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국토를 인체에 비유하면 산맥은 뼈, 들판은 살, 강은 핏줄이다. 산과 들은 국토의 골격을 이루고 강물은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강은 언제나 그렇듯이 유유히 흐르면서 국토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며 흐르는 강물은 여기에
살던 사람들의 애환을 침묵 속에 증언한다. 그리하여 강은 그 이름만 불러보아도 국토의 향기와 역사의
고동이 일어난다. 압록강, 두만강, 청천강, 대동강, 임진강, 한강, 금강, 낙동강, 섬진강……
(16)
한강은 태백산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양수리에서 만나 도도한 강줄기를
이루며 서울을 가로질러 서해로 흘러드는 한반도의 젖줄이다. 그중 한강의 본류는 남한강인데, 태백산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서해에 이르는 물길은 약 500킬로미터에
이른다.
남한강에는 수많은 지류가 실핏줄처럼 퍼져 있어 상류로 올라가 각 고장을 지날 때마다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남한강의 상류는 크게 두 줄기로 흘러내려 영월에서 만난다. 그것이 영월의 동강과 서강이다.
(55)
나는 최언위의 일생을 통해 통일신라가 왜 망했고 고려가 어떻게 새 왕조를 세웠는가를 생각해본다. 통일신라는 끝내 골품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당나라 과거에 급제한
지식인들을 여전히 6두품에 두어 아찬(阿飡) 이상 올라갈 수 없게 했다. 최치원이 제시한 ‘시무십조(時務十條)’라는
개혁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득권을 갖고 있던 보수적인 귀족들이 개혁은커녕 자신들의 보호막을 더욱더
두껍게 두르다가 종국엔 멸망의 길로 들어갔던 것이다.
(100-101)
이렇게 쓰인 그의 <단종애사>는 당시 독자들이 식민지 현실에 빗대어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은 일제의 이등박문을, 삼촌 손에 억울하게 폐위당하고 죽은 단종은 고종 순종을, 사육신 생육신은 독립투사를, 수양대군과 한패가 된 정인지 한명회는
이완용 조병준 등의 매국노를 연상시키는 뚜렷한 작중인물 설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춘원 이광수는
“과연 춘원이로다”라는 찬사를 받았다는데 나는 그의 명작을
이 이상 소개하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132-133)
한국문화에 대하여 줄곧 애정 있는 충고를 해온 프랑스의 석학인 기소르망이 올해(2015) 6월 초, 한국외국어대에서 열린 특강에서 ‘한 국가의 문화적 이미지는 경제와 산업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가’며
이제 한국은 문화적 정당성을 인지하고 그 이미지를 만들어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한국의 브랜드 이미지를 정해보라고 한다면 백자 달항아리를 심벌로 삼겠다고 했다. 기소르망은
모나리자에 견줄 수 있는 달항아리의 미적 가치를 왜 한국이 이미지 메이킹에 활용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206)
<삼봉집>에는
이외에도 삼봉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 위치를 보면 삼각산이 맞다고 했다. 이런 논증은 단양 사람들에게
서운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오서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 허구를 사실로 끼워맞추다보면 더 큰 허구만 낳는다. ‘한때 정도전의
삼봉이 도담삼봉으로 알려졌다.’고 한 걸음만 양보한다고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그런다고 도담삼봉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280-281)
영국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메켄지(F.A. Mckenzie) 기자는 <조선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내가 제천에 이르렀을 때는 햇살이 뜨거운 초여름이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제천 시내 한가운데 아사봉(관아 뒤쪽에
있는 동산)에는 펄럭이는 일장기가 밝은 햇살 아래 선명하게 보였고, 일본군
보초의 총검 또한 빛났다. (…)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번화했던 거리였었는데 그것이 지금은 시커먼 잿더미와 타다 남은 것들만이
쌓여 있을 따름이었다. 완전한 벽 하나, 기둥 하나, 된장항아리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제천은 지도 위에서 싹
지워져버리고 말았다.”
위정척사 사상과 의병운동에 대해서는 완고한 보수적 고집이라는 측면이 강한 유교의 극단적인 이단(異端)으로 보는 역사적 평가도 있다.
그러나 위정척사는 외세와 일본의 침탈에 대한 완강한 저항과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흔히 생각하는 보수반동과는 다르다.
(285)
‘황사영 백서’는
길이 62센티미터, 너비
38센티미터의 흰 비단에 극세필 붓을 사용하여 먹으로 쓴 깨알 같은 글씨 1만 3,311자로 이루어진 장문의 편지이다. 누구든 이 편지를 보면 내용을
둘째 치고 그 정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2013년 울산 대곡박물관에서는 ‘천주교의 큰 빛, 언양’이라는
기획전을 하면서 이 황사영 백서의 정밀 복제본을 전시했는데 박미연 학예사의 말에 의하면 천주교인들은 그 내용보다 깨알 같은 글씨는 보면서 울먹이며
기도하더라는 것이다.
(377)
내가 담배를 끊은 이유는 그때 담뱃값이 폭발적으로 올라서도 아니고, 건강이 나빠져서도 아니었다. 세상이 담배 피우는 사람을 미개인 보듯
하고, 공공의 유해사범으로 모는 것이 기분 나쁘고, 집에서도
밖에서도 길에서도 담배 피울 곳이 없어 쓰레기통 옆이나 독가스실 같은 흡연실에서 피우고 있자니 서럽고 처량하고 아니꼽고 치사해서 끊은 것이다.
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7세기로 <조선왕조실록>에선 광해군 때부터 담배 얘기가 나온다. 담배라는 말은 포르투갈어 타바코(Tabaco)에서 온 것이고 옛날에는
연초(煙草)라고 했다. 이후
많은 애연가를 낳아 영조 때 허필(許佖)이라는 문인은 아예
호를 연객(煙客)이라고 했다. 연초는 연차(煙茶)라는
매력적인 이름으로도 불렸다. 정조대왕이 어느 신하에게 “창덕궁에서
재배한 연두 두 봉지를 보낸다”고 한 자상한 편지가 전하고 있다.
(419)
신륵사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보기 드문 강변 사찰이다. 절집이라면 대개 깊은 산중이나 시내에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남한강변의 높직한 절벽 위에 자리잡은 신륵사는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을 내려다보며 여봐란듯이 가슴을 젖히고 있다.
강물은 쪽빛으로 흐르고 강 건너 은모래 백사장은 눈부시게 빛난다. 그들이 말하는 신륵사의
아름다움이란 곧 신륵사에서 바라보는 남한강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442)
신륵사 절집 자체도 주변의 번잡함에 오염되었는지 절집의 크기와 어울리지 않게 일주문을 거대하게
세우고 단청도 요란하게 하면서 고찰의 모습을 잃어간 것이 너무도 아쉽다. 게다가 4대강 사업이 강행되면서 신륵사는 두 가지를 잃었다. 강월헌 건너편
은모래 백사장이 이제는 사라졌다. 그 아름다운 강마을을 대신한 고수부지식 석축엔 자전거길이 휑하니 뚫려
있을 뿐이다. 아, 그것은 너무도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