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참고]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같이 읽기]

이 책을 읽기 직전에 강헌의 <명리>를 읽었다. <명리>를 읽으면서 예전에 사두고 읽지 않은 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란 책이 생각났다. <명리>를 읽고 나서 이 책을 읽으면 이해하기 더 쉬울 것 같았고, 그리고 <명리>에서 읽은 내용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억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책을 찾아내어 읽었다. 강헌의 <명리>와 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를 연달아 읽었더니, 명리를 이해하는 데 더 좋았던 것 같다. 잘했다 싶다. 내침김에 명리에 관한 또 읽어볼까? 강헌의 <명리>에서 여러 번 소개한 <조용헌의 명리사주학 이야기>를 읽어볼까?

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에서도 음양오행과 명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강헌의 <명리>에서는 원국에 대해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 실전편이라고 하면, 이번에 읽은 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는 명리와 사주팔자가 왜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론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리뷰는 바로 직전에 읽은 강헌의 <명리>를 읽고 쓴 리뷰에 나온 내용과 겹치는 내용은 생략했다.

[내가 곧 우주다]

대중음악평론가인 강헌, 인문학자인 고미숙.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이 명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명리가 홀대 받는 경향이 있는데, 지은이 고미숙은 그 이유를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에서 찾았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서구의 시각으로 다른 지역의 문화를 타자와, 하위주체화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구의 문화와 가치관을 받아들인 동양에서 오랫동안 중시 여겨왔던 것을 무시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오행(五行)목화토금수‘목’은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고, 계절로는 봄을 의미한다. 그런데 무슨 일을 시작하면서 木처럼 해야 하는데火처럼 하는 경우가 있다. 형식에만 너무 집착하고, 소리만 요란한 시작. 봄을 건너뛰고, 여름으로 가버린 그런 것.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모든 일은 순리가 있는 법. 오행이 이런 삶의 교훈도 알려주고 있다. 무슨 일을 마음먹고 시작할 때, 이 말을 명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첫끗발이 개끗발이란 말도 있지 않는가.

고미숙은 사주 뿐만 아니라 관상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사주는 시간적 관찰이고, 관상은 공간적 관찰이라고 하면서, 사주가 관상이고, 관상이 곧 사주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사주와 관상은 곧 나의 생로병사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동양의학에서 관상과 사주는 필수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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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사계절이 있듯이 삶에도 생로병사가 있다. 고로, 나를 아는 것이 곧 우주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이렇듯 인생과 우주, 미시와 거시가 중첩, 교차되다 보니 음양오행이라는 매트릭스 안에서 '앎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풍수지리와 관상, 의학과 사주명리, 기문둔답과 매화역수 등등. 특히 동양의학을 하려면 관상과 사주명리는 필수적이다. 이 둘은 몸에 대한 정보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사주명리는 생년월일시를 가지고 평생의 운을 읽어내는 것이고 관상은 얼굴에 드러나 있는 운명의 지도를 읽는 것이다오장육부의 기운적 배치는 반드시 얼굴에 드러나고 그 얼굴에 드러난 기운에 따라 일생의 리듬을 밟아 간다는 것이 기본원리이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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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주역과 명리를 아주 간단하고 명확하게 설명해 주어서, 누군가 주역과 명리의 차이가 뭐냐고 물어보면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역은 사건을 중심으로 보는 것이고, 명리는 인생 전체의 지도를 보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주 명리가 철학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명리라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철학도 내가 알기로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을 한다. 그러니 명리와 철학은 형제와 같은 관계인 것이다.

 가끔 혁명이나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나를 희생하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를 희생하면서 바꾸는 것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내가 곧 우주이고, 자연이 곧 나의 연장이기 때문에, 나를 희생하면 우주가 희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에 대한 열정이 있다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관계가 중요하다]

올해는 붉은 원숭이 해라고 한다. 그리고 몇 년 전에는 60년만에 오는 백호띠 해, 흑룡띠 해라고 떠들석한 적도 있다. 도대체 색깔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지 궁금했었다. 그냥 장삿속으로 갖다 붙이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 해를 육십갑자를 부를 때 천간을 이루는 오행을 색깔로 표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2010년이 경인년으로 60년만에 오는 백호, 즉 하얀 호랑이띠 해라고 했고, 2012년은 임진년으로 흑룡, 즉 검은 용띠 해라고 했고, 올해는 병신년 빨간 원숭이띠 해라고 한다. 육십갑자 중에 십이지지가 나타내는 것은 띠를 나타낸다. 경인년의 ‘인’은 호랑이띠, 임진년의 ‘진’은 용띠, 병신년의 ‘신’은 원숭이띠를 나타낸다. 그리고 육십갑자의 십천간은 아래와 같이 오행과 연결이 되고, 그 오행이 의미하는 색깔도 아래와 같이 맺어진다.

, -> -> 녹색

, -> -> 빨간색

, -> -> 노란색

, -> -> 흰색

, -> -> 검정

그러니까 경인년의 ‘경’은 오행으로는 金이고, 그것은 흰색을 의미하는 것이고, 임진년의 ‘임’은 오행으로는 水이고, 색깔로는 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올해 병신년의 ‘병’은 오행으로 火, 색깔은 빨간색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인년은 흰색 호랑이가 되는 것이고, 임진년은 검정색 용이 되는 것이고, 올해 병신년은 붉은색 원숭이가 되는 것이다.

강헌의 <명리>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팔자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일간이고, 나머지 팔자들과 일간 간의 관계도 중요하다. 동양 사상에는 “관계가 존재를 우선한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간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일간을 중심으로 각각의 팔자들의 관계 또한 중요한 거다. 관계의 중요성 때문에 오행의 개수보다 서로 어떤 생극적 관계가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 관계의 중요성은 사회생활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할 때 혼자 하는 것보다 같이 협력해서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관계보다 개인의 능력을 더 중시하는 사회가 되어서, 사회가 더 삭막해 보이는 것은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는 협력보다 경쟁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순행대로 살지 않아서 더 힘들고 더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다시 예부터 내려오는 동양사상의 중요한 가치인 “관계”를 중시 여기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잠시 이야기가 나의 잡생각으로 빠져나갔는데, 다시 책 이야기를 하면, 오행은 우리 몸과도 관계를 맺는다. 이것은 <동의보감>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오행과 우리 몸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 ,

- 심장, 소장,

- 비장, 위장

- , 대장

- 신장, 방광

그래서 자신이 부족한 오행과 연계되는 우리 몸의 기관에 더욱 관심을 가져주어야 한다.

.

관계만큼 또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지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는 것.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한자 성어가 있다. 넘치는 것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사주팔자에도 중요하다. 만약 내 사주팔자에 넘치는 것이 있으면, 줄여주어야 하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보충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해주는 것이 지장간이라는 것이다. 강헌의 <명리>를 읽고 나서도 이야기했지만, 지장간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쓸 능력은 되지 못한다. 패스~~

 

 

[운명은 결국 나의 것]

운명은 숙명론이 아니다. 운명은 을 내가 운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리학은 잘 운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네비게이션 같은 것이다. 그래도 아직 운전대는 내가 잡고 있다. 네비게이션이 알려 주는 길이 있어도 자신이 더 자신있는 길이 있다면 그쪽으로 핸들을 틀면 된다. 결국 그 길의 책임은 자신이 지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 나의 길을 알려주는 네비게이션이 있다면 말을 잘 따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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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주명리학을 말하면 숙명론이 아니냐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인생을 결정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숙명론은 정해진 운명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운명에 대한 해석을 전적으로 외부에 맡기는 것을 뜻한다. 몸이 아플 때 의사나 묘방만을 찾으면 그것이 곧 숙명론이다. 왜 아플까? 그 인과를 찾기 시작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풀어 가게 되면 그건 숙명론이 아니라 운명에 대한 비전탐구가 된다. 그런데 비전탐구를 하려면 나의 몸과 마음그리고 그것이 작용하는 원리와 좌표를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사주팔자란 이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네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것뿐이다.(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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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팔자를 고치고 싶다면, 깨달아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깨달음은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깨달음이 아니라,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고, 지혜는 삶의 모든 과정을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팔자를 바꾸고 싶다면 지혜를 사랑하는 훈련을 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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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정보는 소유와 축적의 대상이지만 지혜는 깨달음의 영역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다' '도달하다'의 합성어다. 낡은 사유의 지평을 깨고 새로운 경계를 열어젖히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앎과 몸 사이의 '간극'이 없어야 한다. 간극이 없으면 깨닫게 되고 깨달음이 있으면 간극이 줄어든다. 고로, 삶의 모든 과정을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곧 지혜다. 그러므로 지혜가 없이, 지혜에 대한 열정이 없이 잘 살 수 있는 방법, 팔자를 바꿀 수 있는 길은 단연코 없다! 팔자를 고치고 싶은가? 그럼 가장 먼저 지혜를 사랑하는 훈련을 하라! 그러면 자신에게 꼭 필요한 용신이 무엇인지 절로 드러나게 될 터이니.(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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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자연에 사계절이 있듯이 삶에도 생로병사가 있다. 고로, 나를 아는 것이 곧 우주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이렇듯 인생과 우주, 미시와 거시가 중첩, 교차되다 보니 음양오행이라는 매트릭스 안에서 `앎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풍수지리와 관상, 의학과 사주명리, 기문둔답과 매화역수 등등. 특히 동양의학을 하려면 관상과 사주명리는 필수적이다. 이 둘은 몸에 대한 정보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사주명리는 생년월일시를 가지고 평생의 운을 읽어내는 것이고 관상은 얼굴에 드러나 있는 운명의 지도를 읽는 것이다. 오장육부의 기운적 배치는 반드시 얼굴에 드러나고 그 얼굴에 드러난 기운에 따라 일생의 리듬을 밟아 간다는 것이 기본원리이다.(49쪽)

보통 사주명리학을 말하면 숙명론이 아니냐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인생을 결정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숙명론은 정해진 운명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운명에 대한 해석을 전적으로 외부에 맡기는 것을 뜻한다. 몸이 아플 때 의사나 묘방만을 찾으면 그것이 곧 숙명론이다. 왜 아플까? 그 인과를 찾기 시작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풀어 가게 되면 그건 숙명론이 아니라 운명에 대한 비전탐구가 된다. 그런데 비전탐구를 하려면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그것이 작용하는 원리와 좌표를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사주팔자란 이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네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것뿐이다.(127쪽)

지식과 정보는 소유와 축적의 대상이지만 지혜는 깨달음의 영역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다`와 `도달하다`의 합성어다. 낡은 사유의 지평을 깨고 새로운 경계를 열어젖히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앎과 몸 사이의 `간극`이 없어야 한다. 간극이 없으면 깨닫게 되고 깨달음이 있으면 간극이 줄어든다. 고로, 삶의 모든 과정을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곧 지혜다. 그러므로 지혜가 없이, 지혜에 대한 열정이 없이 잘 살 수 있는 방법, 팔자를 바꿀 수 있는 길은 단연코 없다! 팔자를 고치고 싶은가? 그럼 가장 먼저 지혜를 사랑하는 훈련을 하라! 그러면 자신에게 꼭 필요한 용신이 무엇인지 절로 드러나게 될 터이니.(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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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쪽)

출발부터 형식에 집착하면 그건 봄을 건너뛰고 여름으로 가버린 겨이다.

여름은 화려하다. 안으로 응축했던 열정들이 다 바깥으로 분출되는 단계다.

그래서 속은 비어 버린다. 속빈 강정!

겉은 눈부시지만 안은 탁하다. 

조직은 비대해지고 명성은 높아지는데 그 안에 있는 개인들은 더 이상 고양되지 못하는 단계가 여기에 해당한다.(39)


(49쪽)
자연에 사계절이 있듯이 삶에도 생로병사가 있다.
고로, 나를 아는 것이 곧 우주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이렇듯 인생과 우주, 미시와 거시가 중첩, 교차되다 보니 ㅇ
음양오행이라는 매트릭스 안에서 '앎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풍수지리와 관상, 의학과 사주명리, 기문둔답과 매화역수 등등.
특히 동양의학을 하려면 관상과 사주명리는 필수적이다.
이 둘은 몸에 대한 정보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사주명리는 생년월일시를 가지고 평생의 운을 읽어내는 것이고
관상은 얼굴에 드러나 있는 운명의 지도를 읽는 것이다. 
오장육부의 기운적 배치는 반드시 얼굴에 드러나고
그 얼굴에 드러난 기운에 따라 일생의 리듬을 밟아 간다는 것이 기본원리이다.

(127쪽)
보통 사주명리학을 말하면 숙명론이 아니냐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인생을 결정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숙명론은 정해진 운명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운명에 대한 해석을 전적으로 외부에 맡기는 것을 뜻한다.
몸이 아플 때 의사나 묘방만을 찾으면 그것이 곧 숙명론이다.
왜 아플까? 그 인과를 찾기 시작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풀어 가게 되면
그건 숙명론이 아니라 운명에 대한 비전탐구가 된다.
그런데 비전탐구를 하려면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그것이 작용하는 원리와 좌표를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사주팔자란 이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네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것뿐이다.

(250쪽)
지식과 정보는 소유와 축적의 대상이지만 지혜는 깨달음의 영역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다'와 '도달하다'의 합성어다.
낡은 사유의 지평을 깨고 새로운 경계를 열어젖히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앎과 몸 사이의 '간극'이 없어야 한다.
간극이 없으면 깨닫게 되고 깨달음이 있으면 간극이 줄어든다.
고로, 삶의 모든 과정을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곧 지혜다.
그러므로 지혜가 없이, 지혜에 대한 열정이 없이 잘 살 수 있는 방법,
팔자를 바꿀 수 있는 길은 단연코 없다!
팔자를 고치고 싶은가?
그럼 가장 먼저 지혜를 사랑하는 훈련을 하라!
그러면 자신에게 꼭 필요한 용신이 무엇인지 절로 드러나게 될 터이니.(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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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리기 위해 들어간 비용은 수십억 달러에 달할 것이다.
괴상한 식물학자 한 명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것을 쏟아 붓다니.
대체 왜 그랬을까? 그렇다.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어느 정도는 내가 진보의 과학,
그리고 우리가 수 세기 동안 꿈꾼 행성 간 교류의 미래를 표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타인을 도우려는 본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렇지 않은 듯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렇다.
등산객이 산에서 길을 잃으면 사람들이 협력하여 수색 작업을 펼친다.
열차 사고가 나면 사람들은 줄을 서서 헌혈을 한다.
한 도시가 지진으로 무너지면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구호품을 보낸다.
이것은 어떤 문화권에서든 예외 없이 찾아볼 수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특성이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 나쁜놈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내 편이 되어주었다.
멋지지 않은가?
어쨌든 나는 갈비뼈가 미치도록 아프고 가속으로 인한 멀미 때문에
여전히 시야가 흐리며 배가 몹시 고프고 앞으로 211일이나 더 있어야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
게다가 내 몸에서는 스컹크가 땀이 밴 양말에 똥을 싸놓은 것 같은 냄새가 나는 듯하다.
그래도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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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란 무엇인가? 의식을 정의하기란 참 어려운데,

그것은 의식을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깨어 있는 사람은 의식을 하는 반면, 자고 있는 사람은 의식을 못한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깨어 있으면서도 자기 생각에 몰입해서 자기 주변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정치, 사회, 환경 의식이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의식이 있지만 다른 동물들은 의식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때 의식은 사고하고 자아를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의식은 특정한 의식 상태나 사고방식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의식능력을 일컫는다.

의식능력이란 경험의 본질이나 정도의 어떻든 내면적 경험을 하는 능력이다.

의식능력은 영화 영사기의 빛에 비유할 수 있다.

영사기는 스크린에 빛을 비추는데, 빛을 조절하여 어떤 상(像)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상들은 우리가 경험하는 감각, 지각, 꿈, 기억, 사고, 감정과 같으며 

'의식의 형태'라 부른다.

상이 전혀 없는 빛 자체는 의식능력에 해당된다.

누구나 스크린의 모든 상이 빛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지만,

빛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상이나 대화내용에만 끌리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의식적임을 알고 있지만,

마음에 나타난 다양한 지각, 사고, 감정만을 인식하는 게 일반적이다.

의식 자체를 결코 인식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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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쪽)

“쉽게 얻은 것은 읽지 않기 위해 조심할 것이며, 어렵게 얻은 것은 귀하게 여길 것!”

명리학의 중요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명리학이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는 또 있다.

바로 ‘조화’다. 넘치는 것은 덜고, 모자란 것은 보태며,

뜨거운 것은 시원하게, 추운 것은 따뜻하게 해줘야 한다고 누누이 말한다.

이는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만물에 적용되는 이치다.

‘균형’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달려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고속도록 위의 차가 시속 2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달린다고 해보자.

본인의 속도도 물론 늦겠지만 다른 사람까지 위험하게 한다.

규정 속도로 달려야만 남을 위하고 자신을 위할 수 있다.

그런데 시골길에서는 고속도로의 속력으로 달리면 안 된다.

큰일이 난다.

여기에 맞는 적정 속도가 따로 있다. 이렇게 상황에 맞는 균형을 지켜야 한다.

명리학은 인간의 삶에서 균형과 조화의 리듬을 지성적으로 찾게 해주는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331쪽)


운명이란 말에도 들어 있듯이 인간의 의지는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의지는 원국에서 보이는, 정해진 듯한 삶의 한계를 극복하고 변화시킨다.

넘치는 것을 제어하고, 모자란 것을 끌어올리며, 

질주하는 것을 멈추게도, 느린 것을 빠르게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넘치고, 무엇이 모자라는지, 어떤 순간에 속력을 높여야 하고 속도를 줄여야 하는지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르다.

원국과 대운에 모든 것이 나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대로 될 거라는 결정론에 빠져서도 안 된다.

인간이 스스로를 존엄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의지에 좌우된다.

명리학을 통해 우리가 들여다보는 원국과 대운이라는 것은 

인간의 그런 의지를 더욱더 전략적이고 현실적으로,

효율적이고 지혜롭게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의 프레임일 뿐, 

나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의 틀이 아니다.

우리가 명리학을 좀 더 공부하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이것을 전제로 한다면 명리학을 통해 바라보는 인간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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