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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밖의 개구리가 보는 한국사 - 하버드대 출신 한국학 박사에게 듣는 우리가 몰랐던 우리 역사
마크 피터슨.신채용 지음, 홍석윤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22년 11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우물 밖 개구리
유튜브를 보다 보면 외국의 유명
대학의 교수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강의를 하는 영상이 가끔 올라와 보곤 했단다. 그 어떤 노교수의 유튜브를
보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문화, 역사 등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어. 어떻게 우리나라에 대해서 잘 아실까? 검색을
해보니 하버드 대학교에서 한국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하는구나. 그 분의 이름은 마크 피터슨이라는
분이었어.
그 분의 동영상을 보다 보니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 중에 마크 피터슨 교수님이 쓰신 책들이 보였고,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너희들에게
이야기해줄 <우물 밖의 개구리가 보는 한국사>라는
책이란다. 마크 피터슨 교수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이름도 ‘우물
밖의 개구리’란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한국 밖의 외부인 시각으로 한국 문화를 보겠다는 의미라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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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처음에는 유튜브 시청자들이 불쾌해할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다. 나는 나 자신을 ‘우물 밖의 개구리’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이 말은 상대적으로
당신들 모두는 어떤 문제를 넓은 시각으로 보디 못한다는 의미의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지칭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바로 내가 하려는 말이기도 하다. 다행히 이 말이 오만하거나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유튜브 채널에는 비한국인으로서의 우물 밖의 개구리 관점을 설명한다는 내 생각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댓글들이 많이 올라온다. 그들은 내 생각을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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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 마크 피터슨 교수는 다르게 생각하신다는 것이야.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을 정리한
것이 바로 이 책이란다. 이 책은 역사학자 신채용 님과 대담 식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지은이는 공저로
되어 있단다.
…
우리나라와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가 침략을 많이 받은 희생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나라가 그
어느 나라보다 다른 나라의 침략을 많이 받았다고들 알고 있단다. 아빠도 학창 시절에 그렇게 배웠으니
말이야. 하지만 마크 피터슨 교수는 한국은 한국의 역사는 침략 받은 희생의 역사가 아니고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해온 평화와 안정의 역사라고 주장하신단다. 그러면서 우리나라가 오랫동안 평화의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들을 이 책에서 설명해 주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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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
나는
한국 역사를 관통하는 주요 주제는 평화와 안정이라는 점을 주장할 것이다. 이는 한국 역사를 흔히 ‘희생의 역사’라고 말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정반대다. 이를 위해 나는 한국 역사를 일본 역사와 많이 비교해볼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장에서는 천 년 이상 동안 필기시험(과거제도)를
통해 정부 관료들을 채용해온 한국의 전동에 찬사를 보낼 것이다. 이를 일본의 사무라이 역사와 비교해보라. 그들은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가며 자리를 계승했고 그것이 실패하면 자결했다. 일본의
역사는 삶과 죽음, 살인과 권력 장악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일본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자는 라이벌을 가장 성공적으로 죽인 사람이다.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한 다이묘가 마침내
천황까지 통제한다. 일본의 역사는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 투성이다. 바면
한국에서의 권력은 최고의 문장력 및 학식으로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한 최고의 학생에게 돌아간다.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면 한국에서는 문자 그래도 펜이 칼보다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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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피터슨 교수가 우리나라가
침략을 받은 것이 적다고 하면서 몽골의 침략과 임진왜란과 일제 침략, 이 정도가 큰 침략이었고, 다른 침략들은 성격이 다르거나 규모가 작은 것들이라고 했어. 특히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반기를 든 조선 정부와 동맹을 맺기 위해 침략한 것으로 이 때 희생된 사람들도 많지 않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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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627년과 1636년에 일어난 만주족(후금, 청나라)의 두 차례 침략(정묘호란과 병자호란)도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침략으로 언급되지만 사망자 수는 수백만 명 정도가 아니라 수천 명에 그쳤습니다. 이 침략의 목적은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에 새로 들어온 청왕조가 조선을 동맹국으로 삼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지요. 그 전쟁이 두 차례의 침략으로 이어진 이유는 조선이 동맹국이 되는데 동의했으면서도
비밀리에 명나라와 접촉해 청나라를 공격하는 방안을 모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선과 명나라의 밀약을 알게
된 만주족은 다시 조선을 침략해 왕(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냈지만 이번에는 청 왕도에 대한 조선 왕의 충성을 담보하기 위해 왕의 세 아들을 인질로 잡고 조선에서 철수했지요. 그들은 조선에 군대를 남겨두거나, 총독을 임명해 조선 조정을 통제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완전히 조선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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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들에 공감이 가더구나. 그런데 마크 피터슨 교수는 어떻게 이렇게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그는 1965년 선교사로 처음 한국에 왔다가 한국에 매력에 푹 빠져서 한국에 대해 연구를 하였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한국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까지 땄다고 하는구나. 1965년
처음 한국에 발을 디딘 이후로도 여러 차례 장기간 한국에 머물렀다고 하셨어. 그러니 한국 문화도 그렇게
잘 아시고 우리 말도 그렇게 잘 하시는 거구나.
1.
그렇다면 마크 피터슨 교수가
우리나라의 역사가 평화와 안정의 역사라고 생각하는 근거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야기해줄게. 먼저 특정
성씨들이 많다는 거야. 다른 나라들은 나라가 바뀌면 기존 왕의 성씨들은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어 왕의
성씨들이 줄어들게 되는데, 우리나라는 김씨, 이씨, 박씨 등 옛 나라의 왕의 성씨들이 오늘날까지 많다고 하면서 이것은 나라가 바뀔 때 평화적으로 바뀌고 복수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하셨어.
아빠는 두 가지 의문이 들었어. 고려 시대의 왕의 성씨 왕(王) 씨의
인구는 적고, 조선 시대 초기 왕(王) 씨 성을 숨기기 위해 성을 전(全)
씨나 전(田)으로 바꾸었다고 알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실까. 그런 반문을 예상하셨는지, 왕(王) 씨가 오늘날
적은 것에 대해서는 고려 시대에서 왕 씨가 많이 않았다고 하는구나. 지금의 숫자가 고려 시대의 왕 씨의
비율에 비해 그리 적은 것이 아니라고 했단다. 하지만 왕(王) 씨 성을 전(全) 씨나
전(田) 씨로 바뀐 것에 대한 언급은 없었단다. 왕(王) 씨 성을 전(全) 씨나 전(田) 씨로 바꾼 것은 혹시 아빠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또 한 가지 김 씨, 이 씨, 박 씨가 많은 이유가 조선말기 신분제도가 해체되면서 족보를
가짜로 만들면서 김 씨, 이 씨, 박 씨 성으로 많이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이 없어 아쉬웠단다.
…
두 번째로 우리나라가 평화의
역사를 가질 수 있는 요인은 압록강이라는 큰 강이 국경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어. 이민족들은 그
큰 강을 쉽사리 넘지 못하기 때문에 침략이 적었다는 거야. 신발을 벗은 온돌 문화도 평화의 역사의 근거로
들었어. 도망 갈 일이 없어 신발을 벗고 지냈다고 하는데, 이것은
근거가 조금 약해 보였단다. 도굴되지 않은 무덤들이 많다는 것도 왕을 높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고, 봉건제도가 없는 것도 일찍이 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의 안정된 체제를 가지고 있다고 했어. 또 하나 문치에 의한 통치가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 있던 힘이라고 이야기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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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나는
한국이 안정적으로 평화적인 문치의 역사를 유지해온 핵심적인 이유가 몇 가지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인이 아닌 선비에 의한 정부였다는 점을
누차 강조해왔습니다. 모든 관리들은 과거 시험을 통해 등용되었으니까요.
정말이지 한국의 역사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과거 시험은 유교적 철학적 문제에 관한 것이었지요. 비록 그 제도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한국은 중국보다 그 제도를 훨씬 더 완벽하게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거듭 강조하지만 한국은 중국처럼 그렇게 많은 침략을 받지 않았습니다.
한국이 겪은 침략과 중국이 겪은 침략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 횟수가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중국이야말로 한국보다 훨씬 더 큰 침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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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밖에 우리나라 문화에 대해서도
많이 이야기를 해주셨단다. 우리나라는 한(恨)의 민족이라는 말을 많이들 한단다. 한 맺힌 일들이 많아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것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단다. 하지만 마크 피터슨 교수가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일제 감정기 식민사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구나. 약간 충격적이란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어.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한(恨)의 민족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심지어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였으니까 말이야. 이것이 다 교묘한 식민사관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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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최근에는
‘한(恨)’이라는
개념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신 박사님도 그것이 일본의 강제 점령에서 나온 식민지 역사관의 일부라고
말씀하셨는데, 맞습니다. 나는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 해석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어떤 맥락에서는 식민사관이 한국 역사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고, 조선 시대 당파 논쟁도 자신들의 시각대로 극단적인 대립으로 해석했지요. 한국
역사를 식민지 과점으로 보는 시각이 분명히 있다는 주장은 기본적으로 옳은 지적입니다. 한국 역사의 왜곡은
일부는 식민사관을 가진 악의적인 일본 역사학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생긴 것이고, 일부는 유럽에서 들어온
시대에 뒤떨어진 이데올로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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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유교를 기반으로 한 생활문화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시각으로 이야기하셨어.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자유롭고 개방적인 한국식 유교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확 바뀌었다고 했어. 그건
널리 상식으로 알려져 있으니 새로운 것이 없었지. 그런데 그렇게 유교가 변하게 된 시점에 대해서는 시각
차이가 있단다.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유교가 변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마크 피터슨 교수는 그 때가 아니라고 하셨어. 임진왜란이 끝나고도 2~3세기가 더 흐른 다음에 변화가 생겼다고 했어. 그 때 중국식
유교가 유입되면서 자유롭고 개방적인 한국식 유교가 폐쇄적인 유교가 변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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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사항은 이런 변화가 임진왜란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1592년, 1627년, 1636년의
전쟁 이후에 조선이 사회 경제적으로 크게 변화했다고 말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전쟁 후에 한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쟁 이전 상태의 사회와 정부를 복원하는 것이었지, 어떤 변화된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언급하는 조선의 사회적 경제적 이념적 변화는 그로부터 2~3세기 지난 뒤에 찾아왔는데, 이 점이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조선의 이런 변화가 일본인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주장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지요.
백성들을 전쟁터에서 남겨 놓고 도망간 불명예스러운 왕, 한양을 떠날 때 백성들이 돌을 던졌던
그 왕이 돌아와 다시 왕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조정의 관리들과 정부도 이전과 같이 재건되었고, 농부들도 다시 그들의 농토로 돌아갔으며, 그리고 가장 놀랍게도 노비들도
다시 노비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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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피터슨 교수는 우리 옛
문학의 한 장르인 시조(時調)도 사랑하신다면서 정몽주의 단심가
등을 즉석에서 읊으실 수 있을 정도였어. 그러면서 우리나라 내에서 시조가 쇠퇴하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셨단다. 오히려 외국에서 시조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시조에 관련된 행사들이 많이 열리고 있다고 했어. 이런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나라에서 좀더 신경을 썼으면
좋겠구나. 그런데 지금 정부에는 기대하기 어려우니, 다음
정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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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국제사외는
이제 막 시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시조를 더 많이 쓰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한국 밖에서 시조 운동이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으니 이제 국내에서도 시조를 한국 문화의 살아 있는 전통으로 부흥시키고, 교육 시스템
내에서뿐만 아니라 방과 후 생활 속에서도 시조를 쓰는 훈련을 계속함으로써 학생들이 더 창의적이 되기 위한 길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시조 만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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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대략적으로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봤는데, 우물 안에서 틀에 고정된 역사 공부로 각인된 우리나라의 역사사관을 깨는 새로운 시각이
좋았단다. 그것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또 하나의
역사가의 역사관으로 생각하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도 왜곡된 역사관으로부터 얻은 지식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아직도 우리나라에 일본 식민 사관에 물든 역사학자들이 무척 많으니 말이야. 이번 정부에서 그런 친일 사관을 가진 자들이 국가 정부 요직에 계속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구나. 도대체 이런 친일 정권이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는가? 3년, 아니 3일도 너무 길다.
PS,
책의 첫 문장: 처음 한국 문화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었다.
책의 끝 문장: 이 책은 한국의 역사가 놀랄 만큼 문민적이고, 안정적이며, 평화롭고, 독특하다는
증거를 많은 분야에서 제시하고 있다!
요즘 일부 한국인들은 미래를 걱정한다. 오랜 원한이 맺힌 일본이나 중국의 침략 가능성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우려에 대한 내 대답은 ‘한국인은 한국어로 말한다’라는 것이다. 그 말의 의미는 한 나라의 모든 문화적 사안 중에서 언어가 단연 문화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수 세기 동안 한국을 속국으로 삼아왔으면서도 한국인의 언어를 파괴하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한국인의 언어를 파괴하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이 전쟁에 패해 한국을 떠나자마자 한국인들은 곧바로 한국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일본어로 말하라고 강요받았을 때도 한국어를 썼다. 그들은 공적으로 일본어를 말하도록 강요받았지만 사적인 공간에서는 여전히 한국어를 사용했다. - P13
한국사에 대한 나의 가장 기본적 시각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한국사에 대해 전반적으로 매우 왜곡된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의 가난과 억압으로 왜곡되었고 외부의 영향, 특히 일본에 의해 때로는 고의적으로 때로는 부지불식간에 왜곡되어온 것이다. 나는 한국을 희생자라고 보는 일반적 서술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 대부분 기간에 일본의 희생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인식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고도 끝나지 않았다. 일본의 식민지 점령보다 더 큰 피해를 초래한 한국의 분단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존재하는 피해의식의 요인이 되었다. 희생이 한국 역사에서 강력한 주제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한국 역사의 유일한 주제는 아니다. - P35
조선 왕실 사위들의 족보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신채용 박사는 <선원록>이라는 왕실의 족보를 통해 왕실 사람들과 주요 정치 세력 사이의 관계를 연구했습니다. <선원록>은 세계 어느 왕실의 왕족 족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정말 웅장한 족보입니다. 조선의 왕실보다 족보를 더 소중하게 기록하고 보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왕실의 족보는 그 나라 족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지요. 더구나 한국의 모든 왕실은 어느 왕조에서나 자신들의 족보를 인쇄물로 남겼습니다. 족보는 왕실의 권위를 나타냈으니까요. - P230
물론 한국사 교육에서도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적4어도 한국사의 핵심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반적인 방향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나는 그런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한국 역사를 희생의 역사로 보는 관점이다. 물론 20세기만 보면 한국은 분명 희생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더 이상 20세기가 아니다. 그리고 20세를 너머 한국 역사를 보면 한국의 전 역사를 희생의 측면으로 보는 것도 사실이 아니거니와 비생산적이기도 하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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