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경제성장을 하면서도 온실가스를 감축할 수 있다는, 소위 ‘탈동조화론’에 기반한 ‘생태적
현대화론’이라는 환상에 매달리고 있다. 이런 접근 탓에 기업들을
해결 주체로 삼아 이들을 지원하고 기술과 시장을 활성화하여 탈탄소경제로의 전환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국회는 논의과정에서는 기존 지배적 자본의 이해관계에 맞설 배포도 없이 감축목표 상향을 깎아내리는 데 매달리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기후위기는 그렇게 접근해서는 해결될 수 없다. 기후위기의
책임이 적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떠안고 있는 민중들을 해결 주체로 세워 정보와 기업의 책임을 묻고, 무한한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체제를 넘어서려는 목표와 전략으로써만 기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51)
농업의 지속가능성이 무너지면 결국 피해는 국민의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먹거리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데 있어서 국가의 역할을 확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먹거리를 공공재로
인식한다. 서유럽에서는 폭우로 1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동토 시베리아가 펄펄 끓고 있다.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도 인간의 경제활동에 의한 기후위기의 결과물이다. 기후위기에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은 농업이다. 그리고 농업이 붕괴되면 식량위기에 직면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특히 한국은 식탁의 5분의 1만을 자급하고 있기 때문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극심한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꿀 농정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공공농업이다.
(83)
물론 이들 각자의 목적들 사이에는 갈등과 경합이 불가피하게 예상된다. 하지만
사회적 효율성, 사회적 이동성, 그리고 민주적 시민성이 적절하게
균형을 잡아야 한다. 아동 중심 진보주의 교육과 사회 중심 진보주의 교육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사회화의 기능과 주체화의 기능도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양자의 가치를
적절하게 배합하는 국가의 조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학교 현장에서는 새로운 질서를 창출할 수 있는 비판적
학문활동과 함께, 학교의 시민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결사체의 활성화와 집단적 학습공동체 구성과 문화적
진지가 구축하여야 한다. 공존과 상생의 평화시대를 모색해야 하는 시대의 새로운 교육체제는 단순히 공교육만을
통해서 실현될 수 없다.
(93)
실제로 신입생이 줄어드는 대안학교가 있는 반면에 입시에 최적화된 대안학교의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미 숫자상으로는 기독교 대안학교와 창의적으로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곳이 ‘대안학교’의 주류가 되었다.
(99)
학교의 쉬는 시간은 아이들이 단지 지적인 요구로부터 숨을 돌리거나 긴장을 푸는 휴지기가 아니다. 그것은 어른들에 의해서 면밀히 감독되는 사회적 물리적 조건들로부터 잠시 벗어나는 기회이다. 바로 그때에 아이들은 성인 권위자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들의 관계를 스스로 협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자유를 누린다. 그럼에도 미국 전역에서 이런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 뉴올리언스
대학 주디스 키에프 부교수의 2001년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
기준으로 40%가 넘는 미국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쉬는 시간이 완전히 철폐했다. 동시에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 교육부 통계자료는 학교들의 기술에 대한 지출이
1990년에서 2000년 사이에 300% 이상
증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05)
아이들이 컴퓨터 환경에 그토록 매혹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이들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경험을 하고 좌절감을 느끼게 만드는 ‘저항’들이 그 속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의 세계에서 한 아이가(누구든 마찬가지이지만) 자연세계의 물리적 한계와 자연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의 한계, 그리고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타자들의 의지를 존중해야 할 필요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무제한으로 조작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바로 그런 사물들의 저항이다. 한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대로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를 무릎 위에 가만히 앉아 있게 만들 수도, 장미꽃 봉오리를 피어나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또 친구에게 상처를 준 뒤에는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130)
사람은 뜻으로 살지만, 그 뜻은 말과 행동으로 꽃이 핍니다. 사람의 향기 그득했던 김종철 선생님, 따스하고 향기로운 선생님의
내음을 어찌 잊겠습니까. 세월은 가도 그 향기 내내 남아 우리의 가슴을 진동시킬 거라 믿습니다.
(146)
지식은 공동체와 정치경제의 산물이다. 이 구조를 개인의 능력과 성실성, 의지로 돌파하려는 이들이 혁명가다. 나는 김종철이 한국 현대사에서
그런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로컬’에서 작시
지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서구 지식의 수입상이라는 소리는 듣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식민주의 사회에서는 ‘요약을 잘하는 공부 잘하는 학생’도 없다. 실제 더 큰 문제는 제대로 된 수입상조차 없다는 현실이다. 페미니즘을 포함, 서구 지식을 소개하려면 그 지식이 생산된 특정
사회(또하나의 로컬인 서구)의 역사적 맥락을 충분히 알아야
한다.
(147)
한국사회처럼 ‘지식인’이
부재한 사회에서 진정한 혁명은 혼자 도모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인식의 혁명이 훨씬 어려운 이유다. 제도권에서의 권력으로 자신의 능력을 대신하는 이들에게 보조를 맞춰주다가는 공부할 시간이 없다. 게다가 바우만이 온라인을 두고 말한 ‘새로운 중세’와 ‘우중의 시대’에서, 공동체의 지속성을 고민하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지식인’은 없고 발전주의에 사로잡힌 한국사회에서 우울증이 많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156)
다시 <녹색평론> 창간사로
돌아가 정리해보면 우선 여기서 과학은 기술이 아니다. “오늘의 크나큰 비극을 가중시키는 주요한 요인”은 과학기술이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는 어리석은 믿음인바, 오히려
‘과학과 기술공학’은 사태를 줄곧 악화시켜왔다. 이때 ‘과학기술’은 대중이
비판 없이 수용해온 기술의 의미로 이해해야 옳은데, 그것은 바로 이어지는 단락에 과학사의 관점에서 “과학의 진리에 대한 관계는 언제나 잠정적이고 모색적인 것”이므로 “진정하게 과학적인 태도는 그러니까 늘 열려있는 겸손한 태도”라고 쓴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이어서, 따라서 “자신의 현재 능력이나 인식방법으로써 포착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하여 그것을 무시하거나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참다운 과학정신과 인연이 먼 태도”라고 밝힌 부분이다. 이 부분은 앞뒤 문맥을 보더라도 ‘튀는’ 논리인데, 나는 여기에 과학을 대하는 선생의 관점이 응축되어 있다고
본다.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 <간디의
물레>, 15~16쪽)
(192)
정부는 완벽한 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한 시도에서 실패를 거듭할수록 다음번에는 더 잘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더 많은
권력과 더 많은 돈을 가져간다. 정부는 최대의 고용주가 된다. 정당들은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도 하지만 국가권력은 계속해서 성장해서 이제 많은 경우 국가 수입의 50% 가까이를
흡수하고 있다.
…
정부는 시민들을 뜯어먹고 살아가므로 불가피하게 (가장 좋은 의미에서) 기생적이다. 다만, 원래는
사회의 소관이었던 문제들을 인계받음으로써, 말하자면 좀더 악성 종양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현실에서 이 국가통제의 악순환은 바닥을 치에 된다. 국가가 더 이상
빌릴 것이 없는 지경까지 자국 시민들을 빚지게 만들면 결국 파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