도 제누301의 진심을 이해해 주었단다. 그리고 NC센터를 졸업하게 되면 찾아오라고 진심으로 이야기했단다. 그러면서 부모와 자식 관계가 아니고 친구가 되자고 했단다.

제누301인 센터장인 박씨를 만나러 갔어.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어. 센터장님을 비롯하여 가디님들과 함께 19살까지 센터에 머무르면서 공부하고 배우겠다고 했어. 그리고 NC센터 출신의 차별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당당히 차별을 없애는데 노력하겠다고 했단다. 제누301을 각별하게 생각했던 센터장님도 제누301의 진심을 받아주었단다. 그래서 제누301은 센터에 남기로 했단다. 아빠 생각에 제누301 19살에 되어 NC센터를 졸업을 하게 되더라도 NC센터에 가디로 취업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러면서 NC센터 출신의 받는 차별을 깨려는 사회운동도 함께 말이야. 센터장 박씨와 다른 가디들도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 같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니?

이 읽은 사람들의 서평에 나는 몇 점 부모일까?’라고 자문을 많이 하는 모양이구나. 아빠는 그런 자문은 별로라고 생각해. 부모 자식 간을 무슨 점수로 매기니. 정답 없는 사이, 아니 모든 것이 정답인 사이인데 말이야. 식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너희들이 아빠의 아이들이라서 아빠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 되었단다.


PS,

책의 첫 문장: 두 사람은 홀로그램 속 모습과 약간 달라 보였다.

책의 끝 문장: 열여덟, 아직 태어나지 않은 껑충한 아기가 성큼 계단 위로 올라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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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우리가 태어나는 이유는 세 가지 때문이다.

1. 배우기 위해

2. 경험하기 위해

3.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23-24)

지금처럼 계속 미래에 관심을 가지게. 저 나무는 시간을 상징한다고 한번 생각해 봐. 뿌리는 과거를, 줄기는 현재를, 가지는 미래에 해당한다고 말이야. 과거는 땅에 묻혀 있어 보이지 않지. 그래서 우리가 실제로 보는 대상이 아니라, 머릿속에만 떠올리는 대상인 거야. 과거는 땅속 깊이 뻗어 있는 긴 뿌리들 속에 흩어져 있어. 이런 과거와 달리 현재는 단단하고 선명하지. 하나의 줄기 속에 들어 있거든. 미래는 나뭇잎이 달린 무수한 가지들로 이루어져 있어. 실현 가능한 미래의 시나리오를 의미하는 무성한 나뭇잎들은 서로 경쟁하듯 자라나. 그러다가 햇빛과 수액이 부족한 나뭇잎은 말라 죽게 되지. 나뭇가지 전체가 꺾여 떨어지는 경우도 있어. 이건 어떤 미래의 방향들이 사라지게 된다는 의미지. 하지만 하나뿐인 줄기에서 뻗어 나와 살아남은 다른 나뭇가지들은 눈에 보이는 단단하고 통합된 현재의 연장선에서 계속 자라게 되네. 나무는 계속 자라나. 하지만 이 미래의 나뭇가지들은 굵고 단단해질 수도, 가늘어져 꺾일 수도 있네.”


(88)

,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군요. 여러분은 그 누구의 말에도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내 말도 예외는 아니에요. 난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에요. 세계를 바라보는 내 관점은 부모와 사회로부터 받은 교육의 영향을 받았어요. 내 관점은 당연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어요. 이 말은 우리 모두가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절대적인 객관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여기 모인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어요. 경계를 늦추지 마세요. 여러분의 생각을 조작해 거짓을 믿게 하려는 사람들이 곳곳에 존재한다는 걸 명심하세요.”


(225)

사람들이 새로운 것에 전형적으로 보이는 반응이 어떤지 알아? 이렇게 다섯 단계를 거쳐 반응한대. 1. 조롱한다. 2. 말도 안 되는 가설이라며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공격한다. 3. 가능성까지는 인정하지만 여전히 개연성은 낮다고 본다. 4. 진실임을 받아들이고 나서 왜 미처 그런 생각을 못 했는지 궁금해한다. 5. 너무도 명백한 진실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처음엔 그것을 의심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과 인간이 유인원이 후손이라는 것도 이런 단계를 거쳐 받아들여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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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노린 음모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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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인스타그램에서 가끔씩 신간으로 나온 책 광고가 보인단다. 어느 날 책 광고 카피 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단다. 멘트가 후덜덜.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내 인생은 악몽이 됐다.”

라는 광고 카피였단다.

이 시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말을 대문짝 만하게 써 놓다니용감한 출판사에 박수를 보내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책인가 싶어 광고의 다음 게시물들을 넘겨 보았단다. 소설이더구나. , 지은이가 필립 로스. 필립 로스의 소설들을 서너 권 읽었는데, 모두 괜찮아서 두어 권 사서 재어두고 있었는데신간이 나왔구나. 아주 절묘한 시기에 절묘한 광고 카피를 달고 말이야. 이런 책은 안 살 수가 없지. 바로 사서 읽었단다. 이 책의 리뷰 중에 필립 로스의 책들 중에 가독성이 가장 좋았다는 평이 있었는데 그 평대로 책장이 휙휙 넘어가고, 재미 또한 좋았단다.

지나간 역사의 어떤 일이 다르게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으로 쓴 소설을 대체 역사 소설이라고 한단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이 승전국이 독일이었다면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이런 걸 가정하고 소설을 쓰는 것이야. 이번에 읽은 필립 로스의 <미국을 노린 음모>도 그런 대체 역사 소설이란다. 어떤 역사적 사실을 가정했냐면…. 1940년 미국 대통령이 루즈벨즈가 아니고, 반유대주의자였던 찰스 린드버그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미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세계2차 대전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

이 소설에서 반유대주의자로 대통령이 된 찰스 린드버그라는 사람은 실존 인물이었단다.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한 사람으로 미국에서 꽤나 유명한 사람인 것 같구나. 그가 살았던 시절에도 인기가 있었고, 2차세계대전에 참가에 반대하면서 반유대주의 발언도 했었다고 하는구나. 전쟁 전이긴 하지만 독일에 방문하여 히틀러부터 독일 훈장을 받기도 했다는구나. 그가 후에 대통령 후보 추천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하는데, 지은이 필립 로스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가 그때 실제로 대통령 후보로 나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으로 소설을 쓴 것이란다.


1.

주인공은 지은이와 이름이 똑 같은 필립 로스였단다. 당시 린드버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유대인이었던 자신의 가족들이 어떤 생활을 했을까, 상상을 하면서 소설을 쓴 것 같아.

때는 1940. 필립은 7살이었고, 형 샌디는 12살이었고,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에서 살고 있었어. 아버지는 진급을 해서 다른 마을로 이사 갈 기회가 있었으나, 이사 갈 마을은 유대인들이 적다고 진급을 포기할 정도로 유대인들과 함께 지내려고 하셨단다. 큰 아버지와 큰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사촌형 앨빈도 함께 지내고 있었단다.

당시 미국에서는 찰스 린드버그라는 사람의 인기가 엄청 좋았어. 비행기를 타고 세계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사람인데다가 첫 아이가 유괴 당한 후 죽어서 그에 대한 동정심도 있었단다. 아이의 유괴 사건 이후 미국을 떠나 영국에서 살다가 독일에도 방문하였고, 총통과 친해지면서 독일로부터 여러 훈장들을 받았단다. 그로 인해 유대인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는데, 그런 그가 미국에 와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게 되었고, 결국 인기에 힘입어 최종 후보가 되었단다.

그가 인기를 얻을 수 있던 것은 미국은 세계대전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공약 때문이었어. 왜 우리 젊은이들이 유럽의 전쟁에 참가해서 죽어야 하는가? 라는 거지. 전쟁은 모든 이에게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 공약이 잘 먹혀 들어갔지. 우리만 괜찮으면 된다는 위험한 생각인데, 그것이 죽음과 관련이 있다 보니 잘 먹힌 거지. 그런데 그가 친나치에 반유대주의자란 것이 널리 알려져서 공화당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단다.

필립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유대인들은 루즈벨트가 당선될 것을 믿으면서도, 혹시나 린드버그가 대통령이 어쩌나, 하는 걱정들을 했단다. 그런데 벨겔 스도르프라는 유명한 랍비가 린드버그를 지지한다고 했어. 랍비가 린드버그를 지지하는 이유는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내용 때문이야. 린드버그가 반유대주의자인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했어. 린드버그는 미국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미국 고립주의로 지지도가 급상승했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단다.


2.

이에 유대인들은 몸을 사리거나 격렬히 비판했단다. 앨빈 형은 유대인의 후원으로 무료로 대학에 다닐 수 있었으나, 린드버그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캐나다로 건너가 세계대전에 참가하기 위해 군대에 입대를 했단다. 아버지가 이 일이 있기 전 앨빈 형을 말렸는데, 심한 말다툼 끝에 앨빈 형은 끝내 캐나다에 갔단다.

린드버그는 취임 후 히틀러를 만나 평화 협약을 했고, 추축국 중 하나였던 일본과도 협약을 맺었단다. 이 협약들에는 미국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누가 봐도 미국은 추축국 편을 드는 모양이었단다.

필립의 식구들은 린드버그가 당선이 되기 전부터 워싱턴 DC를 여행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이 여행을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갔단다. 테일러 씨라는 가이드가 안내를 해주었는데, 워싱턴이 아무래도 미국의 정치적 수도이다 보니, 필립의 아버지는 대통령을 비판하는 정치적 발언을 했단다. 그것을 본 어머니는 조마조마해 하셨어. 그런데 호텔 체크인부터 문제가 생겼어. 호텔에서 실수로 이중으로 예약을 받게 되어서 돈을 환불해주면서 호텔에 묵을 수 없다고 하는 거야. 어떻게 해서든지 빈 방을 마련해주는 것이 상식인데, 돈만 툭 던져주고 만 것이란다. 아버지는 이것이 자신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했어. 경찰을 불러 따지려고 했으나, 경찰도 이야기를 들어보고 문제 없다면서 호텔 편을 들어주었단다.

가이드였던 테일러 씨가 다른 호텔을 알아봐주어 다행히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단다. 식당에서 가서는 유대인을 욕하는 반유대주의자들과 시비가 붙기도 했어. 아버지는 미국인인 자신이 왜 미국에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냐면서 큰 소리를 치셨지. 여행이 완전히 엉망이 되었단다.

….

필립에서는 이모 이블린이 있었어. 그런데 그 이모가 린드버그를 지지했던 스도르프 랍비의 비서로 일했어. 아버지는 그런 이모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단다. 어떻게 린드버그를 위해서 일할 수 있냐면서 말이야. 유대인 청소년들을 위한 소박한 사람들이라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하나 생겼는데, 이모는 그 프로젝트를 샌디 형에게 추천했어. 아버지가 반대를 했지만, 샌디 형은 가고 싶다면서 우겨서 8주간이나 남부에 있는 농장에서 체험을 하고 왔단다.

이 프로젝트를 다녀온 이후 샌디는 농장에 대한 동경심이 커졌고, 샌디가 다녀온 남부 지역이 공화당지지를 해서 그 영향을 샌디도 공화당을 지지하게 되었어. 아버지와 정치적 노선과 달라 충돌하기도 했어. 샌디는 그 이후 이모 이블린과 스도르프 랍비가 일하는 동화청이라는 곳에서 일하기도 했어. 소박한 사람들이라는 프로젝트가 유대인 청소년들을 공화당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인 것 같았어.


3.

한편 앨빈 형은 전쟁에 참가했다가 왼쪽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단다. 그런데 전쟁과 부상에 대한 심한 후유증을 겪게 되었어. 처음에는 거의 폐인 생활을 했는데 조금씩 재활에 힘쓰려고 했단다. 필립도 앨빈 형과 함께 지내면서 도와주었어. 하지만 이내 노름에 빠지며 일상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어.

친척 중에 몬티 삼촌이 있는데, 앨빈 형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하자, 삼촌의 말 따라 일을 하려고 했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단다. 이제는 이런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어. 그렇게 잠깐의 노력이 좌절되자, 앨빈 형은 집을 떠나서 셔시라는 친구의 삼촌이 운영하는 도박장에서 일하게 되었단다.

나라 안에서는 한 동안 조용히 있던 루즈벨트 전 대통령이 반 린드버그 세력을 집결시키면서 시위와 집회를 했단다. 필립의 집안은 정치색이 두 개로 나뉘어졌단다. 필립과 아버지, 어머니는 루즈벨트를 지지하고, 이블린 이모와 샌디 형은 린드버그를 지지했어. 이블린 이모는 스토르프 랍비와 함께 백악관에 열리는 연회에 초대받기도 했는데, 독일에서 온 히틀러의 측근도 참석했단다. 유대인들을 그렇게 학대하는 히틀러의 측근과 함께 연회를 하다니이게 말이나 될 소리냐며, 아버지는 이블린 이모와 심한 말싸움을 했고, 이모를 집에서 쫓아냈단다.

린드버그 정부는 홈스테드 42’라는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것은 유대인 가족들을 특정 지역에 이주시키는 정책이었단다. 이제는 대놓다 유대인들을 차별하려는 것이었어. 필립의 엄마 베스는 캐나다로 가자고 했으나, 아버지는 이곳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했어.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해서 이 나라에서 쫓겨나야 하냐고 말이야. 린드버그를 비판하던 유대인 방송인 윌터 윈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결국 그는 방송국에서 퇴출되었단다. 그리고 루즈벨트가 다음 대선에서 출마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이어지자, 윌터 윈첼은 자신이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단다. 그러면서 지역을 돌면서 유세를 했는데, 반유대주의자들의 테러에 의해서 그만 피살되고 말았단다. 나라는 점점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지. 반유대주의자들의 선동이 이어졌는데, 이를 제대로 제지하지도 않았어.


4.

그런데 뜻밖에 일이 벌어졌어. 1942 6월 어느날 린드버그는 자가비행기를 타고(그는 전직 비행사답게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단다.) 워싱턴을 가던 도중 사라졌어. (전직 비행사인 그에게 이런 일은 아주아주 드문 일이지.) 대통령의 실종. 이동 경로를 며칠 동안 수색했지만, 비행기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어. 독일은 영국군이 린드버그를 납치해 갔다고 주장했어. 영국은 독일이 린드버그를 데리고 가서 자작극을 벌이고 있다고 했어. 린드버그가 사라지고 부통령인 휠러가 대통령 대행 임무를 하고, 나라는 계엄령이 내려졌는데, 혼란은 더해갔단다. KKK를 중심으로 한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유대인들이 백여 명이나 죽고 말았단다.

이 시기 필립의 가족들과 친구들도 힘든 시기를 보냈단다. 필립의 친구 셀덴의 엄마가 반유대주의자들에게 죽음을 당했어. 엄마와 둔 둘이 살던 셀덴은 혼자 있게 되었는데, 셀덴이 살고 있는 곳까지 멀리 떨어져 있었어. 아버지는 샌디형과 함께 셀덴을 데리러 폭동과 혼란의 한 가운데를 질러 갔단다.

….

휠러의 대통령 대행은 일주일 남짓하고 의외에 사건으로 끝이 나고 말았단다. 린드버그의 아내, 그러니까 영부인이 휠러의 반국가적 불법에 대해 폭로를 했어. 영부인은 국회에 민주주의를 다시 수립해 달라고 요청을 했어. 휠러는 탄핵이 되었고, 대통령 재선거가 진행되었고, 루즈벨트 대통령이 다시 당선이 되었단다. 그렇게 다시 나라를 제자리에 돌려 놓았지. 루즈벨트 대통령은 연합국을 지지했겠지. 그가 당선된 지 한 달 만에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했고, 미국은 세계대전에 참전을 했단다. 그리고 루즈벨트는 1945년 종전을 얼마 앞두고 죽고 말았단다. 이 부분은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 가지고 왔구나. 실제로 루즈벨트 대통령은 종전을 얼마 앞둔 1945 4월에 죽었거든.

….

그런데 나중에 이블린 이모가 숨겨진 진실을 이야기해주는데 놀라움 그 자체였단다. 린드버그가 대통령이 된 것이 모두 히틀러의 작전이었다는 거야. 린드버그의 아이를 유괴한 것은 독일이었고,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그건 다른 아이였고, 실제 린드버그의 아이는 독일로 유괴해 갔으며, 린드버그 부부가 독일에 왔을 때 아이를 보여주었다고 했어. 그리고 아이를 인질로 린드버그로 하여금 미국에 친독정부를 만들게 한 거야.

집권 중에 린드버그는 다시 독일에 가서 아이를 만났는데, 아이는 부모도 알아보지 못하고 독일 소년군 수업을 받고 있었어. 완전히 독일 사람이 다 된 거지. 이에 린드버그 부부는 그 아이는 더 이상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독일에서 시키는 것에 대해 조금씩 따르지 않기 시작했다는구나. 그리고 그 와중에 린드버그가 실종된 것이라고 했어. 그렇다면 린드버그의 실종도 독일의 짓이라는 것인데….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났단다. 지은이의 상상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 책이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것이 2004년이었어. 필립 로스가 1933년생이니까, 일흔 넘어서 쓴 소설인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창의력 넘치는 소설인 것 같구나. 이제부터 <미국을 노린 음모>를 아빠가 읽은 필립 로스의 소설들 중에 가장 좋았던 소설로 손꼽아야겠구나.

이 소설을 읽으면서 불편함이 하나 있었어. 만약 아빠가 그 시절 미국에 살고 있었고, 전쟁에 나갈 나이가 되었거나 그런 자식들이 있었다고 했을 때, 친나치이긴 하지만 린드버그처럼 절대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가지고 대선에 나왔다면 그를 뽑지 않을 도덕성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맴돌았어. 루즈벨트가 하는 일이 정의롭다고 하지만, 내가 또는 내 자식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을 지도 모르는데, 그를 지지할 수 있었을까. 정말 쉽지 않은 선택이 되었을 것 같구나.

그런데 친나치주의자들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약을 해도, 그걸 끝까지 지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구나. 오히려 추축국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구나. 선거를 할 때, 후보자가 나중에 자신의 공약을 지킬 수 있는지도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단다. 그걸 우리나라 국민들이 못해서 고생을 하고 있구나. 줄거리를 주절주절 쓰다 보니 독서 편지가 길어졌는데 그만해야겠다. 안녕.


PS,

책의 첫 문장: 이 기억엔 두려움이 잔뜩 스며 있다.

책의 끝 문장: 그애 자체가 토막난 다리였고, 그애가 결혼한 이모와 함께 살기 위해 열 달 후 브루클린으로 떠날 때까지 나는 그애의 의족이었다.


윈첼은 리벤트로프를 신사인 척하는 사기꾼이라 불러. 그가 전쟁 전에 뭘 했는지 아니? 샴페인을 팔았어. 술을 파는 장사꾼이었단다. 샌디. 그는 사기꾼이야. 재별 정치인에 도둑에 사기꾼이지. 심지어 그의 이름에 붙은 ‘폰’도 가짜야. 하지만 넌 이런 것들 것들을 전혀 모르고 있어. 넌 폰 리벤트로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괴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괴벨스와 힘러와 헤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난 알고 있다. 폰 리벤트로프 씨가 다른 나치 전범들과 호화 만찬을 즐기는 오스트리아의 성이 어떤 곳인지 들어봤니? 어떻게 그의 것이 됐는지 알아? 빼앗았어. 성주(城主)인 귀족을 힘러가 강제수용소에 집어넣었고, 그래서 술 장사꾼의 소유가 된 거야! 샌디, 단치히가 어디인지, 거기가 어떻게 됐는지 아니? 베르사유 협약이 뭔지 알아? <나의 투쟁>에 대해 들어봤니? 폰 리벤트로프에게 물어봐라. 그가 대답해줄 거다. 그리고 나치의 관점은 아니지만, 나도 대답해줄 수 있어. - P269

아버지의 삶이 고되다는 건 아침에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술을 한 잔씩 하는 걸 보고 알 수 있었다. 보통 우리집에서 포어로제스 한 병이 비려면 몇 년이 걸렸다. 절대금주를 유난히 강조하는 어머니는 스트레이트 위스키의 냄새는 물론이고 거품이 이는 맥주잔을 보기만 해도 치를 떨었다. 그리고 아버지 역시 두 분의 기념일이나 저녁식사에 초대한 보스에게 얼음을 넣은 포어로제스를 대접할 때가 아니면 언제 술을 마셨던가? 하지만 이제 아버지는 시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고 샤워하기도 전에 작은 유리잔에 위스키를 따른 후 머리를 뒤로 젖히며 벌컥벌컥 마셨고 그런 뒤에는 즉시 백열전구를 집어삼킨 듯한 얼굴로 변했다. "좋아!" 아버지는 큰 소리로 말했다. "아주 좋아!" 그런 뒤에야 아버지는 긴장을 풀고 양껏 음식을 먹었고 단 한 번도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았다. - P331

마치 이렇게 해괴한 경우에 다른 사람의 눈에는 옳은 판단과 틀린 판단이 분명히 보이는 것처럼, 그런 곤경에 처했을 때 다른 누구도 어리석음의 손에 이끌리지 않는 것처럼 어머니의 비통함은 후회로, 자신을 향한 무자비한 채찍질로 표출되었다. 어머니는 단지 직감에 따라 행동했으며 그 직감은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올바르지 않은 판단을 내렸다며 자책했다. 하지만 정말 가혹하게도 어머니는 설령 본능을 거부하고 행동했다고 해도 어떤 이유를 찾아내 자신의 행동을 개탄했을 정도로 무조건 자신이 파국적인 실수를 저질렀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 P465

어머니가 고통스러운 혼란에 빠져 자책하는 것을 지켜보는(그리고 그 자신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온 것은, 사람이란 옳은 일을 하면서 동시에 잘못된 일을 할 수 있고, 가끔은 그것이 너무 잘못된 일이라 혼란이 지배하고 모든 것이 위태로울 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으며(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곧 뭔가를 하는 경우일 때를 제외하고…… 그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주 큰일을 하는 것이므로) 심지어 감당할 수 없는 삶의 흐름에 매일 체계적으로 저항하는 어머니에게도 그렇게까지 불길한 혼란을 감당할 체계적인 방법은 없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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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운 배 - 제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혁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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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랜만에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을 읽었단다. 최근 수상작은 아니고, 21회 수상작이니까, 몇 년은 지난 것 같구나. 제목은 <누운 배>. 아빠는 이 책을 몇 년 전에 인터넷 서점에서 알게 되었단다. 책 제목을 처음 봤을 때는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소설인가 싶었단다. 그런데 그건 아니더구나. 어떤 상징적인 의미로 쓰인 말도 아니고, 실제로 배가 누운 것을 소재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아빠가 조선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지만, 너무 실감나게 잘 풀어나갔단다.

조선업을 하는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어떤 장면은 아빠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내용들이었단다. 배를 설계하고 만들고 판매하고그러다가 크고 작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게 되고그럼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움직이는 이런 장면들은 여느 회사에서도 볼 수 있는 장면인 것 같구나. 소설 속 대화를 읽다 보면 회의실에 직접 앉아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회사 경영진들의 답답한 결정을 보면 기시감을 느끼면서도 찐 고구마를 잔뜩 먹은 기분도 들고 그랬단다.

많은 사람들이 몸 담고 있는 회사라는 세계.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고 하지만, 회사라는 세계도 민주주의 세계일까? 예전에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여러 번 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단다. <누운 배>라는 소설을 읽다 보면 지은이가 조선소에서 일하지 않고는 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선업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단다. 작가의 말을 보니 지은이 이혁진 님은 실제로 조선소에서 근무했었다고 하는구나.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리스트에 또 한 명 추가를 해야겠구나. 이 책을 덮고 이혁진 님의 책을 두어 권 주문했단다.


1.

중국에 진출한 한국의 신설 조선업 회사. 거대한 배를 처음으로 두 척이나 수주를 받고 만들게 되었단다. 진척율 80% 정도를 보이던 어느 날 두 척 중에 한 척이 기울어지고 있었단다. 전직원 비상 소집으로 소설인 시작되었단다. 주인공 문 기사도 마찬가지로 팀장의 전화를 받고 회사로 복귀했단다. 하지만 경영기획팀 소속인 문 기사는 특별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단다. 그리고 결국 배는 완전히 옆으로 누워버렸단다.

주인공은 문 기사. 이름이 기사는 아니고 직급이 기사였단다. 이 회사의 직급을 잠깐 소개하자면, 회사에 입사를 하면 먼저 기사라는 직급을 갖게 된단다. 그래서 지은도 성을 함께 붙여 문기사로 불렸다. 소설 속에서 이름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계속 문기사로만 불려서 아빠도 그냥 문기사라고 부를게. 그 위의 직급은 다른 회사들과 비슷하게 대리, 과장, 부장으로 이어진단다.

문기사는 전직기자 출신으로 이 조선소에서는 경영기획팀에 소속되어 회사 홍보를 비롯하여 여러 잡일을 하고 있었단다. 배가 기울어진 이후에는 보험 업무를 하게 되었단다. 거대한 배가 쓰러진 것은 단순히 생각만 해도 엄청난 손해가 날 것 같구나. 손해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서는 보험회사에서 많은 돈을 뜯어내야 하기 때문에 보험 업무는 무척 중요했단다. 회사는 이번 사고가 천재지변에 의한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단다.

이런 일에 전문가인 홍소장이라는 사람도 긴급 섭외했단다. 보험 업무를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문서와 증빙 서류가 엄청 필요했단다. 하지만 이 회사는 신설 회사이고 해서 제대로 된 문서가 별로 없었단다. 프로세스를 미준수한 것도 여럿 있었어. 보험회사도 돈을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만만치 않았어. 손해사정사로 미스터 캉이라고 부르는 중국인을 데리고 왔는데, 홍사장과 마스터 캉의 기싸움이 엄청 났단다. 주인공 문 기사도 보험 회사에 제출할 문서와 증빙자료를 조작하는 등 회사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나갔다. 결국은 이곳도 인맥의 싸움인가? 홍사장과 조선소 회장의 뒷배로 보험 처리가 원하는 대로 될 것 같았단다. 회사 창단 이래 첫 번째 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단다.


2.

그런데 다음 해 신년 인사에서 회장은 뜬금없이 누워 있는 배를 세우겠다고 발표를 했단다. 이미 보험회사에서 어느 정도 손해 배상을 받았는데 왜 배를 세워? 배를 세우는 일은 그 일이 가능하다고 해도 세우는 배용과 수리하는 비용, 그리고 인건비 등을 다 더하면 배 값보다 크다는 것이 실무자들과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단다. 하지만 신년회에 참석한 경영진은 누구도 반대 의사를 보이지 않았단다. 이 회사는 회장의 권력이 막강한 그런 회사였던 거야. 독재라고 볼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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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아무리 그렇더라도 귀가 있고 생각이 있으면 임원들의 횡설수설을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상관없었다. 회장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틀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회장의 힘이고 지위고 회장을 둘러싼 찬란한 광배였다. 회장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강력하게 군림했다. 임원들이 가짜를 말해도 회장이 진짜라면 진짜가 되고 진짜를 말해도 회장이 가짜라면 가짜였다. 사고 원인을 결정한 사람도 회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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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회사 방침에 불만 있는 이들은 하나둘 퇴사를 하게 되고, 회장이 영입한 임원들은 무능력한 자들이고 아래 실무자들만 달달 볶는 스타일이었단다. 외부 영입 임원들 포함 임원들 수는 늘어나는데 사정이 어렵다면서 직원들 연봉은 협상 없이 지난해와 동결 결정되었단다. 그야말로 독재가 따로 없구나. 문 기사의 직속상사 팀장도 무능한 임원과 갈등으로 퇴사를 하였단다. 그러면서 팀이 해체되어 문 기사는 생산기획팀으로 옮겼어.

전 세계적으로 금융환란이 일어났단다. 조선업계도 위기가 불어 닥쳤어. 환율이 올라서 중국 내에서 생활하는 것도 어려워지기 시작했어. 가뜩이나 월급도 동결되었는데 말이야. 불만이 가득한 채권단은 사장을 자르고 새로운 사장을 선임했단다. 조선업에서 잔뼈가 굵은 황철주라는 사장이란다. 이전 사장은 회장의 바지 사장이라고 하면 이번 사장은 야심을 넘어 야욕이 넘치는 사람이었단다. 새로운 사장이 오면 보통 허니문 기간이 있는데, 황사장은 처음부터 사람들을 속된 말로 조졌단다. 특히 임원들을 더욱 강하게 몰아 부쳤어. 무능한 임원들 밑에서 일하는 실무자들은 속이 시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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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황 사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 회의를 기준으로 삼기 바랍니다. 이전에도, 또 다른 회사에서도 똑같이 해왔다는 말 같잖은 소리는 집어치우십시오. 모른다, 확인하겠다, 말만 하지 말고 미리 준비해서 들어들 오세요. 이 회의는 주간 공정 회의입니다. 회의 이름에 걸맞게 지난주 생산 실적을 확인, 정리하고 다가올 한 주의 생산을 제고할 방안을 미리 세운다는 관점에서 준비들 해오세요. 이 회의에 참석한 여러분은 모두 관리자고 책임잡니다. 1 1초가 귀한 사람들입니다. 설명 같은 변명, 변명 같은 핑계, 핑계 같은 거짓말, 불순하고 무책임한 잡설로 자신의 시간을 허비하고 남의 시간을 뺏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황 사장은 수첩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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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다 보면 회사 내 조직 간 상충되는 일이 있단다. 그렇다 보면 다른 조직 핑계되면서 일정이 밀릴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를 하지. 이전 사장 같았으면 그럼 조정된 일정으로 다시 계획을 수립했지만, 황사장 앞에서는 그것이 안되었단다. 책임과 고통을 분담해서 일정을 맞춰야 한다.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찾아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임원의 역할이다. 이런 식으로 임원을 다그쳤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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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167)

황 사장은 자신의 책상 양옆으로 앉아 있는 임원들을 봤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회사의 모든 사람이 그 고통을 나눠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고통을 나누는 게 책임을 나눠 진다는 건 아닙니다. 회사가 어려워진다면 잘못은 내게 있고 또 각자 가지 분야에서 최고참이자 전문가인 임원들, 우리 경영진에 잘못이 있습니다. 책임 역시 내 책임이고 우리 경영진의 책임입니다. 수십 년 일해온 우리가 각자 자신이 맡은 일조차 장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뒤집어 말해 돌발 상황과 변수를 통제하지 못하고 다른 부서가 일하는 것에 자기 일을 맞춰나가겠다고 하는 이 상황이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내 일의 주도권을 남에게, 외부 요인에 내줬다는 게 명백한데도 그걸 되찾을 거라고, 되찾아야 한다고 어떻게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실패와 지연에 적응하고 익숙해질 수 있습니까?” 회의실 안은 적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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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의 전반적인 부조리도 바꾸려고 했단다. 임원 전용 식당을 폐쇄하고, 사장 스스로 중국인 지원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개선점이 있으면 바로 고쳤어.


3.

문 기사는 우연히 황사장의 신문 인터뷰를 도와주는 일을 하게 되었어. 문 기사가 전직 기자 출신이라서 일을 맡게 되었지. 사장님을 독대하고 사장의 비전을 들었는데, 독불장군 같기는 하지만 황사장의 혁신은 명확하고 시원했단다. 이 인터뷰 내용을 문 기사가 정리해서 보여드렸더니 황사장은 문 기사의 글 솜씨에 마음에 들어 했어. 그래서 문 기사에게 새로운 일을 맡겼단다. 임원 회의에 참석해서 회의 내용을 정리해서 담당자에게 전달하고 진행 사항을 체크하는 일이야.

그리고 황사장은 혁신팀을 만들어 활동도 했어. 연말이 되기 전에 생산력을 2.5배까지 늘리는 것이 주 목표인데, 이게 말이 쉽지, 이를 위해서는 또 누군가는 뺑이쳐야했단다. 임원들과 팀원들 중심으로 황사장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어. 특히 회장 라인의 임원들과 갈등이 심했는데, 어느 날은 대놓고 대판 말싸움이긴 하지만 대판 싸우기도 했단다.  이렇다 보니 사장도 자신의 몸도 사리게 되는 정치적 결정을 하는 경우도 있어. 그 중에 하나가 누운 배를 다시 세워 수리하는 일이었단다. 황사장이 오면서 다른 배들을 건조하고 제작하느라 뒷전에 밀렸던 회장님의 무모한 야심이었는데, 그 이야기가 다시 돌았고, 황사장도 거절하지 못하고 배를 세우기로 했단다. 예상했던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어. 우여곡절 끝에 몇 달 몇 일을 밤색 작업 끝에 2년간 바닷속에 잠겨 있던 배의 반대편이 드러났단다. 예상보다 손상은 엄청났단다. 바다에 잠겼던 부분은 거의 녹아 내린 수준이었고, 그냥 봐도 재건조는 불가능한 수준이었어.

….

이 누운 배를 세우는데 많은 인력과 장비를 투입해서 그런지, 새로 만들고 있던 배에서 또 사고가 났단다. 진수를 진행하고 있던 배 한 척이 배로 떠밀려갔고 그 충격으로 배 뒷쪽이 가라앉았어. 다급히 수습하여 피해를 최소화했지만, 최소화한 피해도 이미 막심한 피해였단다. 이 일을 책임지고 황사장이 사퇴를 했단다. 사장이 영입했던 사람들도 줄줄이 사퇴를 했단다. 갑자기 사장이 공석이 되고, 이 공석으로 노리려는 임원들이 몇몇 있었단다. 이런 회사의 미래를 불을 보듯 뻔한 것 같았단다. 자꾸 쓰러지는 배들이 이 회사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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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분명한 것은 일을 일로 하지 않는 회사는, 야합과 담합으로, 협잡과 인습으로, 사람에게 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에 사람을 끼워 맞춰가며 시키는 회사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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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 기사, 아니 이제는 진급한 문 대리도 회사를 그만 두었단다. 그리고 자신이 오래 전 하고 싶었던 글쓰기를 다시 하기로 마음 먹으면서 이 소설은 끝이 났단다.

….

이 소설에는 아빠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도 여기저기 실려 있었단다. 아빠가 책을 읽으면 인상적인 부분을 발췌하는데, 이 책에는 발췌한 부분이 꽤 많았단다. 예전에 아빠가 월급이라는 것이 아빠의 시간을 팔아서 받은 돈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책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있더구나. 월급을 받으면서 젊음을 잃는다고그러고 보니 아빠도 20년 월급을 받고 나니 어느덧 아무도 모르게 젊음이 사라져 버린 것 같구나. 괜히 서글퍼지는구나. 오늘은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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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월급이란 젊음을 동대문 시장의 포목처럼 끊어다 팔아 얻는 것이다. 월급을 받을수록 나는 젊음을 잃는다. 늙어간다. 가능성과 원기를 잃는 것이다. 존재가 가난해진다. 젊음이 인생의 금화라던 황 사장의 말 역시 수사가 아니다. 이대로 10, 20년 또 어느 회사에서 삶을 보내든 그 회사가 모두 이렇다면 내 인생의 금화는 결국 몇 푼 월급으로, 지폐로 바뀌어 녹아버릴 테고 나는 그저 노인이 돼 있을 터였다. 그다음은 끔찍하다. 명예퇴직, 권고퇴직, 그런 말 아닌 말로 수십 년 회사 일에만 길들고 늙은 사람인 채 양계장에서 풀어준 노계처럼 세상에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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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배가 쓰러지니 어서 회사로 들어오라는 팀장의 전화를 받았다.

책의 끝 문장: 아직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 같았다.


입회해 회의실 안쪽 가장 큰 책상 뒤에 앉았다. 임원들이 차례로 일어나 발표를 시작했다. 무엇을 어떻게 혁신하겠다는 것인지 내용은 하나도 없었고 핵심 관리 지표라는 것도 모두 타 회사 자료에서 베꼈는지 회사 실정과 전혀 동떨어져 있었다. 중언부언에 말끝마다 혁신, 혁신, 혁신 모두 그뿐이었다. 말밖에 안 되는 말이 중력 없이 떠돌았고 드러낸 것보다 감춘 것이 더 많은 실적 수치들은 속이 텅 빈 전망을 쌓아 올렸다. 하지만 회장은 아무 불만도,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수량 넉넉한 호수처럼 관대하게 웃었고, 횡설수설하는 임원들을 지켜보며 이따금 알아듣겠다는 듯 고래를 끄덕였다. 회의는 원만히 이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P74

문서라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문서란 엉성하고 허술한 현실에서 부스스 떨어져 내린 각질에 불과했다. 하지만 누가 문서를 우습게 보는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이 문서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현실을, 회사를, 정부나 국가를, 종교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누운 배 한 척이 그렇게 됐듯 사실이라는 것은, 참이나 거짓이라는 것은 힘으로 흔들 수 있었다. 세상은 성기고 흐릿한 실체였다. 그것을 움켜쥔 힘만이 억세고 선명했다. 힘은 우스운 것이 아니었다. 아마리 우스운 것도 우습지 않게 만드는 것이 힘이었다. - P99

성질 괄괄하고, 억센 부산 사투리를 쓰고, 돌려 말해야 할 것 같으면 차라리 입을 다물고, 현장 안 나간 지 보름이 지나도록 턱 끈 자국이 지워지지 않을 만큼 밖으로 쏘다니며 일하던 남자에게 있는 것은 결국 정이었다. 그 남자가 회사를 그만둔다는 것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수많은 사건 사고를 겪고 당하면서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쓰거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덮어둔 채 버티고 견딜 수 있게 해주던 그 정이,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뜻이었다. - P116

결국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입니다. 이미 일어나고 지나간 것을 어떻게 바꾸는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테지만 나는 다르게 봅니다. 과거야말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겁니다. 링 위에서 똑바로 못 했다면 이유가 뭐겠습니까? 링에 오르기 전까지, 링 밑에서 똑바로 안 했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견디고 헤쳐나가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과거, 되레 우리 발목을 잡고 억압하는 과거, 인습, 껍데기뿐인 규정과 규제, 타성, 그런 것들이야말로 바꿀 수 있고 바꿔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현재를 돌파하는 데 도움 주는 것들, 전통, 통찰, 지혜라고 부르는 것, 아니 더 쉽게 말해서 지금도 쓸모 있는 것,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것, 많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옳고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것만 과거에 남겨둬야 합니다. - P177

그게 말입니까? 잘못은 한 사람이 저지르고 수습은 왜 열 사람이 나눠 합니까? 임원이라서요? 생각들 똑바로 하세요! 임원이기 때문에 한 사람도 수습할 일 없게 일해야 하는 겁니다! 당신들이 똑바로 안 하면 당신들 밑에 있는 수십 명이 바로 당신 하나 때문에 개고생, 헛고생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이사 행세, 상무 행세, 뭐든 다 아는 척 거들먹거리면서 대접이나 받고 특권이나 누리라고 회사가 그 많은 연봉을 당신들에게 지급한다고 생각합니까? 당신들부터 똑바로 하세요! - P241

나는 계속 일했다.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고 산정으로 밀어 올리면 굴러떨어지고 다시 밀어 올리면 다시 굴러떨어지는, 아무 희망도 보람도 주지 않는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매일 굴러떨어졌다. 젊은 카뮈는 매일 굴러떨어지는 바위의 부조리와 그것을 각성하면서도 그치지 않는 투쟁에 관해 썼다. 투쟁을 통해 부조리를 비웃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유일한 미덕이고 행복이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그 바위는 결국 모든 것을 깔아뭉갠다. 신이 아닌, 노쇠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결국 바위를 이기지 못한다. 어리석음도, 각성도, 비웃음도, 경멸도, 희망도, 젊음도 굴러떨어지는 바위의 요란한 소리에 묻힌다. 쾅쾅쾅! 늙은 인간을 깔아뭉갠 바위만이 저 끝, 힘이 다해 더 굴러갈 수 없는 곳에 멈춘다. 모든 것이 침묵한다. - P302

분명한 것은 일을 일로 하지 않는 회사는, 야합과 담합으로, 협잡과 인습으로, 사람에게 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에 사람을 끼워 맞춰가며 시키는 회사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치였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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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당신이 구닥다리인 척, 고루한 척, 타락한 척하시는 거 저는 알고 있어요. 저는 당신이 부리는 이런 호기 따위는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아요. 요즘 들어 때를 만난 유행이기도 하고요. 당신에게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거나, 아니면 고통스러운 병일 테지만, 당신이 원하면 언제고 사라져버릴 겁니다. 당신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인데, 마음속 공허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죠. 공허에 귀를 기울이고 또 당신이 허락하기만 한다면, 당신의 그 공허를 채워줄 여인이 나타날 겁니다. 하지만 이는 제 관심사에서 벗어난 일이에요. 저는 예술가에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 안의 남성이 불행한 단 하나의 이유는 예술가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42-43)

저는요, 절대 저 자신을 해치지 않아요! 저는 타인을 좋아하는 만큼 저를 좋아합니다. 맹세컨대 저는 온 마음을 다해 저 자신을 좋아합니다! 제 팔레트, 제 영광의 도구가 저에게 고통의 도구라고 말한 이유는 제가 고통 없이 일하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질서 속에서, 제 몸이나 마음의 죽음이 아니라 제 신경이 소지된 후 안정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이게 답니다. 테레즈, 제 말 어디에 합리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던가요? 저는 오로지 피곤에 빠졌을 때만 제대로 작업합니다.”

 

(48)

당신 속에 있는 그 힘과 제가 전쟁을 해야 하는지, 또 행복해지고 차분해지라고 당신을 설득하면서 사람들이 당신에게서 신성한 불을 없애버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열망은 정신에 대한 지속적인 조건이 될 수 없으며, 열망이 제 열에 들뜨면서 생생하게 표현되었을 때, 열망은 저절로 쓰러지거나 우리를 부수고야 말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모든 연령대가 각각의 특별한 힘과 징후를 가지고 있지 않나요? 우리가 소위 대가들의 다양한 방식들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그들 존재의 연속적인 변화가 만들어낸 표현이 아니었던가요? 서른 살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걸 갈망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무엇이건 어떤 관점에 관한 확신을 당신은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의 환상의 나이에 있습니다. 그러나 조만간 빛의 시기가 올 겁니다. 당신은 진보하기를 바라지 않나요?”

 

(93)

테레즈, 저는 말입니다.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건 당신이지 저 자신이 아닙니다. 제가 당신을 알게 된 이후, 당신은 제가 행복을 믿고 행복의 맛을 느껴보게 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제가 버릇없는 아이 같은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은 게 당신 잘못은 아닙니다. 그렇지요! 저는 이보다는 나은 사람이지요. 저는 당신의 사랑이 제게 행복이 될 것인지를 지금 묻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오로지 사랑이 삶이 될 거라는 것, 그리고 좋건 나쁘건, 제게 필요한 게 바로 이런 삶 아니면 죽음이라는 것만 알 뿐입니다.

 

(159)

이제 정말 지긋지긋합니다. 우리 서로에게 솔직해집시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아요. 서로 사랑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요! 서로를 속여왔던 겁니다. 당신은 그저 연연이 있었으면 했던 거고, 아마 당신에게 저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무것도 아니었을 테지요! 당신에게 필요했던 건 하인이나 노예였다고요. 불행한 저의 성격, 제가 진 빚, 저의 권태, 무분별한 생활에서 느끼는 저의 무기력함, 진정한 사랑에 대한 저의 환상이 저를 당신의 재량에 맡기게 될 거라고, 제가 다시는 정신을 차릴 일이 없을 거라고 믿게 만든 겁니다. 이렇게 위험한 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려면 조금 더 행복한 성격, 더 큰 인내심, 더 많은 융통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많은 재능이 당신에게 필요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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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1 0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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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1 1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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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1 10: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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