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기존 학계의 지배층이 동물계를 수컷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남성들이었고 또 많은 분야에서 지금도 그렇다는 사실이 문제를 악화시켰다. 연구에 영감을 주는 질문 역시 남성의 관점에서 던져졌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암컷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수컷은 사건의 중심이자 모델 생물이 되었으며, 암컷이 존재하는 토대이고 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엉망진창인 호르몬에 좌우되는 암컷은 주요 사건과는 상관없이 주변부에서 산만하게 얼쩡대는 이상치이므로 수컷과 동일한 수준의 과학적 검토를 받을 필요조차 없었다. 암컷의 몸과 행동은 조사되지 않았다. 그로 인한 데이터 공백이 급기야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었다. 암컷은 언제까지나 수컷의 노력을 보조하는 무기력한 존재로 취급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연구된 적이 없으니 들이밀 결과가 있을 리가 없다.


(54-55)

X 염색체와 비교했을 때 Y 염색체는 가장 약한 녀석이다. 제대로 크지도 못했고 유전물질도 훨씬 적게 갖고 있다. 그러나 염색체에서는 크기보다 그 안에서 무엇을 암호화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실제로 Y 염색체에는 SRY(Sex-determining Region of the Y, Y 염색에의 성결정 지역)라는 아주 중요한 성결정 유전자가 자리 잡고 있다.


(74)

조직개념은 테스토스테론의 전능함만을 강조해왔지만 에스트로겐 역시 강력한 호르몬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에스트로겐은 앞에서 본 것처럼 개구리의 성을 전환하는 능력과 함께 테스토테론만큼이나 발생 초기에 동일한 조직에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드러났다. 또한 크루스는 에스트로겐을 차단하여 발생 중인 도마뱀 암컷의 성을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에스트로겐은 분명 암수의 성 발달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또한 이후에도 성적 행동을 활성화하는 근본적인 책임을 맡고 있다. 여성성 호르몬은 정소와 정자를 만드는 데 필요할 뿐 아니라 일부 종에서는 수컷의 교미 행동을 자극한다고 밝혀졌다.


(122)

동물의 왕국에서 암컷은 수컷에게 빼앗긴 성적 운명의 통제권과 알의 친자 결정권을 되찾기 시작했다. DNA 검사 기술로 도마뱀에서 뱀, 바닷가재까지 다른 암컷들의 정절이 속속 철회되었다. 일처다부의 경향은 모든 척추동물에서 발견되었고 무척추동물에서도 예외가 아닌 표준으로 선언되었다. 한편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함께하는 진정한 성적 일부일처는 극히 드물어 지금까지 알려진 종의 7퍼센트 미만에서 확인되었다.


(133-134)

여성의 성적 취향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400~500만 년 동안 어떻게 변해왔는지 추측의 영역이다. 인간은 오늘날 사회적으로 일부일처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건 동부요정굴뚝새도 마찬가지다. 데이비드 M. 버스 같은 진화생물학자는 모든 여성이 아이들을 가장 잘 부양하기 위해 궁극적으로 일부일처를 추구한다는 생각을 즐길지도 모르지만, 만약 정절이 여성의 타고난 자질이라면 왜 그렇게 많은 문화에서 여성의 성생활을 통제하려고 애를 쓰겠냐고 허디는 묻는다. 통제 수단이 비방의 말이든 이혼이든 심하게는 할례이든 간에, 그 이면에는 여성을 방치하면 성적으로 난잡해진다는 보편에 가까운 의심이 깔려 있다. 허디가 지지하는 새로운 관점은 여성이 가진 성적 성향의 잠재력을 억제하고 제한하기 위해 가부장적 사회 체계가 진화했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는 여성의 정절이 대단히 유연하게 작용한다. 처한 환경과 다양한 선택지에 따라 달라질 뿐, 아무리 유행하는 패러다임이라도 배우체의 숙명으로 여성의 정절을 예측할 수는 없다.


(243)

옥시토신은 근본적으로 엄마가 되는 실질적인 생리 과정과 연관되어 있어요.” 로빈슨이 내게 설명했다. 이 호르몬은 부드러운 근육 수축제로 작용하여 포유류에서 자궁이 아기를 밀어내도록 자극한다. 옥시토신이라는 명칭도 그리스어로 신속한 출산이라는 뜻에서 왔다. 또한 옥시토신은 유두에서 젖이 나오는 것도 촉진한다. 분만의 물리적 과정은 혈류에 있는 옥시토신에 의해 자극된다. 그러나 출산 중에 자궁경부가 확장되고 질이 늘어나면 그때부터 뇌에서는 전능한 옥시토신이 물밀듯이 쇄도한다. 그 결과 이 천연 아편제는 초보 엄마가 세상에 갓 나온 아기와 유대감을 형성하도록 단단히 준비시킨다. 아기가 젖을 빨기 시작하면 엄마의 뇌는 옥시토신에 흠뻑 적셔져서 아기를 돌보는 일에 중독이 된다.


(250-251)

엄마가 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진화적 영향력을 가진 대단히 까다로운 일이다. 이처럼 어미가 아닌 다른 개체와의 사이에서 형성되는 유연한 애착 관계는 엄마로 하여금 유일한 부모상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을 덜어주고 훨씬 넓은 범위의 돌봄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버려진 새끼를 입양한 회색물범의 경우처럼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애초에 공동 양육이 진화한 종도 있다. 이는 이중 업무’, 소위 투잡을 뛰어야 하는 동물의 어미에게 엄청난 이점이다.


(299)

영화 <마다가스카르>에서 아프리카의 이 커다란 섬은 줄리언 대왕이라 불리는 알락꼬리여우원숭이가 지배한다.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들이 사실주의적 묘사로 유명한 건 아니지만 줄리언 대왕이 실제 마다가스카르 출신이라는 점에서 독자는 그를 신뢰할 만한 인물로 판단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영화 속 줄리언 대왕의 설정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실제로도 마다가스카르에는 알락꼬리여우원숭이가 많이 살지만 그들의 리더는 왕이 아니라 여왕이다. 영화 제작진은 자신들이 만든 영화에서 남성을 지배자로 내세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꼈을지 몰라도 알락꼬리여우원숭이 사회를 지배하는 성은 단연 암컷이다.


(343)

결국 인류 과거에 대한 가장 적절한 재구성은 침팬지와 보노보의 특징을 섞은 형태일 것이다. 그것이 침팬지에 더 가까웠는지 보노보에 더 가까웠는지는 영원한 논쟁거리가 될 수 있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게 아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기에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미래는 다르다. 보노보 사회가 영감을 준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보노보 이야기는 우리에게 남성이 공격적으로 여성을 지배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행위와 능력은 환경적, 사회적 요인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여성에게 힘을 부여한 핵심적인 요소는 압제적인 가부장제를 무너뜨리고 좀 더 평등한 사회를 꾸려나가는 데 필요한 자매결연의 힘이다. 여기에서 자매란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까지 모두 아우른다.


(360)

진경한 완경(完經)은 생식기관의 노화와 신체의 노화가 분리될 때 일어난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생식기관은 몸의 다른 부분보다 더 빨리 늙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동물원에서 폐경을 경험한 고릴라는 공짜 식사와 건강 관리로 수명이 인위적으로 연장되었다. 야생에서 고릴라 암컷은 35~40년을 살지만 사육 상태에서는 60년까지도 살 수 있다. 몸과 뇌가 난소의 나이를 넘기는 것이다. 5000종의 포유류 중에서 야생에서 자연적으로 완경에 이른다고 알려진 종은 이빨고래류 4종과 인간뿐이다.


(379)

레이산알바트로스는 스테로이드에 심각하게 중독된 갈매기처럼 보인다. 22종의 알바트로스 중에서 체구가 가장 작을지 모르지만 날개를 활짝 펴면 농구계의 거인 르브론 제임스도 꼬마처럼 보일 정도다. 이 바닷새의 특별한 체격은 역동적인 활공에 최적화되어 해양의 상승기류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 날개 한 번 움찔대지 않고 푸른 지구를 수천 킬로미터나 항해할 수 있다. 알바트로스는 물갈퀴 달린 발로 한 번도 땅을 밟지 않고 바다에서 몇 년을 보낼 수 있다. 지구력만큼 이길 자가 없는 이들은 선원과 시인과 신화 창조자들에게 똑같이 신성시되었다.


(425)

저는 학계의 테러리스트예요.” 러프가든이 농담처럼 내게 말했다. “영욱에서 다윈은 일개 과학자가 아닌 국가의 영우이죠. 다윈의 업적을 칭송하는 것은 영국 정체성의 일부입니다. 그 바람에 영국 진화생물학계는 보수적인 성향이 아주 강하게 되었지요.”


(435)

동물의 왕국을 흑백 안경을 쓰고 보는 바람에 다윈과 그의 발자취를 따른 많은 과학자들이 성의 차이점만을 강조하게 되었다는 게 크루스의 입장이다. 유사성을 연구함으로써 배울 것이 더 많은데 말이다.

사람들은 사실 수컷과 암컷의 형질 대다수가 비슷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수컷이든 암컷이든 모두 뇌가 있고 심장이 있고 몸이 있어요. 서로 다른 성 사이에는 차이점보다 유사점이 더 많아요.”


(441)

과학이 동물의 암컷을 얼마나 왜곡해왔는지를 책으로 쓰겠노라 처음 마음먹었을 때, 그 이야기가 이렇게 커질 줄도 몰랐고 내 대상이 이토록 문화적으로 오염되어왔는지도 몰랐다. 나는 막연하게 과학이란 당연히 과학적일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성적이고 증거에 기반하여 실험을 통해 추론되고 오염되지 않은 지식이라고 말이다. 내가 대학에서 복음처럼 배운 진화생물학의 기본 개념들이 편견에 의해 왜곡되어왔다는 것은 충격적 깨달음이었다. 그 덕분에 자신의 편견에 맞서게 되었고 과연 우리가 개인적 인지의 족쇄에서 벗어나 동물의 세계를 진정 공정한 눈으로 볼 수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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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특별판) -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
카이 버드.마틴 셔윈 지음, 최형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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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라는 영화가 얼마 안 있으면 개봉한단다. 오펜하이머라고 하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람인데, 2차 세계대전 때 핵폭탄을 만든 맨하튼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사람으로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갖고도 있단다. 아빠는 오래 전에 제레미 번스타인의 <베일 속의 사나이 오펜하이머>라는 책을 읽고 나서 오펜하이머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되었단다. 그런데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 예고편이 추천동영상으로 떠서 보게 되었단다. 눈이 돌아갈만한 화려한 출현진도 출현진이지만, CG를 하지 않기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핵폭탄 장면을 어떻게 찍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예고편만 봐도 영화의 웅장함이 느껴졌단다. 우리나라의 개봉일은 8 15일에 한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의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지만, 날짜를 잘 잡았구나. 아무래도 우리나라 광복과도 연관이 있는 사람이니까….

유튜브에서 <오펜하이머> 예고편을 보고 난 얼마 후 알라딘 인터넷 서점의 초기 화면에 낯익은 얼굴이 책 앞표지를 가득 채운 책 한 권이 올라왔단다. 유튜브에서 본 예고편 속의 그 얼굴. 오펜하이머. 그 책을 바로 클릭해봤는데 오펜하이머의 평전이더구나. 책의 제목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으로부터 불을 빼앗아 간제우스 신으로부터 다시 불을 빼앗아 온 그리스 신이잖니..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식상한 말보다 훨씬 있어 보이는구나. 책 제목 잘 지은 것 같구나. 이 책은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을 앞두고 출간한 모양인데, 이미 오래 전에 출간된 책인데 이번에 특별판으로 다시 출간한 것이라고 했단다.

아빠가 오펜하이머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어. 그런데도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 영화 <오펜하이머>의 예고편이 떠올랐다고 했잖아. 그래서 처음에는 책 표지 사진이 영화 속 배우 사진인줄 알았단다. 다시 자세히 훑어 보니 오펜하이머의 실제 사진이었단다. 당연히 오펜하이머의 사진이어야겠지. 순간 든 생각은 영화 속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을 진짜 잘 뽑았다는 생각과, 엄청 잘생겼다는 생각이었단다. 책 소개를 읽다 보니,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 책을 읽고 영화화 하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아빠는 이미 오래 전에 오펜하이머에 대한 책을 읽었지만, 기억도 다 흐려졌고, 영화를 보기 전에 준비 운동으로 읽어보려고 바로 결재했단다.

결재할 때는 책 소개를 자세히 보지 않았는데, 집에 도착한 책을 보니 어마어마한 벽돌책이더구나. 천 페이지가 넘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주석과 참고 문헌이 백 페이지 정도 되었고, 실제 읽어야 할 부분은 900페이지 남짓이었단다. 그래도 900 페이지라도…. 이렇게 두꺼우면 출판사 욕심이 분책을 했을 텐데, 분책하지 않고 한 권으로 내준 것이 고맙구나. 이 책은 카이 버드라는 사람과 마션 셔윈이라는 사람의 공저인데, 참고 문헌도 엄청난 것으로 보아 지은이들도 참 대단한 사람들인 것 같구나. , 그럼 이 책의 내용을 시작해 보자꾸나.


1.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그의 부모님은 독일계 이민 1, 2세대로 아버지는 사업가이시고, 어머니는 화가였단다. 모두 유태인이었고, 뉴욕에서 살고 있어서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04 4 22일 뉴욕에서 태어났단다. 오펜하이머가 성()이긴 한데 그 이름이 유명하니, 호칭은 오펜하이머로 이야기를 할게. 오펜하이머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사업 성공으로 생활이 넉넉했단다. 네 살 어린 둘째가 태어나자마자 죽어서, 오펜하이머의 부모님들은 오펜하이머를 과잉보호 하면서 키웠다고 하는구나. 다시 동생이 태어났는데 오펜하이머보다 여덟 살 어린 프랭크였단다.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났지만, 둘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무척 친하게 지냈단다.

오펜하이머는 하버드에 입학을 해서 화학을 전공했는데, 3년만에 졸업을 하고 물리를 공부하고 싶어서 영국 켐브리지 대학의 러더퍼드 교수의 제자가 되겠다고 지원을 했단다. 화학과 물리, 그 어려운 학문을 둘다 하고 싶었다니아빠 같은 범인은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그런데 러더퍼드는 오펜하이머를 불합격시켰다고 하는구나. 그러면서 오펜하이머의 추천서를 톰슨에게 넘겼는데, 톰슨은 그를 받아주었어. 러더퍼드, 톰슨이런 분들은 현대물리학에서 있어 유명한 사람들로 너희들도 교과서에서 많이 보게 될 사람들이란다. 어떤 일은 한 것까지 이야기하기에는 이 편지가 길어질 것 같으니, 오늘은 오펜하이머에만 집중을 하는 것으로 하자.

그렇게 영국 켐브리지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처음으로 양자역학을 접했다고 하는구나. 지금까지 삶을 보면 공부를 엄청 잘하는 모범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에게도 단점이 있단다. 학교 생활에 불안을 느끼는 경향이 있어 우울증도 겪고 발작 증세도 있었어. 그래서 정신과 진료도 한 동한 받았다고 하는구나. 친한 친구들과 여행을 하고 증세가 좀 좋아졌다고 하는구나. 친한 친구들과 여행은 이렇게 사람의 몸과 정신을 건강하게 해주는구나.

오펜하이머는 점점 공부하면 이론 물리학을 전공하기로 했어. 그런데 당시 켐브리지 대학은 실험 물리학의 중심지였어. 이론 물리학의 중심지는 독일의 괴팅겐이라는 곳이었어. 그래서 오펜하이머는 1926년 괴팅겐으로 자리를 옮겼단다. 괴팅겐에는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많았고, 오펜하이머 역시 그들과 교류하면서 양자역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했단다. 막스 보른, 하이젠베르크, 디랙 등 양자역학을 연구한 물리학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젊은 과학자들이었어. 이제 막 떠오르는 양자역학은 젊은이들의 과학이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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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양자 물리학은 확실히 젊은이들의 과학이었다. 젊은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이 새로운 물리학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을 그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알리는 신호라고 생각했다. 몇 년 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난 오펜하이머는 실망한 채로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만방자하게도 아인슈타인은 완전히 맛이 갔어.”라고 썼다. 하지만 1920년대 말까지만 해도 괴팅겐의(그리고 보어의 코펜하겐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아인슈타인에게 그들의 양자 이론을 설득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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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보른은 오펜하이머의 지도교수였어. 오펜하이머는 괴팅겐에서 공부하면서 양자역학에 대한 논문을 많이 꼈단다. 1927년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캘리포니아 공대(칼텍)에서 강의를 했는데 당시 미국에는 양자역학을 연구한 물리학자들이 드물어서 오펜하이너는 양자역학의 선두주자라 볼 수 있었지. 잠시 미국에 머물던 오펜하이머는 다시 양자역학을 공부하기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의 에렌페스트 교수에게 배우려고 했는데, 에펜페스트 교수가 우울증을 앓고 계셔서 오펜하이머는 스위스 취리히 파울리 교수에게 지도를 받게 되었단다. 파울리 교수 밑에서 1929년까지 많은 논문을 썼는데, 이 즈음에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어.

1929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어. 잠시 쉴 때는 주로 뉴멕시코에서 지냈는데, 동생 프랭크와 자주 같이 지냈다고 하는구나. 형으로서 십대 프랭크의 인생상담도 많이 해준 것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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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1929년 오펜하이머는 동생에게 모든 남자들은 여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지. 그런 욕망이 꼭 허영심만은 아니야. 하지만 그와 같은 매력은 가지고 싶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사람들은 멋진 취향이나 행복을 갖고 싶어 하지만 의지만으로 그것들을 얻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것들은 한 사람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들이야. 행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무런 설계도 없이 기계를 만들려는 것과 같을 테니까.”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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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문학도 많이 읽고, 철학에도 관심이 많았고 시도 자주 썼는데, 문학잡지에 실리기도 했다는구나.


2.

미국에 와서 그는 칼텍과 버클리 대학교 분교에서 일하게 되었어. 그와 친한 동료 교수로는 로런스 교수가 있는데, 로런스는 실험 물리학을 전공하였고, 사이클로트론을 발명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단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정세가 급박하게 변했어. 1933년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유태인을 탄압하게 되어 많은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는데 그 중에 유명한 과학자들도 많이 있었어. 오펜하이머는 이들 과학자들을 후원하기도 했단다. 오펜하이머는 이때 인도출신 동료 교수를 알게 되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영향을 받기도 했대.

1930년대는 히틀러의 나치가 독일에서 세력을 키워나가고 공산주의도 전세계적으로 퍼지던 시기여서,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 오펜하이머와 주변 사람들도 관심을 갖게 되는데 1930년를 살던 사람이 정치성을 띠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단다.

, 이번에는 오펜하이머의 사랑 이야기를 좀 해보자꾸나. 1936년 스탠퍼드 의대생 진 태트록을 알게 되어 둘은 사랑에 빠진단다. 그런데 진 태트록은 공산당을 가입하게 되어 나중에 오펜하이머에도 이 일로 심문을 받게 된단다. 그리고 진 태트록을 통해서 다른 공산당원들과 교류를 하게 돼.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공산당에 정식 가입한 이력은 없다고 하는구나.(공산당에 가입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긴 해.) 그래서 FBI에서 오펜하이머도 조사 대상에 올렸고, 단순동조자로 판단하였다고 하는구나.

1939년 독일과 소련은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었어. 이것이 무엇이냐면, 독일과 소련은 서로 침략하지 않고, 남을 침략해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거야. 당시 독일이 폴란드를 불법 침략을 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시작했는데, 소련은 간섭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독일 편을 들어준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어. 이 소식을 들은 미국 내 공산주의자들도 의견이 분분하였고, 소련의 이런 행동에 실망한 이들의 공산당 탈당 러시가 이루어졌대. 오펜하이머도 이 때부터 소련을 경멸하기 시작했다는구나.

오펜하이머는 진 태트록과 4년 정도 사귀고 헤어졌어. 그리고 키티 퓨닝이라는 유부녀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임신까지 하게 되어 키티는 이혼을 하고 오펜하이머와 결혼을 하였단다. 1940 11월이었어. 키티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하면, 키티도 공산주의자로 유럽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이었어. 첫 번째 남편은 한술 더 떠서 스페인 내전까지 참전했는데, 그만 전쟁에서 죽고 말았단다. 남편이 전사하고 나서 키티는 충격을 받고 미국으로 와서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생물, 화학, 수학을 공부했대. 그 대학에 다니다가 같은 대학 의과 대학 인턴을 사귀고 두번째 결혼했는데 이 결혼은 실패한 결혼으로 무늬만 유부녀였어. 그 시기에 오펜하이머를 만난 것이란다.


3.

1939 1월 우라늄의 원자핵을 2개 이상으로 쪼갤 수 있다는 실험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어. 이것이 뭐 대단한 것이냐고 보통 사람들은 이야기하겠지만, 물리학자들에게는 한 가지를 떠올리게 했어. 핵폭탄(원자폭탄). 우라늄의 원자핵 분리를 이용하면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1942년 미국의 물리학자들(아인슈타인도 포함)과 여러 관계자들은 모여서 원자폭탄 개발의 필요성을 루즈벨트 대통령한테 설명을 했대. 특히 독일이 원자폭탄을 먼저 만들면 큰 일 난다고 했고, 이미 독일은 원자폭탄 개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어. 미국은 독일에 비해 원자폭탄 개발이 늦었다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들의 제안을 허락했고, S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조직이 만들어졌는데 오펜하이머도 동참했단다. 이 프로젝트는 나중에 맨하튼 프로젝트라고 명명했고, 엔지니어 출신 육군 중령인 그로보스가 총지휘를 하였단다. 이렇게 맨하튼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 1942 9월이었단다. 그로보스는 연구 총책임자로 오펜하이머로 지목했어. 하지만 당시 동료연구원들은 오펜하이머가 총책임자로 적임자는 아닌 것 같다고 했어. 정치권에서도 그가 공산주의 활동을 이유로 반대를 했어.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그는 일을 하면 할수록 총책임자의 적임자가 되어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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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

한때 괴짜 이론 물리학자이자 장발의 좌파 지식인이었던 오펜하이머는 이제 대단히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일류 지도자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윌슨은 그에게는 품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지요. 그는 우리가 그의 약점이라고 지적했던 것들을 단 몇 달만에 말끔하게 털어버렸습니다. 게다가 행정적인 절차들에 대해서도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의구심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라고 말했다. 1943년 여름 무렵이면 윌슨은 그와 함께 있으면 내 능력 이상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오펜하이머의 사람이 되었고, 그를 매우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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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밀 프로젝트를 위해서 장소를 섭외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협곡 사이에 위치한 로스앨러모스라는 곳이었어. 그곳에 대규모 연구 단지를 지었고, 가족들이 함께 와서 살 수 있는 마을도 새로 지었단다. 오펜하이머는 연구 단지뿐만 아니라 연구 단지 마을의 인프라에도 신경을 써서 부족함 없게 했다는구나. 오펜하이머는 전국 각지의 인재들을 섭외하게 되었는데 그중에 리처드 파인만도 포함되었다고 하는구나. 오펜하이머의 가족들도 로스앨러모스의 공동체 마을에서 생활했는데, 카티는 이곳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했대. 이곳에 와서 둘째 아이인 딸 토니를 낳았는데, 갓난 아기 토니를 이웃집에 맡기고 첫째 피터만 데리고 여행을 하기도 했다는데 그만큼 그곳 생활을 적응하지 못했다고 하는구나.

이제 오펜하이머의 목적은 단 하나. 나치스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일. 독일에서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하는 인물이 하이젠베르크라는 소문이 있어. 하이젠베르크를 납치하려는 계획도 있었으나 실행하지는 않았다고 하는구나. 하이젠베르크가 독일로부터 원자폭탄 개발을 제안 받았으나 그가 일부러 개발을 늦추거나 못하겠다고 하는 소문도 있었다는 기억이 나는구나.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쓴 소설 <클링조르를 찾아서>을 읽은 적이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그 책을 일고 쓴 독서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

이런 와중에도 FBI는 여전히 오펜하이머를 검열하고 도청하면서 감시했다고 하는구나. 오펜하이머가 전 여친 진 태트록을 만났는데, 소련을 정보를 빼내려고 했다고 의심을 하기도 했어. 하지만 진 태트록은 조울증과 우울증과 싸우고 있었으며, 결국 그 싸움에서 지고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고 하는구나.


4.

양자역학의 거물급 학자인 닐스 보어도 미국으로 망명을 왔단다. 2년 전에 하이젠베르크를 만났다고 했는데 그 때 어떤 대화가 이루어졌는지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지만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고 했어. 이 내용도 앞서 이야기한 소설 <클링조르를 찾아서>에서도 그들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구나. 보어는 원자폭탄 개발에 있어 정치적 윤리적 문제를 가지고 국제적으로 협의를 해야 한다고 했어.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하는 과학자들은 개발이 진행될수록 고민이 되었을 거야.

1943 12, 독일이 원자폭탄 개발을 중단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어. 그러면 미국도 원자폭탄 개발을 중단해야 하는가. 독일이 아니면 일본도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했어. 원자폭탄 개발은 일정대로 진행되었어. 1945 5월 히틀러가 자살을 하면서 사실상 유럽에서2차 세계대전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단다. 원자폭탄을 개발해도 쓸 데가 없는 건가? 이제 남은 것은 일본인데, 사실 일본도 시간만 지나면 패망할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었어. 정치인들과 군인들 사이 폭탄 사용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어.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아이젠하워 장군은 원자폭탄에 반대했다는구나.

하지만 변수가 하나 있었어. 소련이 미국과 일본 전쟁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어. 시간이 지나면 일본이 패망하는 것은 맞는데, 소련이 일본본토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오면 전쟁 후 상황이 복잡해질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소련이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원자폭탄이 해결책이라고 했지. 드디어 원자폭탄 개발이 완료되어 사막에서 폭발 시험을 했는데, 시험은 성공적이었지만, 그 성능에 모든 사람들이 놀라면서도 향후 이 무기가 인류를 멸망시킬지도 모른다고 겁을 먹었을지도 몰라.

그리고 1945 8 6일 오전 8 14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어. 3일 후에는 나가사키에 떨어졌고그 두 방으로 일본은 곧바로 항복을 하고 전쟁은 끝이 났단다. 피해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단다.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끌려온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았는데 우리나라 사람도 많이 돌아가셨어. 그 이야기는 한수산 님의 소설 <군함도>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구나.

...

이 일이 있고 오펜하이머는 핵무기는 화학무기처럼 국제적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고, 그것이 국제 회담에서 논의되길 바랬어. 하지만 미국, 영국, 러시아(소련)이 모여 진행한 포츠담 회담에서 핵무기에 대한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어. 오펜하이머는 이에 실망하면서도 계속 원자폭탄을 포함한 슈퍼폭탄은 더 이상 안 되고 국제적으로 규제해야 하고 미국도 핵폐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단다. 하지만, 일부 정치인들과 군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이 일본에 떨어진 순간부터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후회를 하는 것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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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

만약에 오펜하이머가 히로시마 폭탄 투하 전에 대통령이 일본인들은 평화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인지했다면, 그리고 대도시를 대상으로 한 원자 폭탄의 군사적 이용이 8월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면, 그가 어떻게 반응했을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속았다고 믿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가 정부 관료들이 하는 말이면 뭐든지 의심하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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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트루먼 대통령을 앞에서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은 대통령에게 밉보이는 행동이 되기도 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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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

나중에 누군가 대통령이 손에 피라니, 제길. 그는 내 손에 묻은 피의 절반도 묻히지 않았어. 그걸 아프다고 떠들고 다니다니.”라고 중얼대는 것을 들었다. 그는 나중에 애치슨에게 나는 두 번 다시 저 개자식을 만나고 싶지 않아.”라고 말했다. 1946 1월까지도 이 일은 그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고, 그는 애치슨에게 오펜하이머를 “5~6개월 전에 내 사무실로 찾아와 손을 비비면서 원자력 에너지를 발견하여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혔다고 말한 울보 과학자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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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펜하이머는 1945 10.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총 책임자 자리를 사임하고 다시 칼텍으로 돌아왔어. 당시 FBI 국장인 후버는 오펜하이머가 공산당원일 거라고 생각하고 다시 감시를 시작했는데 1946년부터 무려 8년간 감시를 했다는구나. 오펜하이머의 사생활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겠구나. 그런 감시와는 별개로 그의 과학적 성과를 인정받아 1947 3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고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이사로도 임명되었어.

그는 연구소장에 있으면서 TS 엘리엇 등 인문학자들과 작가들을 초빙해서 강의를 개설했지만, 다른 연구원들에게는 좋은 반응으로 보이지는 않았대. 당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는 엄청난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었어. 아인슈타인, 보이, 디랙, 파울리, 괴델, 폰 노이만 등이 있었어.

당시 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냉전시대에 돌입했어. 그러다 보니 정치권에서도 냉전시대의 안 좋은 흐름이 생기기 시작했어. 1949년 정치권에서는 반미활동조사위원회도 그런 것 중에 하나였단다. 공산주의자 지인들이 많은 오펜하이머도 조사를 받았어. 첫 번째 청문회에서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간 줄 알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하면서 내뱉은 이름들이 큰 영향을 받았어. 동료들과 제자들이 대학에서 쫓겨나기도 했어.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알고 담당자를 찾아가 잘못 이야기했다고 했지만, 그들은 오펜하이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어.

동생인 프랭크와 프랭트의 아내 재키도 공산주의자 이력이 있어서 조사를 받았는데, 그 후 프랭크도 대학에서 쫓겨나고 농장 일을 시작했다는구나. 한편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는 여전히 일상 생활을 힘들어했어. 술에 취해 있는 시간이 많았고 우울증을 달고 살았어. 오펜하이머와 키티는 결혼생활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래 행복한 생활은 아니었어.

1949 8월 소련이 원자폭탄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어. 오펜하이머가 경고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거야. 미국은 소련의 원자폭탄에 대항하기 위해 그보다 성능이 좋은 슈퍼폭탄을 개발하자고 했어. 자문위원회였던 오펜하이머는 강하게 반대의견을 피력했단다. 하지만 트루먼 정부는 적극적인 슈퍼폭탄 개발 의지를 보였어. 오펜하이머는 반대파로부터 과거 좌익 이력이 있다면서 다시 공격을 받았어. 그 중에 원자력에너지 위원장을 맡고 있던 스트라우스가 선봉에 섰단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의 뒷조사를 철저하게 했고, 그에게 비밀취급인가를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어. 1950년대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이라는 것이 있었단다. 공산주의자를 색출하여 처벌하는 열풍을 이야기하는데, 미국 상원의원 매카시가 처음 공산주의자가 숨어서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서 시작했는데 근거도 없이 리스트에 오르는 등 피해를 입었다고 했단다. 어쩌면 오펜하이머도 그런 매카시즘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었어. 이미 그 전에 청문회나 맨하튼 프로젝트 책임자를 맡을 때 조사를 이상 혐의점 없다고 했는데 다시 조사하고 청문회를 열게 되었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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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1)

1953년 가을에 워싱턴은 마녀사냥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백 명의 공무원들이 사소한 혐의 때문에 공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 누구도, 심지어 대통령조차도 매카시 상원 의원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195311 24일에 매카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애처로운 유화 정책을 펴고 있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다음날 잭슨은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에게 자신은 매카시가 대통령에게 전쟁을 선포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레스턴은 이 말을 익명의 백악관 관계자의 이야기라며 자신의 칼럼에 인용했다. 한 아이젠하워 보좌관은 기사를 읽고서 잭슨의 발언은 매카시와 그의 동지들이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하기 어렵게 만들 뿐이라며 비난했다. 잭슨은 매카시의 공격에 아무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아연실색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지도력의 부재에 대해 걱정하던 느낌들이 이번 주에 기어코 현실화되고 말았다. 나는 두렵다라고 썼다. 그는 대통령 수석 보좌관 셔먼 애덤스에게 자신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최소한 매카시가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대통령 보좌관들의 생각이 바뀌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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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오펜하이머는 청문회에서 재판을 받았어. 그의 사적인 것까지 다 까발려져 공개되었단다.  그렇게 되자 여론은 오펜하이머가 갈릴레이처럼 박해 받는 과학자라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대. 또는 드레퓌스 사건에 비유하기도 했어. 그만큼 그의 청문회는 납득이 가지 않는 청문회였던 거야. 결국 그는 비밀취급인가 자격을 취소당했는데, 그것보다 더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았을까 싶구나. 1960년대 들어서 케네디 정부가 들어서면서 오펜하이머는 일부 복권이 되었고, 그의 성과들을 다시 인정받아 페르미 상을 수상하기도 했어. 오펜하이머의 영원한 정적 스트라우스는 이에 격분하기도 했대.

오펜하이머는 1965년 후두암에 걸렸는데 40년 동안 이어진 줄담배가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구나. 치료를 시작하여 후두암은 완치가 되었지만, 다른 곳에 전이가 되어서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했단다. 1967 2 18일 오전 10 40분 오펜하이머는 마지막 숨을 쉬었단다. 그리고 1972년에는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가 죽었고, 1977년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딸 토니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대. 아빠가 생각하기에 딸 토니의 자살에는 엄마 키티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렸을 때부터 딸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았고, 우울증 때문일지 모르겠지만 술에 취해 있던 시간이 많았으니

이 책에는 앞부분과 뒷부분에 오펜하이머, 그의 가족들, 그와 연관된 많은 사람들의 일상 사진들이 담겨 있단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젠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겠구나. 그들이 남긴 업적들은 여전이 오늘날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좋든 나쁘든 영향을 받고 있단다. 누군가는 핵무기가 오히려 전쟁 억제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 이도 있단다. 하지만 여전히 핵무기에 대한 공포는 여전히 갖고 있단다. 어떤 또라이 같은 지도자가 어디선가 나타나서 핵무기를 쓸 수도 있으니 말이야.

….

, 아빠가 메모를 하면서 읽었고, 메모를 바탕으로 독서 편지를 썼어. 메모 중간 건너뛰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독서 편지는 엄청 길어졌구나. 이제 곧 영화 <오펜하이머>가 개봉을 하는데 우리들이 좋아하는 로버트 다우트 주니어도 출현한다고 하더구나. 어떤 역으로 출현하나 찾아봤더니, 오펜하이머의 정적인 스트라우스 역으로 나오는구나. 아이언맨의 악역 연기가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이니 기대가 되는구나.

, 그럼 오늘은 이만. 긴 글 읽느라 고생했다.


PS,

책의 첫 문장: 1967 2 25.

책의 끝 문장: 하지만 그 자리에는 주민 회관이 세워졌고, 그 부근은 오펜하이머 해변이라고 불리고 있다.


뉴욕으로 돌아온 오펜하이머는 러더퍼드가 자신을 불합격시켰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오펜하이머는 "러더퍼드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브리지먼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내 경력 역시 그의 눈길을 끌지 못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러더퍼드는 오펜하이머의 지원서를 J.J. 톰슨(1856~1940년)에게 넘겼다. 톰슨은 러더퍼드 이전에 캐번디시 연구소의 소장을 맡았던 저명한 물리학자였다. 69세의 톰슨은 전자를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06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19년에 그는 행정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놓았고, 1925년 무렵에는 실험실에 띄엄띄엄 나오며 가뭄에 콩 나듯 학생을 받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슨이 자신을 받아 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서는 크게 안도했다. 그는 물리학을 직업으로 선택했고, 물리학의 미래와 함께 자신의 미래 역시 유럽에 있다고 확신했다. - P77

오펜하이머는 프루스트의 소설을 처음 읽은 지 10년이 지난 후에도 잔인함을 논하는 구절을 외워 슈발리에를 놀라게 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이 남에게 주는 고통에 무관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사악함이 그토록 드물고, 비정상적이며, 소외된 상태가 아니고 심지어 그 안에서 편히 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와 같은 무관심을 지칭하는 단어는 여럿 있지만, 결국은 끔찍하고 영구적인 형태의 잔인함이라고 할 수 있다."
코르시카에서 오펜하이머는 이 글을 외울 정도로 반복해 읽으면서 자신이 남에게 끼치는 고통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의식했을 것이다.
- P93

나중에 MIT 총장까지 오르게 될 콤프턴은 당시 오펜하이머의 박학다식함에 기가 눌리는 것 같았다. 그는 과학 분야에서는 오펜하이머의 맞수가 될 수 있었지만, 이 젊은이가 문학, 철학, 심지어 정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전혀 대응할 수가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괴팅겐에 와 있는 미국인들은 대개 "프린스턴 대학교나 캘리포니아에서 온 기혼자 대학 교수들이야. 그들은 물리학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지만, 교양 교육은 전혀 받지 못한 것 같아. 그들은 독일인들의 섬세하고 잘 조직된 지적 활동을 부러워하고 있고, 그와 같은 물리학을 미국으로 이식하고 싶어 하지."라고 썼다. 이는 확실히 콤프턴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 P105

괴팅겐은 성인이 되어 가던 젊은이로서 오펜하이머가 처음으로 진정한 승리를 거둔 곳이었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자가 된다는 것이 "터널을 통해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터널 반대편이 계속 위쪽으로 이어져 있는지, 아니면 출구가 있기는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양자 혁명의 끝자락에 걸쳐져 있던 젊은 과학자에게 특히 그러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물리학의 대변동에서 참가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증인에 가까웠지만, 자신이 물리학을 평생 직업으로 삼을 만한 지적인 능력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짧은 9개월 동안 그는 학문적 성과와 성격의 변화를 이루었고, 그 결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단지 1년 전만 해도 그의 생존까지 위협했던 불안한 감정 상태는 이제 상당한 학문적 업적과 그에 따르는 자신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세상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 P118

요점을 말하자면 오펜하이머는 항상 스스로 자유롭게 사고하고 스스로의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어떤 대의에의 헌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균형 잡힌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매카시 시기의 가장 해로운 특징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정치적 편력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1930년대에 미국의 사회, 경제적 정의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좌파의 편에 서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 P244

오펜하이머는 양자 역학을 책만 읽어서는 배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설명하는 과정에서 언어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 자체가 이해에 이를 수 있는 첩경이었다. 그는 같은 강의를 두 번 하지 않았다. 와인버그는 "그는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청중의 얼굴을 보고 어떤 부분에서 이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파악하고는 즉석에서 설명 방법을 완전히 바꾸기도 했다. 한번은 단 한 명의 학생의 관심을 자극하기 위해 강의 시간 전체를 특정한 문제를 설명하는 데 집중하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그 학생은 오펜하이머에게 달려가 그 문제를 자신이 풀어 봐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오펜하이머는 "좋아, 그것이 내가 오늘 세미나를 한 이유라네."라고 대답했다. - P273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의 무시무시한 비밀을 세계가 알지 않고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주장을 전개함으로써 설득에 성공했다. 이것은 모두에게 중요한 순간이었다. 보어의 논리는 오펜하이머의 동료 과학자들에게 특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서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 역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윌슨이 그 순간을 회고했듯이, "내가 당시 오펜하이머에게 느꼈던 것은, 이 사람은 천사처럼 진실하고 솔직해서 잘못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를 믿었습니다. - P443

몇 분 후, 뜨거운 뉴멕시코의 태양을 받으며 단상 위에 앉아 있던 오펜하이머는 그로브스 장군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기 위해 일어섰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는 앞으로 연구소의 작업에 참여했던 모두가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의 성취를 돌아볼 수 있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는 말했다. "오늘 그 자부심은 깊은 우려와 함께해야 합니다. 원자 폭탄이 무기고의 신무기에 불과한 것이 된다면, 인류가 로스앨러모스와 히로시마의 이름을 저주할 날이 올 것입니다." - P501

그래도 오펜하이머는 연구소가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까지도 아루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연구소에 대한 그의 강연에서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이 과학 자체의 특성과 결과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불과 몇 명만이 그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을 뿐이었다. 노이만은 자신의 분야만큼이나 고대 로마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오펜하이머처럼 시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이 연구소를 인간의 삶이 처해 있는 상황들을 총체적이고 다면적으로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가진 과학자, 사회 과학자, 그리고 인문학자들의 안식처로 만들고 싶어 했다. 이는 그가 청년 시절부터 동등하게 관심을 기울여 왔던 과학과 인문학을 화합시킬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런 의미에서 고등 연구소는 로스앨러모스의 정반대이자 심리적 해독제였다. - P571

1953년 무렵이면 냉전은 워싱턴과 모스크바가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의 선택지를 협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핵의 지니 요정을 호리병 속에 가두려 했던 오펜하이머의 노력은 미국 내부에서의 정치적 기류로 인해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제 공화당 출신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 정치 기류는 오펜하이머를 병에 가둬 바닷속으로 던져버리려 했다. - P684

그는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두 강대국들이 상대방은 물론이고 인류 문명 전체를 끝장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자국의 파멸까지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오펜하이머는 "우리는 유리병 속에 든 두 마리의 전갈과 같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요."라고 덧붙여 청중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 P701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폴드 홀 사무실로 걸어가면서 오펜하이머가 있던 방향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조교에게 "저기 나르(nar, 바보)가 간다."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물론 미국이 나치스 독일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펜하이머가 도망쳐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매카시즘에 크게 놀랐다. 1951년 초에 그는 자신의 친구인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편지를 써서, 이곳 미국에서 "수년 전 독일에서의 재앙이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악의 세력들에게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묵종하고 그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오펜하이머가 정부의 보안 위원회에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굴욕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유해한 과정 자체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 P746

개리슨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본 청문회에서는 오펜하이머 박사만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합중국 정부 역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개리슨은 "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걱정"에 대해 말하며 은근히 매카시즘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트루먼과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기에 창궐했던 반공 히스테리로 인해 미국의 국가 안보 기구들은 이제 "공산주의라는 단일한 세력이 훌륭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미국은 자국민들을 먹어 치워서는 안 됩니다." 개리슨은 그레이 위원회가 "사람 전체를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최종 변론을 마쳤다. - P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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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키프로스섬은 솔로몬왕 시절에 구리 생산지로 유명했어. <키프로스>라는 이름도 그리스어로 <구리>를 뜻하는 쿠프로스에서 왔지. 이 섬도 이스라엘 못지않게 외세의 각축장이 됐어.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현대에 들어서는 영국까지 눈독을 들였지. 2차 세계 대전 직후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엑소더스호를 타고 이스라엘 땅으로 향하던 중 영국군에 의해 유럽으로 강제 송환됐는데, 그들 중 일부는 다른 불법 체류자들과 함께 이 섬에 수용됐지. 이 사건은 나중에 미국 배우 폴 뉴먼이 주연한 영화 <엑소더스>로 만들어지기도 했어.”


(213-214)

등검은말벌의 벌집은 제거하지 않으면 이듬해에 네 개로 늘어납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번식하는 거죠. 2005, 그러니까 토냉스시에 최초로 등검은말벌 여왕벌이 유입된 지 딱 1년 만에 로트에가론 지방 전체로 등검은말벌이 퍼져 꿀벌 군락의 30퍼센트가 파괴됐어요. 2006년에는 아키텐 지방에까지 피해가 확산되더니, 2009년에는 급기야 프랑스 전역에서 등검은말벌이 발견됐어요. 이때부터 사람의 사망사고도 잇따랐죠. 등검은말벌의 침에 쏘이면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 혈관 부종으로 이어져요. 침을 한번 박아 넣으면 빼지 못하고 죽는 꿀벌과 달리 등검은말벌은 여러 번 침을 쓸 수 있어요. 그러는 사이 우리 몸에 많은 양의 벌 독이 주입돼 사망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프랑스에서만 매년 1백여 명이 등검은말벌에 쏘여 사망한다는 통계가 있어요.”


(218)

꿀벌은 개미, 등검은말벌과 함께 말벌에서 분화돼 나왔죠. 고릴라와 침팬지, 인간이 같은 조상을 둔 영장류 동물인 것과 같아요. 원시 말벌을 조상으로 둔 개미와 꿀벌, 등검은말벌은 일종의 <사촌 형제>인 셈인데, 먹이가 이들을 저마다 다르게 진화시켰다고 이해하면 돼요. 꿀벌은 식물성, 등검은말벌은 동물성, 개미는 잡식성이죠. 이 세 막시류 곤충은 여러 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커다란 공통점이 있어요. 군집 생활을 하며 한 마리의 여왕을 중심으로 계급 체계가 짜여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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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1권 - 개화기편,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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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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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역사 관련 책을 좋아하잖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그 옛날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참 재미있더구나. 그리고 몰랐던 역사 상식 하나씩 알게 되는 것도 좋고 말이야. 비록 얼마 못 가 까먹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말이야. 이런 역사책을 학창시절에는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 모르겠구나. 국사, 세계사라는 과목들이 아빠가 싫어했던 과목들이거든. 그런데 요즘에는 무척 좋아하게 되었단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여러 권으로 된 시리즈도 즐겨 있는데, 이번에 읽은 강준만 님의 <한국 근대사 시리즈>도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던 시리즈란다. 강준만 님의 <한국 현대사 시리즈>도 있는데, 그건 분량이 너무 많아서 엄두가 안 나고, <한국 근대사 시리즈> 10권으로 한번 도전할 만하다 생각했어. 너희들에게 해줄 역사 이야기꺼리도 생기고 말이야. 강준만 님은 교수이자 비평가로도 많이 활동을 하는 분이란다. 예전에는 아빠랑 정치적 노선이 맞아서 그의 책들도 여럿 가서 보긴 했는데, 언젠가부터 다른 길을 가시는 것 같더구나.

그래도 <한국 근대사 시리즈>는 역사물이니 괜찮겠다 싶었어. 아빠도 근대사를 한번 쭉 정리를 할 수 있는 기회도 되고 말이야. 그런데 이 책은 구성이 좀 독특하구나. 어떤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여러 역사가들이나 비평가들이 쓴 내용들을 발췌를 해서 정리를 해주는 식이란다. 지은이의 생각도 들어있지만, 다른 역사가들과 비평가들의 글들이 더 많이 실려 있는 것 같았어, 그런데 아빠가 모르는 비평가들이 많은데, 그 비평가들이 옳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더구나. 심지어 아빠가 싫어하는 신문의 내용도 실었는데, 아빠가 보기에는 편중된 시각으로 적힌 것 같은데, 지은이께서는 아무런 평을 하지 않더구나. 역사적 사건을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인 것 같기도 한데 그런 방법은 아빠에게는 별로였단다. 아빠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나라 근대사를 한번 쭉 훑어보는 기회로만 삼아야겠구나.


1.

언제부터 우리나라 근대를 봐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단다. 그 시기는 개화를 통해 외부 문화와 충돌하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정의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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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개화기는 새로운 외부 문화와의 충돌을 경험한 시대였다. 그 충돌은 개화기 이전부터 일어났으니 그건 바로 천주교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 대응은 박해로 나타났다.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는 당파싸움으로 인해 증폭되었다. 이는 개화기가 결국 망국(亡國)으로 종결된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의 자폐적 시스템과 더불어 내부갈등이 나라의 진로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였다는 사실을 폭로해주기 때문이다. 개화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천주교 문제를 살펴보고 넘어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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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에서도 본 것처럼 개화기에 천주교 문제는 빼놓을 수 없단다. 18~19세기 천주교가 탄압을 했는데, 천주교가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했다면 이런 일까지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한단다. 천주교에서 우상 숭배를 하지 못하게 하는데, 우리나라의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우상숭배로 규정한 것이야. 우상숭배를 너무 폭넓게 본 것인데 그것은 천주교의 실수였단다. 우리나라에서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우상숭배로 했으니 당시 법이나 마찬가지였던 관혼상제를 거역하는 일이었어. 그래서 천주교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탄압하게 된 거야한참 나중에 교황에 의해 동양의 조상 숭배는 우상 숭배가 아니라고 규정을 해서 오늘날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제사도 지내고 그런단다.

아무튼 천주교는 17세기에 우리나라에 전파되었고, 1785년 사교로 규정지었다고 하는구나. 정조 시절에는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으나, 정조가 죽고 나서 반대파가 정권을 잡고 나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어. 정조의 지지기반이었던 남인들이 천주교를 많이 믿었는데, 반대파 노론이 정권을 잡으면서 천주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반대파를 제거하는 목적에 사용했단다. 1810년 신유박해는 많은 천주교도가 죽었고, 남인들이 몰락하게 되었단다.  이때 아빠가 좋아하는 정약용도 유배를 가게 되었지.

이후 조선은 세도정치가 판을 치고 매관매직이 널러 퍼지게 되었단다. 대표적인 매관매직은 공명첩이 있었는데, 돈을 주고 관리직을 사는 것이었어. 능력도 필요 없고 시험도 필요 없고 돈만 있으면 관직을 가질 수 있었지. 이러니 백성들은 점점 살기 어려워졌고, 실패했지만 홍경래의 난까지 일어나게 되었단다. 헌정 때도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등이 일어나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알려진 김대건을 비롯하여 많은 천주교도들이 순교했단다.


2.

1850년이 넘어서는 이양선, 즉 서양배들이 우리나라 앞바다에 출몰이 잦았단다. 세계적으로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시절이라 동양의 끝까지 빼앗을 땅이 없나 기웃하던 배가 아닌가 싶구나. 이 때는 이미 여러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서양 열강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단다. 중국 베이징도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몰락한 상태이고, 일본은 서양 열강을 따라 하는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단다. 그런데 조선은 출처 없는 낙관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단다. 그렇다고 나라 기반이 제대로 되었냐? 그것도 아니야. 전정, 군정, 환정 등 삼정이 문란하여 백성의 여론은 땅에 떨어졌고, 어려울 때 빌려준다는 환곡의 이자가 치솟아 백성들은 더욱 어려워졌단다. 그래서 이 시절 민란이 많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간도나 연해주로 이주했단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절에 흥선대원군의 계략에 의해 어린 고종이 왕위에 올랐어. 고종 대신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있었고, 나라의 정책도 그에 의해 다 결정되었어. 비변사를 개혁하고 서원을 철폐하고, 호포법을 실시하여 양반들도 군포세를 납부하게 하는 듯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정책들을 개편하여 민심을 얻기도 했어. , 나름 정치개혁을 하려고 노력했구나. 하지만 여전히 백성들의 삶은 고달펐단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의 호의적이었대. 쇄국정책을 일관한 사람으로 알고만 있었는데, 약간 의외구나. 오히려 유학자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어. 그들의 거센 반발을 눈치 볼 수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천주교를 탄압하기도 했대.(병인 박해)

1860 4 5일 최제우가 서학에 대항할 학문으로 동학을 창시했단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최제우를 혹세무민(惑世誣民), 즉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미혹하여 속였다고 해서 체포를 했단다. 많은 백성들의 항의로 금방 풀려났지만, 얼마 후 다시 체포되었고, 1864년 참수형으로 삶을 마감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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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에서 들어왔다가 그 선원들이 우리나라 백성들을 난폭하게 대했고 해적질을 하는 등 난동을 부렸단다. 그래서 박지원 손자인 박규수의 지휘아래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켰단다. 물론 그곳에 타고 있던 선원들도 죽었지. 이 일이 나중에 미국에게 신미년에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빌미를 주게 된단다.

같은 해, 프랑스는 프랑스인 출신 신부의 죽음을 규명을 요구하기 위해 군함을 몰고 한강 따라 한강까지 왔었다고 하는구나. 서울에서 큰 진전을 보이지 않자 일단 후퇴했는데 강화도에서 이를 대비하고 있는 조선군과 격전을 벌였어. 그리고 이때 프랑스군이 이때 철수하면서 외규장각 서적, 직지심경 등 우리나라의 귀중한 보물들을 포함한 많은 책과 유물들을 약탈해갔단다. 그렇게 약탈해간 것인데 오늘날까지 돌려줄 생각을 없다니, 선진국의 양심들은 어디다 팔아먹었는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있고 5년이 지난 1871,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를 찾겠다고 왔다가 조선의 거센 항의에 전투를 벌이게 되었단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신미양요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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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열강 뿐만 아니라 일본도 호시탐탐 노렸단다. 일본은 이미 제국주의에 대한 학습이 되어 있었고, 주변국 중에 가장 만만해 보이는 조선을 간섭하기 시작했단다. 일본 운양호 사건을 조작하여 강화도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된단다. 이때 적극적으로 일본인 입장에서 도와준 김인승이라는 사람이 있었단다. 그러니까 이완용 이전에 김인승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그를 친일파 1호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단다.


3.

최한기라는 사람은 이름만 들어본 사람인데 그는 우리나라 개화와 개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많은 글을 쓰신 분이란다. 이름은 들어봤는데 그가 어떤 분이었는지 잘 몰랐는데, 조선말 진보 지식인이었고, 많은 책들을 쓰셨구나. 나중에 시간 되면 그에 관한 책을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예전에 도올 김용옥 선생께서 최한기에 대해 쓴 책이 있는 것 같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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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89)

금장태는 최한기는 조선 후기 실학파의 마지막 인물이자 근대 개화사상으로 한걸음 나아갔던, 그 기대의 가장 앞선 진보적 지성인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저술은 1000권이나 된다는데 세상에 알려진 것은 아직 100여 권뿐이다. 그의 탁월한 학문의 폭넓은 식견이 알려지자 당시의 여러 재상들은 그를 조정에 끌어들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펼 수 없는 상황에서 벼슬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신미양요로 강화도가 미국 함대에 침략당하자 친분이 있던 유수의 자문요청에 조언한 바 있다. …… 자신의 시대를 새로운 것으로 낡은 것을 바꾸는변혁의 시대로 규정한 그는 차라리 옛것을 버릴지언정 지금을 버릴 수는 없다하여 진보정신을 표방하고 과학과 문명이 더욱 발전하고 역사가 발전해나간다는 것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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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는 시대의 흐름에 맞게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우리 사회를 바꾸자고 주장하는 개화파들은 대부분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단다. 특히 서양제도와 사상까지 모두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급진개화파들이 그랬단다. 급진개화파들은 일본에 유학을 가면서 일본 메이지유신 계몽운동을 앞장선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을 받고 와서 우리나라도 서양문물을 받아 들여야 하자고 주장했단다. 참고로 급진개화파와 달리 우리 사상과 도덕은 그대로 두고 서양 기술만 받아들이자고 하는 온건개화파도 있었단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정부도 개화 정책을 추진했어. 민영익을 중심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했는데, 1881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해서 청나라에는 영선사, 일본에는 신사유람단을 파견했단다. 그리고 서양의 나라와는 처음으로 미국과 1882년에 수호조약을 맺었단다. 역사책에서는 조미수호조약이라고 한단다. 그런데 조선과 미국 사이의 조약인데, 이걸 주도한 사람은 청나라의 이홍장이라는 사람과 미국의 슈펠트였단다. 이렇듯 이 시절 청나라의 간섭이 심했단다. 나라의 자존심이 서질 않던 시절이구나. 조선은 참석하지 않고 조미수호조약을 승인만 했다고 하는구나.

나라 사정이 어려워지다 보니 구식 군대에서 봉급을 일 년 넘게 미지급하게 되었는데, 참다 못한 구식 군대가 난을 일으켰으니 그것이 바로 임오군란이었단다. (1882) 임오군란을 일으킨 지도부는 흥선대원군과 면담을 했는데, 한직에 물러나 있던 흥선대원군이 이들을 뒤에서 조정한 것으로 보인단다. 난을 일으킨 군인들은 궁궐을 습격하고, 이때 민비(명성황후)는 도망을 간단다. 얼마 전에 펄 벅 여사의 <살아있는 갈대>에서도 명성황후가 궁궐 습격에 충주까지 도망을 가는 장면이 있었잖아. 그것이 바로 임오군란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만들어진 장면이란다. 고종은 어쩔 수 없이 흥선대원군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흥선대원군은 입궁하여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단다.

흥선대원군이 입궁을 하게 되자 난은 잠잠해졌어. 역시 흥선대원군이 뒤에서 조정한 것이 맞는 것 같구나. 흥선대원군은 입궁하자마자 정적이었던 민비의 국상을 준비했단다. 민비가 도망갔는데 죽은 걸로 치고 장례식을 치르려 했던 것이란다. 하지만, 이때 청나라가 개입하게 된단다. 아무래도 민비 쪽에서 움직인 것 같구나. 청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임오군란의 책임을 묻고,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압송했단다. 한 나라의 왕의 아버지를 다른 나라 군대가 침입해 끌고 가다니흥선대원군이 잘못한 것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안에서 해결을 해야지다른 나라에서 끌고 간다는 것이 말이 되니? 국력이 약한 당시 우리나라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단다. 재집권한 지 33일만의 일이었어. 그렇게 끌려간 흥선대원군은 4년이나 유폐되었다가 풀려난다고 하는구나. 민비는 궁에서 도망간 지 51일만에 다시 궁으로 돌아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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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국과 수호를 맺은 다음 조선 정부는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한단다. 이것도 펄 벅 여사의 <살아있는 갈대>에서 이야기했었는데 기억나니? 1883년 민영익, 유길준, 홍영식, 서광범 등은 미국 견학을 떠나게 된단다. 민영익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까지 들렀다고 오고,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서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했단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지. 그는 미국의 신문에까지 실렸다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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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

한편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의 미국 생활은 어떠했는가?

미국 <뉴욕타임스> 1883 11 8일자는 사절 수행원의 한 사람인 유길준은 자기나라의 옷을 벗고 지금은 서양 옷을 입고 있다. 그는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시의 에드워드 모스(1838~1925) 교수 지도하에 학생으로 이 나라에 머물 것이다. 어제 저녁 이 젊은이는 5번가(뉴욕)에 산책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다. 그러나 몇 마디의 영어를 사용하여 경찰관에게 호텔 가는 길을 물어 찾아왔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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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들 중 박영효, 유길준이 주축이 되어 1883년 한성순보를 창간하게 되는데, 국내 소식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소식도 많이 알려주었다고 하는구나. 아빠가 학창시절 때 한성순보가 최초의 근대적 신문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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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은 이후 다른 서양의 나라들과도 조약을 맺게 되었어. 영국과 맺은 조영수호조약, 러시아와 맺은 조러수호조약 등. 그런데 조영수호조약의 내용에 영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조영신조약이라고 다시 맺었는데, 영국 제품에 낮은 관세를 보장하는 등 우리나라에 엄청난 불평등 조약이라고 하는구나. 이런 국제 관계에 대한 경험이 없던 우리나라는 이때 맺은 조약들이 대부분 우리에게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을 거야.

마지막으로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김옥균은 급진개화파잖아. 그는 조선의 시스템을 서양의 제도로 싹 바꾸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고종을 만나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어. 고종도 김옥균의 주장을 지지했어. 고종도 청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서 개화사상으로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했거든. 이미 왕의 허락도 받았겠다, 이 정변의 성공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1884 12 4. 우정총국 완공 축하연회에서 척화수구파들을 비롯하여 대신들을 십여 명 죽이고 개화파가 정권을 잡았단다. 이 일을 성사시킨 사람들은 젊은 급진개화파인 박영효, 김옥균, 서재필, 홍영식 등이었단다. 그들은 새로운 내각을 구성을 했어. 갑신정변에 의해 구성된 내각은 대부분이 20대와 30대로 이루어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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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

갑신정변의 내각은 청춘정권이었다. 내각 서른두 명의 연령을 보면 20대와 30대가 3분의 2 이상을 차지했다. 김옥균 서른세 살, 홍영식 스물아홉 살, 서광범 스물다섯 살, 박영효 스물세 살, 서재필 스무 살 등 주동자들은 더 젊었다. 혈기가 지혜를 앞섰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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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여서인지 고종은 그들에 반감을 갖게 되었단다. 고종의 이런 낌새와 함께 다시 청나라의 간섭으로 청나라 군대가 궁을 침략했단다. 김옥균은 고종을 설득하려고 했어. 하지만 고종은 끝내 그들을 배신하고 버렸단다. 이제 김옥균 등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3일의 권력을 내려놓고 도망을 가야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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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

너희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군주는 그렇게 개화를 버렸다. 김옥균은 군주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쏟는다. 이제 곧 천하대역죄인이 될, 그의 부모와 아내와 아이들은 몰살을 당하게 될, 그리고 자신은 10여 년의 망명객이 될 것이며 망명지 일본에서도 버림받은 후 결국 중국 상하이에서 조선 정부가 보낸 암살자에게 목숨을 잃을, 그러나 군주를 사랑하였고 조선의 강대한 힘을 꿈꾸었던 김옥균은 이렇게 군주와 마지막 작별을 했다.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이 김옥균과 함께 후퇴하는 일본군을 쫓아갔다. 군주의 곁에는 이제, 청군과 군중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될 홍영식, 박영교만 남았다. 실패한 혁명 뒤에 남은 것은 군중의 분노뿐이다. 거리는 살육으로 뒤덮인다. 일본인과 개화파들, 그들의 가족은 보이는 대로 습격을 당한다. 김옥균의 집과 일본공사관은 성난 군중의 손으로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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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일본군대까지 끌어들여 반대를 무차별하게 죽이면서 정권을 잡는 방식이 민심에도 부합하지 않았단다. 그러니까 정변에 대한 지지가 적었고, 그렇다 보니 명분도 줄어들었던 것 같구나. 결국 청나라 군대도 쉽게 간섭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구나.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해석을 내놓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신용하라는 분의 말을 인용하여 정리하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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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

이어 신용하는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실패 요인은 일본군 무력을 차용한 요인이라며 갑신정변은 아무리 필요하고 애국적인 목적을 갖고 있어도 그 수단에 있어서 침략의도를 가진 일본의 힘을 일부 빌려서 수행하려 해서는 실패하고 만다는 뼈아픈 역사의 교훈을 우리들에게 남겨주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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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한국 근대사 산책> 1권을 이야기해보았단다. 이 시리즈는 이미 10권까지 다 사 놓았기 때문에 끝을 봐야 한단다. 한 달에 두어 권씩 읽으면서 올해 안에 끝내는 것으로 목표를 삼아 봐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개화기는 새로운 외부 문화와의 충돌을 경험한 시대이다.

책의 끝 문장: 이는 김옥균 암살사건을 다루면서 더 생각해보기로 하자.


‘블라디보스토크’의 블라디는 러시아어로 ‘정복하다’는 뜻이고 보스토크는 ‘동쪽’의 의미인바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가 동쪽으로 와서 정복한 도시인 셈이다. 이전 이 땅은 발해의 중요한 거점 지역이었고 이후로는 여진과 거란의 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이 땅을 한자로 해삼위(海蔘威)라고 표기했는데 바닷가에 ‘해삼’이 많아서 해삼위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바다도 4~5개월간 결빙하기 때문에 부동항을 얻으려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 P72

역설이지만 서학은 물론 동학에 대한 이러한 탄압은 조선 조정이 자신들의 죄, 즉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걸 시사하는 건 아닐까? 민생을 도탄에서 건져낼 수 없는 무능이, 언제든 민심을 폭발시킬 수 있는 위험요소 제거에만 총력을 기울이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 게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망국(亡國)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 P90

다블뤼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자선(慈善)의 원조 국가가 조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다.
"이 나라에서는 자선 행위를 진정으로 존숭하고 실천한다. 사랑방에서 받는 대접 이외에도 식사 때 먹을 것을 달라면 거절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일부로 그를 위해 밥을 다시 하기도 한다. 들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식사하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즐거이 자기 밥을 나누어준다. 뱃사공들은 밥을 먹지 않고 배 타러 나온 사람과 나누어 먹는 것을 철칙으로 한다. 잔치가 벌어지면 언제나 이웃 사람들을 초대해서 형제처럼 모든 것을 나눈다. 여비가 없이 길을 떠나는 사람은 엽전 몇 닢의 도움을 받는다. 없는 사람과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조선인이 가진 덕성 중의 하나이다."
먼 훗날에라도 조선에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 P99

조선은 강화도조약에 따라 개항을 하게 되었고 근대적인 서양 문물을 수입하게 되었다. 1876년 부산이 개항하고 이어 1879년 원산, 1880년 인천이 개항했다. 학계에선 근대화가 되는 시대를 의미하는 ‘근대’가 언제부터인가 하는 논쟁이 있는데 학계의 통설적 견해는 아무런 준비 없이 강요된 것이긴 하지만 개항을 통해 새로운 서구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한 1876년을 근대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 P161

<한성순보>는 신문발간의 동기와 기술적 지원은 일본에 의존했지만 신문의 뉴스원, 내용과 관련해선 중국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이 신문이 기사로 가장 많이 다루었던 국가는 중국(453회)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베트남(165ㅎ회), 프랑스(71회), 영국(56회), 일본(53회), 미국(47회) 등이었다. 중국 관련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이유는 조선과 중국의 관계가 밀접했다는 것 이외에 영국,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선교사나 상인 등이 발간하던 중국계 신문들을 주요 뉴스원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성순보>의 실무자들은 "거의가 한학자와 중국어 역관(譯官) 출신들로서 한문에는 능통한 반면 일본어는 몰랐다는 점과 이들이 "일본보다는 중국을 더 숭상"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베트남, 프랑스 관련 기사가 많았던 건 1884년 6월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1883) 문제로 일어난 청불전쟁과 베트남이 프랑스에 먹히는 비극에 대한 동병상련(同病相憐) 감정 때문이었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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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양장)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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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Jiny 가 학원에서 읽어야 한다면서 책목록을 보여주었단다. 그 목록에 이희영 님의 <페인트>이 있었단다. 이 책은 예전부터 인터넷 서점에서 많이 노출이 되어서 책 제목과 책 표지는 이미 알고 있던 책이었어. 책 제목과 책 표지만으로는 무슨 내용인지 가늠이 안 되었단다. 왜 제목이 페인트일까? 궁금했지. 이 궁금증은 우리 식구들 모두의 궁금증이었지.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아빠가 가장 먼저 읽어 보았단다. 그리고 그 궁금증을 해결했단다. ㅎㅎ Jiny도 아빠 다음으로 이 책을 읽었으니 이제 그 궁금증이 해결되었겠구나.

너희 같은 학생들에게 추천을 해주어서, 이 책에 교훈적인 내용도 담겼나? 하는 생각도 하면서 책을 펼쳤단다. 책 소개를 전혀 읽지 않고 읽기 시작했는데, SF 소설이더구나. , 아빠가 SF 소설은 좋아하니 더 반가웠단다. 책이 그리 두껍지 않아서 휘리릭 읽었단다. Jiny는 이미 책 내용을 알고 있을 테니, 아빠의 기억력을 백업한다는 생각으로 줄거리에 충실하게 적어보련다.


1.

가까운 미래인데, 먼 미래인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 속의 시대에는 아이들의 양육을 포기한 부모들을 위해서 나라에서 체계적으로 아이를 양육해주는 NC센터가 있었단다. NC Nation’s Children의 약자였어. 그리고 아이를 낳고 양육을 포기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했어. 그래야 양육 문제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가 줄어들고, 그로 인해 떨어지는 출생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 같구나. 아이들을 낳아본 아빠로서는, 미래가 되었다고 해서 엄마, 아빠의 아이들을 사랑하는 본능이 쉽게 바뀔 것 같지가 않더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양육 포기하는 것이 자연스런 사회가 되어도, 양육 포기를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는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야.

아무튼, NC센터는 국가에서 아이들을 키워주는 그런 단체였고, NC 센터는 나이에 따라 퍼스트 센터, 세컨드 센터, 라스트 센터로 구분되어 있었어. 마지막 라스트 센터는 13살부터 19살까지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 면접을 통해서 부모를 선택할 수 있었단다. 이것이 오늘날 입양 시스템과 좀 다른 것이란다. 오늘날 입양은 부모가 될 사람이 아이를 선택하게 보통인데, NC 센터에서는 입양하고 싶은 사람들을 아이가 면접을 여러 번에 걸쳐서 하고 나중에 최종적으로 결정을 하게 되면 그때 NC 센터에서 나가 자신의 선택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거야.

NC 센터의 아이들을 입양한 부모에게는 나라에서 여러 가지 혜택을 주기도 해. 이렇게 센터의 아이들이 부모를 면접하는 것을 부모 면접(Parent’s Interview)이라고 하고, 부모 면접을 영어로 한 페어런츠 인터뷰를 줄여서 부르다 보면 페인트와 발음이 비슷해서 아이들 사이에 부모 면접을 은어로 페인트라고 불렀단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페인트가 된 것이란다.

센터에서 아이들을 보호해 주는 어른을 가디언이라고 하고, 줄여서 가디라고 한단다. 그리고 센터의 아이들은 입양이 되어 센터를 떠나기로 확정되면 이름을 갖게 되고 그 이전에는 자신이 태어난 달의 영어 이름을 줄인 것에 숫자를 붙여서 부른단다. 주인공은 1월에 태어나서 제누301’이라고 불렀어. 제누301 17살로 센터 안에서는 꽤 나이가 많은 편이었단다. 19살까지 부모를 만나지 못하면 NC에서 나가서 혼자 살아야 하는데, 이 경우 암암리에 NC센터 출신이라는 차별을 받게 된다고 하더구나. 센터장 박씨와 가디 최씨는 제누301 19살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부모를 만나게 해주려고 노력을 했단다. 센터장 박씨는 센터를 위해서 참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었어. 자신의 일보다 센터의 일이 늘 먼저였어.


2.

보통 NC 센터에 아이를 입양하려는 부부는 준비를 많이 해 온단다. 아이의 면접을 받는 대상이 부부들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어느 날 젊은 30대 부부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센터에 들렀단다. 서하나, 이해오름이라는 부부인데 그들의 자세부터 부모가 되려는데 별 관심이 없어 보였어. 그저 국가에서 주는 혜택을 받으려고 온 사람들인 것 같아서 가디들은 그 부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다른 준비를 많이 한 사람들과 달리 솔직함이 좋다면서 제누301은 그들을 면접하겠다고 했단다.

면접을 하면 할수록 그들의 솔직함에 면접은 3차까지 이어졌단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제누301은 입양을 거부했단다. 서하나, 이해오름 부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니야. 제누301은 이곳 NC센터에 더 배울 것이 있다고 했어. 마지막 19살 때까지 NC센터에서 배우고 이 곳을 나가서 혼자 세상에 부딪혀 보겠다고 했어. 그런 점을 마지막 면접 때 서하나에게 이야기를 했고, 서하나도 제누301의 진심을 이해해 주었단다. 그리고 NC센터를 졸업하게 되면 찾아오라고 진심으로 이야기했단다. 그러면서 부모와 자식 관계가 아니고 친구가 되자고 했단다.

제누301인 센터장인 박씨를 만나러 갔어.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어. 센터장님을 비롯하여 가디님들과 함께 19살까지 센터에 머무르면서 공부하고 배우겠다고 했어. 그리고 NC센터 출신의 차별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당당히 차별을 없애는데 노력하겠다고 했단다. 제누301을 각별하게 생각했던 센터장님도 제누301의 진심을 받아주었단다. 그래서 제누301은 센터에 남기로 했단다. 아빠 생각에 제누301 19살에 되어 NC센터를 졸업을 하게 되더라도 NC센터에 가디로 취업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러면서 NC센터 출신의 받는 차별을 깨려는 사회운동도 함께 말이야. 센터장 박씨와 다른 가디들도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 같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니?

이 읽은 사람들의 서평에 나는 몇 점 부모일까?’라고 자문을 많이 하는 모양이구나. 아빠는 그런 자문은 별로라고 생각해. 부모 자식 간을 무슨 점수로 매기니. 정답 없는 사이, 아니 모든 것이 정답인 사이인데 말이야. 식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너희들이 아빠의 아이들이라서 아빠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 되었단다.


PS,

책의 첫 문장: 두 사람은 홀로그램 속 모습과 약간 달라 보였다.

책의 끝 문장: 열여덟, 아직 태어나지 않은 껑충한 아기가 성큼 계단 위로 올라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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