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초 장왕이 출현하기 이전의 국내외 정세는 대체로 이러했다. 초 목왕은
성복대전 패전의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국내의 거대 씨족들은 누르는 정책을 썼다. 진(晉)은 조돈이 정권을 잡아 법치를 내세우는
동시에 패자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고, 진(秦)은 여전히 진(晉)을 상대로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한편 화북에서 산동까지 항상 중원세력들의 버거운 상대였던 적족의 한 일파는 멸망했다. 이는 춘추전국의 무대가 점점 중원국가들 위주로 돌아가게 하는 신호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쪽의 초나라에서 새로 군주가 될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춘추 세 번때 패자 장왕이다.
(136)
장왕 개인은 대범하면서도 과감하다. 대국의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패자가 되는 것은 개인의 차질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국정이란 복잡해서 전체를 조정하고, 여러 인재들을 이끌어갈 조력자가
필요하다. 제 환공의 관중이나 진 문공의 호언 등이 바로 그런 인재들이다. 초나라에는 손숙오가 있었다. 그러나 손숙오는 장왕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물이었다. 장왕이 보기에 손숙오는 재미를 모르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왕은 손숙오와 같이 했다. 손숙오를 등용한 일 자체가 바로 장왕의 능력이었다.
(138)
관료는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사무 능력과 더불어 최소한 두 가지 미덕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관료는 청렴해야 한다. 공직을
수행할 때 청렴하지 않으면 훈령을 강제할 수 없다. 그다음은 자신을 왕 위에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관료와 권력자의 차이다. 권력자는 인민에게 자신을 부각시켜야
한다. 그러나 관료는 “묵묵히”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권력자(왕)는 그 관료를 신임한다. 아래와 위에서 동시에 신임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훌륭한 관료가 되려면 아래와 위의 압박을 모두 견뎌야 한다. 손숙오가 그런 관료식 재상의 원형이었다. 그런 원형이 이어지고 이어져 청나라까지 왔다.
(149)
“오랫동안 자리를 고집하는 것은 탐욕이며, 현명하고 능력 있는 이들을 천거하지 않는 것은 군주를 속이는 것이며, 자리를
양보할 줄 모르는 것은 겸손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다 못한다면 이는 불충한 사람입니다. 불충한 신하들 밑에 둔다면 군왕께서는 어떻게 충성을 고취할 것입니까?” 우구자가
기어이 우겨서 결국 장왕은 손숙오를 등용했다.
이 기록도 손숙오를 기껏 처사로 묘사한다. 이렇게 한대까지 고대의
기록들은 모두 손숙오의 출신이 미천했다고 말한다. 다만 가장 신뢰도가 낮은 <세본>만이 억지로 손숙오의 계보를 만들어냈다. 고대에 나라를 강하게 하는 길은 오직 인재에 달려 있다. 여러 기록들은
장왕이 지방의 이름 없는 인사를 기용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칭찬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람들이 엉뚱하게도 <세본>이나 <동국열국지>
같은 위사(僞史)나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믿고 있다.
결론은 말하자면 손숙오는 촌뜨기고, 장왕은 그 촌뜨기를 기용해서 패업을
이뤘다.
(181)
저나라 군주(장왕)는 인재를
쓸 때 내무를 보는 사람은 될 수 있는대로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쓰고, 외정을 담당하는 이는 될 수
있는대로 오래된 사람을 씁니다. 그러니 인재를 씀에 실덕하지 않고, 상을
내림에 빠트림이 없고, 노인에게는 추가로 은혜를 베풀고, 사신들에게는
불편함이 없게 했습니다. 군자와 소인의 복장을 구분하여 귀한 이는 존중 받고 천한 이도 마땅한 위의(威儀)를 가지게 되었으니, 예가 거꾸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덕이 서도 형벌이 제대로 행해지며, 정령이
관철되고 하는 일이 때에 맞이며, 사람들이 법(군령)을 준수하고 예를 따른다면, 그런 나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이길 수 있을 때 진격하고 어려우면 퇴각하는 것이 군사를 부리는 좋은 방법이며, 약한 자를 쳐서 합치고 우매한 자를 공격하는 것이 무력을 쓰는 올바른 도리입니다. 그러니 어른께서는 군대를 정돈하고 무력을 쓰는 도리를 따르시지요. 하필
초나라겠습니까? 중훼께서 남긴 말이 있습니다. ‘어지러운
자를 쳐서 취하고, 망하는 자는 업신여기고, 약한 자는 쳐서
합친다’고요.
(240)
<노자>의 성인을
장왕으로 바꾸어서 읽어보라. 장왕이 보기에 어렵사리 얻은 것이라 해도 자신이 갖지 못한다면 버리는 것이
더 낫다. 정나라 군주가 항복을 청하자 장왕은 한계를 인정했다. 남의
아래에 처할 수 있는 군주라면 아직 민심을 잃지 않았다. 그런 나라는 아직 삼킬 수 없다. 장왕이 “재물을 얻기 위해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정나라를 얻고서 땅을 취하지 않는 것을 모티브로 <노자>는 “성인은 귀한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244)
물론 장왕이 평화를 사랑한 군주는 아니었다. 그는 중원을 대신하여
동쪽으로 무자비하게 국토를 확장했다. 그는 현실의 군주일 뿐 ‘노자’와 같은 심오한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는 북쪽으로 명성을 얻으면서
사실은 동쪽으로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그가 동쪽으로 진출하면서 잔혹한 방법만 썼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소나라는 장왕의 포로들은 풀어주지 않았다가 망하고 말았다. 비록
침략자지만 그는 자신의 사람과 남의 사람을 최대한 살린다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그래서 장왕은 무(武)라는 이름을 가진 형이며 노자는 문(文)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