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전력망이 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강화돼 있었더라면 전력 공급이 멈추지 않아 이 재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전원이 공급됐더라면 이미 구비된 기기를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방파제가
쓰나미보다 높았더라면 안전 설비가 침수되지 않았을 것이고, 일반 전원,
백업 전원, 백업의 백업 전원이 유지돼 재양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디젤 발전기와 케이블이 다양한 높이에 설치돼 있었거나 냉각수가 필요 없는 공기 냉각식 발전기가 있었다면 이런
장비에 의해 일부라도 재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배터리의 일부라도 쓰나미 피해를 당하지 않는 곳에
구비되거나 여덟 시간 이상 지속됐다면 재해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격납 건물 내 원자로 압력 용기
내부의 압력을 낮추는 장치가 구비돼서 디젤 구동 소화 펌프가 작동되었더라면 재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이 실패했을 때 필요한 명확한 계획이 있었더라면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39)
핵기술이란, 말하자면 천상의 기술을 지상에서 손에 넣은 것과 같다. 핵반응이라는 것은 천체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지상의 자연에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자연현상을 지상에서 이용한다는 것은 그 의미가 심각하다. 모든 생명에게 방사능은, 그것에 대해 전혀 방어할 준비가 안 돼 있는 위협이다. 방사능은
지상의 생명이 영위하는 원리를 교란하는 이물질이다. 지상의 세계는, 생물계도
포함해 기본적으로 화학물질에 의해 구성된다. 그리고 그 순환은, 기본적으로
화학물질의 결합과 분해라고 하는 화학과정의 범위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 핵문명은, 그렇게 파멸의 순간을, 언제나 시한폭탄처럼, 제몸에 품은 채 존재하고 있다. 이 위기는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닐까. 그리고 지금, 그 시한장치의
째깍째깍하는 소리가 점점 커져 우리 귀에 들어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_다카기 진자부로, 1986년
(68-69)
일본이나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원전 사고가 나면 정부와 원전 업계가 나타내는 반응은 후쿠시마 이후 일본을 모방하게
될 것이 확실하다. 그들은 모든 정보와 원전 부지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국가의 안보 우려를 언급할
것이다. 재해 후 사람들을 정보에서 차단하는 능력은 바람직하지 않은 특권이다. 과학 기자들에게 어떤 수준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며, 국가의 안전 보장을
위해 어떤 수준의 재량이 필요한지 정할 필요가 있다. 이 합의를 위한 틀이 필요하다. 지금은 이런 중책이 조사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재해 시 예상되는
시나리오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문제조차도 과학자와 정치인 사이에 아무런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지 않는다. 이것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최고의 과학자들이 연방 의회 상원의원이나 하원의원과 접촉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충격을 받았다. 20년 전 체르노빌 사고는 이렇지 않았다.
독립적인 입장의 과학자와 언론인, 정치인 사이의 지속적이고 열린 커뮤니케이션이 새로운 원자력
재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86)
우리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서 실시한 관찰 조사는 어렵지 않지만, 문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은 관심을 가졌더라도 자료를 모아 분석하고, 심사의 대상이 되는 과학 논문을 발표하는 등 끝까지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 분야에 대한 재정 지원은 없다. 과학자들도 배관공처럼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 원전 사고와 관련된 정부나 규제 기구는 방사능이 야생 생물, 더 나아가 인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113)
체르노빌 방사선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 선천성 이상 비율이 상승했다는 보고는 회의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묵살되어왔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국제원자력기구와 세계보건기구, 유엔개발계획 등의 조직들이 단호하게 묵살한 것을 들 수 있다. IAEA는
“이 지역의 방사능은 상대적으로 저선량이므로, 출산율을 떨어뜨린다고
볼 수 없다. (…) 사산, 비정상적인 임신, 출산 합병증의 수와 아이의 건강 전반에 영향을 준다는 증거는 없다. (…) 선천성
기형이 완만하지만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은 (…) 이를 제대로 보고하는 병원이 늘어난 것을 뜻한다고
생각되며, 방사능과는 관계없다”고 단언했다.
(118)
정치인들은 확실한 과학적 증거가 없고 여론의 지지가 없는 상태에서도 정책을 주장하고 수행한다. 그러나 그들은 의료 전문가가 지지하는 예방 원칙에 근거할 때 그것이 시민과 환경에 무해하다고 명시할 의무가
있다. 체르노빌의 방사선이 기형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IAEA의
의견은 이 예방 원칙에 모순된다. 그뿐만 아니라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기형을 유발하는 직접 영향 또는
잠재적인 영향을 근거 없이 부정한다면, 올바른 조사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후쿠시마 사고에 대한 우리의 조사활동을 계기로 저선량 방사선의 기형 유발 관련 연구가 앞으로는 지속적으로 지원받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러한 연구 성과가 앞으로 진행될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오염지에 대한 연구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156)
우리는 오염 수준을 어떻게 파악할까. 1킬로그램당 1200베크렐이라는
기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두 가지를 기억하자. 방사선에는
안전한 레벨이란 없다는 것, 즉 세슘134와 세슘137은 우리 인간이 만들어서 방출하기 전까지 자연에 존재하지 않았던 물질이라는 것이다.
(191)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이 행성의 죽음과 마주하고 있다. 나는 천문학자 칼 세이건에게 우주에 다른 지적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잠시 침묵한 뒤 이렇게 대답했다.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생명종이 우리와 같은 진화 단계에 도달하며, 스스로를
파괴할 테니까.”
(193)
우리의 권리 의식은 기이하다. 30퍼센트의 전기를 낭비하면서도, 전기가 어디에서 오는지 대부분의 사람은 짐작조차 못 했다. 이런
사람들은, 예를 들어 우리 모두가 빨래 건조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원전에서 만들어내는 것과 거의 같은
양의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고, 의사와 과학자에게 데이터를 분석하고 설명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 삶의 방식과 원전이 초래할 문제에 대해 생각하도록 사람들을 ‘계몽’하는 것, 무엇보다 우리의 아이들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