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그래유시가 말했다. “여기서 핫도그를 먹고 집에 가서 폴리오에 걸려 죽었다고 이제 모두 무서워서 오지를 않아. 말도 안돼. 핫도그 때문에 폴리오에 걸리는 게 아니야. 핫도그를 수천 개는 팔았는데 아무도 폴리오에 걸리지 않았어. 그러다가 아이 하나가 폴리오에 걸리니까 모두들 이러는 거야. ‘시드네 가게에서 파는 핫도그 때문이야, 시드네 가게에서 파는 핫도그 때문이야!’ 이건 삶은 핫도그야. 삶은 핫도그로 어떻게 폴리오가 걸려?”

(81)

그래, 처음부터 우리 삶을 유지시켜준 대체 불가능한 발전기를 찬양하는 것-파란 하늘의 몸에 홀로 틀어박혀 있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저 황금의 눈과 매일 현실로서 만나는 것을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하느님은 선하다는 공식적 거짓말을 억지로 받아들이고 아이들을 죽이는 냉혈한 살인자 앞에 굽실거리는 것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다. 사람들의 존엄을 위해서도, 인간성을 위해서도, 가치를 위해서도, 하물며 여기서 도대체 무슨 지옥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매일매일 생각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나았을 것이다.

(156-7)

그때 갑자기 허비와 앨런, 뉴어크에서 여름을 보내는 바람에 죽은 아이들이 떠올랐고, 그 아이들을 인디언 힐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꽃처럼 피어나는 같은 또래의 실라, 필리스와 비교하게 되었다. 그가 이 원기 왕성한 아이들과 함께 여름 캠프의 이 시끄러운 유원지 같은 곳에 안락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동안 프랑스 어딘가에서 독일군과 싸우고 있는 제이크와 데이브도 있었다. 그는 삶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우리 모두가 환경의 힘 앞에 이렇게 무력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여기 어디에 하느님이 개입하고 있단 말인가? 하느님은 왜 한 사람은 손에 라이플을 쥐여 나치가 점령한 유럽에 내려보내고 다른 사람은 인디언 힐 식당 로지에서 마카로니와 치즈가 담긴 접시 앞에 앉아 있게 하는가? 하느임은 왜 위퀘이크의 한 아이는 여름 동안 폴리오에 시달리는 뉴어크에 놓아두고 다른 아이는 포코노 산맥의 멋진 피난처에 데려다놓는가? 이전에는 부지런하게 열심히 일하는 것에서 자신의 모든 문제의 해법을 찾았던 사람에게는 지금 일어나는 일이 왜 지금처럼 일어나고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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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폴리네시아의 여러 섬 사회는 그렇게 각기 경제적 전문화, 사회적 복잡성, 정치적 조직, 유형 생산품 등이 크게 달랐다. 이는 인구 규모 및 밀도와 관련되어 있었고 그것은 다시 섬의 면적, 분열, 고립성, 그리고 먹거리를 구하거나 식량 생산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 등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폴리네시아의 여러 사회는 원래 동일한 하나의 조상 사회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각기 다른 환경으로 인해 얼마 안 되는 지표면적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그 사회의 차이점들이 다양하게 발전했던 것이다. 폴리네시아 내부의 그러한 문화적 차이의 범주들은 본질적으로 세계의 다른 모든 지역에서 나타난 것들과 일치한다.

(94)

그러므로 아타우알파가 생포된 사건은 근대사의 가장 큰 충돌이자 결정적인 순간이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하지만 그보다 일반적인 측면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 왜냐하면 피사로가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을 수 있게 만든 요인들은, 본질적으로 근대에 세계 각지의 이주민과 원주민 사이에서 벌어졌던 유사한 많은 충돌 사건들, 그것들을 결정 지었던 요인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타우알파 생포 사건은 세계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넓은 창문인 셈이다.

(112)

간단히 말해서 문자 덕분에 스페인인들은 인간의 행동과 역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인들에 대해 전혀 몰랐다. 또한 바다 건너에서 쳐들어온 침략자들을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역사적으로 앞선 다른 시대에 무수히 일어났던 유사한 침략 위협에 대해서도 전혀 듣지도 읽지도 못했다. 그러한 경험의 격차 때문에 피사로는 함정을 파게 되었고 아타우알파는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274)

유라시아에서의 동서 확산이 쉬웠던 데 비해 아프리카의 남북 축을 따라 확산되기는 얼마나 어려웠는지 살펴보자.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창시 작물은 대부분이 매우 신속하게 이집트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에티오피아의 서늘한 고지대까지 전파되었지만 그 너머로는 전파되지 못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중해성 기후는 그 농작물들이 자라기에 이상적인 환경이었겠지만 에티오피아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이에 위치한 3200km에 이르는 열대 지역은 이 농작물들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저위도 지방인 사헬 지대나 열대 서아프리카의 기후, 즉 기온이 높고 주로 여름에 비가 내리며 낮의 길이가 비교적 일정하다는 조건에 이미 적응한 토종 야생 식물들을 작물화하면서 농업이 시작되었다.

(287-8)

질병은 인간을 죽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므로 역사를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했다. 2차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전시에 사망한 사람들 중에는 전투 중 부상으로 죽은 사람보다 전쟁으로 발생한 세균에 희생된 사람이 더 많았다. 위대한 장군들을 칭송하는 전쟁의 역사는 인간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한 가지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 과거의 전쟁에서는 반드시 가장 훌륭한 장군이나 무기를 가졌던 군대가 승리하지는 않았으며 가장 지독한 병원균을 적에게 퍼뜨리는 군대가 승리할 때가 많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294-5)

그러나 세균은 인간의 몸속 영양분을 섭취하도록 진화되었으며 피해자가 죽거나 저항할 때 새로운 피해자가 몸으로 날아갈 수 있는 날개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병원균들은 피해자에게서 피해자로 옮겨가는 여러 가지 방법을 진화시켜야 했다. 이러한 수법 중에는 인간이 흔히 질병의 증상으로 경험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 나름대로 대응 방법을 진화시켜 왔고 병원균들은 다시 거기에 대한 대응 수법을 진화시키는 것으로 대처해 왔다. 그리하여 인간과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병원체들은 점점 더 격화되는 진화적 경쟁 관계 속에서 서로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패배의 대가는 어느 한 쪽의 죽음이며 자연선택이 심판을 맡고 있다.

(352-3)

토머스 에디슨의 축음기는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현대의 가장 위대한 발명가가 이룩한 가장 독창적인 발명품이다. 1877년 에디슨이 최초의 축음기를 만들었을 때 그는 이 발명품이 소용될 만한 열 가지 용도를 제시하는 글을 발표했다. 거기에는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말을 보존하는 일, 시각 장애자들이 들을 수 있도록 책을 녹음하는 일, 시간을 알려주는 일, 철자법을 가르치는 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음악을 재생하는 일은 에디슨이 제시한 우선순위에서 상위권에 들지도 못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에디슨은 자신의 발명품에 상업적인 가치가 없다고 조수에게 말했다. 그러나 다시 몇 년 후에는 마음을 바꾸어 축음기 판매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용도는 사무용 구술 기계였다. 다른 기업가들이 축음기를 이용하여 동전을 넣으면 대중 음악이 흘러나는 주크박스를 만들어냈을 때 에디슨은 자기 발명품이 사무용이라는 중요한 용도를 벗어나서 그렇게 전락하는 것에 반대했대. 그리고 20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에디슨도 축음기의 주된 용도는 음악을 녹음하고 재생하는 일이라는 데 마지못해 동의했던 것이다.

(383)

각 대륙의 면적, 인구, 확산의 난이도, 식량 생산의 출발 시기 등에서 나타난 이 같은 차이에 따라 기술 발전의 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다. 기술을 자가 촉매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라시아는 처음부터 상당히 유리한 입장에 있었지만 1492년에 와서는 엄청나게 앞서게 되었다. 그것은 유라시아인들의  지능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유라시아의 지리적 요건이 탁월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뉴기니인들 중에는 잠재적인 에디슨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은 그 천재성을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필요한 기술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활용했다. , 축음기를 발명하는 문제보다는 뉴기니의 정글에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살아남는 문제에 주력했던 것이다.

(527)

가령 1519년 코르테스가 이끄는 초라한 탐험가들이 멕시코 해안에 상륙했을 때 수천 명의 아스텍 기병들이 아메리카 원산의 가축화된 말을 타고 달려와서 그들을 다시 바다로 내몰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스텍인들이 천연두에 걸려 죽은 대신 질병에 저항력을 가진 아스텍인들이 아메리카의 병원균을 퍼뜨려 오히려 스페인인들이 전멸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물의 힘에 의존하는 아메리카 문명이 정복자들을 파견하여 유럽을 황폐화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같은 가설적인 일들은 수천 년 전에 일어났던 포유류의 멸종으로 이미 실현 가능성을 잃고 말았다.

(543)

아메리카 내부의 이 같은 장애물에서 빚어진 여러 가지 결과들 가운데 몇 가지는 짚고 넘어갈 만하다. 식량 생산은 미국 서남부 및 미시시피 강 유역으로부터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의 곡창 지대인 캘리포니아 및 오리건 주로 확산되지 못했다. 결국 그곳의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는 적당한 가축 작물이 없어서 수렵 채집민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안데스 고지대의 라마, 기니피그, 감자 등은 끝내 멕시코 고지대에 조달하지 못해서 중앙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에서 가축화된 포유류라고는 개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미국 동부의 작물화된 해바라기가 중앙아메리카에 도달하지도 못했고 중앙아메리카의 가축화된 칠면조가 미국 동부나 남아메리카로 전파되지도 못했다.

(547)

이상으로 우리는 유럽인인 침략자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보다 유리해질 수밖에 없었던 세 가지 궁극적 요인을 확인했다. 그것은 인간이 살기 시작한 시기가 유라시아에서 훨씬 빨랐던 점, 유라시아에는 작물화할 만한 야생 식물은 물론이고 특히 가축화할 만한 야생 동물이 훨씬 많았으므로 결국 유라시아의 식량 생산이 더 우수했다는 점, 그리고 유라시아에는 대륙 내의 확산을 방해하는 지리적 생태적 장애물이 비교적 적었다는 점이었다. 네 번째이면서 아직은 불확실한 또 하나의 궁극적 요인은 몇 가지 문물이 남북아메리카에서는 발명되지 않았다는 알쏭달쏭한 현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중앙아메리카의 복잡한 사회는 문자와 바퀴를 발명했는데 안데스의 복잡한 사회는 대략 비슷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발명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바퀴는 중국에서 그랬듯이 인력으로 움직이는 외바퀴 손수레에 이용해도 쓸모가 많았을 텐데 중앙아메리카에서는 한때 장난감으로만 사용되다가 다시 사라자고 말았다는 것이다.

(591)

아프리카의 남북 축은 가축의 전파에도 심각한 방해물이 되었다. 적도 아프리카의 체체파리는 트리파노소마를 옮기는데, 아프리카의 토종 야생 포유류는 저항력을 갖고 있어서 괜찮았찌만 새로 들어오는 유라시아 및 북아프리카의 가축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반투족이 체체파리가 없는 사헬 지대에서 손에 넣었던 소는 반투족이 팽창하여 적도 부근의 삼림 지대를 통화할 때 살아남지 못했다.

말은 B.C. 1800년경 이미 이집트에 도달하여 곧 북아프리카의 전쟁 양상을 바꾸어놓았지만 사하라 사막 너머의 서아프리카에서 기병대를 갖춘 여러 왕국이 건설된 것은 A.D. 1~1000년의 일이었고 체체파리가 서식하는 지역을 통과하여 남하하지는 못했다. , , 염소는 B.C. 3000sus~2000년에 이미 세렝게티 평원의 북쪽 변두리에 도달했지만 거기서 다시 세렝게티 평원을 지나 남아프리카에 도달하는 데에 2000년 이상이 걸렸다.

(594)

각각의 대륙에서도 동식물의 가축화 작물화는 그 대륙의 전체 면적 중에서 작은 일부분에 불과한 몇 군데, 즉 유난히 조건이 좋은 지역들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기술 혁신과 정치 제도의 경우에도 대부부분의 사회는 스스로 발명하는 문물보다 다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문물이 훨씬 많았다. 그러므로 어느 한 대륙에서의 확산과 이동은 그곳의 여러 사회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결국 각각의 사회는 (환경이 허락하기만 한다면) 대체로 다른 사회에서 발전된 문물들도 공유하게 된다. 그렇게 되는 과정은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머스킷 전쟁을 통하여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이점을 갖지 못한 사회는 그것을 가진 사회로부터 그 이점을 얻어내거나 아니며(얻지 못하면) 그것을 가진 사회에 의하여 교체되는 마는 것이다.

(603)

이제 중국에서 있었던 이 같은 일들을, 정치적으로 분열된 유럽의 탐험 선단이 항해를 시작했을 때의 경우와 비교해 보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이탈리아인으로 태어났지만 프랑스의 앙주 공의 신하가 되었고, 다시 포르투갈 왕의 신하가 되었다. 그러다가 포르투갈 왕에게 서진 탐험을 위한 배를 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골럼버스는 메디나 세도니아 공에서 호소했지만 그 역시 거절했다. 메디나 첼리 공에게도 호소해 보았지만 또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스페인 국왕과 왕비에게 호소하자 그들도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다시 요청했을 때는 결국 허락해 주었다. 그 당시 만약 유럽이 통일되어 앞의 세 왕후 중의 한 명이 다스리고 있었다면 남북아메리카의 식민지화는 무산되었을지도 모른다.

(613)

그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오히려 더 심각한 숙명적 의미를 갖는 또 하나의 사건은 1930년 여름의 자동차 사고다. 그것은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한 시기보다 2년 전의 일인데, 당시 그는 사망석(앞좌석 오른쪽의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그가 탄 자동차는 무거운 트레일러 트럭과 마주쳤다. 이 트럭은 히틀러의 자동차와 충돌하여 그를 깔아뭉개기 직전에 정지했다. 히틀러의 정신병이 나치당의 정책과 성공에 미친 영향의 크기를 감안할 때, 만약 그 트럭 운전수가 브레이크를 단 1초만 늦게 밟았다면 제2차 세계 대전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614)

이것과 반대되는 극단적인 견해는 프로이센의 정치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주장으로, 그는 칼라일과 달리 정치의 내면 세계를 오랫동안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정치가의 일이란, 역사 속에서 걸어가는 신의 발소리를 듣고 그가 지나갈 때 옷자락을 붙잡으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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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찼던 젊은 시절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을 때, 나는 당최 아이를 어떻게 대할지 몰라 허둥대다가 손을 많이 댈수록 오히려 자라지 못하는 어린 묘목을 떠올렸다. 나무를  키울 때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성장을 방해한다는 걸 떠올리고는 아이도 나무 기르듯 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고는 마치 어린 묘목을 돌보듯 간섭하고 싶은 마음을 거두고 한 걸음 뒤에서 아이를 지켜보았다. 덕분에 딸아이는 일찍부터 제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법을 깨우쳤다.


(7)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든 지금은 노목에게서 나이 듦의 자세를 새삼 깨우치고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제 속을 비우고 작은 생명들을 품는 나무를 보며 가진 것을 스스럼없이 나누는 삶, 비움으로서 채우는 생의 묘미를 깨닫곤 한다. 평생을 나무를 위해 살겠다고 마음 먹고 병든 나무를 고쳐 왔지만, 실은 나무에게서 매 순간 위로를 받고 살아갈 힘을 얻은 것이다.


(17)

나무는 늘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주변 환경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생명체이다. 움직일 수 없는 탓에 환경의 영향이 절대적이고, 생존하려면 주변의 아주 작은 변화에도 재빨리 대응해야 한다. 말 그대로 나무의 삶은 선택의 연속인 셈이다. 해를 향해 뻗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우듬지의 끝은 배의 돛대 꼭대기에서 주변을 감시하는 선원과 같다. 항해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발견하면 그 즉시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 우듬지의 끝은 가지에 이르는 햇볕의 상태를 일분일초 예의 주시하다가 조금이라도 달라질 낌새가 감지되면 미련 없이 방향을 바꾼다. 그 선택에 주저함은 없다. 오늘 하루가 인생의 전부인 양 곧바로 선택을 단행한다. 가만히 보면 선택이 가져올 결과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저 온 힘을 다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뿐이다. 하긴 결과를 예측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미래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르는데 말이다.


(21)

미래를 걱정하느라 오늘을 희생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한 번쯤 청계산의 소나무를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소나무는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망치지 않았다. 방향을 바꾸어야 하면 미련 없이 바꾸었고, 그 결과 소나무는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덕분에 사람들 눈에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지만 그럼 어떤가. 소나무가 왜 ㄷ자 모양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알고 나면 그 지독하고도 무서운 결단력에 혀를 내두르게 될 뿐이다. 내일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오늘 이 순간의 선택에 최선을 다해 온 소나무.


(32)

나무는 유형기를 보내는 동안 바깥세상과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을 벌인다. 따뜻한 햇볕이 아무리 유혹해도, 주변 나무들이 보란 듯이 쑥쑥 자라나도, 결코 하늘을 향해 몸집을 키우지 않는다. 땅속 어딘가에 있을 물길을 찾아 더 깊이 뿌리를 내릴 뿐이다. 그렇게 어두운 땅속에서 길을 트고 자리를 잡는 동안 실타래처럼 가는 뿌리는 튼튼하게 골격을 만들고 웬만한 가뭄은 너끈히 이겨낼 근성을 갖춘다. 나무마다 다르지만 그렇게 보내는 유형기가 평균 잡아 5. 나무는 유형기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하늘을 향해 줄기를 뻗기 시작한다. 짧지 않은 시간 뿌리에 힘에 쏟은 덕분에 세찬 바람과 폭우에도 굳건히 버틸 수 있는 성목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38)

그런 의미에서 나무는 스스로 멈춰야 할 때를 잘 안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성장했고, 욕심을 내면 조금 더 클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나무들은 자라기를 멈춘다. 마치 동맹을 맺듯 나도 그만 자랄 테니 너도 그만 자라렴하고 함께 성장을 멈추고는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결국 나무에게 있어 멈춤은 자신을 위한 약속이면서 동시에 주변 나무들과 맺은 공존의 계약인 셈이다.


(50)

새 생명이 자라기 위해 숲에 빈틈이 필요하듯 우리 인생도 틈이 있어야만 한숨을 돌리고 다음 걸음을 내디딜 힘을 얻을 수 있다. 나 또한 완벽주의를 내려놓고 나니 비로소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만일 내가 모든 나무를 완벽하게 고치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더라면 나무 몇 그루쯤 더 살릴 수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까지 일을 계속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정말이지 일이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실수한 것만 떠오르고, 전부 마음에 들지 않고, 스트레스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해 나무를 위한 최선의 결정을 내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64)

그렇게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걷다 보니 걷는 것이 마치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친 욕심으로 무겁게 배낭을 메고서는 절대 멀리 가지 못하는 것처럼, 인생도 집착과 욕심을 내려놓지 않고는 진정 원하는 곳에 이를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였다. 마음을 낮추고 가진 것을 내려놓을 때 인생길이든 여행길이든 비로소 가볍게 걸을 수 있다는 걸 왜 진작에 몰랐을까.


(84)

이렇듯 우듬지가 구심점 노릇을 해 주어서 나무는 자라는 동안 일정한 수형을 유지할 수 있다. 특히 전나무나 메타세쿼이아 같은 침엽수들이 원추형으로 길고 곧게 자랄 수 있는 것은 줄기 꼭대기의 우듬지가 아래 가지들을 강한 힘으로 통솔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생에 비유하자면 꿈이나 희망이랄까. 나무의 우듬지가 아래 가지들을 다스려 가면서 하늘을 향해 뻗어 가듯, 사람은 꿈이나 희망 등 살아갈 이유가 있어야만 삶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이겨 내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96)

누구에게나 새로운 시작은 두렵고 떨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살아 보니 틀린 길은 없었다. 시도한 일이 혹시 실패한다 해도 경험은 남아서 다른 일을 함에 있어 분명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꿈을 이루기 위해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해 볼 여지가 있다면, 씨앗이 껍질을 뚫고 세상으로 나오듯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괴테도 말하지 않았던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용기 속에 당신의 천재성과 능력과 기적이 모두 숨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거목도 그 처음은 손톱보다도 작은 씨앗이었음을 잊지 말기를.


(101-102)

그래서 나는 광보상점 같은 나무의 기질에 대해 설명할 때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자세를 비유로 들곤 한다. 기질에 맞게 자리만 잘 잡아주면 나무는 큰 보살핌 없이도 제가 알아서 잘 자란다. 아이 역시 타고난 적성에 맞춰 방향만 잘 잡아 주면 아기새가 둥지를 떠나 드넓은 하늘로 날아오르듯 자신의 인생을 알아서 잘 펼쳐 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든지 잘 모르는 부모가 의외로 많다. 나무에 관심이 많다면서도 나무에 대해 너무 몰랐던 내 친구처럼 말이다. 앞으로는 내 아이는 내가 제일 잘 알지요라고 말하기 전에 아이에게 요즘은 뭐가 제일 재미있어?”라고 묻는 부모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114)

삶도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가는 모든 길은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이왕 남길 흔적,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들고, 나와 함께해서 좋았다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늘어나면 얼마나 보람될까. 그래서 나는 나무처럼 사는 것이 삶의 목표다. 그러한 제목으로 책을 낸 후 후회도 많이 했다. 어디 나무처럼 산다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그래도 나는 그러고 싶다. 꼭 나무처럼만 살았으면 원이 없겠다.


(132-133)

맞서 싸우지 않고 일단 한 걸음 물러서서 부드럽게 우회할 줄 아는 것. 그것을 결코 지는 것이 아니다. 저 혼자 강하게 곧추선 나무가 한여름 폭풍우에 가장 먼저 쓰러지는 법이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아무리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면 안 된다. 노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부드러운 것이 능히 단단한 것을 이기고 약한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긴다.”


(137)

가만히 보면 나무에게 있어 적응은 가진 것을 버리는 데사 출발한다. 똑 같은 종인데도 사막과 초원의 경계쯤에 자리한 나무는 비옥한 땅에서 자라는 나무에 비해 뻗는 가지도 적고, 가지에 달린 잎도 얼마 되지 않는다. 대신 건조한 기후에 살아남기 위해 잎이 두껍다. 아예 사막으로 들어가면 그나마 있던 잎도 모두 없애고 잎이 달릴 자리에 가시만 남긴다. 변화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본연의 모습을 철저히 버리고 그곳에 맞게 적응해 가는 것이다. 더욱이 그냥 적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변의 다른 생명체들까지 불러 모아 새로운 생명의 땅을 만든다.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나무가 한번 머물다 간 자리는 생명이 깃드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198)

사람은 누구나 어제보다 나은 오늘, 달라질 내일을 꿈꾼다. 하지만 마음만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거창한 변화가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변화를 시도하는 오늘이 쌓여 어느 순간 달라지는 내일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모든 것은 지금보다 조금은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하겠다는 작은 결심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자리를 탓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 안에서 부단히 변모를 꾀하며 수백 년 살아가는 나무처럼 말이다.


(226-227)

그런데 플라타너스의 우리말 이름이 버즘나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플라타너스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껍질이 벗겨져 허연 속살이 얼룩덜룩 보이는 수피가 얼굴에 피는 버짐(버즘)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253-254)

가만히 보면 세상 모든 문제를 정해진 틀 안에서 해석하고, 자신의 삶조차 규격화된 공식 안에 가두어 살아가는 존재는 인간뿐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한 삶이라는 것도 실은 누가 정해 놓았는지도 모를 인생 공식 안에 갇힌 박제 같은 인생이 아닐는지. 하지만 삶을 거듭할수록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복잡한 문제들은 결코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지지 않는다. 알려진 공식대로 열심히 달려간다 한들, 그것이 진정한 인생의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292)

나무가 하늘을 향해 크게 자랄 수 있는 것은 바람에 수없이 흔들리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냉혹한 바람에 꽃과 열매를 한순간에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뿌리의 힘은 강해지고 시련에 대한 내성도 커진다. 바닷가에 자리한 팽나무가 거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꼿꼿했더라면 그렇게 아름다운 가지들을 지닌 거목으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팽나무에게 있어 흔들림은 스스로를 더 강하고 크게 만드는 기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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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6)

내 생각을 말해줄까? 공부는 꼭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둔하다고 했지? 송곳은 구멍을 쉬 뚫어도 곧 다시 막히고 만다. 둔탁한 끝으로는 구멍을 뚫기가 쉽지 않지만, 계속 들이파면 구멍이 뚫리게 되지. 뚫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구멍이 뻥 뚫리면 절대로 막히는 법이 없다. 앞뒤가 꼭 막혔다고? 융통성이 없다고 했지? 여름 장마철의 봇물을 보렴. 막힌 물은 답답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빙빙 돈다. 그러다가 농부가 삽을 들어 막힌 봇물을 터뜨리면 그 성대한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단다. 얼마나 통쾌하냐? 어근버근 답답하다고 했지? 처음에는 누구나 공부가 익지 않아 힘들고 버벅거리고, 들쭉날쭉하게 마련이다. 그럴수록 꾸준히 연마하면 나중에는 튀어나와 울퉁불퉁하던 것이 반질반질 반반해져서 마침내 반빡반짝 빛나게 된다. 구멍은 어떻게 뚫어야 할까? 부지런히 하면 된다. 막힌 것을 틔우는 것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연마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어찌해야 부지런히 할 수 있겠니?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으면 된다. 그렇게 할 수 있겠지? 어기지 않고 할 수 있겠지?


(53)

사의재(四宜齋)는 내가 강진에 귀양 와서 사는 집이다. 생각은 담백해야 한다. 담백하지 않으면 서둘러 이를 맑게 해야 한다. 외모는 장중해야 한다. 장중하지 않으면 빨리 단속해야 한다. 말은 과묵해야 한다. 과묵하지 않으면 바삐 멈춰야 한다. 동작은 무거워야 한다. 무겁지 않거든 재빨리 더디게 해야 한다. 이에 그 방에 이름을 붙여 사의재라 하였다. 마땅하다()는 것은 의롭다()는 뜻이다. 의로움으로 통제한다는 의미다. 나이가 들어감을 생각하다보니 뜻과 학업이 무너진 것이 슬퍼서 스스로 반성하길 바란 것이다. 이때는 가경8(순조3, 1803) 겨울 11월 신축일 초열흘, 동짓날이니, 실로 갑자년이 시작하는 날이다. 이날 <주역>의 건괘를 읽었다.”


(62~63)

아이가 글을 읽는 것은 대개9년이다. 여덟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가 그때다. 하지만 여덟 살부터 열한 살까지는 아는 것이 어리석어 책을 읽어도 맛을 모른다. 열대여섯 살쯤 되면 이미 음양에 대한 기호가 생겨 여러 가지 물욕으로 마음이 나뉜다. 실제로는 열두 살부터 열네 살까지 3년간 독서한다. 하지만 이 3년 중에도 여름에는 무더위로 괴롭고 봄가을로는 좋은 날이 많다. 아이들은 놀기를 좋아해서 모두 능히 독서만 할 수가 없다. 다만 9월부터 2월까지의 180일간이 독서하는 날이 된다. 3년을 합쳐 계산하면 540일이다. 여기에다 세시(歲時)의 놀이와 질병이나 우환으로 방해받는 날짜를 빼면 실제로 독서할 수 있는 대략 3백 일이다. 3백 일은 하루하루가 보배구슬 같고, 하나하나가 금옥과 다름없다. 하지만 조선의 어린이들은 모두 소미 선생의 <통감절요> 15책을 이 3백 일간의 양식으로 충당한다. 결국 평생의 독서가 이 책 한 질에 그치고 만나. 나머지 다른 책을 읽는다고는 해도 모두 대충대충 읽어 온전히 하지 못하니 족히 꼽을 것이 못 된다.”


(131)

생활을 꾀하는 방법은 밤낮으로 궁리해봐도 뽕나무 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구나. 이제야 제갈공명의 지혜로움이 과연 가장 윗길임을 알겠다. 과일을 파는 것은 본래 맑은 이름을 지키는 일이기는 해도 장사꾼에 가깝다. 뽕나무 같은 것으로 선비의 명성을 잃지도 않고 큰 장사꾼의 이익을 얻게 되니, 천하에 이 같은 일이 다시 있겠느냐. 남쪽 땅에 뽕나무를 365그루 심은 사람이 있다. 이것으로 해마다 돈 365꿰미를 얻는다. 1 365일에 날마다 한 꿰미씩 써서 양식을 삼으니 평생 궁하지 않았다. 마침내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채 세상을 떴으니, 이 일을 가장 본떠 배워야 할 것이다. 그다음은 잠실(蠶室) 세 칸을 짓고 잠박(蠶箔) 7층으로 만들어라. 모두 스물한 칸에 누에를 길러 부녀자들이 놀고먹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니라. 올해 오디가 익었으니, 너는 소홀히 여기지 마라.”


(139)

- 공부는 밥 먹듯이 해야 하는 법이다. 숨 쉬듯이 하고, 습관처럼 해야지. 내가 그렇게 두고두고 일렀거늘

- 그리하겠습니다. 다시는 마음을 풀지 않겠습니다.

- 한동안 고성사로 올라가 지내거라. 안과는 당분간 떨어져 공부만 해야 한다. 시를 짓거든 내게 내려보내고. 날마다 목표량을 정해놓고 읽고 쓰도록 해라. 중간에 맥을 놓으면 공부도 덩달아 맹탕이 된다. 새잡이가 되고 만다. 이 길로 올라가거라. 알겠느냐?


(160-161)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은 처음에 종을 쳐서 시작하고, 끝에는 경()을 울려 마친다. 순순하게 나가다가 끊어질 듯 이어지며, 마침내 화합을 이룬다. 이렇게 해서 악장이 이루어진다. 하늘은 1년을 한 악장으로 삼는다. 처음에는 싹 트고 번성하며 곱고도 어여뻐 온갖 꽃이 향기롭다. 마칠 때가 되면 곱게 물들이고 단장한 듯 색칠하여 붉은색과 노란색, 자줏빛과 초록빛을 띤다. 너울너울 어지러운 빛이 사람의 눈에 환하게 비친다. 그러고서는 거둬들여 이를 간직한다. 그 능함을 드러내고 그 묘함을 빛내려는 까닭이다. 만약 가을바람이 한차례 불어오자 쓸쓸해져서 다시 떨쳐 펴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텅 비어 떨어진다면, 그래도 이것으로 악장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산에 산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매번 단풍철을 만나면 문득 술을 갖추고 시를 지으며 하루를 즐겼다. 진실로 또한 한 곡이 끝나는 연주에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185)

- 아버님! 우리 풍속에서 집안의 촌수를 따지는 것은 고루하고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닐는지요?

- 삼촌이니 사촌이니 하는 것은 네 말대로 우리나라 풍속이다. 하지만 또 지극히 묘하고 정밀하다. 마땅히 정리(情理)상 우리나라 풍속이라 하여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된다. 다만 촌수를 따지는 의미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숙부가 삼촌이 되는 것을 따져보자. 나와 아버지는 1촌이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또 1촌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동생은 또 1촌이다. 그래서 3촌이 되는 것이지. 4촌이나 6촌은 거슬러 증조부까지 올라가서 따져서 내려와 그 촌수를 헤아린다. 지금 사람들이 4촌과 6촌은 모두 나란히 놓고 옆으로만 따지려 들어, 끝내 4 6을 맞추기 못하니 또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8촌의 경우는 고조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내려와야 한다. 네가 시험 삼아 다른 사람에게 이를 물어보면 알게 될 게다.


(285)

깊은 산속에 살며 거친 옷에 짚신을 신고 맑은 못가에서 발을 씻고 고송에 기대어 휘파람을 분다. 집에는 좋은 거문고와 오래된 경쇠(맑은 소리를 내는 악기의 종류)를 놓아두고, 바둑판 하나와 책을 한 다락쯤 갖추어 둔다. 마당에는 백학 한 쌍을 기르고, 기이한 꽃과 나무, 수명을 늘이고 기운을 북돋우는 약초를 심는다. 이따금 산승이나 우객(羽客, 도사)과 서로 왕래하며 소요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세월이 가고 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조야(朝野, 조정과 민간을 통틀어 이르는 말)가 잘 다스려지는지 어지러운지에 대해서도 듣지 않는다. 이런 것을 두고 청복(淸福)이라고 한다.”


(312)

제목은 <4 20일에 학포가 왔다. 서로 헤어진 지 이미 8년이 되었다>이다.

생김새는 내 자식이 틀림없는데

수염 자라 흡사 딴사람 같네.

집 편지 가지고 오긴 했어도

정말로 진짜인가 긴가민가해.”


(331~333)

예전 죽란(竹欄, 서울 명례방의 집 이름)에서 살 적에 내 성품이 국화를 사랑했다. 해마다 국화 화분 수십 개를 길러, 여름에는 그 잎을 살피고, 가을에는 그 꽃을 보았다. 낮에는 그 자태를 관찰하고, 밤에는 그림자를 감상했다. 무실선생(務實先生)이란 이가 지나는 길에 들렀다가 비난하며 말했다. “심하구려. 그대의 화려함이. 그대는 어째서 국화를 기르는가? 복숭아와 오얏, 매화가 살구 같은 것은 꽃과 열매를 두루 갖추고 있고. 나는 이 때문에 일삼아 이를 기른다네. 열매가 없는 꽃은 군자가 마땅히 심을 것이 못 되어.” 내가 말했다. “공께서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십니다그려. 형체와 정신이 오묘하게 합쳐져 사람이 됩니다. 형체만 기르면 정신이 굶주릴 수 있습니다. 열매가 있는 것은 입과 몸뚱이를 길러주고, 열매가 없는 것은 마음과 뜻을 즐겁게 하지요. 어느 것이든 사람을 길러주지 않음이 없습니다. 맹자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요? ‘대체(大體)를 기르는 자는 대인이 되고, 소체(小體)를 기르는 자는 소인이 된다고요. 어찌 반드시 입에 넣어 목구멍으로 삼킨 뒤라야 실용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의 도리를 확충한다면 장차 농부라야 성인이 되겠고, 시를 외우고 글을 읽는 것은 모두 실속 없는 공부가 되고 말겠군요. 이 어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불가의 말에도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이도(異道)이기는 하나 지극한 이치가 담긴 말입니다. 또 어찌 이른바 실이 허가 아니며, 허가 실이 아닌 줄을 알겠습니까? 공자께서는 군자는 의리로 깨우치고, 소인은 이익으로 깨우친다고 했습니다. 주자가 육자정(중국 남송의 유학자 육구연)과 더불어 아호의 강석(講席)에서 이 뜻을 강론할 때, 사방에 앉았던 이들이 이를 위해 눈물을 흘린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모두 허를 살핌을 실이라 여기고, 이익을 깨우침을 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실로 분명하고 통쾌하게 이를 나눠 풀이하자 총명한 사람들이 모두 울었던 것입니다.”


(406-407)

황상이 마재를 떠나던 2 19일만 해도 다산의 용태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아침나절에는 감회가 일었던지 결혼 60주년을 돌아보는 시도 한 수 지었다. <회근시>가 그것이다.

눈 돌리는 사이에 예순 해가 지나가니

복사꽃 짙은 봄빛 신혼 때와 비슷하다.

살아 이별 죽어 이별 늙음만 재촉하고

짧은 근심 긴 기쁨에 임금 은혜 감격하네.

이 밤에 목란사(木蘭詞)는 가락이 더욱 좋고

그 옛날의 <하피첩>엔 먹 자국이 남았구나.

갈라졌다 되합쳐짐 내 형상 그대로라

합환 술잔 남겨두어 자손에게 주리라.”


(543-544)

황상은 정학연의 죽음을 통곡하며 <곡정감역> 3수를 지었다. 셋째 수만 읽겠다.

이재 완당 산천 공의 좌석에 함께하니

노둔한 말 천리마 터럭에 붙었다고 말들 했지.

만리장성 무너져서 몸은 위태로운데

늦봄이라 꽃 시들고 빗소리는 수런수런.

집 일으킨 큰 사업이 어이 부끄러우랴만

동각의 유편(遺編) 앞에 머리 자주 긁적였지.

시문 어이 일삼으리 휘파람만 그저 불며

남은 인생 다만 그저 술 마시며 울 뿐일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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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

겐테 박사는 서울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서울의 로케이션은 아주 독특하다. 사방에 뾰족하고 높고 힘찬 산들이 민가가 들어선 곳까지 뻗어 내려오면서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 서울의 모습이다. 이런 전망(view)을 가진 서울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아름답고도 꼽는 군주국 도시 명단에 들어가야 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서울을 페르시아 수도 테헤란과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와 비교해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러나 서울에는 (…) 잘츠부르크처럼 웅장하고 엄숙한 기사의 성채가 없고, 테헤란의 (…) 위엄 넘치는 다만반드(Damavand) 산처럼 거대한 산도 없다. 그러나 서울보다 고도가 약 300미터 높을 뿐인 남산에서 내려다보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44-45)

성종 19(1488)에 명나라에서 온 동월이라는 사신은 <조선부>에서 서북쪽에서 들어오며 한양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찬미했다.

임진강 나루를 건너 파주에 이르러 한성을 바라보니 저 높이 서기(瑞氣)가 어리었다. 벽제관을 지나 홍제원에 당도하니 여기가 조선의 서울인데 동편으로 우뚝하다. 높은 삼각산에 받쳐 있고 울창한 푸른 소나무 그늘에 덮여 있다. 북쪽은 천 길로 이어져 내려서 그 기세는 진정 천군(千軍)을 누를 만하고 서쪽을 바라보니 한 관문(關門)이 있는데 오직 말 한 필 드나들 만하다. 산은 성 밖을 둘렀는데 날쌘 봉황이 날아가며 번뜩이는 것 같고 소나무 아래에 흰모래는 마치 쌓인 눈에 햇볕이 내리쬐는 듯하다.”


(48)

단적으로 말해 한양도성은 전란을 대비해 쌓은 성곽이 아니라 수도 한양의 권위와 품위를 위해 두른 울타리다. 집에 담장이 있고, 읍에 읍성이 있듯이 수도 서울에 두른 도성이다. 영어로 말해서 포트리스(fortress)가 아니라 시티 월(city wall)이다. 만약에 전쟁을 대비해 성곽을 축조했다면 석벽을 사다리꼴로 높이 쌓고 성곽 둘레에 해자를 깊게 파서 두르는 등 겹겹의 방어시설을 구축했어야 했다. 도성이 울타리이기 때문에 숭례문을 비롯한 관문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행문 이상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 동대문을 옹성처럼 두른 것은 전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풍수상 허하다는 서울의 동쪽 지세를 보완한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64)

풍경 뻬레스트로이까 북악산 개방에 부쳐(황지우)


뉴욕에도 도쿄에도 베이징에도 베를린,

모스끄바에도 없는 산()

단 하루도 산을 못 보면 사는 것 같지가 않은,

산이 목숨이고 산이 종교인 나라에

오늘

싱싱한 산 한 채가

방금 채색한 각황전(覺皇殿)처럼

사월 초순 첫 초록 재치고

솟아올랐네.


저 권부의 푸른 기와집 그늘에 가려

지난 반세기 마음의 위도에서 사라졌던 자리에서

오늘 이제는 육성으로 이름 불러도 될

그대 백악이여,

금지된 빗금을 넘어 그대가

사람 만나러 내려올 때

솟아난 것은 한낱 돌덩어리가 아닌

우리네 마음의 넉넉한 포물선이었구나.


이렇게 풀어버리니 별것도 아니었던 두려움이,

홍련사에서 숙정문 지나

창의문에 이른 길 따라,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운 아름다움이 되었으니

아무나 그 문들 활짝 열어

그대 슬하에 감추인 말바위며 촛대바위를

순우리말로 되찾아오네.

하여 차출된 팔도 머슴애들의 사투리를

잘 짜 맞춘 성곽이

산허리를 재봉틀질한 것 같은

역사의 긴 문장이 되고

그 쉼표마다 돌아서 내쉰 한숨이

이렇듯 위업이 되었음에랴, 하지만.

이렇듯 풀과 꽃과 나미가 되돌아온 자리에

제 빛깔과 향기가 이름을 되물려 주는 것만으로도

이보다 더 한 위업이 있을까!


, 이제 가물면 북문(北門)을 열어주고

물 넘치면 그 문 닫아둘 수 있는 산,

동네 처자들 숙정문 세 번 가면

안 되는 사랑도 이루어진다는 그 소문난 산,

파리에도 런던에도 하노이, 시드니에도 없는 산,

봄비 그치고 송진처럼 물방울 맺힌 나뭇가지 사이로

마침내 사람 눈을 만난 북악산

그 언저리 허공 어디쯤

붉은 낙관(落款) 한 점 꾸욱 눌러두고 싶네.


(125)

인조반정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연산군 때 탕춘대 절벽 밑 좌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워 옆으로 긴 누각을 지었다.”고 했고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성종 때 문신인 성현(成俔) <용재총화>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도성 밖에 놀 만한 곳으로는 장의사 앞 시내가 가장 아름답다. 시냇물이 삼각산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오고 골짜기 안에는 여제단(厲祭壇)이 있으며 그 남쪽에는 무이정사(武夷精舍, 무계정사를 말한 듯함)의 옛터가 있는데 길 앞에는 돌을 수십 길이나 쌓아올린 수각이 있다. 또 절 앞 수십 보 앞에는 차일암(遮日巖)이 있는데, 바위가 절벽을 이루어 시내를 베고 있는 것과 같으며 그 바위 위에는 장막을 칠 만한 우묵한 곳이 있는데 바위는 층층으로 포개져 계단과 같다. 흐르는 물소리가 맑은 하늘 아래 천둥 번개가 치는 듯해 귀가 따갑다. 물이 맑고 돌이 희어서 선경(仙境)이 완연하다.”


(151)

석파(이하응)는 난초 그림뿐만 아니라 시도 잘 지었고, 글씨도 잘 썼고 독서도 많이 했다. 그가 즐겨 사용한 문자도장에는 이런 멋진 문구가 있다.

讀未見書 如逢良士

讀己見書 如遇故士

아직 보지 못한 책을 읽을 때는 어진 선비를 만나듯 하고

이미 본 때를 읽을 때는 옛 벗을 만나듯 한다.”


(152)

유주학선 무주학불(有酒學仙 無酒學佛)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

인생의 여유와 허허로움을 느끼게 하는 명구가 아닐 수 없다. 석파정에서 동쪽으로 건너다보이는 북악산 아래에는 추시가 지내던 백석동천 별서가 있다. 이제 백석동천으로 발을 옮기자니 사제지간에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왠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별서의 팔자였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


(168)

현진권은 자신이 역사소설로 돌아선 이유에 대해 <문장> 1939 12월호에 <역사소설문제>를 기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을 위한 소설이 아니오. 소설을 위한 사실인 이상 그 과거가 현재에 가지지 못한, 구하지 못한 진실성을 띄었기 때문에 더 현실적이라고 믿습니다. 현재의 사실에서 취재한 것보담 더 맥이 뛰고 피가 흐르는 현실감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비현실적이라는 둥 도피적이라는 둥 하는 비난의 화살은 저절로 그 과녁을 잃을 것입니다.”


(176-177)

나는 이 집의 돌기와 지붕을 얹은 긴 콩떡 담장에서 우리나라 한옥 담장의 미학을 본다. 중국의 담처럼 바깥과 철저히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환경과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다. 비탈을 오르는 돌담의 기와 지붕이 계속 높이를 달리하는 것도 즐겁다. 이 돌담이 있음으로 해서 이 동네 거리가 얼마나 고상해지고 품격이 높아지는가 생각하면 내 주장에 수긍할 것이다. 돌담도 사괴석(四塊石)으로 권위 있게 쌓은 것이 아니라 막돌을 얼기설기 쌓고 흰 강회로 마감한 콩떡 담장인지라 더 정감이 간다.


(196)

그런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주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7 2월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1895)을 겪은 고종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지 1년 뒤에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법궁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해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은 황궁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뒤를 이은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에 상황(上皇)으로 남은 아버지께서 덕에 의지해 장수하시라는 뜻으로 덕 덕() , 목숨 수() , 덕수(德壽)라는 이름을 지어 바쳤고 이후 덕수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283-284)

그런가 하면 대한문의 한() 자를 중국의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 중국을 숭상하는 뜻이 있다는 주장, 혹은 조선도 중국처럼 큰 나라라는 뜻이라는 설도 나왔다. 반대로 이 글자를 놈이라는 뜻으로 해석해 이토 히로부미가 큰 놈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뜻으로 바꾸도록 강요했다는 주장도 생겼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낭설이다. 1907년에 편찬된 <경운궁 중건도감 의궤>에 실려 있는 이근명(李根命) <대한문 상량문>에 그 내력이 소상히 밝혀져 있는바, 대한은 큰 하늘이라는 뜻으로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이 하늘과 함께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381)

성균이란 음악에서 음을 고르게 주율하는 것을 뜻하며 <주례(周禮)> <대사악(大司樂)>에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성균의 법을 관장하여 국가의 학정(學政)을 다스리고 나라의 자제들을 모아 교육한다.”

그리고 주소(注疏, 각주)에서는 그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이란 그 행동의 이지러진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이란 습속의 치우침을 균형 있게 하는 것이다.”


(387-389)

모든 선비들이 학문에 힘쓰고 품행을 깨끗이 해 세상에 나오면 왕조의 존경 대상이 되고, 들어앉아서 유림(儒林)의 표상과 기준이 된다면 국가적으로는 그것이 큰 디딤돌이 되어 굳이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법은 엄해질 것이요, 비단결같이 꾸미지 않아도 문장은 유려할 것이며, 노래와 춤이 아니어도 백성들은 즐길 것이고, 사냥 연습이 아니고도 병력은 강해질 것이며, 100년이 안 되어도 예악(禮樂)이 흥성해질 것이다.”

이렇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서두를 시작한 정조는 나라에서 학생들을 예우하는 뜻을 이렇게 말했다.

요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한결같이 지금 선비들의 처신이 예만 못하고, 학문도 지금 선비들은 예만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지껄이는 소리에 불과하다. 지껄이는 자 역시 지금의 선비가 아니란 말인가.

선비를 만들고 뛰어난 인물을 장려하는 것이 왜 괜한 일이 일이겠는가. 선비로서 자신을 아끼는 것과 남들이 아껴주는 것 모두가 국가에서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에 임할 것을 부탁하는데 그것은 의례적인 훈시가 아니라 술잔을 내려주며 하는 격려였다.

이제 먹을 것과 함께 은술잔을 내린다. 제생(諸生)들은 술잔 속에 아유가빈(我有嘉賓)’이라 새겨져 있는 것을 아는가? ‘나에게 아름다운 손님이 있다는 이 말은 <시경> ‘녹명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빈객과 자리를 함께하는 것이란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밤새도록 자리를 뜨지 않고 갖옷 없이도 추위를 느끼지 않으며 또 피곤도 느끼지 않는다. 이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영재를 육성하는 데 일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새긴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부탁하는 말로 끝맺는데 그 비유의 뜻이 자못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

! 제생들아! 그대들은 나의 이 말로 하여 혹 느슨하게 생각하지들 말고 한 치 한 푼이라도 오르고 또 올라 마치 100리 길을 가는 사람이 항상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듯이 하라. 그리하면 자만하고 싶어도 자만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계속해야 할 것이 학업이고 무궁무진한 것이 덕이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바라는 것은 제생들이 그렇게 계속 노력하여 무궁한 발전을 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제생들이여! 감히 노력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정조의 ‘100리 길을 갈 때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라는 말에 나는 그간 80리만 가도 다 간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아 조금 뜨끔했다.


(409)

먼 옛날로 돌아가서 600여 년 전, 수도 한양의 도시계획 마스터플랜을 설계한 삼봉(三峯) 정도전은 동네마다 이름을 지으면서 성균관 일대는 가르침을 숭상한다는 의미로 숭교방(崇敎坊)이라고 했다. 오늘날 대학로가 있는 성균관 옆 동네가 동숭동(東崇洞)인 것은 숭교방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448)

성균관이 강학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향사공간인 대성전(大成殿)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교()와 학()이 분리되지 않아 유학(儒學)이면서 동시에 유교(儒敎)임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그 때문에 불교와 마찬가지로 유교의 성현을 모시고 예를 올리는 종교공간을 갖고 있는데 이를 문묘(文廟)라 한다. 불교에 사찰이 있듯이 유교엔 문묘가 있고, 사찰에 대웅전이 있듯이 문묘엔 대성전이 있고, 사찰에 관음전, 지장전이 있어 보살을 모시듯이 문묘엔 동무(東廡), 서무(西廡)가 있어 역대 성현들을 모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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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철 2020-08-17 0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고 쓰고 잊는다...
황지우님의 시 잘 읽고 복사해 갑니다.
감사합니다.

읽고 복사하고 저장해두고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