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구애 -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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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에 갇힌 우리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 스토리의 재미도, 세부묘사의 깨알같은 즐거움도, 문장의 미학도 다 생략하고 단순한 주제의식만 덩그러니. 도무지 동일시가 안된다. 차라리 홍상수 영화를 보는게 나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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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역사 - 신대륙 발견부터 부시 정권까지, 그 진실한 기록
하워드 진.레베카 스테포프 지음, 김영진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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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관점에서 바라본 미국의 역사가 잘 정리되어 있다. 초등 고학년에서부터 역사 초보 성인에게도 좋은 책이다. 현재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아는게 필수적이라는 걸 절감하게 해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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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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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금지는 욕망을 북돋우고, 중단을 모르는 감정의 자기증식의 끝에는 자기파멸이 기다리고 있다. 요즘에도 이런 식의 몰입식 사랑을 하는 젊은이가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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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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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탈출해봤자 지옥같은 도돌이표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안락한 중상층의 가족주의적인 현재의 삶이 진짜 행복이라고, 공연히 헛된 꿈 꾸지 말라고 협박하고 구슬린다. 내용전개는 무지 재밌지만 결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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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의 앵무새 열린책들 세계문학 56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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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겹의 이야기가 중첩되는 구조일 뿐만 아니라 사유의 밀도도 높아 많은 집중력을 요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플로베르가 자신의 소설 순수한 마음을 쓰는 동안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소녀 펠리시테의 앵무새 룰루를 묘사하기위해 박물관에서 대여해 온 앵무새 박제의 진본을 화자가 찾아가는 과정이 하나의 전체적인 틀을 이룬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소설의 결말답게, 우리는 끝내 진본이 어떤 것인지 알아낼 수 없다.

 

당대에 유행하는 철학적 흐름을 이런 식으로 적용하여 쓴 소설은 사실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하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 김연수의 지적인 소설, 꾿빠이 이상』도 있기 때문이다. 작가 이상의 데스마스크 진본 찾기라는 미션을 수행해나가는 과정을 그리면서 진본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동일한 결론으로 끝나는 소설 말이다. 어쨌건 이 작품은 한 시대의 지적 유행대표까지 하는 소설인 탓에, ‘유행의 정점을 지나 그에 대한 반성까지 하고 있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른 모든 유행상품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뻔 했던 소설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이 작품은 오랜 기간 동안 나의 무의식에 또아리를 틀고 있던 질문, 도대체 문학이 심리학이나 진화론, 혹은 뇌신경과학과 다른 차원에서, 혹은 이들 학문의 지대한 결과물들을 넘어서서 인간에 대해 더 말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한 가지 매력적인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개인사)의 모호성, 해독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이 소설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이 훌륭한 까닭은 작가의 역사(개인사) 이해에 대한 회의라는 주제의식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결국 우리의 현재의 삶과 문학과 예술의 의미에 대한 보다 진지한 탐색으로 이어지는 탁월함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가령,역사(개인사)라는 텍스트 이해는 오직 그 진리성이 가져올 우리 삶에 대한 현재적 의미를 위해서만 중요하다는 커다란 주제는 내가 먼저 접했던 그의 최근작(2011년 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강렬한 울림을 주었던 진리이다. 그러나 플로베르의 앵무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간 통찰이 담겨져 있다. 문학은 타인과 나 자신을 이해하려는, 결코 도달할 수는 없지만 절대 헛되지는 않을 노력을 통해 타인과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을 의미 있게 만드는 일을 돕는 훌륭한 다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것이 바로 화자이자 주인공인 가 에마 보바리처럼 지속적인 간통을 행하고 자살을 기도했던 아내의 삶을 이해하려 애쓰는 내용이 소설의 보다 중요해 보이는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까닭이다. 그가 이렇게까지 아내를 이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유는 물론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플로베르에 관한 사실상의 평전을 쓰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아내를 이해하기 위해 는 곧바로 아내의 삶의 항로로 뛰어들어 들여다보는 대신, 굳이 플로베르의 앵무새 찾기로, 플로베르의 삶의 궤적 더듬기로 우회한다. 그 종착점은 분명 부정한 아내와의 삶을 지금까지 꾸역꾸역 함께 해온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우회가 필요했을까? 물론 는 어쩌다 플로베르라는 작가의 세계에 빠져든 플로베르의 팬이자 연구가다. 그러나 과연 와 플로베르와의 만남이 우연이었을까? 결국 플로베르의 삶이라는 텍스트와 그가 남긴 소설이라는 또 다른 텍스트는 의 아내라는 텍스트에 대한 훌륭한 보조 텍스트 기능을 한 탓에 하필이면 이 작가에게 끌리게 되었던 것 아닐까?

 

'나'는 최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갖가지 가능성들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로도 이어진다.

아마 그것은 기질상의 문제일 것이다. () 어떤 사람들을 실망과 성취를 두려워하여 기권하고 구경한다. 다른 사람들은 뛰어들어 즐기고 위험을 감수하는데, 최악의 경우 그들은 몹쓸 병에 걸릴 것이고 잘해야 도망쳐 나와 평생 콩을 혐오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엘렌을 어느 쪽에서 찾을 수 있는지도 알고 있다. (209-210)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내를 다 이해하지는 못한. 그의 말대로, 책은 일어난 일들에 대해 설명을 해주지만 냉혹하게도 삶은 설명이 없는 곳이므로. 그렇지만 그는 보다 나은 망원경을 사용하기만 한다면 그만큼 더 많은 별들이 나타난다는 믿음을, 그리고 우리가 자존심 때문에 하나의 해답만을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타인(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할 수 있게 되리라는 믿음을 조용히 읍조린다. 다만, “인간성을 변화시킬 수는 없고, 그저 알 수 있을 뿐이며, “완전한 결합이란 희귀하다는 쓸쓸한 결론을 덧붙이면서.

 

이 소설도 자칫하면, 사랑이란 상대방의 고통에 대해 헤아리고 상상해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 그런 노력을 통해 소통(이해) 비슷한 것에 다가갈 수 있고 동시에 우리 자신의 고통도 치유 받을 수 있다는, 뭐 그런 따듯하고 보드라운 얘기로 마무리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줄리언 반즈의 소설은 끝내 휑하니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빠져나가버린 것만 같은 느낌을 남긴다.

 

사실 나는 이런 맛에 소설을 읽는다. 섣부른 위로를 받는 느낌보다는 삶의 비밀에, 진실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 게 어떤 전율을 가져다주니까. 아마도 이런 전율이야말로 소설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일 거다. 이 소설의 도 플로베르가 예술이 도덕성을 고취시킨다거나, 정치적 대의를 위해 봉사한다거나, 혹은 위로를 제공한다는 따위의 주장들에 콧방귀를 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또 다른 문장 하나는 주인공이 격언 중의 격언이라며 한 다음의 말이다.

 

글쓰기와 관련된 진리는 출판을 하기 전에 틀을 짤 수 있지만, 삶의 진리는 이제 너무 늦어서 아무 효과가 없을 때 겨우 그 틀을 짤 수 있다. (210)

 

슬픈 진실이다. 정말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언제나 너무 늦게 등장하는 게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은 (삶을 끝내려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소설 혹은 예술이라는, 우리 삶을 이해하기 위한 보조 텍스트를 간혹 기웃거리면서, 그것을 통해 가끔씩은 살아가는 일의 쓸쓸함이, 고독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받기도 하면서 말이다.

 

모리아크는 말년에 쓴 <회상록>에서 다른 이들처럼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늘어놓고는 타인의 공감을 강요하는 대신, 자신이 읽은 책,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 자신이 본 연극들을 이야기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작품들을 통해 자신을 발견했던 그는 결국 그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바로 이 소설의 화자처럼 말이다. 멋있지 않은가? 우리의 대화도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어쩌면 소통이란 게 가능할 것도 같은 느낌이다. 더 자주, 사람들과 모리아크처럼 이야기를 나누며 살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삶은 지금보다 아주 조금은 덜 쓸쓸하고 조금은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2013.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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