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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가깝다면 가까운 곳에 운석이 떨어졌는데 십 년이 지나서도 기행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연해주의 시골 마을에 불덩어리 같은 운석이 떨어질 무렵, 그는 평양에서 조선민주당을 이끌던 고당 선생을 모시고 있었다. 고당 선생과는 인연이 깊었다. 선생은 오산학교에 재직하던 시절 기행의 집에서 하숙을 했고, 몇 년 뒤 그가 오산고보에 입학했을 때는 교장을 맡고 있었다. 해방이 되어 소련인들을 상대할 일이 많아지자 고당 선생은 고향 정주에 머물던 기행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통역 겸 비서로 삼았다. 그때만 해도 기행은 고당 선생이 곧 남쪽의 인사들과 함께 민주공화국을 만들면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하리라고 생각했다. 이제 돌이켜보면 순진한 생각이었지만, 그땐 다들 그랬다. 모두가 모두의 선의를 믿었다.


(81)

시대의 눈보라 앞에 시는 그저 나약한 촛불에 지나지 않는다. 눈보라는 산문이며, 산문은 교시하는 것이다. 당과 수령의 말은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는 산문이다. 준엄하고 매섭고 치밀하다. 하지만 시는 말하지 않는다. 시의 할일은 눈보라 속에서도 그 불꽃을 피워 올리는 데까지다. 잠시나마 타오르는 불꽃을 통해 시의 언어는 먼 미래의 독자에게 옮겨붙는다.


(85)

그 때에도 보름이면 이 세상은 달빛으로 가득차지 않겠나? 달이야 거기 사람이 있든 없든 찼다가 이지러지는 그 자연의 법칙을 반복하겠지. 그런 무심한 것이 자연이라는 것도 모르고 인간들은 거기게 정을 둔단 말이지. 마치 해와 달이 자기 인생을 구원해주기라도 하듯이 말이야. 오로, 우리의 태양이시여, 영원한 달님이시여, 라고 찬양하면서. 하지만 해와 달은 그 누구의 인생도 구원하지 않아. 우리도 그런 자연을 닮아 노래는 들리는 대로 들으면 되고, 춤은 보이는 대로 보면 되는 거지, 좋으니 나쁘니 마음을 쏟았다 뺏었다 할 필요는 없었던 거야.


(85)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 어떤 시를 쓰지 않을 수 있는 것,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사람이 누를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


(117)

사전에서 세상의 뜻풀이는 이렇게 고쳐야 해요. 영원한 것은 없는 곳이라고.


(164)

숲이 비어 있는 것을 보는 사람도 시인이고, 폐허가 꽉 차 있는 것을 보는 사람도 시인이지요. 저는 모든 폐허에서 한때의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시를 씁니다. 괴링이 이끄는 독일 폭격기가 육백 대나 날아와 포탄을 쏟아부었을 때, 스탈린그라드는 영원히 불타는 줄 알았어요.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죠. 밤은 낮처럼, 낮은 밤처럼. 물은 불처럼, 불은 물처럼. 악은 선이 되고, 선은 악이 됐죠. 그게 바로 전쟁, 지옥의 풍경이에요. 그렇게 몇 달 뒤 꺼지지 않을 것 같았던 불이 꺼졌을 때, 도시는 완전한 폐허가 됐죠. 그 폐허를 응시하는 일이 시인의 일이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164-165)

전쟁은 인류가 행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한 일이지만, 그 대가는 절대로 멍청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나요?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평화를, 상처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회복을 노래할 수 있나요? 전 죽음에, 전쟁에, 상처에 책임감을 느껴요.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감을 느껴야만 해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


(189-190)

이 날짜만 그대로 두고 책에 실린 자음과 모음을 해체해 다시 조립한다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누가 어떻게 조립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행은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언어의 세계를 떠날 수 없었다. 평생 혼자서 사랑하고 몰두했던 자신만의 그 세계를.


(190-191)

수령이 문학에서 낡은 사상 잔재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라고 교시를 내린 뒤, 전국의 도서관과 도서실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이 소장중인 책들 가운데 반당 반혁명 작가의 책들을 회수해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거기서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 당연히 서로의 주장은 엇갈리고, 지향점은 다르고, 문체는 제각각이다. 그렇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현실은 그 무수한 세계가 결합된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또 추악한 세계가 있다. 협잡이 판치는 세계가 있고, 단아하고 성실한 세계가 있다. 어떤 세계는 지옥에, 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현실 전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당과 수령, 그리고 그들의 충실한 대리인인 병도는 자신들이 조립한 언어의 세계만이 리얼하다고 말하지만, 수많은 세계를 불태우고 남은 단 하나의 세계라는 점에서 그들의 현실은 한없이 쪼그라들다가 스스로 멸망하리라.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그런 언어와 문자가 스스로 실현되는 현실을 말한다. 거기에는 당과 수령은 물론이거니와 기행의 자리마저도 없는 것이다.


(228-229)

아무리 준비해도 모자란 겨울나기에 비하자면, 봄 준비는 마냥 기다리는 게 일이었다. 봄은 아기 걸음이고, 먼빛이고, 올동말동이니까. 4월 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사흘이 지나면 강에서는 쩍쩍 소리 내며 버그러지는 얼음장 위로 흙탕물이 넘실거렸다. 새벽이면 골짜기 안으로 안개가 부잇하게 감돌아 돈사(豚舍) 네모 등의 가스불빛이 까물거렸고 아침햇살이 빗살처럼 번져나면 새들의 노랫소리가 흥겨웠다. 겨우내 얼어 있던 흙으로 틈이 생겨 봄볕이 스며들면 오랑캐꽃과 살구꽃과 진달래가 피어나 단조롭던 흑백의 구릉을 환한 빛으로 물들였다. 마을에 물레방아가 내걸리고 소달구지가 지나갈 즈음이면 개울가로는 처녀들이 바구니를 들고 둥글레며 쑥 따위를 캐러 다녔다. 그렇게 삶은 다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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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내가 언제나 무서운 외갓집은

초저녁이면 안팎마당이 그득하니 하이얀 나비수염을 물은 보득지근한 북쪽재비들이 씨굴씨굴 모여서는 쨩쨩쨩쨩 쇳스럽게 울어대고

밤이면 무엇이 기화골에 무리돌을 던지고 뒤우란 배나무에 쩨듯하니 줄등을 헤여달고 부뚜막의 큰솥 적은솥을 모조리 뽑아놓고 재통에 간 사람의 목덜미를 그냥그냥 나려 눌러선 잿다리 아래로 처박고

그리고 새벽녘이면 고방 시렁에 채국채국 얹어둔 모랭이 목판 시루며 함지가 땅바닥에 넘너른히 널리는 집이다.

   --<외갓집>


(38)

황토 마루 수무나무에 얼럭웅 덜럭궁 색동헝겊 뜯개조박 뵈짜배기 걸리고 오쟁이 끼애리 달리고 소삼은 엄신 같은 딥세기도 열린 국수당고개를 몇 번이고 튀튀 춤을 뱉고 넘어가면 골안에 아늑히 묵은 영동이 무겁기도 할 집이 한 채 안기었는데

 --<넘언집 범 같은 노큰머니> 中에서


(48-49)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가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 <수라(修羅)>


(59)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 나의 조상은 현재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북방(北方)에서> 中에서


(93)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은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 <선우사(膳友辭)> 中에서


(117)

빨간 물 짙게 얼굴이 아름답지 않으뇨

빨간 정() 무르녹은 마음이 아름답지 않으뇨

단풍든 시절은 새빨간 웃음을 웃고 새빨간 말을 지줄댄다. 어데 청춘을 보낸 서러움이 있느뇨

어데 노사(老死)를 앞둘 두려움이 있느뇨

재화가 한끝 풍성하야 시월(十月) 햇살이 무색하다

사랑에 한창 익어서 실찐 띠몸이 불탄다

영화의 자랑이 한창 현란해서 청청한울이 눈부셔 한다

시월(十月) 시절은 단풍이 얼굴이요, 또 마음인데 시월단풍도 높다란 낭떨어지에 두서너 나무 깨웃듬이 외로히 서서 한들거리는 것이 기로다

시월 단풍은 아름다우나 사랑하기를 삼갈 것이니 울어서도 다하지 못한 독한 원한이 빨간 자주로 지지우리지 않느뇨

 --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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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

음식에는 가족이라는 공동운명체의 기질과 취향과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함께 밥을 먹었던 기억은 가족을 단단히 결합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음식의 공유는 기억의 공유로 곧잘 이어진다. 사소한 것을 통해 조선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게 백석의 시라면 백석에게 음식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먹을거리에 그치지 않는다. 백석의 시를 지배하는 음식이 거의 모든 시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가 음식을 감각의 총화로 파악하고 의도적으로 시에 배치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음식은 놀라운 친화력을 발휘해 독자를 시의 자장 안으로 강하게 끌어들인다.


(62)

당시 <조선일보> 사옥은 태평로 1가에 있던 2층짜리 조그마한 건물이었다. 백석은 광화문을 지나 세종로를 걸어 신문사로 출근했다. 멀리서 봐도 그는 남들의 눈에 금방 들어올 만큼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숱이 많은 새까만 곱슬머리에 선명한 눈썹에다 얼굴 한가운데에는 서양 사람처럼 콧날이 깎아놓은 듯 우뚝 자리 잡고 있었다. 균형 잡힌 어깨와 다리를 가진 훤칠한 키의 백석이 세종로를 겅중겅중 걸어가면 누구나 다시 한 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목이 유난히 긴 이 청년은 늘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었다. 길 가던 여성들이 이런 모던보이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화들짝 놀라며 곁눈질을 하기 일쑤였다.


(99)

1930년애 중반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가치체계가 파국을 향해 가고 있었을 때였다. 이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백석은 일본 제국주의가 드리운 그늘에서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상상하였다. 그것은 과거의 재생을 통해 현실의 몰락을 타개해나가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백석은 주관적 감상주의와 계몽주의를 넘어선 그 무엇을 찾고자 했다. ‘그 무엇은 새로운 미적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시를 구체화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시단을 휩쓸었던 카프 계열의 사회주의 문학론은 지나치게 계몽성이 강해 백석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소통이 불가능한 이상의 실험주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백석은 식민지로 오염되고 왜곡되기 이전의 고향, 즉 시원의 순결성을 가지고 있는 고향과 고향의 방언에 착안했다. 고향의 말인 방언이야말로 몰락의 길을 치닫고 있는 조선의 현실을 지켜낼 수 있는 하나의 시적인 역설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고 그는 판단했다. 그러니까 백석의 평안도 방언 사용은 향토주의에 매몰된 결과물이 아니라 준비된 창작방법론이며 의도된 기획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가장 새로운 것이지.’


(160)

하지만 그는 1933년 일제의 기관총 구입비용 1,600만원을 헌납한 것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을 전후해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1937 1 1일자 <조선일보> 1면에 일왕 부부 사진을 크게 실어 충성을 표시하는가 하면, 전쟁 발발 직후 8 2일자 사설에서는 출정 장병을 향하여 위로 고무 격려의 편지 한 장 보내는 것도 총후의 임무라고 썼다. 그 후에는 국방헌금을 모은다는 사고를 내고 전쟁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동아일보>의 김성수 사장도 군사헌금 1,000만원을 헌납하는 등 중일전쟁을 전후에 친일신문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161)

백석은 혼란스러워 머리를 흔들었다. 백석은 일본에 유학을 할 때나 귀국한 뒤에 단 한 편도 일본어로 작품을 쓰지 않았다. 수업을 하거나 사적인 편지를 쓸 때에도 일본어를 섞는 일을 극도로 자제했다. 의사전달도 문학적인 표현도 조선어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고향 평안도의 방언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백석만의 특허상표였다. 그의 몸은 함경도에 머물고 있었지만 백석은 시시때때로 머리에 떠오르는 고향의 방언 때문에 외로움을 누를 수 있었다.


(218-219)

일제는 황국 신민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국민이라는 굴레를 씌워 분리하는 정책을 폈다. 식민지를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통치하겠다는 발상이었다. 그것은 백석이 보기에 굴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백석은 내선일체를 강요하고 빠르게 미쳐가는 조선에서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조선과 일본은, 엄연히 민족과 언어가 다른데도 그 둘을 하나로 여기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경성에 계속 남아 있다가는 내선일체의 수렁으로 빠져들 게 뻔했다.


(337)

백석은 ‘1956년도 <아동문학>에 발표된 시인 및 서클 작품들에 대하여라는 총평 형식의 글에서 시와 동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매우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피력했다. 시의 요건은 생활에서 우러난 감정, 사색의 중요성, 언어를 부리를 법이라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하지만 이 자신감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북한문학의 주류가 항일혁명문학에 이은 김일성 유일사상을 바탕으로 한 주체문학으로 변화하면서 북한문학에서 자율성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게 되었다.


(413)

<조국의 바다여>는 백석이 북한에서 발표한 마지막 시였다. 아니, 그가 이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시였다. 평양에서 삼수군으로 쫓겨날 즈음 백석에게 시는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시인으로 살아남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 인간으로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백석에게는 더 시급했다. 해방 이후 백석의 북한에서의 작품 활동을 단순히 예술성을 망각하고 시를 정치도구화한 파렴치한 행위로 몰아붙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백석이 북한에서 아동문학논쟁을 통해 문학의 자율성과 미학주의를 주장한 마지막 시인 중 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의 지도 아래 놓인 북한의 문학을 조금이라도 더 보편적인 미학의 논리로 되돌려놓겠다는 그의 문학주의는 결국 꺾일 수밖에 없었다.


(420)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 김영한은 서울 성북동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경영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거물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이 요정을 드나들었다. 1996년 대원각이 들어선 7,000여 평의 땅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고, 1년 뒤에 사찰 길상사가 완공되었다. 1997년 김영한은 백석 연구자 이동순의 주선으로 창작과비평사에서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1999년 자야 여사는 여든세 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백석의 연인답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한겨울 눈이 제일 많이 내린 날 내 뼛가루를 길상사 마당에 뿌려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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